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20:18:49

할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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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누스 (요나) 모스크와 시가지 전경

1. 개요

아랍어 حلحول
영어 Halhul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서남부 알칼릴 주의 도시로, 인구는 약 2만 7천명이다. 헤브론 북쪽의 고원 지대에 위치하며, 시가지가 거의 이어져 있한다. 해발고도는 900m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이다. 팔레스타인의 최고봉 (1030m)인 자발 나비 유니스 (사도 유누스 산) 역시 이곳에 위치한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구약의 등장인물 중 나단가드의 무덤이 위치해 있다고 한다.[1] 일부 무슬림 주민들은 유누스 (요나) 역시 이곳에 묻혔다고 믿는다.

2. 역사

파일:Neby_Yunis.jpg
1940년 네비 유니스 모스크의 모습

고대에는 알울라 (Αἰλουά)로 불렸고, 이는 가나간어로 '추위에 떠는'이란 뜻이라 한다. 구약의 여호수아기에서 할훌은 인근 베트수르와 함께 유다 지파에게 주어진 땅으로 기록되었다. 고고학적으로는 인근에 상고대 도시가 있었고, 기원전 17세기 이집트 신왕국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가 기원전 11세기 들어 이스라엘 왕국기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르호보암이 재차 롱벽을 둘렀다 한다. 바다 민족의 침공기인 기원전 1000년경 도시는 재차 버려졌다가 기원전 8세기 무렵 재정착되었으나,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유대 왕국 정복 시에 예루살렘과 함께 파괴되었다. 헬레니즘기 일부 재건되어 알울라 혹은 알루루스로 불렸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셀레우코스 왕조의 각축장이다 후자의 땅이 되었다. 마카비 전쟁 시기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하스몬 왕조군은 인근 베트수르에서 셀레우코스 군을 격파하였다. 하스몬 왕조기 할훌은 이두메아 지역의 일부였고, 현지인들은 요한 히르카노스 1세 시기에 유대교로 개종했다.

1차 유대 반란 시기 할훌은 유대인들의 밀회 장소였고, 바르 코크바의 난 시에 요새화되었다. 발굴 결과 할훌 일대에서는 고대 히브리, 그리스어로 적힌 도편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뒤이은 로마 직접 지배기에도 도시로 이어졌고, 로마식 모자이크와 동로마 성당 유구가 발견되었다. 나비 유니스 모스크 수리 중에는 10세기 말엽 파티마 왕조기 대리석 묘비가 발견되었고, 주드함 부족원의 것으로 밝혀졌다. 1149년, 2차 십자군다마스쿠스 공방전 중에는 원로한 하디스 학자 압둘라흐만 알 할훌리가 전사하기도 했다. 한동안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를 받던 할훌은 살라흐 앗 딘에 의해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고, 1226년 아미르 알 무아잠 이사는 휘하 맘루크이자 헤브론 총독인 라시드 앗딘 파라즈에게 유누스 성지 겸 모스크에 미나렛을 세우게 하였다. 같은해에 할훌을 방문한 지리가 야쿠트 알 하마위는 예루살렘과 헤브론 사이의 겨통로에 위치하며, 유니스 빈 맛타 (요나)의 무덤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오스만 제국기 할훌은 할릴 나히야 (군)의 마을이었고, 1596년 기준 무슬림 92 가구가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곡물, 포도 등의 기본 세금에 염소나 벌꿀 등의 공물을 바쳤다. 1847년 할훌을 방문한 영국인 선교사 존 윌슨은 유대 순례지로 묘사했고, 1852년 방문한 미국인 성경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은 농업적으로 번성한 도시이며 쇠락한 모스크의 첨탑이 인근 마을들에서도 보인다고 기록하였다. 1863년에 방문한 프랑스인 탐험가 빅토르 게렝은 약 7백명이 거주하고 언덕 남쪽에 히브리어 묘비, 아인 아이윱 (욥의 샘)이 있으며 네비 유니스 모스크에는 외국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1870년 오스만 토지 문서에 할훌의 인구는 119가구에 380인의 남성으로 기록되었다. 1883년 팔레스타인 탐험 재단은 할훌이 언덕 위의 석조 마을로, 모스크는 현대 건물로 보인다고 기록하였다. 영국령 팔레스타인 시기인 1922년의 조사에서 인구는 1927명의 무슬림으로 기록되었고, 1931년에는 인근 마을들까지 합하여 487가구 2523명으로 조사되었다.[2]

1939년 7월,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군 블랟워치 부대가 할훌 주민들이 무기를 숨기고 있다 여겨 모든 남자들을 물도 거의 없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철창에 48시간 동안 가둬 13명이 사망하는 가혹행위를 하였다.[3] 1945년 기준 할훌의 주민은 3380명이었고, 3만 7천여 두만의 토지를 소유했다.[4] 1차 중동전쟁 후 일대는 요르단령이 되었고, 1961년 할훌의 인구는 5천 4백여명이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일대를 점령했고 1979년 3월 이스라엘군은 할훌에 16일간 계엄령을 내렸다. 이에 대한 항의 시위 도중 3명의 청소년이 피살되었다. 2차 인티파다 시기 이스라엘은 1500 두만의 토지를 압수했다. 1995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 후에도 할훌의 수난은 계속됐다. 2002년 2월, 이스라엘군 헬기가 공습하여 경찰서와 철물점 등이 파괴되었고 여럿의 사망자가 나왔다. 그해 5월에도 팔레스타인 정보부 인사들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2005년에는 시청이 전소되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이스라엘 당국 허가 없이 지었다며 가옥을 허물었고, 이스라엘 군의 검문소가 세워졌다. 2010년대에도 시위 중 체포, 피살이 잇따랐다. 2018년에는 유대인들이 현지 포도원을 훼손했고 2022년에도 군사 습격 도중 민간인이 피살되었다.


[1] 나단의 묘는 외부와 격리된 녹색 동굴에 있었다고.[2] 그중 1인의 기독교도 여성 제외하면 전부 무슬림[3] 협조적인 남자와 여성은 물 충분히 주는 철창에 가뒀다. 갈증에 시달리던 한 남성은 우물에 총을 숨겼다고 거짓 증언한 후 그걸 가져오지 못하자 사살되었고, 다른 남성은 탈출 시도 후 사살되었다. 이후 영국군은 자체 감사 후 별다른 징계 없이 유족들에게 3천 파운드를 주고는 사건을 덮었다.[4] 그중 5529는 관개 농업, 13656은 곡물용 밭, 165는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