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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동명의 도시에 대한 내용은 트리폴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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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폴리(레바논) | ||
고대부터 십자군 시대까지 중심이었던 미나 지구. 행정 구역상 별개의 도시지만 편의상 같은 도시로 취급된다.
맘루크·오스만 시대의 구도심. 오른쪽에 힐끗 보이는 성벽은 레몽 드 생 질이 트리폴리 포위를 위해 세운 몽스 페렝두스 성채 (시타델)이다.
1. 개요
아랍어: طرابلس레바논의 제2의 도시이자 수도 베이루트에 버금가는 대도시이다. 2021년 기준 약 73만명으로, 20km 거리의 국경을 넘어온 시리아 난민들의 유입으로 2014년 55만에서 크게 증가하였다. 고대 아시리아 제국에 정복당한 기록이 있을정도로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후 페니키아인들이 무역도시를 세웠고 로마 제국과 이슬람 제국를 거쳐 발전해오다 십자군 전쟁 당시 트리폴리 백국이 세워젔으며 오랫동안 십자군의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 이후 맘루크 왕조가 이 도시를 정복, 대대적으로 파괴하면서 도시가 초토화되었으나 곧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고 그후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항구도시로 크게 발전하였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레바논이지만 거주민의 대다수는 수니파 무슬림이다.
인지도 면에서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비해 뒤쳐지지만, 그 역사성만은 압도한다. 한편 두 도시들은 영어 및 한국어로 모두 트리폴리(Tripoli), 아랍어로도 둘 다 타라불루스(طرابلس)로 표기된다. 따라서 구별을 위해 레바논의 도시는 현대 표준 아랍어로 타라불루스아샴(طرابلس الشام), 즉 레반트의 트리폴리로도 지칭된다. 그외에 현지인들은 알파이하(الفيحاء)로도 지칭하는데, 아랍어로 '발향(發香)'의 뜻을 지닌다. 한때 주변의 광대한 오렌지 농장으로 둘러쌓였던 도시에 오렌지 꽃이 개화할 무렵이 되면 시가지가 그 향으로 가득하였던 것에서 기원한 별명이라고 전해진다.
2. 역사
트리폴리의 고대사는 당시 중심이던 엘 미나 일대가 현대식 시가지로 변모하여 별로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재구성하기 쉽지 않다. 한편 도시의 남쪽 교외인 아부 할카 일대에서는 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3만년 전의 임시 거처 유구가 발견되었다.2.1. 고대
시장 한구석에 놓인 로마 기둥 |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트리폴리 출토 석관 |
기원전 1400년 경부터 주거지가 형성되었으며, 비슷한 시기 고대 이집트의 아마르나 서신에서 '데르블리'라는 명칭으로 기록되며 역사에 등장하였다.[1] 그외에 아흘리아 혹은 와흘리아로도 지칭되었으며,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국왕 아슈르나시팔 2세가 침공했을 당시 도시는 '마할라타' 혹은 마이자 등으로 불렸다. (비록 시기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페니키아 인들이 상업 거점으로 삼은 후에는 아타르로 불렸으며,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페니키아 지방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그무렵 트리폴리는 페니키아 북부의 주요 항구이자 상업의 중심이었고, 해상 무역과 함께 시리아 내륙 간의 대상 무역을 수반하며 후일 근대까지 이어지는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고전기 트리폴리 도시 주변부에는 현 레바논-시리아 해안 일대의 페니키아 도시들 중 티레, 시돈, 아라두스 (아르와드 섬)[2] 출신 주민들이 이주하여 각자의 자치적인 행정 구역을 이루었다. 헬레니즘 기에 그리스 인들은 이렇게 3개의 구별되는 구역을 갖춘 것에 기인하여 도시를 '3개의 도시'라는 의미의 Τρίπολις (트리폴리스)로 지칭했는데 트리폴리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3] 디아도코이 전쟁기에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셀레우코스 연합군에 패배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이곳으로 후퇴한 바 있다. 그후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에 그 해군의 조선소가 설치된 트리폴리는 기원전 112년 자체적인 화폐를 주조할 권리를 부여받았고, 기원전 105년에는 자치 도시가 되었다.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리던 도시는 기원전 1세기 로마 제국령이 되어 다른 페니키아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업과 삼나무 목재 거래에 종사하였다.
2.2. 중세
7세기간 이어진 로마 지배기 중에 트리폴리에는 경기장과 체육관 등 공공 건물들이 지어졌고, 270년에서 286년까지 그 동전 주조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다만 551년 베이루트 지진으로 인한 해일[4]로 도시가 파괴되며 로마 시대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637년 말엽 트리폴리는 이슬람 제국에 점령되었고, 기존 페니키아 체제에서 벗어나 준드 디마슈크 (다마스쿠스 군구)에 편입되었다. 아랍인들의 유입과 함께 도시는 지중해를 통틀어 중요한 무역 거점으로 부상하였다. 우마이야 왕조기에 트리폴리는 그 수도인 다마스쿠스의 외항이었고, 이스칸다리야에 이른 제국의 두번째 군항이었다. 10세기 중반부터 도시는 파티마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047년 트리폴리를 방문한 여행가 나시르 이 호스로는 인구를 약 2만으로 추산하였고, 전부 쉬아 무슬림이라 기록하였다. 그에 의하면 파티마 '술탄'은 도시에서 대군을 일으켜 동로마 등 외세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했다고 한다.2.2.1. 바누 암마르와 십자군의 당도
1090년 시리아 일대의 정세바누 암마르 ( بنو عمار )는 파티마 조의 핵심 세력이던 쿠타마 베르베르 인의 후예로, 11세기 무렵 트리폴리에 정착하였다. 그중 파티마 조에 의해 도시의 카디로 임명된 아민 앗 다울라 아부 탈립 알 하산 이븐 암마르는, 1070년 총독 무크타르 앗 다울라 이븐 밧잘이 사망하자 스스로 트리폴리의 독립 군주로 선포하였다. 북쪽의 타르투스에서 남쪽의 주바일 (비블로스)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한 아민 앗 다울라는 2년만에 사망하였고, 그의 두 조카들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인 끝에 잘랄 알 물크 알리 이븐 무함마드가 경쟁자를 축출하고 집권하였다. 그는 27년간 재위하며 파티마 조와 셀주크 제국 사이에 균형 외교를 통해 독립을 유지하였고, 거금을 들여 수도 트리폴리를 학문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그 결과 세워진 다르 알 일름 (지식의 집)은 1만권의 장서를 소장하여 당대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대외적으로 잘랄 알 물크는 1081년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자블라를 점령하였다. 안정적으로 통치하던 잘랄 알 물크는 1098년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남하하는 십자군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1099년 1월 십자군은 폐허로 변한 마라트 알 누만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남하하였다. 그들은 히슨 알 아크라드 (미래의 크락 데 슈발리에)에 이르러 3주간 머물렀다. 그 무렵, 십자군의 군사력을 경계하던 잘랄 알 물크는 그들과 동맹을 맺을 계획으로 그 지도자 레몽 드 생 질에게 사절을 보내어 대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일단의 십자군이 트리폴리에 입성했는데, 도시와 그 일대의 부유함에 감탄한 그들은 돌아온 후 레몽에게 인근 도시들 중 하나를 공격해 협박에 나설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공격을 결심한 레몽은 잘랄 알 물크의 선물에도 2월 15일 '트리폴리의 관문' 아르카를 포위하였다. 트리폴리에 속한 다른 도시 타르투스가 손쉽게 점령된 것과 달리 아르카의 수비대는 3달간 맹렬히 저항하였다. 결국 5월 13일 레몽은 주변의 설득에 포위를 풀고 남하하였고, 트리폴리 주변을 느리게 지나갔다. (5월 13-16일) 겁을 먹은 잘랄 알 물크는 3백명의 기독교도 포로 석방과 함께 말 15필 및 1만 5천 베잔트의 조공을 바쳤고 식량과 길잡이까지 제공하였다. 이에 만족한 레몽은 도시에 별 해를 가하지 않고 갈길을 재촉하였다.
위기를 넘긴 잘랄 알 물크는 얼마 안가 사망하였고, 그의 동생 파크르 알 물크가 계승하였다. 그는 십자군이 예루살렘 함락 및 사후 처리에 몰두하는 틈에 타르투스를 수복하였다. 한편 예루살렘 국왕이 되지 못한 후 트리폴리 정복을 목표로 정한 레몽은 1100년 7월 팔레스타인을 떠나 트리폴리 공격에 있어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였다. 같은해 예루살렘 국왕 고드프루아가 사망하자 에데사 백작이던 동생 보두앵 1세가 계승을 위해 7백의 병력과 남하하였는데, 다마스쿠스의 아미르 두카크는 그를 습격하기 위해 베이루트와 비블로스 사이의 개의 강 (나흐르 알 칼브)에 매복하였다. 그러나 승전 후 시리아에서 두카크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대해질 것을 우려한 파크르 알 물크는 보두앵에게 매복을 알렸고, 후자는 진군을 멈춘 후 반격하여 두카크를 격퇴하고 예루살렘에 무사 당도하여 즉위하였다. 1101년에 두카크는 파크르 앗 딘에 반기를 든 자블라에 아타베그 툭테긴의 아들 부리를 보내 점령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5]
2.2.2. 2천일의 포위 (1102-09년)
1101년의 십자군과 함께 아나톨리아를 지나다가 매복을 당해 패배한 레몽은 안티오크에서의 억류를 거쳐 1102년 초엽 트리폴리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그해 3월 타르투스를 점령한 그는 이듬달 3백의 병력과 함께 트리폴리 앞에 나타났다. 파크르 알 물크는 홈스의 자나 앗 다울라와 두카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들은 원군을 파견하였다. 레몽은 병력을 1백, 50, 1백으로 나눠 각각 그들을 대적하게 하였고 자신은 남은 50여 예비대와 남았다. 그러나 전투가 개시되자 홈스 병력을 이끄는 아미르 야쿠즈가 먼저 이탈해버리자 2년 전의 배신을 기억하고 있던 2천 다마스쿠스 병력 역시 철수하였다. 이에 레몽은 전군을 집결시켜 트리폴리 측에 맞섰고, 성문 앞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파크르 알 물크는 7천의 전사자를 내는 대패를 당하고 철수하였다. 그후 레몽은 트리폴리 외곽의 몽스 페랑두스[6] (순례자의 산)에 성채를 지어 도시를 봉쇄하고는 스스로 '트리폴리 백작'임을 칭하였다.1103년 레몽은 제노바 함대와 함께 트리폴리를 공격했지만 실패하자 비블로스로 시선을 돌려 이듬해 4월 점령하였다. 이렇게 남북으로 트리폴리를 고립시킨 레몽은 도시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이에 반격에 나선 수비대는 1104년 9월 몽스 페랑두스 성채를 공격하였고 도중 발생한 화재에 중상을 입은 레몽은 이듬해 2월 사망하였다. 다만 하란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한 후, 트리폴리를 구원하기로 했던 하란의 영주 소크만도 비슷한 시기 사망하며 십자군의 봉쇄는 이어졌다. 레몽의 사후 그의 차남 알퐁스가 백작위를 계승하였는데, 당시 겨우 1살이었기에 본국 프랑스에 머물렀다. 따라서 그의 사촌 기욤 (알 세르다니)이 섭정하였는데, 1108년 본국인 툴루즈 백작국을 상속받았던 레몽의 장남 베르트랑 (이븐 생 질)이 그를 계모에게 매각하고 레반트로 향하였다. 한편 그해 4월, 계속된 포위에 절망한 파크르 앗 딘은 사촌 아불 마나킵에게 섭정을 맡기곤 5백여 기병 및 많은 예물을 동봉한 채 원군을 구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에 나섰다. 몽스 페레그리누스의 기욤은 성내 사기 저하를 기대하며 그들의 통과를 방해하지 않았다.
파크르 앗 딘은 다마스쿠스에서 환대받은 후 바그다드로 향하여 술탄 무함마드 1세를 알현하였다. 술탄은 그를 크게 환대하였지만 모술 원정 준비 등 이라크 내부 문제에 치중해 있었기에 정작 원군 파견은 거절하였고, 파크르 앗 딘은 8월경 소득없이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기다리다 지친 귀족들이 보호를 대가로 파티마 조에 복속했다는 낭보를 접하였다. (8월 25일) 파크르 앗 딘은 여전히 충성하는 자블라로 항하였다. 1109년 초엽 섭정 기욤이 아르카를 점령하며 트리폴리는 더욱 고립되었다. 그해 5월 안티오크 공국의 섭정 탕크레드는 자블라를 점령하였고, 파크르 앗 딘은 그에 복속했음에도 축출되었다.[7] 한편 그 무렵 베르트랑은 몽스 페랑두스의 기욤을 포위하였다. 베르트랑은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 기욤은 탕크레드에 충성하며 이는 십자군 전체의 분열로 이어졌다. 내분을 해결하기 위해 그곳에 모인 십자군 제후들은 알퐁스에게 본국 툴루즈 백작위를 넘겨주고 현지 영토는 양분하여 기욤은 타르투스와 아르카 등 북부, 베르트랑은 트리폴리와 비블로스 등 남부를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극적인 타협 이후 십자군은 트리폴리 포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집트로부터의 원군이 늦어지며 궁지에 몰린 파티마 조의 총독 샤라프는 6월 26일 보두앵 1세에게 퇴로 보장을 대가로 항복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는 수용되지 않았고, 1109년 7월 12일 십자군은 도시를 함락하였다. 트리폴리 구원을 위해 파견된 파티마 함대는 불과 8시간 후에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별수 없이 철수하였다. 이어진 약탈 도중 10만권의 장서를 자랑하던 다르 알 일름 도서관은 '불경스럽다'고 여겨져 방화되었다. 주민들은 대부분 노예로 전락하였고, 나머지는 재산을 압수당한 후 축출되었다. 베르트랑은 해군을 제공한 제노바 공화국에 시가지의 1/3을 상업 지구로 하사하였다. 한편 포위 도중 '뒤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은 기욤은 그 부상으로 곧 사망하였고, 베르트랑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단독 백작으로 등극하였다. 이렇게 세워진 트리폴리 백작국은 마르캅 (마르가트)에서 비블로스 (기블렛)에 이르는 영토를 지녔고, 십자군 영토 (우투르메르)의 허리로써 중요시되었다.
2.2.3. 트리폴리 백국
레몽 1세가 건립한 몽스 페렝두스 (순교자의 산) 성채
십자군 시대에 트리폴리는 번영하는 항구 도시였고, 특히 4천개의 베틀을 지닌 비단 직조의 중심이었다. 그외에 레몬, 오렌지, 사탕수수 등이 거래되었다. 180년간 이어진 프랑크 지배에 도시의 주요 언어는 오크어였고 주민 구성도 라틴, 그리스, 아르메니아, 마론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과 아랍 무슬림, 유대인 등 민족과 종교가 다양하였다. 십자군 시대 도시의 주요한 변화는 시가지가 몽스 페렝두스 일대 내륙 시가지의 성장이었다. 시타델에는 기존 쉬아 성지를 흡수한 '순교자의 산의 성묘 교회'가 세워져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그외에 성타븨 '성 마리아 교회'와 카르멜 교회 등이 세워졌다.
2.2.3.1. 툴루즈 가문
같은 십자군 국가지만 안티오크 공국과 예루살렘 왕국 사이에 위치한 트리폴리 백국은 종종 양측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였다. 베르트랑은 동로마 제독 마누일 부투미타스와 동맹해 안티오크와 맞서려 하였고, 1112년 계승한 아들 퐁스는 예루살렘 왕국과 대립하였다. 후자의 경우 1122년 국왕 보두앵 2세가 트리폴리로 친히 나아가 퐁스의 복속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한편 퐁스의 치세에 트리폴리 백국은 1126년 라파니야를 점령하고 홈스를 습격하는 등 힘을 과시하였다. 1132년 퐁스는 외부 출신의 국왕 풀크에 대항한 안티오크 공작 부인 알리스의 반란 시에 에데사 백국과 함께 그녀를 지지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10월에는 알레포의 이마드 앗 딘 장기가 트리폴리로 진군, 퐁스를 격파하고 몽스 페랑두스에서 그를 포위하였다. 이때 풀크가 퐁스를 구원하며 양측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이듬달 퐁스는 장기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트리폴리의 무슬림 라이스 (대표)를 처형하였다.1137년 3월 이번에는 다마스쿠스의 실권자 바르자와쉬가 몽스 페랑두스를 공격하였고, 퐁스는 반격에 나섰으나 격파당하고 패주하던 중 현지 기독교도에 의해 바르자와쉬에 넘겨져 처형당하였다. 다만 트리폴리 자체에 대한 공격은 시도되지 않았고, 계승한 아들 레몽 2세는 부친을 배신한 산간 지방의 야곱파 기독교도들을 학살하였다. 한편 퐁스와 함께 포로가 되었던 트리폴리 주교 제라르는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이후 포로 교환 때에 석방되었다. 트리폴리 백국의 위기는 이어졌다. 같은해 레몽 2세와 풀크는 바린 전투에서 장기에게 패하였고, 이듬해 장기는 아르카를 점령해 도시를 지척에서 공격할 수 있는 기지를 얻었다. 1144년 레몽 2세는 크락 데 슈발리에를 구호 기사단에 넘겨 백작국의 동쪽 변경을 강화하였다. 1145년 레몽 2세의 당숙 베르트랑이 백작위를 주장하며 트리폴리와 크락 데 슈발리에 사이의 아미라 성채에 웅거하였다. 이에 레몽은 1149년 장기의 후계자인 누르 앗 딘을 초청해 아미라 성채를 점령하게 하였고, 포로가 된 베르트랑에 대한 석방 협상에 나서지 않았다.
한편 트리폴리 백국의 약화는 점차 가시화되었다. 1151년 여름 파티마 함대가 트리폴리 항구를 습격해 선박에 방화하고 수백여명을 죽이거나 납치하였다. 이듬해 레몽 2세는 아내 호디에르나와 충돌하였고, 이에 후자의 언니 멜리장드와 보두앵 3세가 트리폴리에서 왕실 모임을 열어 화해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 도시로 귀환하던 레몽 2세는 남문 부근에서 아사신 자객의 습격을 받아 동행한 두 기사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분노한 군중은 시내의 무슬림들을 공격하며 분풀이하였다. 레몽의 암살을 틈타 누르 앗 딘은 타르투스를 일시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고, 트리폴리에 계속 머물던 보두앵 3세이 개입으로 상황은 겨우 안정되었고 레몽 2세의 아들 레몽 3세가 계승하였다. 그는 1161년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자신의 누이 멜리장드와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에 분노하여 동로마령 키프로스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1163년 레몽은 부카이아에서 누르 앗 딘을 격파해 명성을 떨쳤지만. 이듬해 하림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안티오크 공작과 달리 그는 석방 협상 대상에서 배제되었고,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가 섭정을 맡았다.
1170년 시리아 대지진 당시 트리폴리의 성벽 역시 붕괴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한편 누르 앗 딘과 이집트를 두고 경쟁하던 아모리는 동로마 측에 지원을 청하기 위해 1171년 3월 트리폴리를 출항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였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레몽 3세는 석방되었는데, 같은해 아모리 역시 사망하자 레몽은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이 되었다. 1177년에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트리폴리에 당도, 현지 십자군과 홈스 및 하마를 공격하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누르 앗 딘의 사후 시리아를 접수한 살라흐 앗 딘이 반격에 나서나 보두앵 4세의 반격으로 패한 것이 바로 몽지스가르 전투였다. 1180년 반격에 나선 살라흐 앗 딘은 타르투스를 공격하였고, 이에 레몽은 그와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강경파에 밀렸고, 그 결과 1187년 벌어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은 대패하였다. 대부분의 십자군 도시들이 점령되었고 안티오크, 타르투스, 트리폴리, 티레 정도가 유지되었다. 안티오크와 타르투스는 팔레스타인에서 너무 멀었기에 피난민들은 우선 티레, 그 다음으로 트리폴리에 집결하였다.
2.2.3.2. 안티오크-트리폴리 연합
하틴 전투에서의 부상이 도진 레몽 3세는 같은해 자녀 없이 사망하였고, 6-7촌뻘의 안티오크 공자 레몽 4세가 계승하였다. 다만 1189년 그는 동생 보에몽으로 대체되었다. 두 형제는 현직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3세의 아들들이었기에 이때부터 트리폴리 백국은 사실상 안티오크의 속령이 되었다. 한편 1188년 석방된 '국왕' 기 드 뤼지냥은 티레의 코라도에게 입성을 거부당하자 트리폴리로 향하였고, 이에 살라흐 앗 딘은 도시에 대한 공격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기는 아크레 포위에 나섰고, 따라서 본래 트리폴리로 향하려던 독일 십자군은 대신 아크레 포위망에 합류하였다. 3차 십자군 당시 도시는 주요 전장과 거리가 멀었기에 평온하였고,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와의 연락을 위해 사절을 파견했을 시에 그가 경유한 것 외에는 기록도 거의 없다. 1198년 예루살렘 국왕 애므리 드 뤼지냥의 암살을 시도했던 왕위 후보 라울이 도시로 피신한 바 있다.1201년 보에몽은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4세가 되며, 안티오크와 트리폴리는 동군 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선대인 1199년부터 안티오크 공국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과 분쟁을 벌였는데, 트리폴리는 보에몽 4세의 기존 중심으로써 그가 세력을 추스르고 반격할 수 있는 기지가 되어주었다. 1208년에는 아이유브 술탄 알 아딜이 키프로스 측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트리폴리를 공격하였다. 보에몽이 구원을 위해 남하하자 그 틈에 아르메니아 군이 안티오크를 공격하였다. 이로써 양측의 전쟁은 재발하였고, 1216년에는 보에몽이 트리폴리에 있는 틈에 아르메니아 군이 안티오크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1218년 5차 십자군 도중 보에몽은 트리폴리에서 키프로스 국왕 위그 1세의 여동생 멜리장드와 결혼해 뤼지냥 왕실과의 혈연을 맺었다.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은 이듬해 보에몽이 안티오크를 수복하며 종식되었다.
한편 1220년대 키프로스에서는 제국파와 이벨린 당파 간의 내분이 있었다. 전자에 속했다가 축출된 아모리 발라리는 1225년 트리폴리로 도피하였다. 1232년 봄, 장 드 이벨린은 제국파에 맞서 트리폴리에 상륙한 후 본거지 베이루트를 수복하였다. 한편 보에몽 4세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고, 트리폴리 항구를 봉쇄해 이벨린 가문 간의 연락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그가 사망하자 아들 보에몽 5세가 계승하였다. 1230년대 말엽에는 이른바 귀족 십자군이 당도하였다. 그 지도자인 테오발드는 1240년 하마의 아미르가 기독교 개종을 암시한 것에 반색하여 트리폴리까지 당도하였으나 그가 번복하며 헛걸음하기도 하였다. 한편 제국파와 이벨린 가문의 내전은 1243년 7월 전자의 지도자 필랑기에리와 로타르 형제가 티레에서 붙잡혀 트리폴리로 축출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1252년 보에몽 5세가 사망하자 아들 보에몽 6세가 계승하였다.
2.2.3.3. 위기 속 번영
십자군 시절 베잔트 금화
1256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트리폴리, 타르투스 주교에게 기존의 기사단에 대한 지원에 더하여 안티오크에 대한 재정 지원도 나서게 할만큼 트리폴리는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1258년 도시에서는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직을 두고 십자군 제후들의 회의가 열렸고, 부재한 국왕 콘라딘 대신 키프로스 국왕 위그 2세가 국왕 대리로 결정되었다. 한편 같은해 보에몽 6세에 대한 비블로스와 보트룬의 반란 시에 트리폴리는 포위당하였고, 반격에 나선 보에몽은 비블로스 영주 베르트랑도에게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8] 몽골의 시리아 침공을 조용히 넘긴 트리폴리 백국은 곧 몽골을 격파한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의 공세에 직면하였다. 1266년 바이바르스는 진짜 목적인 사파드 성채 대신 우선 아르카를 점령하였고 부관 칼라운을 파견해 트리폴리 주변의 농지 및 소규모 성채들을 초토화시켰다. 2주 간의 약탈 끝에 맘루크 군대는 3천이 포로와 홈스로 귀환하였다.
1268년 이번에는 안티오크를 목표로 북상한 바이바르스는 우선 자파 (야파)를 함락한 후 5월의 첫 10일간 다시 일대를 황폐화시키며 요새에 숨은 주민들을 사로잡았다. 이는 트리폴리에 거처하던 보에몽 6세의 구원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였고, 그에따라 약 일주일 후 안티오크는 외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로 함락되었다. 이로써 안티오크 공국이 사실상 멸망하자 트리폴리가 십자군의 북부 중심이 되었다. 1270년과 1271년 초엽 바이바르스는 재차 트리폴리 근교를 습격하였고 4월 크락 데 슈발리에를 점령하였다. 항복한 기사들과 주민들은 트리폴리로 향하였다. 이로써 트리폴리의 동쪽 방어막이 사라졌고, 같은 시기 8차 십자군의 와해 소식에 술탄은 도시에 대한 공격을 결심하였다. 보에몽 6세는 휴전을 청하였으나 바이바르스는 그를 겁쟁이라 비웃고 자신의 원정비를 부담하라는 조롱으로 거절의 뜻을 밝혔다. 5월에는 기벨라카르 (히신 아카르)가 항복하여 주민들이 트리폴리로 향하였다. 도시의 양익을 보호하는 두 성채가 모두 함락되며 트리폴리는 적이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1271년 5월 16일 바이바르스는 트리폴리로 향하였는데,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의 십자군이 아크레에 당도했다는 소식에 철수하며 도시는 구원되었다. 그후 보에몽 6세와 바이바르스 간의 휴전은 장기간 유지되었다. 1274년 2차 리옹 공의회 당시 트리폴리 주교 폴은 템플기사단장과 함께 십자군 국가들을 대표하여 파견되었다. 1275년 보에몽 6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보에몽 7세가 계승하자 키프로스-예루살렘 국왕 위그 3세는 망자의 사촌으로써 계승권을 주장하며 트리폴리에 당도하였으나 별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1277년에는 타르투스 계승권을 두고 비블로스와의 엠브리아코 가문과의 갈등이 재발하였다. 보에몽 7세는 템플기사단이 반군 편에 서자 트리폴리의 그 지부를 철거하였고 이에 기사단장 기욤 드 보주는 도시 밖에서 무력 시위에 나섰다. 1278년 템플기사단은 해상으로 트리폴리 공격을 시도하나 폭풍을 맞아 실패하였고, 보에몽은 해상으로 시돈의 템플러 성채를 공격하며 보복하였다. 결국 구호기사단의 중재로 현상 유지의 휴전이 성립되었다.
1281년, 몽골군과의 2차 홈스 전투를 앞두고 술탄 칼라운은 보에몽과 10년의 휴전을 맺었다. 이듬해 1월 비블로스의 영주 기 2세는 트리폴리에 잠입해 템플기사단 지부에서 반란을 꾀하였으나 사전 협의와 달리 그들의 호응이 없었다. 기 2세는 거사를 포기하고 구호기사단 지부로 피신하나 곧 보에몽에 의해 건물의 성탑에 포위되었고, 몇시간의 대치 후 목숨 보장 대가로 항복하였다. 그러나 보에몽 7세는 약속을 어기고 일당을 도시에서 서남쪽으로 10km 떨어진 네핀에 감금해 굶겨 죽이는 잔인함을 보였다. 그후 비블로스는 백작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홈스 전투 당시 몽골군에 합류한 구호기사단에 복수를 천명한 칼라운은 1285년 5월 기사단의 트리폴리 본부인 마르가트 (마르캅) 성채를 점령하였다. 수비대는 타르투스를 거쳐 트리폴리로 후퇴하였다. 이로써 북쪽의 라타키아는 고립되었고, 1287년 3월 칼라운은 그곳은 본래 안티오크 령이었음으로 트리폴리와의 휴전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도시를 점령하였다. 트리폴리의 운명은 이제 불보듯 뻔하였다.
2.2.3.4. 트리폴리 함락 (1289년)
맘루크 군의 트리폴리 포위 | 십자군의 최후 항전지인 엘 미나의 바카르 섬 (사진 왼쪽 아래). 최근 다리가 놓였다 |
같은해 10월 보에몽 7세는 자녀 없이 사망하였고, 누이 루시아가 계승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탈리아에 있었고, 주민들은 보에몽의 모친인 시빌라를 추대하였다. 다만 시빌라가 섭정으로 선임한 타르투스 주교 역시 여론의 반감을 샀고, 결국 시빌라 역시 폐위되었다. 그후 주민들은 자치적인 코뮌을 선포하였고, 보에몽 7세에게 죽은 기 2세의 동생 바르톨로메오를 시장으로 선출하였다. 1288년 루시아는 구호기사단의 도움으로 네핀을 장악하고 코뮌과 대립하였고, 기사단장들은 트리폴리를 방문해 설득을 시도하나 실패하였다. 코뮌은 제노바에 지배권을 제안하나 그들 역시 더 많은 이권을 요구하였고 시장 바르톨로메오는 군사 원조를 대가로 칼라운에 복속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결국 루시아를 백작으로 승인하였다. 루시아는 코뮌과 제노바의 권리를 승인하는 타협을 통해 트리폴리를 장악할 수 있었다. 한편 칼라운은 이러한 내분을 틈타 트리폴리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였다. 그해 말엽 도시에서 무슬림 상인이 체포된 것이 명분이었으나, 이미 전쟁 준비가 한창인 상태였다.
1289년 2월, 칼라운은 1만이 기병과 3만의 보병으로 구성된 대군[9]을 모아 카이로에서 출정하였다. 맘루크 측 내통자로부터 내막을 전해들은 템플기사단장 기욤은 칼라운의 목표가 트리폴리임을 알렸다. 코뮌은 그가 거짓 정보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는 것으로 여겨 불신하였는데, 기욤이 부관을 파견해 재차 확인한 후에야 방어 준비에 나섰다. 이듬달 장 드 그라이 휘하의 프랑스 십자군과 구호-템플기사단 병력이 트리폴리에 당도하였고 키프로스의 앙리 2세도 동생 아모리 휘하 4척 규모의 원군을 파견하였다. 상당수의 비전투원은 키프로스로 피신하였고, 코뮌은 루시아에게 방어 지휘를 맡겼다. 3월 25일, 칼라운은 트리폴리를 포위하였다. 19대의 투석기가 포격에 나섰고, 1500명의 공병들이 갱도를 파기 시작하였다. 4월 말엽, 도시의 동남쪽 모퉁이의 주교 성탑과 서쪽의 구호기사단 성탑이 반파되며 함락이 가시화되었다. 이에 항구에 정박하던 2척의 베네치아 함대가 도주하였고, 4척의 제노바 함대가 뒤따랐다. 그후 맘루크 군은 최후의 공세에 나서 4월 27일 동남쪽 성벽이 돌파, 도시를 함락하였다.
키프로스의 앙리 2세는 다음날 뒤늦게 아크레에 당도하였다. 함락된 트리폴리에서는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이 일어났다. 루시아와 아모리 등 지도부는 선박에 올라 도주하였고, 템플러 지휘관 페드로와 시장 바르톨로메오 등은 전사하였다. 시내의 기독교도 성인 남성들은 대부분 학살되었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어선을 타거나 헤엄쳐 항구 인근의 예배당이 위치한 성 토마스 (바카르) 섬으로 피신하였다. 그마저 해수면이 유난이 낮았던 29일에 맘루크 기병대가 건너 당도하였고, 술탄의 병기창에 일꾼으로 쓰일 1200명의 장정들을 제외하고 모두 학살당하였다. 포위군의 일원이던 하마의 아미르이자 학자 아불 알 피다는 전투가 끝난 후 섬을 방문했는데, 시체가 땅을 덮고 있어 그 악취로 인해 숨을 쉬거나 걸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트리폴리에 대한 180년에 걸친 십자군의 지배는 종식되었고, 시리아 각지에서는 그의 해방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2.2.4. 맘루크 왕조
칼라운이 공사를 시작해 1314년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에 의해 세워진 알 만수리 사원
트리폴리 구시가지 지도
많은 전리품을 얻은 후 칼라운은 십자군에 의해 재차 요새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를 파괴하였고, 레몽 1세가 세웠던 내륙의 몽스 페렝두스 일대에 새 도시를 세웠다. 이러한 '새 트리폴리(타라불루스 알무스타짓다)'는 십자군의 위협이 사라진 후, 시간이 흐르며 옛 도시와 합쳐지게 된다. 트리폴리 함락 소식에 유럽에서는 아라곤-나폴리 전쟁이 잠시 중단되었고, 전 트리폴리 대주교는 1290년 롬바르드 십자군을 모아 아크레로 돌아왔다. 다만 후자가 무슬림 상인들을 죽이며 휴전이 파기되었고, 이듬해 아크레 역시 맘루크 군에 함락되었다. 아크레 공방전 당시 맘루크 조의 트리폴리 총독 알 타바키 역시 포위에 합류하였다. 그후 도시는 맘루크 조의 주요 해군 기지가 되었다. 1302년 16척의 이집트 함대가 레반트 최후의 십자군 거점인 루아드 섬을 포위할 때에도 트리폴리 항구를 거쳤다.
맘루크 시대에 트리폴리는 맘루크 시대의 시리아 속주 6개 중 라타키아에서 비블로스에 이르는 동명의 주의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그중 트리폴리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다음 가는 도시였고[10] 시리아의 주요 무역항으로써 사탕, 빵, 정제된 설탕 등을 유럽에 수출하였다. 그중 설탕 수출은 14세기 후반 흥성하였다. 그외에 도시 주변을 두른 과수원에서 생산되는 오렌지, 시리아의 특산품인 비누와 올리브 기름, 그리고 십자군 시대와 마찬가지로 직물을 수출하였다. 직물 중에서는 면직물과 비단, 특히 벨벳 (융단)이 주를 이루었고 비누와 직물은 소규모 공방들에서 생산되었다.
한편 권력 구조에 있어 맘루크가 주요 정치, 군사, 행정 기능을 장악하여 집권층을 이루었고 대다수의 아랍 (혹은 아랍화된) 민중은 종교와 상공업의 측면에서 활약하였다. 그외에 도시에는 시리아 각지의 이주민과 맘루크 군의 점령 당시 술탄을 동행한 북아프리카인들, 동방 정교도, 소수의 서유럽 가문들과 유대인들이 거주하였다. 맘루크 지배기의 트리폴리의 인구는 약 2만 ~ 4만 정도였는데, 동시기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인구는 약 10만 정도였다.
맘루크 시대 트리폴리는 빠른 도시화와 도시 개발을 겪었다. 이는 시타델과 대사원, 아부 알리 강의 세 축을 따라 진행되었다. 도시의 주요 도로들은 만연한 바람과 지형에 따라 계획되었다. 도시를 두른 성벽은 없었지만 육중한 건물 구조와 좁고 복잡한 거리가 적군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주거 지역의 길거리에는 요충지마다 감시와 방어를 위해 터널 형태의 다리가 세워져 수비의 거점이 되었다. 맘루크 조는 도시에서 멀지 않은 키프로스 왕국 등 외침에 대비할 목적으로 항구에 7개의 감시탑을 세웠는데, 그중 술탄 카이트베이 시대에 세워진 사자 탑은 현존한다. 한편 새 도심 배후에 위치한 레몽의 몽스 페렝두스 성채는 맘루크 시타델로 확장되었다. '왕자의 수도교'는 라신 샘의 물을 끌어오기 위해 재활용되었다.
몇 개의 다리가 건설되었고 근교의 과수원들은 늪지대로 확장되었다. 주택들은 지붕에 설치된 저수조로 수자원을 충당하였다.
맘루크 트리폴리는 기후, 장소 배열, 방어, 도시 미학 등으로 특징 지어졌다.
맘루크 트리불로스의 종교적, 세속적 건물들은 당대 건축에 있어 가장 우수한 예시들을 이룸.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12-13세기 교회들의 돌들로 지어졌음. 당대의 건축 특성들은 모스크와 마드라사에 드러나는데, 그중에서도 구조나 장식 면에서 원형을 잘 간직한 마드라사들이 시선을 끔. 그곳에는 벌집 모양의 무카르나스 천장과 신기한 형태의 마감부, 현관, 창문 틀이 있음. 그중 우수작은 마드라사 알 부르타시야인데, 우아한 정면부는 흑백 돌로 조각되어 있고 주요 문의 들보에는 크게 장식되어 있음.
맘루크 시대 공공 건물들은 그 위치, 화려한 정면부와 거리 배치로 강조되었다. 아블라크 등 현지 사암을 이용한 화려한 조각 기법은 정면부와 입구의 장식에 활용되었다. 그를 떠받든 벽들은 수직 지지대로 활용되었다. 교차된 천장은 예배당에서 닫힌 장방형 방들까지, 회랑에서 중정까지 드리웠다. 돔들은 영묘당과 미흐랍, 지붕 덮힌 중정 등 중요하고 두드러진 공간들에 지어졌다. 맘루크 트리폴리의 건축 전형의 세부 사항들은 교차된 아치 천장과 팔각 개구부에서 만나는 오목한 홈, 장미 모양 홈, 또한 단순한 돔 혹은 물결진 돔 등으로 구성됨. 돔을 받치는 모서리 돔 및 이중 원통부는 장방형 방에서 둥근 돔으로의 변형에 쓰임
맘루크 건물의 장식은 미나렛, 출입구, 창문 외부, 미흐랍, 키블라 벽, 내부 바닥 등 그의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에 집중되었다. 당대의 장식들은 구조적 장식 (건물 외부에 있고 아블라크 벽, 단순 혹은 지그재그 형태의 틀, 비늘 무늬, 맞물린 들보와 홍예석, 명문, 그리고 무카르나스)과 적용/변형된 장식 (건물 내부에 있고 대리석 상감 세공, 스투코 - 석고 양각 부조, 유리 모자이크 기법)으로 세분화될 수 있다.
사원들은 골고루 분산되어 있고, 마드라사들은 주로 만수리 대사원 주변에 밀집되어 있다. 모든 칸들은 시리아에서의 도로들에 대한 용이한 접근을 위해 도시 북부에 자리하였다. 하맘들은 주된 인구 밀집 구역의 수요를 담당하기 위해 신중히 배치되었다. 하나는 대사원 옆에, 다른 하나는 상업 지구 중앙에, 세번째는 강변 주거지구에 자리하였다.
맘루크 트리폴리의 주요 건물들은 6개의 회중 사원들 (만수리 대사원, 알 아타르, 타이날, 알 우웨이시야트, 알 부르타시, 앗 타우바트 사원)을 포함하였다. 그에 더하여 2개의 구역 사원 (압둘 와헤드, 아르군 샤)들이 있었다. 알 부르타시와 알 우웨이시야트 사원은 빈 부지에 세워졌는데, 다른 사원들은 교회 / 칸 / 상점 등 선대의 구조물을 활용해 지어졌다. 또한 도시에는 16개의 마드라사가 있었는데, 그중 4개 (앗 주라이키야트. 알 아타르, 알 리파이야, 알 우마리야트)는 현존하지 않는다. 6개의 마드라사들은 대사원 주변에 밀집되어 있다. 그외에 도시에는 칸카를 포함한 5개의 칸과 돔형 구조가 특징인 3개의 하맘 등 많은 세속 건물들이 있었다. 하맘들은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그 돔들로부터 내려오는 빛은 내부 분위기를 한껏 돋구었다.
맘루크 시대의 시리아
1336년 총독 타이날 앗 나시리에 의해 세워진 타이날 사원
술탄 카이트베이가 항구 동쪽 편에 세운 사자 성탑
2.2.5. 오스만 제국
술탄 쉴레이만 1세의 이름이 새겨진 시타델 현관
오스만 시대에 들어 트리폴리는 초반에는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도)에 속한 산작이었고, 레바논 산지의 바누 아사프가 트리폴리 산작의 행정을 맡았다. 1521년 잠깐 에얄레트가 되었던 시기를 거쳐 1579년 공식적으로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에얄레트의 일부가 합쳐져 타르투스에서 비블로스에 이르는 해안과 내륙의 홈스와 하마까지 포함하는 트리폴리 에얄레트(에얄레티 트라블루스 샴)이 성립되었다. 도시는 1612년까지 알레포의 외항으로 여겨졌고, 시리아 내륙 무역과 부근 산지의 과세에 수익을 얻었다.
17-18세기 트리폴리는 프랑스 상인들이 많이 머물렀고, 무역 권리를 놓고 유럽 각국 간의 경쟁이 일기도 하였다. 다만 배후 도시인 알레포의 쇠퇴와 함께 1864년 행정 개편 시에 트리폴리는 베이루트 빌라예트 하의 산작으로 강등되었다. 1918년 도시는 영국군에게 장악되었다.
오스만 시대의 공공 건축으로는 쉴레이만 1세에 의한 시타델 복구가 있다. 후대의 총독들은 수비대 거점과 감옥으로 쓰이던 기존 십자군 구조물에 더 많은 개조를 가하였다.
현재의 칸 앗 사분은 본래 반란 통제를 위해 시내 중심에 세워진 군사 병영이었다.
오스만 트리폴리는 또한 도시의 남쪽 출입구의 개발과 알 무알라크 (걸려있는) 모스크 (1559년), 앗 타흐한 모스크 (17세기 초), 앗 타흐바 모스크 (맘루크 건축으로, 1612년 홍수로 파괴된 후 오스만 시대에 재건됨) 등 많은 건물들의 발달을 거쳤다. 이는 또한 칸 앗 사분 (17세기 초엽)과 하맘 알 자디드 (1740년)과 같은 몇몇 세속적인 건물들을 포함하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Yusuf_Sayfa
1729년 트리폴리를 묘사한 지도
2.2.5.1. 갤러리
엘 미나의 골목 | 구시가지의 시장 |
구시가지의 풍경
시장의 일부분
[1] 리비아의 트리폴리는 기원전 6세기 경에 건설되었다[2] 현 시리아 타르투스 앞바다에 위치함[3] 리비아의 트리폴리가 실제 3개의 도시들 중 하나가 발전한 것과 비교하면 레바논의 트리폴리는 한 도시 근교에 3개의 자치 구역이 있었던 것이다[4] 현 레바논 일대의 해안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재해로, 베이루트에서만 3만여가 사망하며 한동안 도시가 침체기를 맞게 하기도 하였다[5] 파크르 알 물크에 충성하던 자블라의 태수가 두카크에 충성하였고, 이에 후자는 아타베그 툭테긴의 아들 부리가 파견되었다. 다만 그는 주민들의 반발에 직면하였고, 이에 파크르 알 물크는 군대를 파견해 도시를 되찾고 포로가 된 부리는 정중한 사과 편지와 함께 다마스쿠스로 돌려보내졌다.[6] 혹은 페렝기우스[7] 본래 탕크레드에게 그의 봉신으로서 통치하겠다는 조건으로 항복하였으나 지켜지지 않음. 이후 그는 다마스쿠스와 모술을 거쳐 바그다드의 칼리파 알 무스타지르를 섬기다 1118/9년 사망한다[8] 다만 후퇴하던 베르트랑도가 전사하며 사태는 진정되었다.[9] 다만 이들 중 포위에 직접 참여한 병력은 1만 5천 정도였다[10] 나머지는 하마, 케라크, 사파드이다. 하마를 제외하고는 모두 요새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