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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르키예어 | Bursa ve Cumalıkızık : Osmanlı İmparatorluğunun Doğuşu | ||
| 영어 | Bursa and Cumalıkızık: the Birth of the Ottoman Empire | ||
| 프랑스어 | Bursa et Cumalıkızık : la naissance de l’Empire ottoman | ||
| 국가·위치 | 부르사 |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 지정번호 | 1452 | ||
| 등재연도 | 2014년 | ||
| 등재기준 | (ⅰ)[1], (ⅱ)[2], (ⅳ)[3], (ⅵ)[4] | }}} | |
| 부르사 울루 자미 (대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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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심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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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사 성채 언덕 |
1. 개요
오스만 튀르키예어: بورسا영어, 튀르키예어: Bursa
튀르키예 북서부 마르마라 지방에 위치한 부르사주의 주도이며 인구 190만의 도시로,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의 뒤를 이어 튀르키예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다. 부르사 혹은 프루사라는 지명은 도시의 실질적인 창건자인 비티니아 왕국의 군주 프루시아스 1세에서 유래되었다. 에디르네와 함께 오스만국의 수도(1326년 ~ 1453년)로 기능하며 성장하였다.[5] 이후에도 아나톨리아의 주요 거점이었고, 실크로드를 통한 비단 생산 도시로써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신흥 오스만국의 사실상 첫 도성이고 천도 이후에도 중시되었으며, 초기 군주들의 왕릉이 있다는 점에서 중국 청나라의 심양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구도심에는 대사원인 울루 자미를 중심으로 오스만 시기 옛 건물들이 즐비하며,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튀르크 민족주의에 있어서도 중요한 도시인데, 성채 (칼레시) 언덕에 오스만 제국의 창건자인 오스만 1세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그외의 관광 거리로 남쪽의 울루 다으 (해발 2543m) 산이 있는데, 동계 스키리조트가 운영되고 곤돌라 (케이블카)도 있다. 또한 부르사는 설산에서 흘러내린 깨끗한 물과 온천으로도 유명하다. 물이 풍부한 덕에 공원도 많고 녹음도 우거져 예실 부르사, 즉 '푸른 부르사'로도 불린다. 음식에 있어서는 튀르키예의 대표 음식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스켄데르 케밥의 발상지로,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6] 스포츠에 있어서는 터키 쉬페르리그의 둘 뿐인 이스탄불 외의 우승 구단 중 하나인 부르사스포르의 연고지이다. 부르사주는 2011년에 경상북도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2. 역사
동로마 시대에 세워진 부르사 성채의 성문
소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가 비티니아 왕국에 체류하던 시기 '미시아의 올림포스' (울루 다으) 기슭에 도시를 세운 후 주군 프루시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프루사 (Προῦσα)라 명명했다 한다. 다른 프루사와 구별하기 위해 올림포스의 프루사 (Προῦσα ἐπὶ τῷ Ὀλύμπῳ)로도 불린다. 다만 한니발이 세운 프루사는 현 도시 북쪽의 해안에 있던 키오스 (Kίος)의 파괴 후 재건한 프루시아스 (Προυσιάς)를 지칭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확실한 것은 기원전 2세기 무렵 비티니아 왕국 하에 현 시가지에 프루사란 도시가 세워진 것이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프루사는 물이 맑은 고장으로써 온천 도시로 각광받았다 한다.
6세기 무렵 프루사는 직물업으로 명성을 떨쳤고, 특히 비단이 특산물로 정착해 근대까지 이어졌다. 56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 프루사는 요새화되었고,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동로마 제국 시기 중소 도시였던 프루사는 1070년대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가, 1097년 1차 십자군의 니케아 점령 후 다시 동로마 령이 되었다. 1204년에는 피에르 드 브하수와 파용 드 오를레앙이 이끄는 4차 십자군이 프루사 성채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고, 도시는 니케아 제국을 거쳐 동로마 제국의 군사 거점으로 남았다. 14세기 들어 프루사는 니케아, 니코메디아와 함께 동로마의 대오스만 방어선을 구성했으나 1307년 니케아에 이어 1317년부터 오스만 군에게 봉쇄되었다.
2.1. 오스만 제국의 수도
오르한 가지 자미 (오르한 모스크)
휘다벤디가르 자미 (무라트 1세 모스크)
을드름 자미 (바예지트 1세 모스크)
1317년 오스만 베이국 초대 베이인 오스만 1세가 프루사를 봉쇄했고, 동로마 수비대 및 주민들은 성채에서 버텼다. (부르사 공방전) 그러던 1326년 4월, 오스만 1세가 사망하던 날 도시는 항복했다. 뒤를 이은 아들 오르한은 첫 수도였던 쇠위트 (Söğüt) 및 이즈니크에서 1335년 프루사로 천도했고, 지명은 튀르크식인 부르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엘리아스 수도원은 오스만 1세의 영묘가 되었고, 그 옆의 총독궁은 오스만 황궁인 베이 사라이로 개조되었다. 동로마 시기 시가지는 성채 언덕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오르한은 그 동쪽에 오르한 가지 모스크와 카라반사라이 & 하맘 (목욕탕) & 이마레트 (구휼소) 등을 세워 현재의 새 시가지를 건설했다.
14세기 중반 부르사에는 마드라사, 카라반사라이, 병원 등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고 오스만 제국 최초의 화폐 주조소도 들어섰다. 튀르키예 전통 만담 연극 카라괴즈가 이 시기 부르사 거주민을 배경으로 한다. 실제로 카라괴즈 연극의 전신인 질-우-하얄이 베이 사라이에서 열린 무라트 1세의 아들들의 할례 축하연에서 공연되었다 한다. 1360년대 무라트 1세가 모스크 단지 (퀼리예시)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1390년대 바예지트 1세가 을드름 모스크와 울루 자미를 세우며 부르사는 곳곳에 돔과 미나렛이 즐비한 모스크 도시가 되었다. 1360년대 제국이 발칸반도로 확장하면서 트라키아의 에디르네를 수도로 삼은 후에도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전까지 오스만 제국은 루멜리아 (유럽)과 아나돌루 (아나톨리아)로 양분되어 있었기에 부르사와 에디르네가 공동 수도로 기능했다.
2.1.1. 15세기 초의 위기와 극복
울루 자미 (그랜드 모스크)
파일:예실 부르사.jpg
예실 자미 (메흐메트 1세 모스크)
메흐메트 1세 영묘
동시에 부르사는 막 정복된 에디르네와 달리 발상지와 가깝고 무슬림 인구가 많은 정신적 중심지로써 중시되었다. 오스만 1세, 오르한, 무라트 1세, 바예지트 1세, 메흐메트 1세, 무라트 2세까지 6명의 오스만 군주 (술탄은 4명)가 부르사에 매장되었다. 부르사는 1402년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의 증손자 무함마드 술탄 미르자가 이끄는 티무르 제국군에게 점령되었다. 이때 약탈과 방화로 인해 시가지가 크게 파괴되었고, 1413년에는 오스만 공위기를 틈타 카라만 왕조의 메흐메트 2세가 부르사를 31일간 포위했지만 총독 하즈 이바즈 파샤가 방어해냈다. 이후 무사 첼레비를 격파하고 내전을 끝낸 메흐메트 1세가 다가오자 카라만 군대는 철수했다.
비록 도시를 함락하지는 못했지만 카라만 베이 메흐메트 2세는 부르사 교외 지역들에 방화하며 1406년에 메흐메트 1세가 세웠던 바예지트 1세 영묘를 파괴했다. 메흐메트 1세는 이듬해 콘야 전투에서 메흐메트 2세를 격파하고 사로잡으며 복속시킨다. 두 차례 전란을 겪으며 울루 자미가 불타는 등 큰 피해를 입은 부르사는 메흐메트 2세와 무라트 2세의 안정적인 통치 하에 복구되었고, 후자는 무라디예 모스크 단지를 더하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부르사는 에디르네와 함께 수도의 지위를 잃게 된다.
2.2. 아나톨리아 서부의 중심 도시
무라디예 자미 (무라트 2세 모스크)
1442년에 세워진 이르간드 다리
1453년 이후로도 부르사는 아나톨리아 서부의 중심지로 유지되었고, 아나돌루 에얄레트 산하 부르사 산작의 치소였다. 1487년 당시 인구는 4만 5천에 달했다. 주요 산업은 동로마 때부터 이어진 비단을 주력으로 하는 직물업이었고, 이란과 중국에서 수입된 누에 고치는 코자 한에 모여 시내의 직물 공방들로 분배되었다. 부르사에서 생산된 비단, 베개, 카프탄, 각종 수공예품은 코스탄티니예 황궁에 납품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부르사 상인들은 비단 수출로 큰 돈을 벌었고, 그중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부르사 비단을 제국 외부에까지 팔았다.[7] 부르사는 또한 로마 시대와 마찬가지로 깨끗한 온천수로 유명했고, 16세기 쉴레이만 1세 시기에 예니 카플르자 목욕탕이 세워졌다.
정치에 있어 부르사는 메흐메트 2세 등의 술탄들이 사파비 왕조 원정 시에 거쳐 가는 것 외에는 퀴타히아에 밀려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다만 1481년 봄 메흐메트 2세 사후의 내전에서 젬 술탄이 아야스 파샤를 격파한 후 부르사에서 술탄에 즉위했으나, 곧 바예지트 2세에게 예니셰히르 전투에서 패하고 망명한다. 1512년 셀림 1세가 동생 아흐메트와 동맹해 부르사를 점령한 조카 알라에틴을 격파해 도시를 수복하고, 1553년에는 에레을리에서 처형된 쉴레이만 1세의 아들 셰흐자데 무스타파의 장례식이 열렸다. 부르사는 16세기 중반 이후 부르사는 2세기 이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1605년 아흐메트 1세가 젤랄리 반란 진압을 지휘하며 머물렀다.
하지만 1633년 무라트 4세가 이라크 원정 중에 거쳐 간 후로 더이상 술탄들은 부르사를 방문하지 않았다. 따라서 황궁인 베이사라이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수도로 다과를 보내는 헬바하네 정도만 운영되다가, 19세기가 되면 완전히 사라진다. 한편 부르사 근처 기독교도 마을들에는 많은 목동이 있었고, 불법적으로 데브시르메로 끌려간 소년들에 대해 주민들이 목축에 지장이 있다며 항의하자 조정이 개입해 돌려보내는 일도 있었다. 18세기 초엽 부르사는 화재를 겪었고, 1855년에는 대지진으로 여러 건물이 붕괴하여 술탄 압뒬아지즈의 지원으로 재건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부르사에는 14-15세기의 초기 오스만 건축과 함께 오스만 바로크 양식이 공존하게 되었다.
2.2.1. 근현대: 발칸 실향민 수용
1868년 오스만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된 에미르 술탄 모스크
오스만 전통 양식의 시가지
1867년 부르사는 '신이 돌보는'이란 뜻인 휘다벤디가르 빌라예트의 치소가 되었고, 1922년까지 유지된다. 발칸 전쟁 중인 1914년, 부르사 인근 지방의 기독교도 마을들은 반기독교 기류 하에 여러 괴롭힘을 당했다. 발칸 전쟁 직후인 1915년 7월, 청년 튀르크당에 의해 마을에서 쫓겨난 해안 마을들의 그리스 정교도들이 부르사로 피신했다. 얼마 후 부르사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소개 명령이 내려졌고, 일부 저항한 이들은 학살되었다. 이후 러시아 제국에 의해 동부 아나톨리아 및 캅카스에서 축출된 쿠르드인과 체르케스인들이 대신 정착했다. 1차 대전 이후에는 발칸 반도에서 쫓겨난 튀르크인들이 부르사에 대거 정착했다.
터키 독립 전쟁 시기인 1920년 7월에는 그리스 군이 부르사를 점령했고, 2년 넘게 주둔하다가 둠루프나르 전투 후 1922년 9월에야 철수했다. 그리스 군은 철수하며 도심을 불태우려 했지만 서구 국가들의 제지로 기차역을 불태우고 일부 다리를 포격해 파괴하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차역과 다리를 이용하던 주민들이 포화에 희생되었다. 독립전쟁 이후 그리스계 주민들은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으로 추방되었고, 1940년대에는 불가리아에서 추방된 15만에 달하는 불가리아 튀르크인 및 포마크인의 1/3이 부르사에 정착하였다.[8] 이로써 부르사의 인구 구성은 무슬림이 절대 다수가 되었고, 1927년에 6만이던 인구는 1950년경 12만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2.3. 현대
시내의 트램
신도심인 후다벤디가르 공원
튀르키예 공화국 시기 부르사는 공업 도시로 탈바꿈하여 울루 다으를 접한 남쪽을 제외한 도시 교외 지역에 공단들이 들어섰다. 이로 인해 인구가 급증하여 튀르키예 제4의 도시로 성장했고, 1980년대 ~ 2000년대에는 많은 동부 지역 출신 튀르크 및 쿠르드 인들이 유입되며 인구 구조가 또다시 바뀌었다. 현대 튀르키예에서 부르사는 (19세기 무렵에 생긴) 이스켄데르 케밥의 발상지이자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로 알려져 있고, 대외적으로는 물가가 저렴하면서도 오랜 역사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여행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2010년 부르사스포르가 터키 리그를 우승하는 바람에 도시가 축제 분위기가 되기도 했고, 2014년에는 구도심 권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3. 관광 (볼거리)
부르사 성채의 성벽
도심 동부의 예실 자미 (메흐메트 1세 모스크) 일대
도심 중앙부의 울루 자미 일대. 오른쪽의 산은 울루 다으
유럽 방면 이스탄불 남쪽에서 비교적 싼값에 배를 타고 넘어갈 수 있는데 대략 2~3시간 정도 걸리면 시내에 들어갈 수 있다. 이스탄불이 워낙에 붐비고 수작부리는 현지인들이 많거니와[9] 관광지를 중심으로 창렬물가를 자랑하기에 본인의 여행 스타일이 관광지 훑어보기가 아닌 그냥 발 닿는대로 즐기는 걸 선호한다면 하루 정도 시간내서 가보기에도 무리는 아닐 정도로 가깝다.
3.1. 상세 목록
- 울루 자미 (그랜드 모스크, Ulu Camii)
바예지트 1세 시기인 1396 ~ 1399년에 세워졌고, 1400년 티무르와 1412년 메흐메드 베이의 공격으로 일부 훼손되었다가 재건되었다. 19세기 들어 바로크 양식으로 중수되었다. 보통 마스지드하면 한 개의 커다란 돔에 미나레트를 떠올리는데 여기는 작은 돔 여러 개가 올라간 형태이다. 튀르키예의 유명한 건축물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박물관이 이스탄불에 있는데 거기에서 등장하는 걸로 보아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나름 유명한 마스지드로 평가받는 듯하다. 시내 중심과 가까워서 바로 코앞의 지하에 설치된 상당한 규모의 바자르와 지상의 시장과 이어져 있다. 현지인들에게는 나름 유명하지만 외국인들은 잘 안가는 곳이어서 그런지 이스탄불의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마스지드보다는 더 진짜 모습의 마스지드 풍경을 볼 수 있다.[10][11]
- 예실 자미 (메흐메트 1세 모스크, Yeşil Camii)
초록색 모스크란 뜻으로, 1412 ~ 20년에 걸쳐 메흐메트 1세가 건설했다. 그는 사후 1421년 아들이자 후계자인 무라트 2세가 건립한, 초록 돔이라 불린 투르베 (영묘)에 안장되었다. 내부는 타브리즈 출신 장인들이 장식했다. 미흐랍과 정문의 무카르나스, 내부의 푸른색 타일은 티무르 제국의 영향을 받은 정교한 조각으로 명성이 높다. 1855년 부르사 대지진 당시 피해를 입어 프랑스인 기술자의 도움으로 복구되었고, 1941-43년에도 정비가 있었다. 모스크와 영묘 외에 부속 시설들로 마드라사, 이마레트 (구휼소), 하맘 (목욕탕) 등이 있다. 그중 마드라사는 현재 부르사 튀르크-이슬람 예술 박물관 (Bursa Türk ve İslam Eserleri Müzesi)으로 쓰이고 있다.
- 을드름 자미 (바예지트 1세 모스크, Yıldırım Camii)
구도심 동부의 언덕에 위치하며, 1391 ~ 95년 바예지트 1세가 건립했다. 부속 시설로 영묘, 마드라사, 병원, 목욕탕 등이 있다. 그중 병원인 다뤼시파는 오스만 건축의 첫 사례였고, 1900년 무렵 화약 공장으로 쓰였다가 1990년대에 복원되어 현재에도 안과 병원으로 쓰이고 있다. 바예지트의 영묘는 쉴레이만 1세가 건립한 것이다. 부속 마드라사는 15-16세기의 저명한 학자들이 강의했고, 20세기 초엽 버려진 후 1948년에 보수되었다. 목욕탕에는 냉탕, 온탕, 열탕이 있고 현재까지 잘 남아있다. 또한 울루 다으 산의 아크차을라얀 샘과 이어지는 수도교도 있다.
- 오르한 가지 자미 (오르한 모스크, Orhan Gazi Camii)
- 무라디예 자미 (무라트 2세 모스크, Muradiye Camii)
구도심 서부에 위치하며, 1426년 무라트 2세가 건설했다. 부속 시설로 영묘, 목욕탕, 병원 등이 있다. 이즈니크 타일과 동로마 시기 기둥 등으로 장식된 영묘에는 무라트 2세 외에도 젬 술탄과 무스타파 황자 등의 오스만 황족들이 안장되어 있다. 18세기 초의 화재에 이어 1855년 대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어 재건되었고, 2015년에도 복원 공사가 있었다. 1950년대 이래로 부속 병원은 결핵 진료소로 쓰이고 있다.
- 휘다벤디가르 자미 (무라트 1세 모스크, Hüdavendigar Camii)
구도심 서북부에 위치하며, 1363 ~ 66년 무라트 1세가 건설했다. 부속 건물로 영묘, 자위예 (수피 사원), 시브얀 메크테비 (쿠란 학교), 구휼소, 목욕탕 등이 있다. 모스크는 1층은 예배당, 2층은 마드라사로 쓰였다. 복합 단지는 1855년 대지진으로 파괴된 후 복구되었다. 이마레트 (구휼소)는 현재 문화 센터로 쓰이고 있다.
- 에미르 술탄 자미 (Emir Sultan Camii)
구도심 동부에 위치하하는, 15세기 부하라 출신의 수피 성인이자 바예지트 1세의 참모 에미르 술탄 (샴스웃딘 메흐메드 알리)의 무덤을 중심으로 형성된 모스크 단지. 바예지트 1세의 자녀들인 메흐메트 1세와 훈디 파트마 하툰, 무라트 2세가 조성했다. 1766년 지진으로 붕괴한 후 셀림 3세가 재건했으나, 1855년의 대지진 후 다시 붕괴하여 1868년 오스만 바로크 양식으로 2차 재건되었다. 부속 시설로 영묘, 목욕탕 등이 있고 그중 후자는 문화 센터로 쓰인다.
- 코자 한 (Koza Hanı)
1490-91년에 아불 알라 빈 풀라드가 도심에 세운 카라반사라이로, 부르사의 13개 카라반사라이 중 하나였다. 이름은 '누에 여관' 정도이다. 발생하는 수익은 와크프 (재단) 형식으로 이스탄불의 바예지트 2세 모스크의 운영 경비에 투입되었다. 부르사 비단의 거래 거점으로, 16세기 메디치 가문이 지부를 둘 정도로 번영했다. 1층에는 50개, 2층에는 54개의 방이 있고 안뜰 중앙에는 작은 모스크 (메스지트)가 있다. 1630년, 1671년, 1784년에 보수가 있었고 2008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방문했다.
- 이르간드 다리 (Irgandı Köprüsü)
1442년 부유한 상인 뮈슬리히딘이 건축가 티무르타쉬에게 의뢰해 건설한 다리로, 부르사 시가지를 동서로 가르는 괵데레 강에 놓였다. 1개의 아치는 11m 높이이고, 상단에는 30개의 목조 바자르 상점 건물이 있어 독특한 모습을 자아낸다. 1855년 부르사 지진으로 일부 파괴된 후, 1922년 터키 독립 전쟁 시에 철수하는 그리스 군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어 폐쇄되었다가 1949년과 2004년에 복원되었다. 현지인들은 세계에서 4개 뿐인 상점 병용 교량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 오스만 가지 영묘 (Osman Gazi Türbesi)
성채 언덕의 토파네 공원에 위치한다. 일대는 동로마 시기 성 엘리야 수도원이었는데, 오스만 1세가 포위 진영에서 사망 직전 오르한에게 성채 위로 보이는 은색 돔을 가리키며 그곳에 매장되길 희망했다 한다. 영묘는 1801년의 화재와 1855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1863년 술탄 압뒬아지즈에 의해 기존의 팔각꼴 형태로 재건되었다.
- 오르한 가지 영묘 (Orhan Gazi Türbesi)
오스만 가지 영묘와 10m 거리를 두고 위치하며, 사각꼴에 각 면마다 3개의 창문이 있다. 오르한 외에도 부인 뉠리페르 하툰, 바예지트 1세의 아들 무사 첼레비, 바예지트 2세의 아들 코르쿠르 등이 안장되어 있다. 1855년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1863년 술탄 압뒬아지즈에 의해 재건되었다.
- 이브라힘 파샤 법원 목욕탕 (İbrahim Paşa Mahkeme Hamamı)
1421년에 대재상 찬다를르 카라 할릴 하레틴 파샤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가 세운 목욕탕으로, 이즈니크에 있는 자신의 이마레트 (구휼소)의 경비를 대기 위한 와크프 (재단) 건물이다. 부속 모스크와 단지를 이루며, 일대에 카디의 거처와 법정이 있었기에 '법원 목욕탕'이라 불리게 되었다. 목욕탕은 남녀 구분되어 있고, 냉탕과 열탕 및 찜질방 등으로 구분된다. 현재도 전통 목욕탕으로 남아있다.
- 에스키 이펙 한 (Eski İpek Han)
15세기 중반 예실 자미의 경비를 대기 위해 건축가 겸 군인인 하즈 이바즈 파샤가 건설했다. 16세기 들어 그랜드 바자르와 코자 한으로 옮겨가기 전에 비단 상인들이 집결하던 곳이다. 2층의 'ㅁ'자 형태이고 1층에는 39개, 2층에는 42개의 가게가 있다. 지금까지도 직물 공방과 의류 상점들이 입점해 있다.
- 피린츠 한 (Pirinç Han)
1490-1500년에 걸쳐 바예지트 2세가 (코자 한과 함께) 이스탄불의 바예지트 2세 모스크 경비를 대기 위한 와크프 건물로 세웠다. 다른 한들처럼 2층 ㅁ 형태다. 전통적으로 곡물, 특히 쌀이 거래되었고 외국 상인들도 자주 방문했다. 1983-2004년에 보수되었다.
- 부르사 그랜드 바자르 (Bursa Kapalı Çarşı)
구도심 중심부에 위치한다. 직물을 중심으로 신발, 가방, (공산품) 의류, 유리 공예품, 보석, 수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130개 넘는 가게가 입점해 있다. 7백년 넘는 역사를 지녀 현존하는 튀르키예 최고의 시장으로 손꼽힌다.
- 부르사 성채 (Bursa Kalesi)
기원전 1세기 비티니아 왕국 시기에 처음 세워져 6세기 동로마 제국 시기에 증축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한니발이 설계했대 하며, 본래 5개의 성문이 있었다. 현지인들은 성채를 부르는 다른 튀르키예어 단어인 '히사르'라고도 부른다.
- 토파네 시계탑 (Tophane Saat Kulesi)
19세기 말엽 압뒬아지즈의 치세에 처음 세워졌으나 1900년경 철거되었고, 1904년 압뒬하미트 2세의 즉위 29주년을 맞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완공되었다. 6층에 33m 높이이며, 4면에 시계가 있으며 내부에는 89개의 계단이 있다.
- 아브달 다리 (Abdal Köprüsü)
수피인 압달 첼레비가 1667-699년에 도시 서쪽의 닐뤼페르 강에 세운 석조 교량. 12개의 홍예가 있고, 70m 길이이다.
- 주말르크즉 마을 (Cumalıkızık)
부르사 동쪽 7km 지점 울루 다으 기슭의 전통 마을로, 부르사 구도심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 시립 박물관 (Bursa Kent Müzesi)
- 부르사 고고학 박물관 (Bursa Arkeoloji Müzesi)
4. 특산물
튀르키예어로 세프탈리라고 부르는 복숭아가 특산물이다. 그 당도는 어마무시하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복숭아라고 부른다는 소리가 있다. 일단 부르사 시내에서 아무 가게에나 보이는 복숭아를 굳이 고르고 고르지 않고 아무거나 집어먹는다해도 어지간한 국산 복숭아 뺨치는 당도를 자랑한다. 체리 역시 유명하다.이 지방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 이스켄데르 케밥도 전문 프랜차이즈 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요리가 나오고 조금 기다리면 종업원이 와서 끓는 버터를 냅다 들이 붓는 게 일종의 암묵적 룰 같은데, 당연하게도 엄청난 칼로리를 섭취하게 된다. 버터에 찌들은 한 입 크기로 썰어놓은 빵과 구운 가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현지인들은 '부르사 케밥(Bursa kebabı)'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부르사 시내에서는 오직 이스켄데르 에펜디의 후손이 운영하는 가게에서만 이스켄데르 케밥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으며, 나머지 가게는 요우르트 케밥(Yoğurt Kebabı)이라고 부르고 있다.
밤으로 만든 케스타네 셰케리(kestane şekeri)가 대표 특산품으로 꼽힌다. 부르사에서만 살 수 있다고 하며, 현지인들도 선물로 많이 사가는 모양인지 선물용 제품도 많이 판다. 이름은 대략 '밤 사탕'이라는 뜻인데, 밤을 설탕물에 졸이고 절여 만든 디저트로 엄청난 당도를 자랑한다. 부르사 시내 어디서든 살 수 있지만 가격대 편차는 꽤 있는편.
5. 경제
금융가 옆의 후다벤디가르 공원
부르사는 교외 지역이 전부 다 공단이라 봐도 될 정도로 튀르키예 서북부의 주요 공업 도시이다. 산업에 있어 르노, 피아트에서 생산하는 터키의 자동차 공장이 위치한다. 르노 부르사 공장은 르노의 주력모델인 클리오를 생산하며, 특히 튀르키예 최대 기업 코치 홀딩스 산가의 토파쉬가 이곳에 공장을 두고 피아트의 승용차 및 상용차 라인을 수십년 간 현지생산했다. 피아트의 후신인 스텔란티스도 토파쉬를 통해 중형 상용차 라인을 생산하고 있다.
6. 스포츠
신영록 선수가 뛰었던 튀르키예의 1부 축구팀 부르사스포르의 연고지이다.7. 출신 인물
- 케렘 셴
- 에네스 위날
- 무라트 1세 - 그의 별명이기도 한 휘다벤디가르 (신이 보호하는 자)는 도시의 별칭이기도 하다.
- 메흐메트 1세 - 오스만 제국 제2의 건국자. 그의 영묘인 예실 자미와 푸른 영묘는 부르사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여겨진다.
- 이스켄데르 에펜디(İskender efendi) - 이스켄데르 케밥의 발명자. 부르사 시의 이스켄데르 케밥 가게들 사이에선 이스켄데르의 후손만 이스켄데르 케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관계없는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은 요우르트 케밥(Yoğurt Kebab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암묵의 룰이 있다고 한다. 사실 출생지는 동부의 에르주룸인데, 젊은 시절 부르사에 정착해 대부분의 인생을 보냈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5] 1360년대의 어느 해안가에 에디르네를 함락한 이후 천도를 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정작 오스만의 군주들은 이후로도 부르사에 머물렀으므로 수도가 두 군데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부르사는 메흐메트 1세가 에디르네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오스만의 수도였다.[6] 부르사 케밥이라 부르기도 하며, 발명자인 이스켄데르 베이의 후손만이 부르사에서 이스켄데르 케밥 간판을 쓸 수 있다[7] 부르사의 비단에 대해서는 오스만 사학자 할릴 이날즉의 저서를 참고[8] 다만 불가리아 국명의 어원이자 민족 구성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불가리아인들의 조상 중 하나인 불가르족도 튀르크 계통이다.(불가르 칸국 문서 참조) 불가르족의 경우 정교회로의 개종 전후하여 교회 슬라브어를 받아들이면서 지배층마저 슬라브어 계열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피지배층이었던 남슬라브인들과 동화되었다.[9] 갈라타 다리에서는 뜬금없이 담배불 붙혀달라곤 다가와서 술이나 한 잔하고 꼬셔서 바가지를 씌운다거나, 구두솔을 일부러 떨구고는 주워주는 관광객에게 고맙다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냅다 구두를 닦은 다음에 거액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닦아 줄 수 조차 없는 샌들을 신은 사람한테도 시도한다)[10] 원래 튀르키예인들이 우리 기준으로는 신기할 정도로 낯가림이 없는데 외국인, 특히 동양인을 보기 힘들고, 아이들 같은 경우 여행자를 역으로 '관광' 하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11] 마스지드는 회당이기도 하지만 기도시간이 아니라면 현지인에게 마을회관 같은 기능도 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려와서 자기들끼리 뛰어 놀게 하고 한 쪽에 모여서는 수다를 떠는 게 일상이라서 엄숙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종교시설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보통의 이슬람은 종교와 생활이 너무 밀접해서 예배의식도 경건하지만 가벼운 느낌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회당 내부에서 기도시간에 드러누운(...) 사람도 볼 수 있다. 종교 의식의 엄숙한 분위기를 중시하는 유럽인들이나 동아시아인 관점에서 이는 불경스러운 행동으로 보는 반면, 이쪽은 '여기는 신의 집이고 그는 신의 품안에 누워있는 것이다.' 로 생각을 한다고. 반면 예배의식이 가장 엄격한 종교는 동방정교회 쪽이다. 못해도 1시간 걸리는데 그 과정을 전부 서서 진행한다. 물론 노약자를 위한 약간의 의자를 배치하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