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31 12:11:28

괴베클리 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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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 제리코의 탑 아누 지구라트 조세르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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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SCO World Heritage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괴베클리 테페
튀르키예어 Göbekli Tepe
영어 Göbekli Tepe
프랑스어 Göbekli Tepe
국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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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르우르파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572
등재연도 2018년
등재기준 (ⅰ)[1], (ⅱ)[2], (ⅳ)[3] }}}

파일:괴베클리 테페.jpg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조성된 시기4. 유적지의 건설5. 몰락
5.1. 천문 현상과의 연관성?
6.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7. 기타
7.1. 아르메니아의 반발
8.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괴베클리 테페 지도.jpg파일:괴베클리 테페 지도 2.jpg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는 튀르키예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라는 의미의 지명으로, 튀르키예 남동쪽 샨르우르파(Şanlıurfa)도 외렌직(Örencik)군에 있는 석기 시대의 유적을 가리킨다.

이 유적은 해발 760m에 위치한 언덕 정상에 묻혀 있었는데 현지인이 우연히 찾아서 몰래 파 내려가다가 발견되었다. 이후 1963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교와 튀르키예 이스탄불 대학교가 공동 조사를 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였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4]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1994년부터 2014년까지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했다. T 자 형태 돌기둥 200개 이상이 늘어서 20겹으로 원을 이루는 형태가 특징인데, 기둥 중 가장 높은 것은 5.5 m에 달한다.

2018년 6월,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튀르키예의 18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언어별 표기

【언어별 명칭】
<colbgcolor=#CCCCCC,#212121> 한국어 괴베클리 테페
튀르키예어 Göbekli Tepe
아르메니아어 Պորտասար (Portasar)
쿠르드어 Girê Mirazan
중국어 哥贝克力石阵
일본어 ギョベクリ・テペ

3. 조성된 시기

2010년에 발표된 결과로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 기원전 9675년 무렵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구조물은 21세기 기준 약 11700년 전에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PPN A)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 이 정도 크기의 인공 구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6] 대표적인 대규모 고(古)유적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이기도 한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대략 기원전 2000~2700년 무렵에 건설된 유적인데 괴베클리 테페는 이 시기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피라미드가 지어진 시기와 현대까지의 기간(4000년)보다, 괴베클리 테페가 지어지고 피라미드가 지어지기까지의 기간(7000년)이 3000년이나 더 길다. 심지어 최초의 문명 도시라고 하는 수메르 문명보다도 앞선 것이다.

유적이 위치한 아나톨리아 반도는 현재까지 발견된 도시 중 가장 오래되고 초기 밀 농사를 했다고 추정되는 유적들도 발견되므로, 수렵인들이 이런 종교 시설을 건축하며 모여 살다가 농사를 지으며 정착민으로 변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었다.

이 시점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류가 원시 생활에서 벗어나 일정 규모의 인구가 모여 연대를 붙이는 것이 의미있는, 즉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초의 고고학적 업적을 만든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베클리 테페를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1993년 이탈리아계 미국인 지질학자인 체사레 에밀리아니(Cesare Emiliani)는 서력 기원의 연대에 10,000을 더해 '홀로세 기원'(Holocene era), 또는 '인류 기원'(Human Era)이라고 이름지어 약칭 HE라고 쓰자는 주장을 했다. 예를 들어 서기 2022년은 12022 HE로 하자는 것이다.

2019년, 괴베클리 테페에서 38km 떨어진 카라한 테페(Karahan Tepe)에서 T 자형 기둥이 250개나 발견되는 등 괴베클리 테페보다 더 거대한 신전이 있었고,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 외에도 주변 지역 각지에서 T 자형 기둥 신전이 잇따라 발견되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집단이 존재했었음이 드러났다. 신전 주변에서 곡식을 빻기 위해 필요한 맷돌과 탄화된 곡물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주변에서 주거지의 흔적들도 계속해서 확인되고 있다.

4. 유적지의 건설

파일:괴베클리 테페 예상 기록화.jpg
괴베클리 테페는 언덕 위에 스톤헨지처럼 원 모양으로 세운 돌기둥이 특징인데, 기둥들에는 여러 가지 곤충동물 형상이 양각되어 있다. 돌기둥들은 T 자 형상을 했는데 사람을 나타낸 듯하다. T 자형 돌기둥의 몸통 부분(ㅣ 부분)에는 손과 인체 형상이 조각되었지만 얼굴 부분(ㅡ 부분)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T 자형 유물은 한국의 솟대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가 앉는 횃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다른 유적에는 사람 얼굴을 새겼으므로, 여기서는 얼굴을 조각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돌기둥을 세우고자 인근에 위치한 석회암 언덕에서 바위를 떼어내 운반했으며, 근처에 이러한 작업을 한 채석장들과 미완성된 기둥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기둥 하나의 무게가 10~20톤에 달하기 때문에 클라우스 슈미트는 운반과 조각, 건설에 적어도 500명 이상의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 시기는 겨우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려던 신석기 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고고학계의 기존 학설에 따르면, 인류가 이러한 거대 유적을 조성하려면 체계적인 토목 활동이 가능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려면 농경 생활에 따른 체계화된 사회 조직이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학설에 따르면, 스톤헨지 같은 고대 건축물에 사용된 기술을 사용하면 15명 이내의 인원으로 기둥을 운반할 수 있었을 것이며, 괴베클리 테페에서 이루어진 실험에 따르면 모든 건축물들은 25명 이내의 인원으로 4개월 안에 건설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괴베클리 테페의 건설에 소요된 인력에 대해서 확립된 사실은 아직까지 없다.

5. 몰락

괴베클리 테페는 세워진 뒤 약 2천 년 동안 신전으로 사용된 듯하다. 이곳에 세웠던 기둥들을 고의로 땅에 묻은 뒤 새로운 기둥을 다시 세우는 등 변화가 몇 번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후기로 갈수록 기둥을 제작하는 방식은 단순해지고 조잡해지는 경향이 있었으며, 결국 기원전 8000년쯤 괴베클리 테페는 버려져 땅속에 묻혔다.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땅을 파 기둥을 메운 뒤, 그 위에 석회자갈과 석기도구들, 동물과 인간의 뼈를 묻고 버렸다는 사실이다.

고의적으로 신전을 매장한 흔적이 있으므로 종교/정치적인 분쟁이나, 지배계급에 맞선 반란 등에 휘말렸으리라는 시각이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종교를 믿는 무리가 신전 일대를 지배하여 괴베클리 테페를 이교도의 건축물로 규정하고 묻어버렸거나, 혹은 그 이전에 누군가가 돌기둥들을 숨기거나 보존하기 위해 묻었다는 것이다. 후자의 주장은 돌기둥들이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온전하게' 묻혔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조사로는 인위적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묻혔다고 추측한다. 사람의 손으로 묻었다면 유적이 상대적으로 고르게 묻혔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괴베클리 테페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신전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퇴적된 듯하다.

따라서 '인위적 몰락'과 '자연적 퇴적'을 결합하여 가설을 내놓기도 한다. 말 그대로 괴베클리 테페가 모종의 이유로 방치되던 시기가 있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방치되고 버려졌다가 나중에 누군가가 복구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가 고고학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존의 학설로 예상되던 발전수준에 비해 놀랍다는 뜻이지 본격적인 성읍국가나 문명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관리가 쉽게 끊어짐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굳이 전쟁이나 집단적인 분쟁이 아니어도, 단순히 생태자원 고갈로 인한 서식지 이동이나 재해로 인한 피난 등으로도 인적이 끊길 수 있다.

의외로 이런 일은 고대 이후에도 굉장히 빈번하였다. 가령 서기 10세기에 세워진 그린란드바이킹 식민지는 크게 번성하여 가톨릭 교구가 설치되고 주교가 임명될 정도였으나, 소빙하기로 인한 기후변화 때문에 인구 대부분이 아이슬란드로 피신했고, 18세기에 바이킹의 후손인 덴마크인들이 옛 식민지들을 재건할 때까지 버려졌다. 근현대에도 19세기까지 사람들이 상주하다가 1830년에 일어난 가뭄으로 버려진 짐바브웨의 종교유적 그레이트 짐바브웨, 1995년에 지진으로 폐허가 된 뒤로 유령도시가 변한 러시아 사할린 섬네프테고르스크의 사례가 있다. 그리고 괴베클리 테페보다 훨씬 규모가 큰 톨텍 문명 등 문명도 자원고갈이나 자연재해로 멸망한 사례가 있었으니 무리한 추측도 아니다.

5.1. 천문 현상과의 연관성?

<nopad>파일:괴베클리 테페 천문 현상.jpg
마치 황소자리플레이아데스 성단과 비슷하여 천문학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성 가설도 있다.

괴베클리 테페가 시리우스의 위치를 기록하는 천문대의 역할을 해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현재 시리우스는 북반구 대부분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밝은 별이지만, 기원전 1만 년 전에는 1년 내내 지평선 아래에 있는 전몰성, 즉 관측이 불가능한 별이었다. 지구의 세차 운동으로 적위가 증가하여 기원전 9300년 무렵 시리우스는 튀르키예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해당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못 보던 밝은 별이 남쪽 지평선 부근에서 나타난 듯이 보였을 것이다. 이 시기는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 연도와 맞아떨어진다.

또한 시리우스가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위치는 지구가 세차운동을 함에 따라 수백 년 단위로 변화하는데, 이들과 돌기둥들이 배치된 방향을 연장한 선이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일 정말로 시리우스의 출현이 괴베클리 테페를 건립하는 동기가 되었다면, 시리우스 숭배는 고대 이집트보다도 더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온 유서 깊은 종교적 믿음이다. 하지만 수렵채집활동으로 살아가던 원시부족이 문자도 없이 천문관측기록을 어떻게 후세에 전할 수 있었냐는 의문이 남는다.

'떠돌아다니던 수렵민들이 갑자기 어떤 계기로 모여서 신전을 건축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에 대답하고자 '혜성 소나기'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린란드의 아이스 코어, 지구 궤도 이심률 변화, 북아메리카의 지질역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기원전 1만 1천 년 무렵에 지구는 황소자리 유성우의 극대기에 돌입했고, 이때 대규모의 혜성 충돌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혀졌는데, 이 사건이 괴베클리 테페를 세우는 동기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 이 주장은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고대의 아포칼립스> 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다만 이 다큐멘터리의 제작자는 유사 역사학으로 악명 높은 그레이엄 핸콕이다.

한발 더 나가자면, 혜성충돌로 전 지구적인 재앙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에서 종교적인 영감을 얻은 한 무리가 이 대참사를 기록하려고 했고,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한 곳에 정착하여 모여 살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농업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앞의 황소자리의 예와 비슷하게 돌기둥에 새겨진 동물들의 형상과 배치는 별자리와 관련이 깊으리라는 추측이 많다.

6.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

파일:클라우스 슈미트.jpg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 1953. 12. 11~2014. 07. 20)

이 유적의 발굴 시작부터 모든 것을 관리했던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의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는 2014년 7월 20일 수영을 하던 중 심장 마비로 만 60세 나이에 급사했다. 이후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의 튀르키예인 아내이자 튀르키예 고고학자인 치으뎀 쾩살 교수가 유적을 관리하고 있다.

파일:치으뎀 쾩살.jpg
치으뎀 쾩살(Çiğdem Köksal)

치으뎀 교수의 페이스북에 발굴 관련 상황과 더불어 남편인 클라우스 교수의 일화를 튀르키예어로 설명했다.

7. 기타

  • 1997년에 발견되어 2019년경부터 발굴이 시작된 인근의 카라한 테페(Karahan Tepe)의 경우, 괴베클리 테페보다도 더 이전의 유물들로 추정되는 것들이 하나하나씩 발견되고 있는 상황이다.#
  • 스톤헨지를 세운 사람들이 이 유적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일 수도 있다. 기원전 10000년 전 아나톨리아 반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흘러흘러 현재의 영국까지 넘어간 것으로 DNA 검사 결과 확인된 것인데, 괴베클리 테페와 직접 관련이 있지야 않지만 아나톨리아 출신이고, 비슷한 돌 유적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이 모였다.
  • 이 지역이 시리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시리아 국경에 접한 지역이라 발굴에 애로 사항이 생길 우려도 있었다. 2014년 8월 이스탄불 대학의 이희수 교수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난민 수용지 근처라 검문을 받았다고 한다.
  • 그래도 튀르키예에서는 세계적인 유적지가 될 전망을 안고 기대하고 있으며, 발굴 및 연구를 열심히 지원하고 있다. T 자 돌탑들도 2016년 중순에 개장될 우르파 고대 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중무장한 군대를 배치하여 학자들을 경호하고 있다. 이희수 교수는 이 돌탑들을 보고 싶어 했으나 박물관에 이동하여 개장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조금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해서 박물관에 갔지만, 당연히 개장하려면 한참 남았다면서 거절당했다. 그래도 튀르키예 내 인맥을 동원하고 외국인으로서 보고 싶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애원하여 마침내 부관장에게 특별히 개인 관람을 허락받았다. 정해진 시간이나마 직접 봤는데 겨우 10% 수준이 발굴되었음에도 상당수 유적이 출토되어, 일부만 봤는데도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고도 남을 것 같다는 소감을 적었다.
  • 2020년 기준으로 유적 위에 돔형 지붕을 설치해 놓고, 관광 안내소와 각종 편의 시설까지 설치해 적극적으로 관광객 유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홍보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영어 안내도 잘 갖추어 놓은 것과는 별개로, 관리 직원들에게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한때 코로나19로 인해 한 번에 5명밖에 관람을 하지 못했으나 2022년 기준으로는 규제가 완화되어, 티켓만 구매하면 인원 제한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파일:괴베클리 테페 터키1.jpg파일:괴베클리 테페 터키2.jpg

  • 2017년 9월 28일, 튀르키예 언론에 따르면 괴베클리 테페와 동시대의 유적이 티그리스강 근처의 하산케이프 지역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다음 뉴스 네이버 뉴스 놀랍게도 괴베클리 테페를 세울 무렵 수렵 및 채집 생활을 하던 수준의 사람들이 1000년 동안이나 거주하다가 떠나간 도시 유적이었다. 튀르키예 정부의 아나톨리아 지역 개발 계획에 의해 댐 예정지 조사를 진행하다가 발견된 곳이라 몇 년 뒤 해당 지역이 수몰될 예정인 것이 문제다.

7.1. 아르메니아의 반발

아르메니아는 괴베클리 테페가 원래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살고 있었던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구약 성경》의 <창세기>에서 방주를 만들었다고 기록된 노아의 5대손인 하이크(Hayk)를 민족의 시조로 보며, 대홍수 직후 처음 땅을 밟은 노아가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알려진 아라라트산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 또한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에는 그 유명한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깊은 역사를 가졌었는데 1915년부터 1918년에 걸친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튀르키예에게 여러 영토를 빼앗긴 채 아라라트산 바깥쪽의 작은 땅으로 내몰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의 긍지가 담긴 괴베클리 테페 유적지를 원래부터 자신들의 역사인 것마냥 광고하는 튀르키예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다. 반면 지금의 튀르키예인들의 정체성은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으로, 중세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자들의 후손이다. 민족적 자부심이 담긴 주장을 전부 논외로 하더라도, 이 지역의 원주민이 아르메니아인이라는 건《성경》에도 나올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고, 튀르키예인들이 이주민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튀르키예식 이름인 '괴베클리 테페' 대신 예전의 아르메니아식 이름인 '포르타사르'(Portasar)로 불러주길 희망하고 있다. 그래서 포르타사르라는 이름으로 구글에 검색하면 뜨는 사이트들도 죄다 아르메니아 관련 사이트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딱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며, 영어나 프랑스어 등 위키백과를 봐도 괴베클리 테페를 아르메니아어 명칭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다만 본문에 '아르메니아에서는 포르타사르라고 불린다.' 정도로만 언급할 뿐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논리 때문[7]이 아니라, 이 유적을 만든 이들이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증거 또한 없기 때문이다.

괴베클리 테페가 발굴된 지역은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자 문명권이었던 지역인데, 이 지역은 역사가 너무나 오래되고 문명 간 교류도 많이 오고갔던 지라 진짜 토착 민족이 누구인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찾기 힘든 곳이다. 현재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정착 시기는 12000년 전쯤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아르메니아인이 이 지역에 이주해 온 시기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기원전 4000년 전 즈음으로 추정되고, 다수 민족이 된 것은 이슬람 발흥 이후인 7세기 즈음부터다.[8] 그리고 설령 아르메니아 인들이 그 이전부터 여기 살았다고 하더라도, 12000년 전의 선조들을 민족으로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 정도 시간이면 혈통이 전부 뒤섞였거나 이 지역 근방 토착 민족 모두의 공통 조상이라고 보는 편이 맞지, 현재의 민족 분류를 대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지역으로 막 쳐들어왔던 서기 10세기 시절의 황인종 튀르크족을 괴베클리 테페를 지은 고대인들의 후손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원주민들에게 유전적으로 흡수되었다. 결국, 현대의 튀르키예인도 말이 좋아 튀르키예인이지, 사실상 간판만 튀르키예인인 이 지역 토착 원주민들의 직계후예이며, 때문에, 현대 튀르키예인의 일반적인 유전적 특성은 고대 이래 아나톨리아 반도에 살아온 원주민의 유전자 풀을 주류로 하여, 10세기 튀르크족을 비롯해 지금까지 이곳으로 들어온 다양한 외래인들의 유전자가 소소하게 양념처럼 섞여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민족의 유전적 특성은 국경에 따라 딱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라데이션으로 변화한다. 주변국가와의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현지에서 대대로 살아온 주민들은 선대에 인접국가의 주민들과 혼혈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인접국가의 주민과 공유하는 유전자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이다. 게다가 아나톨리아 반도와 주변 일대의 민족들은 애초부터 유전적 차이가 크지 않았던 터라, 현대 튀르키예인은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등과 유전적으로 거의 유사하다. 결국 괴베클리 테페는 튀르키예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8년부터 관광객들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8. 관련 문서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이후 독일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로 이직했다가 2014년 작고했다.[5] Dietrich, Oliver & Schmidt, Klaus. (2010). <A Radiocarbon Date from the Wall Plaster of Enclosure D of Göbekli Tepe.. Neo-Lithics.> 2/2010. 82-83.[6] 어디까지나 이 정도 대규모 유적으로 한정했을 경우다. 소규모 유적이나 사람의 손길이 덜 들어간 유적들 중에는 그보다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테오페트라 동굴(Theopetra Cave) 같은 것들이 있다.[7] 오히려, 아르메니아는 프랑스나 서구권에서 더 정치적으로 지지해오고 있다. 물론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땐 물질적으로 도울 수도 없었던 현실이다. 당시 전쟁때, 러시아나 조지아·이란을 통해서만 지원품을 보낼 수 있었는데 러시아와 이란은 미국이 경제제재를 했고, 조지아는 아제르바이잔 편을 들어서 아르메니아로 갈 지원품을 항구에서 막아버렸다고 한다.[8] 이 지역이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사이의 분쟁 지대가 된 이후, 기존 원주민인 셈 계열의 아람-아시리아인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이슬람의 위협을 피해 동로마 제국쪽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이 그 공백을 채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