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08 21:14:19

그레이트 짐바브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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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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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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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레이트 인클로저 구역의 모습[1]
아래: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전체 모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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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대 짐바브웨 유적
영어 Great Zimbabwe National Mon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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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빙고 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364
등재연도 1986년
등재기준 (ⅰ)[3], (ⅲ)[4], (ⅵ)[5] }}}

1. 개요2. 구조3. 역사
3.1. 재발견과 수난

1. 개요

짐바브웨 마스빙고 주에 위치한 석조 도시유적. 짐바브웨 왕국이 건립한 남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전근대시기 거대 건축물로 식민지화 이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최대 규모 건축물이다.

쇼나족의 언어로 짐바브웨라는 말은 '숭배받는 일가' 혹은 '석조 가옥'을 의미하는만큼 석조로 만들어진 가옥이나 성채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사실 짐바브웨 유적들은 현재의 짐바브웨뿐만 아니라 모잠비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까지 약 200여개가 존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짐바브웨 유적이 이 그레이트 짐바브웨인 것.

짐바브웨 유적들은 쇼나족의 도시들로 축조되었는데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번성한 쇼나족들은 농업, 목축업, 광산채굴업, 해외무역에 종사했으며 이를 통해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런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200여개의 도시를 건설할 정도의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해외무역은 쇼나족에게 큰 부를 안겨준 산업으로 오늘날의 모잠비크 해안에 위치한 스와힐리족의 항구들과 무역을 했다. 금, 상아, 구리를 수출하고 스와힐리족의 항구에서는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등에서 들여온 값비싼 비단, 도자기, 유리구슬 등을 수입했다.

짐바브웨 유적들에선 중국제 도자기의 파편, 페르시아제 유리 구슬의 파편 등이 발굴되었는데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광범위한 해상무역에 참여했다는 증거 중 하나다. 또한 중국에서도 구리 덩이쇠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발견된 거푸집의 문양과 일치해서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만들어진 구리 덩이쇠가 화폐로서 중국까지 흘러들어갔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2. 구조

파일:Western_Entrance_to_the_Great_Enclosure_-_Great_Zimbabwe_I.jpg 파일:Hill_Complex_-_Great_Zimbabwe_(2).jpg
그레이트 인클로저의 서문 언덕 구역의 성벽
돌로 축조된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무려 11m에 달하는 높이에 4m 두께의 탄탄한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고 내부에는 진흙으로 만든 원형의 주거지들이 위치해 있었다. 이 거대한 돌 성벽은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의 백미로 꼽히는데, 모르타르를 전혀 쓰지 않고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이어붙이는 식으로 지어져 아주 탄탄했다.

대체로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11세기부터 약 300년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크게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지어진 언덕 구역,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지어진 그레이트 인클로저,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지어진 계곡 구역 이렇게 3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모습은 그레이트 인클로저의 모습이다.[6] 가장 유명한 그레이트 인클로저 구역은 거대한 외벽과 내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외벽은 둘레 250m, 최대 높이 11m, 두께 4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외벽과 내벽 사이에는 높이 9m, 지름 5.5m 짜리 돌탑이 지어졌는데, 도굴꾼들이 보물이 묻혀있을거라 믿어의심치 않았던 탓에 가장 많이 훼손된 부분들 중 하나다.
파일:zimbabwebird.png 파일:짐바브웨 국장.svg
짐바브웨 새 조각상 짐바브웨 새의 모습이 그려진 국장
이 유적에서 발견된 '짐바브웨 새'라고 불리는 돌로 만든 조각상이 아주 유명하다. 유적의 언덕 구역에서 활석을 깎아만든 총 8개의 새 조각이 발견됐다. 쇼나족 전통에서 행운의 상징이자 신의 전령으로 여겨졌던 달마수리를 묘사한 것으로 크기는 약 40cm 정도다. 높이 90cm의 기둥 위에 올려놓고 신성하게 여겨졌으며 수많은 짐바브웨 유적들 중에서도 오직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만 발견되는 유물이다. 이 유적 자체가 짐바브웨 국가 전체와 거의 동일시 되다보니 이 새의 모습을 현재에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당장 로디지아 시절의 국기와 현재 짐바브웨의 국기, 국장에도 이 새가 그려져있다.
조각상들은 받침대와 마찬가지로 단단한 돌 블록을 깎아서 만들었으며 높이는 4피트 6인치 정도, 모두 각각 땅에 깊게 박혀있었다. 또한 지름 18인치인 맷돌 모양의 돌이 있어 테두리에 여러 인물들이 새겨져 있었다.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을(나머지는 모두 부리가 손상된 상태였다) 골라 파내기로 결정했다. 파내는 동안, 원주민들이 지나치게 흥분해 총과 투창을 들고선 우리를 둘러쌌다. 나는 그들이 우리를 공격해올 것이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작업을 계속했으며, 클라스에게 2개의 소총을 장전시켜놓고 우리를 가장 먼저 겨누는 놈을 쏴버리라고 했다.

1889년 짐바브웨 새 조각상을 뜯어간 윌리 포셀트의 기록.
1889년에는 영국인 보물 사냥꾼 윌리 포셀트가 원주민들이 보는 눈앞에서 강제로 새조각을 뜯어가버렸다. 포셀트는 세실 로즈에게 새 조각을 팔아버렸다. 세실 로즈는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이런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아랍이나 지중해 세계에서 건너왔다고 여겼으며 학자들조차 페니키아의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짐바브웨 독립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4개의 새 조각상을 되돌려줬지만 하나는 여전히 세실 로즈의 자택에 남아있다. 1907년 독일로 넘어간 새 조각상 받침대 역시 국제적 압박으로 인해 2003년 짐바브웨로 되돌아왔다.

3. 역사

파일:그레이트짐바브웨상상도.jpg
전성기 시절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상상도
인류의 발상지라는 아프리카답게 이미 10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지은 반투족들은 기원전 150년경부터 이 곳에 정착해 4세기부터 농업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반투족의 한 일파였던 쇼나족이 11세기부터 석조 건축물들을 짓기 시작했던 것이다. 쇼나족은 짐바브웨 왕국을 세워 11세기부터 약 300년간 번성했고, 이 짐바브웨 왕국의 수도가 바로 그레이트 짐바브웨였다.

짐바브웨 왕국의 전성기였던 14세기에는 1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살았고 도시의 면적도 730헥타르에 달해 중세 런던과 크기가 비슷했다. 물론 석조 건축물들이 있는 도시 중심부만 인구 밀도가 높고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교외 일대는 인구 밀도가 훨씬 낮았다는 것은 고려해야겠지만 식민지화 이전 남아프리카 일대에서는 유례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도시였다. 짐바브웨 왕국은 동쪽 스와힐리계 도시 국가들을 통해 상아인도양으로 수출하며 아라비아, 심지어 저멀리 중국과도 교역했다.[7] 짐바브웨 왕국의 교역 네트워크는 내륙으로도 뻗어있어서 북쪽으로는 콩고와 교류했다.

그러나 15세기부터 다양한 악재들이 겹치며 짐바브웨 왕국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왕국은 인구 급증과 토지와 자원 고갈, 환경 변화 등으로 점점 세력이 쇠퇴했다. 수도 그레이트 짐바브웨 지하의 대수층이 오염됐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15세기 초부터 세계 경제 침체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금의 수요가 감소했고 짐바브웨 왕국이 벌어들이는 수익도 줄어들었다. 왕실 내부에서도 분쟁이 일어나 왕실이 분가해 북쪽에 무타파 제국을 세우는 등 왕국은 날로 쇠락해갔다. 상인들도 그레이트 짐바브웨 대신 북쪽과 서쪽의 무타파 제국, 부투아 왕국 등과 다른 교역 루트를 뚫었다. 왕국은 어느 순간 몰락했고 수도 그레이트 짐바브웨도 17세기까지 사람이 거주했으나 이후에는 버려졌다.

쇼나족은 문자로 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대한 문자 기록은 유럽인들에게서 나타난다. 처음으로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안 유럽인은 포르투갈인으로 내륙에서 활동하던 무어인들에게서 쇼나족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1531년 소팔라[8]에 주둔하고 있던 포르투갈군 사령관인 빈센테 피가도는 본국에 "잠베지강과 림포포강 사이의 내륙 평원의 금광 근처에 요새가 있으며 22m가 넘는 큰 탑도 있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심바오에(Symbaoe)라 부르는데 왕궁이라는 뜻이다"라고 보고했다. 이외에도 포르투갈 탐험가 주앙 데 바로스도 1538년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현지인들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지을 수 없는 건물이라 악마의 작품이 틀림없다는 소문이 당시에도 아랍인 상인들 사이에서 자자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인들은 현지의 쇼나족이 이런 도시를 지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무어인(아랍인)들이 금광을 방어하려고 만든 요새가 버려진 걸로 단정했다. 사실 이 시기쯤 되면 쇼나족은 정치적 중심지를 옮긴지라 이런 판단을 했을법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포르투갈인들 뿐만 아니라 쇼나족과 교류하던 아랍인 상인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3.1. 재발견과 수난

파일:ZIMB0411a.jpg 파일:Stone_Passage.jpg
중앙 돌탑[9] 외벽과 내벽 사이 좁은 돌길
짐바브웨 왕국은 15세기 이후 정치적 중심지를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잠베지강쪽으로 옮기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종교적 중심지로서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이렇게 간신히 유지되던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1830년대 남아프리카의 줄루족이 팽창하면서 북쪽으로 밀리던 은데벨레족이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거주하던 이들을 쫓아내버리면서 완전한 폐허가 되고 만다.

폐허가 된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재발견된건 1867년으로 독일계 미국인인 아담 렌더가 사냥을 하러 이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 유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 조사는 1871년의 독일 고고학자 칼 마우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칼 마우크의 조사는 엄격한 과학적 조사가 아닌 자신의 망상을 반영한 수준이었다. 칼 마우크는 이렇게 웅장한 건축물을 열등한 흑인들이 세웠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건설한 자들이 솔로몬시바의 여왕과 관련이 있을것이라고 보았다. 마우크는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왕의 사절과 함께 자신의 왕국으로 귀국했고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시바여왕의 궁전의 복제품이라고까지 했다.

이후 이 지역에 백인 이주민들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레이트 짐바브웨도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백인 이주민들과 학자들은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이 지역 원주민인 흑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칼 마우크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해서 이 유적이 시바여왕의 궁전이라고 굳게 믿었다. 심지어 시바여왕의 궁전을 건설하면서 흑인들이 노예로 동원되었다는 주장까지 서슴치 않았다. 유적에 대한 과학적 발굴이나 조사보다는 이런 선입견과 편견으로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이해했다.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도 이러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일부 발굴을 진행한 고고학자들은 이 유적이 시바여왕의 궁전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흑인들이 건설자라는 생각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일부 발굴 결과와 포르투갈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아랍 상인들이 이 유적을 건설했다고 판단했다. 세실 로즈의 지원을 받아 짐바브웨 일대를 탐험한 시어도어 벤트는 페니키아 상인들이 이 도시를 건설했을 것이라 믿었다. 1905년에 데이비드 랜들매키버(David Randall-MacIver)라는 고고학자가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주변의 유사한 짐바브웨 유적들에서 발견된 토기 유물과 쇼나족의 토기가 유사하고 유적의 건축 양식에서 아랍인들의 영향이 전혀 보이지 않음을 근거로 하여 쇼나족이 유적의 건설자라고 주장했으며 일부 고고학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다른 백인들은 물론 고고학계에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대한 왜곡된 주장들은 로디지아의 건국과 국가 유지에 확고한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즉, 과거에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페니키아인, 아랍인, 시바여왕 등이 흑인들을 지배한 곳이라는 인식을 프로파간다로 활용하여 이주민이 원주민을 통치하는 것을 정당화하도록 시도한 것이다.
파일:Great_Zimbabwe_-_panoramio.jpg 파일:ASC_Leiden_-_Rietveld_Collection_-_East_Africa_1975_-_05_-_033_-_A_wall_of_the_ruins_of_Great_Zimbabwe_-_Masvingo,_Zimbabwe.jpg
그레이트 인클로저에서 바라본 언덕 구역 그레이트 인클로저의 외벽
한편,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솔로몬의 보물이나 아랍 상인의 금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믿은 이들이 유적을 마구 파헤쳐 금속품들을 가져갔으며 그 무게는 25kg에 달할 것으로 추측된다. 정교하게 쌓여진 탑들은 이과정에서 다수가 파괴되었으며 이 때문에 복원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5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등의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발견된 유물에 대한 조사결과 기존 가설들을 뒤집는 결과들이 나왔다. 유물들의 연대가 시바 여왕설, 페니키아 상인설 등의 시기보다 늦은 12세기에서 16세기의 것으로 나타났다. 로디지아 정부는 이런 조사결과를 부정하면서 탄압하려 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로디지아 정부나 국립박물관 디렉터들로부터 흑인 건축을 뒷받침할 만한 학술조사 결과 발표를 하지 말 것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학술적 결과들은 흑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싹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로디지아가 무너지고 흑인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국명을 세실 로즈의 이름에서 따온 로디지아에서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따온 "짐바브웨"로 바꾸게 되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겪은 이런 일련의 수난들 때문에 짐바브웨 (舊 로디지아) 내에서는 "외국인은 국적과 학력을 막론하고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정서가 형성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짐바브웨가 쇄국 정책을 시행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짐바브웨에는 그레이트 짐바브웨 외에도 연구할 유적이 산재하지만 쇄국 정책으로 인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1]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은 크게 언덕 구역, 계곡 구역, 그레이트 인클로저 구역 이렇게 3개로 나뉘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두터운 외벽으로 유명한 그레이트 인클로저다.[2] 사진 아래쪽 바위언덕에 있는 것이 언덕 구역, 맨 오른쪽 위가 그레이트 인클로저 구역, 언덕 구역과 그레이트 인클로저 구역 사이에 있는 돌담 같은 폐허 무더기가 계곡 구역이다.[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4]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5]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6] 이렇게 광범위한 건축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뤄진 것에 대해 학자들은 군주가 바뀌면 새 군주가 이전 군주의 거주지를 놔두고 새로운 거주지를 건설해서가 아닌가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7] 유적지에서 중국의 도자기 파편, 아라비아의 동전과 유리 구슬 등이 발견됐다.[8] 모잠비크 해안가 소팔라 강둑에 위치한 도시.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들 중 하나이자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진출한 항구들 중 하나기도 하다.[9] 도굴꾼들에게 약탈당해서 높이가 7m 가량이나 낮아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