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30 22:40:34

솔로몬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명이인이나 솔로몬의 이름을 따온 것들에 대한 내용은 솔로몬(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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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히브리어 : 슐로모(שלמה, /ʃlomo/)
그리스어 : 솔로몬(Σολομών)
라틴어 : 살로몬(Salomon)[1]
출신 이스라엘 유다 지파 소속
생몰년도 B.C ~931년
출생지 이스라엘 예루살렘
재위년도 B.C 970년 ~ B.C 931년
약 41년
사망지 이스라엘 예루살렘
왕릉 이스라엘 다윗성
어머니 밧세바
아버지 다윗
가족관계 아들 : 르호보암
이전왕 다윗
다음왕 북이스라엘 : 여로보암 1세
남유다 : 르호보암

1. 개요2. 왕이 되다3. 솔로몬의 지혜4. 성군이자 명군으로서의 모습5. 그러나...6. 평가7. 대중 문화에서8. 기타

1. 개요

아직까지 성전, 지혜 등으로 성경 내에서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으며, 그 자체가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마저 지혜나 심판의 상징적인 인물이다.[2] 그의 치세 아래 이스라엘은 최대의 번영을 구가했으나 실책도 적지 않아 쇠퇴와 분열의 징조가 보였다는 점에서 후세의 건륭제[3]아우랑제브, 루이 14세에 비유할 만하다.

'지혜의 왕'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성경에 등장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의미의 예디드야(여디디야)(ידידיה, Jedidiah).

구약성경 중 시편의 시 중 상당수, 잠언 구절 중 상당수를 집필했고 코헬렛(전도서), 아가의 작자로 알려졌다.[4] 부왕이 지으려고 했으나 짓지 못한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수많은 잠언과 시를 남겼다고 하는데, 엄청나게 많은 시편을 남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도 시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시편 중에서 솔로몬 왕이 썼다고 명확하게 나와있는 구절은 별로 없다.

2. 왕이 되다

그 유명한 다윗 왕의 아들. 어머니는 장군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 출생시 네토라레 요소가 있다. 시바 여왕 및 다른 여인들과도 염문을 뿌린 것으로 봐서 집안내력인 듯(…).

본래 그가 다음 왕의 자리를 이을 가능성은 희박했는데, 비록 다윗의 총애를 받는 밧세바의 소생이었지만 왕위 계승 서열은 낮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다윗의 아들 중 계승 서열이 가장 높았던 이는 넷째였던 아도니야였으며(첫째 아들이었던 암논은 셋째 압살롬의 칼에 살해당했고[5], 둘째인 길르앗은 요절했으며, 압살롬은 무리하게 왕위 계승을 시도하다가 요압의 창에 살해당했다), 그의 뒤에는 이스라엘의 군대 사령관 요압과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지원하고 있었다(즉 군부와 교단의 거물들이 뒤를 봐주고 있었다는 얘기다). 특히 요압은 다윗의 전성기를 이끈 불세출의 명장이자, 부왕의 정치기반이라 할 수 있는 유다 지파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어 다윗조차 그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던 희대의 권신이었다.[6] 솔로몬을 지지하던 제사장 사독과 근위대장 브나야가 있었지만, 아도니야 쪽의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비록 사울 왕에게 일족이 학살당하기는 했어도 판관 시절부터 쭉 이어져 오고 있던 엘리 계열의 지체높은 명문 제사장 가문이었던 것에 반해, 솔로몬 쪽의 사독은 아비아달만큼 그 가문의 입지가 빵빵하지 못했고, 브나야 역시 군부의 수장인 요압과 정면으로 대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밧세바와 선지자 나탄이 다윗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다윗은 전에 밧세바와 한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사독과 브나야를 불러들인 뒤 아도니야 일파가 손을 쓸 틈도 주지 않고 직접 왕위를 넘겨줘버렸다. 이로 인해 아도니야 일파는 한 순간에 역적으로 몰려서 공중분해되었다. 역사적으로 왕에게 사랑받는 아내가 기존의 후계자를 몰아내고 자기 아들을 세우려 한 경우는 많았는데, 그 시도가 성공한 예 중 하나. 만일 솔로몬이 암군이었다면 다윗은 '애처의 꾐에 홀려 띨띨한(…) 후계자를 정해 나라를 망쳤다'라는 평을 들었겠지만 솔로몬이 명군이라서 다윗의 선견지명이 발휘된 것으로 남게 되었다. 허나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국 최대 전성기를 이룩하긴 하지만 동시에 쇠퇴의 원인도 제공하기도 했다.

3. 솔로몬의 지혜

솔로몬이 정확히 어느 시대 사람인지, 어느 지역의 왕인지 모르지만 그와 관련된 일화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굉장히 많다.
한 명의 아이를 가지고 다투는 두 여인 앞에서 아이를 반으로 나누자고 함으로써 진짜 어머니를 찾아 낸 이야기나 악마에게 '다리를 건설해 주면 가장 먼저 건너는 것의 영혼을 네가 가져가게 해 주겠다'며 다리를 만들게 해 놓고는 염소를 가장 먼저 건너게 하고 "내가 언제 인간의 영혼이랬나? 난 그런 말한 적 없다."라고 발뺌하는 등, 악마마저도 지혜로 속여서 삥 뜯었다는 일화[7][8]가 유명. 솔로몬의 72 악마, 솔로몬의 반지 등은 오컬트 계에서 상당히 이름 높다. 그가 썼다는 '솔로몬의 열쇠'는 중세 마법의 교본이며 큰 열쇠와 작은 열쇠로 나뉘는데, 작은 열쇠는 흑마법 계열로 통한다. 삼각형 2개가 겹쳐진 육망성은 '솔로몬의 봉인'이다.

이슬람교코란에도 등장하며, 특히 사람과 진(마신), 모든 동물들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능력과 반지가 유명하다.[9] 아랍어로는 술라이만(سليمان). 마찬가지로 이슬람권인 터키어로는 쉴레이만(Süleyman)이다. 버튼이 번역한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진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는 정말 한 번도 안 빠지고 이 이름이 나온다. 특히 이슬람교의 경우, 선지자 이전의 예언자 중 하나이며, 하느님께 인정받은 왕으로서, 부친 다윗과 둘 카르나인(Dhul Qarnayn)과 함께 항상, 가장 훌륭한 세 명군 중 하나로 존경받는다.[10] 덧붙여, 이슬람교에서는 후술할 솔로몬의 타락이나 우상 숭배 같은 것은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사망 시의 묘사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서서 잠들었으며, 하느님이 그가 짚은 지팡이를 서서히 약하게 하여 천천히 잠들듯 뉘였다고 한다. 여러모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상적인 왕" 유형의 인물로 묘사된 듯. 또 성경에서는 그냥 단역에 지나지 않는 시바의 여왕과 관련된 많은 전승이 아랍에 내려오고 있다.

또한, 같은 그리스도교권에 뿌리를 둔 바하이 교에서도 예언자로서 대우받으며, 동방 정교회의 경우 "올바른 예언자이자 왕"으로서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그 외로, 기독교권 성경 인물 중 지혜와 번영, 그리고 성전 헌당으로 가장 유명한 "왕"인 만큼, 후대의 (다분히 세속적이던) 중세 교황이나 왕들의 모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펠리페 2세는 솔로몬을 모방하여 그의 성전을 따라 스페인에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을 만들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하기아 소피아의 헌당식에서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를 이겼노라"고 했다고. 또한,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경당의 도안(치수) 또한 솔로몬 신전의 치수를 본떴으며, 내부 프레스코에서는 르네상스식으로 해석한 성전이 그려져 있다. 그 유명한 샤를마뉴 또한 앨퀸의 기록에 따르면, 스스로를 다윗이자 솔로몬으로 여기고, 또 그러한 찬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지배층의 인식 이외로도, 14세기의 주교 Jacobus de Teramo가 법률을 설명하기 위해 집필한 책 <Liber Belial>에서는 모세가 변호하는 예수와 악마 벨리알의 재판의 판관으로 놓여지는 등, 중세 서양에서는 아버지 다윗과 함께 존경(혹은 좋은 이미지)이 대단했던 모양.

그의 지혜는 야훼에게서 받았다고 한다. 성경을 디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윗 말기에 그의 아들로서 왕위를 받게 된 솔로몬은 일천번제라는 걸 하느님께 드렸다고. 이는 1,000마리를 번제라는 형식의 제사로 드린 것을 말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크고 아름다워 경악할 지경인데, 문제는 번제라는 게 그냥 태우기만 해서는 안되고, 를 도살하는 방법부터 나누는 방법에까지 꽤나 품이 들어가는 제사라는 점.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게 잡은 제물이 제사 율례에 따라 제사장과 그 휘하 성직자들(레위 지파)에게 나뉘어졌음을 생각하면, 성직자들로서는 고된 일이 아니라 좋은 선물이었을지도. 속된 말로 그냥 소고기 뷔페 애초에 레위 지파라는 거대한 지파는 성직자 계층으로 묶여 있어 재산도 없고 사회 활동이 제한된 상황이었기에, 1,000마리를 처리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딸린 식솔도 많았고, 일단 제사장에게 주고 나면 제사장이 그것을 일반 백성들에게 나눠줘서 같이 먹는 것도 가능하니, 1,000마리 분량의 쇠고기 처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솔로몬이 좋은 왕이 되길 바라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은 건지, 솔로몬이 를 1,000마리나 태운 정성이 갸륵해서인지,[11] 하느님이 솔로몬의 제사에 답하여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의 바람에 만족했고, 지혜롭다고 칭찬하며 그에게 더한 지혜와 그가 바라지 않은 것도 내렸고, 솔로몬 이후로 그와 같은 지혜를 가진 자는 없을 것이라고 복을 내렸고, 덤으로 부귀영화도 같이 줬다.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는 성경의 구절을 볼 때 하느님과 만났던 것은 꿈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솔로몬이 하느님께 부탁드린 지혜는 히브리어 원문으로 본다면 "듣는 마음", 즉,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라고 한다.

4. 성군이자 명군으로서의 모습

솔로몬의 통치하에 통일 이스라엘은 최대 번영기를 구가하였는데, 예루살렘에서는 하도 이 많아 마치 돌 같이 여기며 귀하게 보지도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공으로 받는 금만 해도 매해 666 달란트(39,960 파운드 = 약 18,000 kg)였다고(...). 또한 시대마저 잘 만났는지, 당대 중동의 맹주 위치에 있던 이집트 제 21왕조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며 솔로몬 통치하의 이스라엘은 보다 더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2]

성전 건축을 할 당시에는 페니키아(레바논에 있던 고대 국가)의 중심이었던 티레에서 히람 왕이 보낸 기술자가 와서 도왔는데, 목재로 쓸 엄청난 양의 백향목[13]들을 벌목하여 여러 개의 뗏목으로 엮어 공수했다고 한다. 티레는 히람 시절 때 번영했는데, 솔로몬은 그와 결혼동맹을 맺고 서로 같이 무역을 하기도 하는 등 경제적 교류가 활발했다고 한다.

또한 성경의 묘사에 따르면 성전 이외에도 호화로운 궁을 건축하였으며, 전성기 이스라엘의 넓은 강역을 여러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고 총독을 보내어 통치했다고 한다.[14] 또한 홍해로 통하는 에시온게벨 등 여러 곳에 항구를 지어 무역을 활성화했으며,[15] 동시에 국방에도 신경을 써 전략적 위치에 있는 므깃도 등지에 병거를 정비하고 성을 세워 일종의 요새 도시, 혹은 성새 도시로 만들었다.[16]

5. 그러나...

허나 이런 영광과 풍요를 구가했던 그도, 늙으면서 몸은 삭아갔고, 나이 먹으면서 처첩들로 만족하면서 그의 노년기 이후로 조금씩 지혜도 쇠락해간다. 결국 젊은 들이 그에게 강한 힘을 행사[17], 그가 젊을 때 강성했던 나라는 노년기부터 조금씩 쇠락해간다.

하느님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은 솔로몬이 말년에 왜 그렇게 타락하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되었는지에 대해, 성경에서는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나온다. 여자 때문이라고. 너무나 많은 이교도 여자들을 첩으로 두게 되어서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길로부터 멀어졌다고 한다.[18] 물론 이를 편협한 성관념에 의거하여 '남자는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유대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의 정체성은 세상과 다름을 추구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타 문화의 이방 신들, 즉 세상과 동화되는 길을 택하였고 그 결과 유대의 왕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무너뜨려 몰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솔로몬의 이러한 행적은 훗날 예언서 화자들에 의해 죄를 지은 자로서 부각되고 만다.

그래도 결국 말년에 잠언과 전도서 등을 쓰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다. 야훼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너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질 것인데, 너희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서라도 지금 당장은 아니고 네가 죽고 난 후 너의 아들이 왕위에 즉위할 때 갈라질 것' 이라고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 후술한다. 이건 하느님이 다윗 생전에 다윗에게 자손들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사고는 많이 쳤어도 하느님만을 섬겼기 때문. 그리고 결국 그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르호보암 즉위 직후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진다. [19]

신명기 17:16-17에도 왕이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고(백성을 애굽의 길로 인도할 것),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마음이 미혹됨), 은금(스스로를 위함)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열왕기상엔 은을 돌같이 할 정도로 과도한 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병거가 1,400대, 마병이 12,000명에 왕후가 칠백, 후궁이 삼백이라할 정도로 많이 두었다. 신명기에서 왕이 된 자가 하지 말아야 할 모든 계명을 어긴 셈이다. 이후 이교도 여성의 문물로 인한 우상숭배로 인해 계명을 어긴 댓가로 나라를 빼앗아 신하에게 줄 것이 예언된다. 다만 아비인 다윗빨로 솔로몬 대엔 하지 않고 그 아들대에 나라를 빼앗길 것이라 한다.솔로몬은 아빠 잘 만나서 그냥 넘어간거다. 아니었으면 나라 뺏기고 내란조장했다고 두고두고 까였을 것. 르호보암은 아빠 때문에 나라 뺏기고...

결국 솔로몬은 말년에 전도서를 쓰면서, 일생 동안 엄청난 지혜와 많은 부로 온갖 것을 다 해보고도 모든 것이 헛되더라라는 명언을 남기며 그러니 너는 젊었을 때 네 하느님을 찾으라는 말을 남긴다. 다만 이 전도서의 경우에는 후대의 인물이 솔로몬의 이름을 빌려서 썼다는 추측이 있는지라...

그리고 이스라엘의 분열과 몰락의 징조는 그의 치세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셰숑크 1세[20]가 제22왕조를 열면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며, 그의 사후 왕위를 이은 르호보암은 폭군으로 묘사된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집트에서 귀국한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백성들이 "솔로몬 부왕께선 너무 가혹하셨는데 르호보암 왕께서 저희 세금과 노역 좀 줄여 주세요 징징"라고 한 걸 보면 솔로몬은 의외로 백성들을 꽤 쥐어짰던 듯(...).[21] 물론 르호보암은 "내 새끼손가락은 울 아버지 허리보다 굵고, 울 아버지가 너희를 채찍으로 다스렸으니 난 전갈로 너희를 다스리겠다"며 깔끔하게 씹어버렸고(…)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이에 반발하여 독자적인 나라를 세워 버린다.[22] 이후의 이스라엘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남(南) 유다 왕국과 에브라임 지파를 필두로 한 10지파의 북(北)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되었으며,[23] 각각 바빌로니아아시리아에 정복당하기 전까지[24] 한번도 다시 통일되지 못하였다.

6. 평가

여러모로 초심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사람이 만든 결과를 한줄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아버지 다윗이 물려준 탄탄한 국가를 사치와 향락으로 망쳐버린 원흉. 즉 솔로몬 시대의 번영은 "속빈 강정"이였던 셈이다.[25] 그는 분명히 명군의 자질이 있었고 즉위 이후에도 하느님께 받은 지혜로 나라를 성실히 이끌어갔다. 그의 통치기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절정기였으며 은이 바닥에 굴러다닐 정도로 부강했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도 위상이 높아져서 이집트 21왕조와 결혼동맹을 맺고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입지를 굳혀나갔다. 또한 국방과 행정에도 신경을 써서 군사력을 보강하고 지방에 총독을 파견하는 등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전제 왕권을 구축해나갔다.[26] 문제는 그가 이렇게 만든 결과물을 가지고 축첩질을 일삼으며 놀아재꼈다는 것.

사실 그의 치세는 겉으로는 부강해 보였으나 속은 썩어가는 기아의 성세, 속빈 강정이였다. 앞서 언급된 신명기 17:16-17은 너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두개의 나라로 갈라질 것이나 다만 너의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서 네가 아닌 너의 아들 대에 갈라지리라고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 시대의 번영은 솔로몬이 단독으로 만든 결과가 아니라 아버지 다윗이 하느님과 함께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인 것.[27] 즉 다윗 대에 다져진 것을 바탕으로 솔로몬 대에 전성기를 누린 것이 맞다. 물론 솔로몬이 못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고 명군의 자질은 분명히 드러났으나 아버지 다윗에 비하면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더욱히 그가 막대한 조공을 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축첩질에 골몰하면서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선민[28]으로서의 본질을 스스로 버리게 되었고 예전의 보여왔던 지혜와 명군으로서의 자질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그의 만행을 보다 못한 하느님은 그를 꾸짖으며 이스라엘의 멸망과 분열을 계시하셨으며 결국 그 말대로 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된다. 물론 그도 사태를 파악할 총기 정도는 남았는지 말년에 전도서를 쓰면서 회개하긴 했지만 그가 자행했던 엄청난 트롤링은 결국 이스라엘이 다시 분열되는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여러모로 중국의 당현종과 유사한 인물. 선대에 만들어진 기반을 바탕으로 절정을 누렸으나 초심을 잃고 말년에 주색잡기와 가렴주구를 일삼아 결과적으로 나라를 쇠망하게 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다만 당나라는 반란을 진압하고 내정을 어느 정도 복구해서 삐걱대는 상태로나마 왕조가 유지되었지만 이스라엘은 당나라 만큼 탄탄하진 못했는지 솔로몬 사후 남북으로 갈라져 치고받고 싸우다가 결국 이민족들에 의해 멸망했다.

이외에도 루이 14세, 아우랑제브, 건륭제 등이 비슷한 사례로 꼽히며 이들의 공통점은 당연하게도 과시욕에 찌들어 내정을 악화시켰다는 점. 여하간 초심의 중요성을 증명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인물 군상들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솔로몬의 타락에 대한 열왕기의 기록의 비판적 평가에 대해서는 견해 차가 있을 수 있다. 왕실 역사가들의 사관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역대기와는 달리 열왕기에는 선지자들의 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사관은 아무래도 왕실 역사가들에 비해서는 왕국에 대해 비판적일 것이다. 가령 역시 선지자들의 사관이 반영되었을 사무엘서에서는 왕정 자체가 신정이 아니기에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솔로몬의 정책들에 대해서도 열왕기는 비판적인 관점을 우선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솔로몬이 궁궐을 건축하고 사치와 호화를 누렸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왕실이 정당한 부와 영광을 누리고 드러내는 것을 공연히 문제삼는다고 항변할 수 있다.

외국 여인들을 첩실로 삼았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이는 외교의 일환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왕족과 귀족의 여인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가장 확실한 동맹의 방법이자 효율적인 외교 전략이다. 순혈주의적인 선지자 전통의 관점에서는 문제이겠지만,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불가피한 외교적 선택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왕 다윗도 암몬 왕의 딸이나 헷 사람의 아내 등 외국의 여인들과 결혼하였음은 마찬가지인데, 솔로몬만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부당하다.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을 위해 신전을 건축했다고 비판을 받지만, 솔로몬이 신앙을 버렸다기 보다는 타 종교의 의식을 관용하는 정책을 채택한 것이 배타주의적 선지자들에게 그렇게 인식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배타주의적인 선지자들의 입장에서는 솔로몬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관용하는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장려하는 것'과 진배 없고, 나아가 그 스스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도 진배 없다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상인들의 교류의 중심지인 수도의 국가를 통치하는 왕으로서는 타 종교에 대해 관용하고 존중하는 정책을 채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람 장군 나아만이 여호와 신을 섬기면서도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왕이 우상에 절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그 옆에서 부축하는 일을 선지자 엘리사가 허용했던 취지를 고려하여 솔로몬의 행적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7. 대중 문화에서

8. 기타

또한, 아버지 다윗과 달리, 성경 이외의 기록으로 생존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시기에 번영했을 광산(부)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 왕이 있다는 것은 타 기록이나 연구에도 존재하나, 그의 이름이 "솔로몬"(혹은 여디디야)란 건 남아있지 않다고. 원래 팔레스타인 자체가 기록이 적은 편이고 특히 솔로몬 시대의 기록은 발견된 양이 적어 연구가 쉽지 않다. 솔로몬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적어도 간접적인 증거는 존재하므로 학계에선 솔로몬의 부와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Shalom과 같은 어원을 두는, '평화'라는 의미라고 한다. 예루살렘의 '살렘' 또한 같은 어원이다.[2] 예를 들면, 솔로몬의 심판이란 표현은 굉장히 흔하게 쓰이며 명판결이란 의미로 이해될 것이다. 솔로몬의 선택이라는 방송 프로그램과 아이의 생모를 밝히는 송사는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3] 다만 건륭제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건륭제가 전성기를 이끌었다기 보단, 전성기를 누렸다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청나라는 이 당시의 이스라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탄탄했던데다가 후대의 가경제, 도광제가 건륭제 때의 폐단을 어느정도 뜯어고쳐서 이스라엘처럼 와장창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번영과 쇠락을 동시에 이끌었다는 점에서는 당현종과 비슷하다. 특히 개원지치 이후의 당나라 역시 지방세력의 봉기와 이민족들의 난입으로 분열되었던 것도 유사하다.[4] 다만 코헬렛과 아가는 어휘의 특성상 훨씬 후대의 누군가가 솔로몬의 이름을 빌려서 지었다는 게 정설이다.[5] 권력다툼의 요소가 아예 없다고 할 순 없겠으나 애초에 암논이 살해당할 만한 짓을 했다. 압살롬 문서 참조.[6]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된 후, 다윗은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함부로 압살롬을 죽인 요압을 군대 사령관 직에서 쫓아내고 반란군의 사령관이었던 아마사를 대신 기용했지만, 요압은 오히려 아마사를 살해하고 자신의 지위를 되찾았다. 요압 문서 참조.[7] '악마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다리는 사실 고대 로마인들이 만든 것이었으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중세시대가 되면서 그 사실을 잊어버린 중세 서유럽인들이 "이렇게 대단한 다리를 인간이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악마가 만든 게 틀림없어!"라면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The Devil's Bridge라고 검색해 보면 아름다운 다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8] 이후 사바트 같은 데 나오는 하급 악마들은 주로 염소 모습으로 나타난다.[9] 천일야화 등에 등장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진"과도 연관이 있다. 그를 그 램프(혹은 호리병)에 가둔 것이 솔로몬 왕. 이를 포함한 수많은 전설에서, 묘하게도 소원을 들어주거나, 조언을 주는 역할로 묘사된다.[10]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Solomon 문서.[11] 제사 규례에 따르면 재산 형편에 따라 적절한 축생으로 드릴 수 있었다. 를 도저히 못 드리겠으면 으로, 양조차 안되면 비둘기로 드리라고 되어 있다. 비둘기마저 안 되면 곡물로 드릴 수도 있다고.[12] 일례로, 이집트 왕조로선 비교적 드물게도 파라오의 딸이 솔로몬에게 시집온 것과 그 외 중동의 여러 중소규모 왕국과 세력에서 그에게 딸을 바쳐, 소위 말하는 300의 아내와 700의 처첩을 가지게 된 것을 들 수 있을 듯. 당시 이집트 왕조는 근친혼으로 유명한 왕조였고, 때문에 다른 나라에 왕족을 보내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는데도 이게 가능했다는 것이 놀랍다.[13] 지금도 레바논은 백향목 명산지다.[14] 성경의 묘사에는 전성기의 이스라엘 강역이 시나이 반도부터 요르단강 동편, 페니키아, 그리고 키프로스 섬과 시리아까지 미쳤는데 먼 유브라데 강 유역까지라 나와있으나, 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 성경에서 솔로몬 시대 이스라엘의 최대 영토 확장의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은 선왕 다윗인데, 이 당시에 유브라데 강 유역의 딥사, 가나안 남쪽 부근의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펼쳐졌던 이스라엘 바깥쪽의 세력도는 완전한 정복이 아니라 조공을 받는 것을 조건으로 화친을 맺은 이스라엘의 제후국의 개념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15] 지중해-근동을 넘어 인도와도 교역을 했다는 말도 있다.[16] 참고로 이 므깃도(Meggido)라는 도시는 그 유명한 아마겟돈이라는 말의 원형이라고 한다. 정확히는 하르마겟돈.[17] 성경에서는 들이 섬기던 이방 우상들을 솔로몬이 섬기기 시작했다고 나온다[18] 이를 우상 숭배가 아니라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인 일종의 다문화 현상으로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19]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북쪽 왕국이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였다.[20] 개역개정판 성경 기준으로 '시삭'.[21] 건축사업에는 이방인들이 동원되어 사역을 하였는데 문제는 워낙 넘쳐나는 금과 은으로 성경학자들 사이에선 마치 아즈텍의 금과 은으로 엄청난 인플레를 맞이한 스페인과 같이 이스라엘도 심각한 인플레를 맞이한건 아닐까 추측한다. 단, 저 징징댐에 대해서는 다윗 대까지 세력이 강했던 각 지파의 수장들이 그간 솔로몬의 강력한 왕권에 억눌려 있다가 반발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 또한 상당하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세력을 유지하려는 귀족(혹은 지방 호족)들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냥 심플하게 말년의 솔로몬을 두고 가혹했다고 지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22] 사실 솔로몬 때 이미 분열징조가 있었지만 부친인 다윗이 여호와한테 너무 잘해서 솔로몬 당시엔 나라 안쪼개고 그 아들 대에 쪼갰다고 기록되어있다.[23] 르호보암계의 남유다가 왕의 혈통만큼은 잘 이어나갔던 데 반해, 여로보암이 세운 북이스라엘은 왕통이 몇 번이나 바뀌는 등 바람 잘 날 없었다(…). 금송아지가 툭하면 나오면서 성전 부정했던 것만 봐도 무시무시한 그분께 얼마나 까였을지 보인다. 심지어 레위 지파 사람들마저 버려서(일반인 제사장 설립. 율법에 제사장은 레위 지파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자기를 인정해 주는 유다로 갈 수밖에[24] 시기상으로는 아시리아의 북이스라엘 정복이 먼저다.[25] 이는 먼 훗날 전세계 최강의 절대군주로 평가받던 건륭제에 대한 평가와 놀랍도록 일치한다. 건륭제 역시 측근비리를 눈감아주고 자신 역시 생일에 금불상 3만개를 선물받는 등 재산 모으기에 골몰하며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폐단들은 고스란히 후대에 커다란 재앙이 된다.[26] 성경만 봐서는 이해가 안될 수 있지만 역사책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군사력 보강과 지방관 파견은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해가 안된다면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제일 먼저 한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자.[27] 한 국가가 결정한 정책이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비슷하게 청나라는 강희제 때부터 다져온 기반을 바탕으로 건륭제 때 절정을 누렸으며 프랑스의 절대 군주 루이 14세 역시 할아버지 때 부터 닦아온 기반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리고 위의 두 사람은 본인들의 물욕과 과시욕으로 나라를 말아먹는데 일조했다.[28] 선택된 백성, 즉 하느님의 택하심으로 선택받은 성도라는 의미. 이스라엘은 이전부터 선민이라는 것으로 세상과 자신들을 구분지으며 세상과는 다른 존재임을 의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