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개국공신에 대한 내용은 권신(고려) 문서 참고하십시오.
[clearfix]
1. 개요
권신(權臣)이란 전근대 시기 왕조 체제하에서 권력를 휘두르던 신하를 가리킨다.단순히 권력이 많거나 직책이 높은 신하들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의도되거나 설계된 바 그 이상으로 신권이 왕권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큰 경우나, 독자적인 권력 기반이나 군주의 총애를 믿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면서 통제하기 어려웠던 신하를 가리킨다. 가령 조선의 의정부 정승들은 모두 국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법제상 권력이 보장된 자리였으므로 '권신'으로 지칭하지는 않는다. 또 단지 직책만 높고 실권은 적은 경우도 많았다.
\'권신'은 권력자의 속성에서도 특히 복합적인 인성 부적격(특히 불충)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몇몇은 하극상의 예일 수도 있다. 반대로 복합적인 인성 적격(특히 충성)을 강조하는 용어로는 \'중신(重臣)'이 있다. 쉽게 말해 똑같이 권력을 장악해도 좋은 놈이면 중신이고, 나쁜 놈이면 권신이었다는 것이다.[1] 예를 들면 제갈량은 사실상 황제 대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촉한의 국정을 장악했지만 전근대에는 제갈량을 '중신'이라고 했지, '권신'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제갈량의 충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고, 같은 관료 조직이나 피지배자 사이에서의 평가도 우수했으니까. 그 밖에 춘추시대 초기의 관이오와 전국시대 말기의 악의 등이 있다.
제갈량의 사례에서 보듯 이러한 평가는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아, 조선 시대의 경우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으로 김종서를 비롯한 당시 정치 지도부를 숙청하면서 그들이 권신이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는 김종서에게서 '권신'이라는 오명이 지워지기도 했다. 특히 붕당정치 시대에는 각 붕당의 리더에 대한 평가 때 권신이냐 중신이냐를 놓고 붕당끼리 팽팽히 대립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대간에게 권신으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많았다. 붕당은 대간을 중심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신 안동 김씨의 김조순은 이러한 과정에서 평가가 나뉘게 된 케이스로, 본인도 권력을 어느 정도 절제하기는 했지만 붕당의 시대가 끝나고 세도정치 시기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대간에서 '중신'으로 칭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도정치의 발단을 만든 장본인으로서 사실상 권신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권신들은 그 특성상 크든, 작든 군주의 권력과 권위를 침범하게 되어 있어서 숙청됐을 때 보통 역적의 타이틀을 뒤집어썼다. 반면 역으로 권신의 권세가 강해지다 못해 대세가 완전히 권신에게 흘렀을 때는 찬탈이 일어났다. 왕조 국가라면 일단 기본적으로 신하가 '군주'를 진심으로 섬기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데다가, 권신들의 경우 절대 다수가 군주의 권력을 침해하고, 이에 따른 부작용이 생기기가 매우 쉬워서였다.
군주제의 특성상 외척 출신이 권신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군주의 의도적인 외척 견제로 권좌에서 밀려나는 예외도 많았다.
그 밖에는 개국공신이나 그 후손들이 권신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개국 초기에는 세습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하여 대숙청을 일으키는 경우가 빈번했다. 전한의 태조 고황제 유방의 이성왕 숙청이 유명하며, 그 밖에도 월나라의 구천,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행한 숙청도 유명하다. 처음에는 군주와 협력하다가도 장기적으로 권신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미리미리 싹을 잘라두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왕조 국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일어나며, 싹을 제대로 자르지 못했거나, 자칫 싹을 자르는 사람이 권력을 장악해버리면 부패가 시작되기에 상당히 많은 국가가 이런 부패 청산 및 권력 정리 과정에서 권력을 잘못 이양하여 생긴 독재국가로 시작하는 케이스가 많다.
권신이라도 해도 사실 군주의 손바닥 위였던 경우도 많다. 특히 군주가 한국사에 유래없는 절대권력을 지녔던 조선시대의 권신들이 이런 경우가 많았는데, 권신에게 권력을 쥐어주고, 욕받이를 실컷 시키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숙청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2] 이것이 조선시대의 권신이 유독 많은 이유이다.
오늘날에는 사람에 따라 용어의 의미를 폭넓게 해석하여 김종서, 흥선대원군, 제갈량같이 군주가 어려 선대 군주의 유탁을 받은 고명대신이거나, 군주를 대신해 섭정을 맡는 경우에도 권신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사극에서는 그야말로 최종 보스의 위엄. 보통은 이미지상 악역으로 더 많이 나온다.
2. 역사 속 권신들
- 권신이면서 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반면교사일 경우에는 강조 표시.
- 권신인지 아닌지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는 기울임체 표시.
- 그리고 권력이 너무 막강해서 군주가 바지사장에 불과했던 경우는 밑줄 표시.[3]
2.1. 한국사
2.1.1.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 진정 - 근초고왕 대의 인물이다. 외척 출신으로 347년 조정좌평에 임명되었다. 성품이 사납고 까다로우며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에게 평가가 나빴다고 한다.
- 진고도 - 근구수왕의 장인이다. 376년 내신좌평에 임명되면서 군주로부터 정사를 위임받았다.
- 해구 - 백제 시대에는 해구란 이름을 가진 인물이 시대별로 세 명이나 있었는데, 이 해구는 바로 백제 문주왕 ~ 삼근왕 시기의 권신 해구이다. 문주왕을 시해하고, 어린 삼근왕 치세에서도 군주를 대신해 전횡을 일삼다가 반란을 일으켰고 토벌되었다.
- 비담 - 선덕여왕한테 반란을 꾀하기는 했지만, 워낙에 기록이 없어서 간신인지는 불명. 여왕 측에 선 근왕파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패배해 몰락한다.
- 연개소문과 아들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 아버지는 평가가 갈리나, 아들들은 권력 다툼으로 고구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다. 다만 이러한 투쟁의 속사정이나 그들 개개인의 내막은 꽤나 복잡한 편이다. 자세한 것은 각 인물 항목 참조. 특히 연개소문은 최충헌과 더불어 한국사에서 군주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신하로 유명하다.[4] 대놓고 군주를 시해한 권신이며 이 당시 보장왕은 사실상 그냥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 위해 온 김춘추가 보장왕이 아니라 연개소문과 만났다는 사실은 이 당시 권력 상황이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적국인 당나라에서도 연개소문에 대해 언급하지, 보장왕에 대해선 별다른 말이 없다.(...) 그래도 보장왕은 연개소문이 동탁이나 조조와는 달리 보장왕을 잘 대해줬기에 헌제와 같은 대접은 안 받아서 그나마 다행일지도..?
- 김유신 - 장군으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지만 당시 중앙 정치 쪽에서는 최고 실력가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7촌이며 태종 무열왕의 7촌 겸 처남이자 문무왕의 외숙이었으니. 김유신이 가진 최고 직위인 태대각간은 17관등 중 최고 관등인 각간 위로 대각간, 그리고 거기서 다시 한 번 위로 태대각간으로 최고 관등으로부터 무려 2관등이나 올린 파격적인 직위였다. 또한 이 직위는 김유신과 사후 추증된 김인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오르지 못했다. 사후에는 아예 신라의 군주로 추존되었으며 현재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은 왕릉의 형상을 하고 있다. 당시 김유신의 정치적 입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다만 신라 군주들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동시대 고구려의 권신 연개소문과는 달리 김유신은 권력을 가져도 본분에 충실해 왕권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군주의 오른팔로써 권력을 받았고 그 권력을 충실히 군주를 위해 사용한 경우.
- 김흠돌 - 신라 문무왕 ~ 신문왕 때의 권신. 통일전쟁 때 김유신 휘하에서 공을 세웠고 딸을 신문왕에게 시집보내 외척으로써 막대한 권력을 가졌다. 그러나 신문왕 대에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고 처형되었다. 김흠돌의 모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반발하여 모반을 꾀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 다른 설로는 김흠돌의 반대 세력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모반 사건을 조작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 김양 - 신무왕 옹립에 공을 세웠고 문성왕 때는 군주의 장인, 즉 국구가 되어 실세로 군림했다. 죽을 때도 김유신의 예법에 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태종 무열왕의 능 근처에 묻혔다.
- 장보고 - 김양보다 신무왕 옹립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데다 왕실과의 혼사부터 온 지배층의 견제를 받았을 정도로 장보고의 권력의 크기 자체만 보면 모범적인 권신이 맞다.[5] 결과적으로 통수맞고도 반란까지 안갔고 빌미야 문성왕 측이 제공한게 맞지만.
- 김위홍 - 조카인 진성여왕과의 관계로 당시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진성여왕이 남편이 없었고 당시 신라에서 근친혼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편, 즉 국서로 봐야 한다는 의견 또한 있다.
- 종간, 은부 - 태봉의 권신
- 능환 - 후백제의 권신
2.1.2. 고려
- 왕규 - 왕규의 난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오늘날에는 정말 권신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문서 참조.
- 왕식렴 - 정종 당시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경 천도를 주도하다 실패하여 국정에 혼란을 야기했다는 것이 권신으로 지목되는 이유이다.
- 김치양 - 고려 전기의 최강의 권신이다. 천추태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무려 300평이 넘는 대저택을 짓는 것도 모자라 자기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 권신이자 간신이다.
- 강조 -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즉위시켰다. 다만 권세를 잡은 기간은 짧다. 후에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한 요 성종에 맞서 싸우다 통주 전투에서 대패해 끝내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죽음 직전의 순간에 요의 회유에도 끝내 넘어가지 않았다. 현종은 강조가 죽고 나서야 제대로 군주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 이자연 - 딸 셋을 문종에게 시집보내 3명의 군주(순종, 선종, 숙종)의 외조부가 된 초유의 인물. 고려 중기의 최대의 문벌귀족인 경원 이씨의 세도를 쌓아올린 인물이다.
- 이자의 - 이자연의 손자다. 헌종때 자신의 누이동생인 선종의 후궁 원신궁주의 아들이자 헌종의 이복동생이 되는 한산후 왕윤을 군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계림공에 의해 제압당하고 살해당했다.
- 이자겸 - 이자연의 손자다. 예종에게 한 명, 인종에게 두 명의 딸을 시집보냈다. 그래서 인종은 이모 두 명과 혼인한 셈.[6]
- 척준경 - 이자겸과 한패였을 때는 물론이고 이자겸을 축출한 뒤엔 더더욱 권세가 커졌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직접적으로 그가 '권력을 휘둘렀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후대에 의해 과장됐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등을 비롯한 무신정권 역대 집권자들 - 여기서 유일하게 간신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경대승이다. 최충헌은 한국사 최고(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최악의 권신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신정권 당시 고려의 군주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고 모든 권력자들이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최충헌은 연개소문과 더불어 한국사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신하로 유명하다.
- 기철 - 누이인 기황후의 위세를 등에 업고 온갖 패악질을 부린 원간섭기 시대의 간신. 결국 병신정변때 공민왕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 신돈 - 초기에는 개혁에 앞장섰으나, 후기에는 타락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창왕과 우왕을 내리 폐위시키며 폐가입진이란 논리를 내세웠기 때문에 신돈의 이미지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높은 편.
-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 권문세족의 핵심으로 우왕 치세의 간신들. 무진피화때 의기투합한 최영과 이성계 일파에게 숙청당했다.
- 최영
- 이성계 - 고려말 군부의 실세로서 이후 신진사대부와 결합하여 위화도 회군 이후 다른 군부의 실세였던 최영을 제거하고 왕 셋을 폐위, 살해하며 조선을 건국한다.
2.1.3. 조선[7]
- 정도전 - 태조의 신뢰를 받아 권력을 가진 경우로 간신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1차 왕자의 난으로 숙청된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역신으로 규정당해야 했지만.
- 이거이 - 정종 ~ 태종대의 권신. 개국 공신 출신에 많은 사병을 거느렸으며 큰 아들인 이저는 태조의 사위에 군권을 쥐고 있고, 작은 아들인 이백강은 태종의 사위였다. 권력이 이처럼 막강했으나, 태종의 사병 혁파에 반대하고 불온한 말을 [8] 지껄였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숙청당했다. 그래도 이거이는 본보기였던 덕분인지, 이 때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것으로 끝냈고 나중에 다시 복직했다. 이거이 다음으로 숙청당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민무구, 민무질, 민무회, 민무휼에 비하면 상당히 온건한 처우였던 셈.
- 이숙번 - 하륜과 함께 태종의 양팔이었지만, 처세에 조심하지 않았고 자제력도 결여되어 있어 권세를 마구 휘둘렀다. 물론 이를 태종이 그대로 놔둘리 만무해 결국 숙청당했다. 세종대에 《태종실록》 편찬을 위해 잠시 서울로 올라와 과거의 일을 회고한 후, 유배에서 풀려나 겨우 경기도에서 살 수 있게 되었으나 관직은 받지 못했다. 충성심 만큼은 의심받지 않았지만, 단점이 많고 전횡이 심해 숙청된 경우라 할 수 있다.
- 김종서 - 단종 시기의 국정을 모조리 장악했는데 이는 수양대군 일파[9]에게 그를 축출할 명분을 만들어 주었지만, 기록을 보면 특별히 전횡을 저지른 기록은 없다. 최영과 마찬가지로 자기 절제에 충실한 케이스. 쿠데타로 숙청된 것도 똑같다.
- 한명회 - 조선 전기 전형적인 보스형 권신. 두 딸을 각각 예종, 성종에게 시집보냈으나 모두 단명했다. 비리와 축재가 많았기에 간신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그래도 국정은 잘 이끌었고, 북방 개척에서도 활약했으며 일처리 능력도 매우 유능했다. 다만 실제로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파의 존재감이 조선 중기의 혼란에 영향을 끼친 감은 있다.
-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중종반정 공신 - 공신 버프로 이들의 전횡이 대단히 심각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헌데 이들은 정작 모두 중종이 즉위한지 10년이 채 되기 전에 젊은 나이에 시름시름앓다 죽고 만다. 특히 박원종은 영의정이 된지 불과 몇달만에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겨우 44세였다.
- 이행, 이항, 심정 - 남곤과 함께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를 몰아내는데 앞장섰으며, 남곤 사후 권력을 행사했다. 이후, 김안로와 적대했다가 모두 실각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홍경주, 김극핍 등도 이 그룹에 포함되기도 하나, 홍경주는 너무 일찍 죽어 권세를 누리지 못했다. 이행은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고 심정과 이항 또한 능력은 뛰어났으나, 조광조 일파와의 갈등이 심해 기묘사화에 가담했고 이후 완전하게 권신으로 타락했다.
- 조광조 - 권력을 준 중종이 부담을 느낄 정도로 강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결국 자신에게 권력을 준 중종에게 숙청당했다.
- 김안로 - 조선 초기 최강의 권신이며 간신. 경빈 박씨 일파, 이행, 심정, 이항 일파 등의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제거하고 중종의 아들 복성군의 사사까지 주도한 공포 정치의 상징이었다. 그의 지나치게 잔혹한 정치는 후대에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중종이 총애하던 경빈과 서장자인 복성군을 죽인 것 때문에 중종의 눈 밖에 나서 제거당했다.
- 윤원형 - 김안로와 함께 조선 전기 최강의 권신이자 간신. 덕분에 덩달아 문정왕후가 함께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 윤원형과 함께 경원대군을 명종으로 옹립한 소윤의 실세들. 허나 정순붕은 노환으로, 최보한은 병으로 죽고, 임백령은 급사하여 권력을 제대로 누려보진 못했다. 그러나 이기 만큼은 77세까지 장수하며 윤원형에 맞먹는 세도를 구축했다. 이기는 이행의 형으로서 문무를 겸비했으나, 무예는 형인 이권에 못 미치고, 문장은 동생인 이행을 따라갈 수가 없어 자조한 일도 있다.
- 이량 -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사의 권신. 윤원형에 맞먹는 세도를 구축했으며 한때는 윤원형을 뛰어넘는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명종의 외척으로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각종 요직에 두루 앉히면서 밀어주었으나 윤원형을 견제하라는 일은 안하고 다른 외척인 심씨를 모함하고 전횡이나 일삼다가 명종의 눈밖에 나서 전격적으로 숙청되었다.
- 정철 - 정여립의 난 당시 위관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으나, '건저의 사건'으로 실각했다. 선조는 한 마리의 독수리와 같다고 정철을 칭찬했으나, 정철을 실각시킨 뒤에는 정철을 비난했다. 원칙에 충실하고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그와 동시에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이어서 동인 전체가 그를 증오했다.[10]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작품으로 선조에게 아첨과 아부를 하는 작품들이 있어 간신으로 보기도 하지만, 왕조 시대에는 국왕에게 그런 시를 바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또한 위관으로서 동인들을 가혹하게 다루긴 했지만, 정철이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 것은 선조 본인이었다. 심지어 정철을 소인으로 비난하던 최영경 같은 경우, 정철은 방면을 주장했지만, 선조가 국문을 밀어붙여 죽었다. 유자광처럼 국왕의 도구로 쓰이다 숙청당했다고 볼 수 있다.
- 류희분, 박승종 - 류영경이 숙청된 직후 이이첨이 부상하기 전까지 소북 정권을 운영하면서 권세를 누렸다. 특히 류희분은 광해군의 처남으로 외척이라 탁소북 출신인 박승종도 그와 손잡아 무사할 수 있었다. 봉산옥사 이후 이이첨과 함께 '삼창'이라 불렸으며 폐모에는 반대했으나 후금과의 외교 문제로 둘은 엇갈린다. 이이첨은 오랑캐 사신의 목을 치자고 강하게 주장했고 류희분은 거기에 좋다고 응했는데 박승종이 "류희분의 분 자는 똥 분이냐?" 비웃으면서 이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틀어진다. 인조반정 이후 류희분은 아우 류희발과 함께 목이 잘렸고 박승종은 아들과 함께 자결했다.
- 이이첨 - 왕권 침해와 권력 남용면에서 간신이기도 하다. 다만 정치적 파트너였던 정인홍의 영향 때문인지 의외로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 김류 - 반정의 4대장 중 이서와 신경진은 무인이라 천대받고 이귀는 난폭하다는 이유로 인조의 미움을 산 와중에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잘 나갔으나, 정원군의 추숭에 반대하고 강빈 사사에 반대하면서 인조의 눈 밖에 났다.
- 이귀 - 반정의 4대장 중에 한 명인데, 좌찬성,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이귀는 난폭하다는 이유로 인조의 신임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귀의 아들들인 이시백과 이시방 형제가 청빈하고 명망이 높아 인조와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 김자점 - 인조반정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고, 인조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누렸다. 그러다가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에는 도원수로서 청군의 침공에 맞섰으나, 남한산성의 함락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유배를 갔다. 돌아온 뒤에는 재기에 성공해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인조 후기에는 영의정까지 되었다. 인조가 승하한 후, 효종이 즉위하자 그는 대간과 산림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이 때문에 귀양을 갔다가 귀인 조씨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 김우명 - 명성왕후의 부친이자 숙종의 외척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고 송시열을 견제하기 위해 허적과도 연합을 했다.
- 송시열 - 조선 후기 최강의 권신. 세도정치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의 권세의 크기를 따라갈 사람은 없었다. 명성면에서는 세도정치 시기의 권신들조차 감히 따라가지 못할 지경. 조선 후기에 사관 없이 군주와 독대를 한 몇 안 되는 신하다.
- 허적 - 현종, 숙종조의 재상으로 적절한 과단성, 신중한 처신과 일처리로 현종과 숙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탁남의 영수이자 오랫동안 영의정을 지냈으며 강력한 외척인 김우명, 김석주 등과 연계했고 자신과 적대적인 김만기, 김만중 형제에게도 손을 내밀었으나 거절당했다.[11] 허나 말년에 자신의 서자인 허견을 관리하지 못하다가 허견이 복선군 등과 역모를 꾀하는 바람에 함께 사형당했다. 야사에서는 숙종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유악을 쓴 것 때문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록》에는 관련 내용이 없으며 그가 처형될 때 읊어주는 죄목에도 없었다.
- 김석주 - 인조, 효종조의 명재상 김육의 손자이자 효종, 현종조에 군주의 신임을 받은 김좌명의 아들이며, 숙종의 외가쪽 친척으로[12] 2차 예송논쟁에서 송시열과 서인을 실각시켰다가, 권력을 잡은 남인을 치기 위해 다시 서인과 손잡는 등의 행보로 권력을 유지하였다. 게다가 병권도 쥐고 있었다. 그는 숙종 10년에 51세를 일기로 요절했는데, 숙종의 역사상 행적을 볼 때 더 오래 살았으면 험한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기사환국으로 공신호를 추탈당했다가 나중에 복구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재상 중 하나인 김육. 참고로 초상화에 묘사된 생김새가 굉장히 독특하다.
- 민암 - 숙종 치세, 남인의 2차 집권기 당시의 최고 실세로 남인의 영수였다. 남인 재집권 이후 예조판서, 병조판서, 대제학을 거치다가 우의정에 올랐다.[13] 숙종이 장희빈에게 서서히 질려가면서 숙빈 최씨를 총애하는 것을 보고 한중혁, 함이완 등의 모의를 고변하여 남인 정권을 탄탄히 하려다가 숙종의 주특기인 환국에 휘말려서 죽고 만다.
-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 숙종 말엽에서 경종 초의 노론 영수들로 '노론 4대신'이라 불렸다. 실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으며 숙종과 야합하여 경종을 폐세자하려고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섣불리 경종 길들이기에 나섰다가 삼수의 옥 사건으로 모조리 죽음을 맞는다. 이중 김창집과 이이명의 권세가 가장 강력했으며 김창집의 아버지는 위에 상술한 숙종, 현종 조의 재상이자 송시열의 애제자인 김수항인데 김수항 역시 환국으로 사사된다. 이이명도 위에 상술한 김만중의 사위에다가 대사헌 이민적의 아들이다.
- 최석항, 류봉휘, 조태구, 이광좌, 조태억 - 숙종 말엽에서 경종 초의 소론 영수들로 조태억을 제외하거나 포함하여 '소론 4대신' 또는 '소론 5대신'이라고 불렸다. 노론 4대신이 숙청된 이후에 권세가 가장 강력했지만, 영조 즉위 이후 권세가 조금씩 떨어졌다. 그래도 이광좌와 조태억은 영조 때에도 영의정이나 좌의정까지 지냈지만, 사후 '나주 괘서 사건'으로 소론 5대신 모두 관작이 추탈되었다. 순종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1#2
- 홍인한, 정후겸 - 영조 말년을 지배한 실세, 겁도 없이 정조를 어떻게 해보려다가 정조의 교묘한 대응에 박살났으며 정조 즉위 후에 모두 사사된다.
- 홍국영 - 정조의 신임을 얻어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일찍 숙청당했다. 그를 세도정치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 김조순, 김좌근, 김유근, 김문근, 김수근, 김흥근, 김홍근 - (신)안동 김씨 일파. 김조순이 배경이 되고 김좌근, 김홍근, 김유근 등을 비롯한 그 후손들이 전면에 서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 조만영, 조인영, 조득영, 조병구, 조병현 - 풍양 조씨 일파. 신정왕후의 외척으로 외손자 헌종이 즉위하면서 (신)안동김씨와 경쟁했고, 막강한 권력을 행세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수준을 넘어서진 못했고 철종 조에 이들이 대거 죽으면서 풍양 조씨 권세는 사실상 끝난다.
- 흥선대원군 - 섭정이고 고종의 생부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아들 고종의 신하였다. 이는 '대원군의 가마 논쟁'에서 드러난 것인데 본래 조선의 예법에 종친들은 여덣 명이 드는 '팔인여'를 타고 정승급 대신들은 4명의 가마꾼이 드는 교자를 타는 것이 예법인데 안동 김씨 일파는 대원군에게 종친의 예를 적용하려 했으나 대원군은 끝내 대신들처럼 교자를 타고 다녔고 조대비 역시 대원군에게 교자를 타도록 했다. 본래 종친은 정치 참여를 하지 못하는 게 원칙이므로 안동 김씨가 대원군에게 오히려 더 사치스런 팔인여를 타게 하려고 했던 것. 하지만 고종이 20세가 넘어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조정을 장악하려고 한 것은 얄짤없는 권신의 모습이다. 단적으로 고종이 15세가 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완전히 뒤로 물러난 것이나, 최익현이 고종이 20세가 되었으니 친정을 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을 처벌하려고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 실권에서 밀려난 대원군은 고종을 밀어내고 다른 아들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죽을때까지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지 몇개월 뒤에 생을 마감했다. 그래도 황제의 친할아버지라고 순종때 대원왕 작위를 받았다. 심지어 "한미교류를 20년 가량 늦추게 만든 늙은이"라는 맹비난마저 없지만은 않다.
- 민승호, 민규호, 민태호, 민겸호, 민영규, 민영소, 민영준, 민응식, 민영익, 민형식 - 여흥 민씨 일파. 고종의 외척으로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의 주도세력으로 꼽힌다. 그리고 특히 민승호, 민겸호, 민영준 등은 탐관오리로 나라를 망쳤다. 그나마 괜찮은 인물은 급진개화파였다가 온건개화파로 전향한 덕분에 악당취급당한 민영익과 함께 민씨일족의 신진으로 유명하였던 민영환 정도다.
- 김홍집 - 갑오개혁을 총지휘한 인물이자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다. 당대 인사 중 업무능력이 탁월해서 여러 세력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관파천으로 인해 완전히 역적으로 몰려서 죽음을 맞이했다.
- 이완용 -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본격적으로 흑화하며 폭주 했다. 을사조약에서 처음으로 찬성하였고 이후엔 통감부 설치되자 일제는 이완용을 대한제국 총리로 올렸다. 그렇게 총리가 된 이완용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는데, 대표적으로 고종황제가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일으키자 이완용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 시키고 순종을 옹립 시켰다. 이 때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완용이 고종황제를 겁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이완용이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지르며,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라고 적혀 있다.이후 정미칠적,경술국적 모두 들어가면서 매국의 중심에 섰다.
2.2. 일본사
- 모노노베노 모리야
- 아스카 시대의 소가[14] 가문 - 천황가와 혼약을 맺어 정계에 진출한 소가 가문의 수장들. 소가노 우마코는 기존의 토착 호족 가문인 모노노베 일가를 척살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사위인 쇼토쿠 태자를 내세워 개혁을 주도했다. 다만 정권을 장악했지만 권세를 휘두르지 않고 막후 정치를 행사하여 국정을 어지럽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들인 에미시와 손자 이루카는 관직을 독식하고 덴노 일족을 위협하는 등 패악질을 부리는 바람에 나카노오에 황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에 의해 척살당했다. 그리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소가 일족을 척살한 공로로 후지와라 성씨를 하사받았는데, 사실상 후지와라 일가의 중시조였다.
- 헤이안시대 후지와라가의 권력자들 - 천황가와의 혼사로 대를 이어가며 셋쇼와 간파쿠 직을 독식했다. 이들의 정치를 '섭관정치'라고 부를 정도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11세기 초반의 권력자이자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의 모델이라는 설도 있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였다.
- 타이라노 키요모리
- 호조 도키마사를 비롯한 호조씨 가문의 싯켄들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역대 막부[15] 쇼군들[16][17]
2.3. 중국사
2.3.1. 하상주
2.3.2. 춘추전국시대
2.3.3. 한나라
- 소하
- 곽광
- 왕망[18] - 외척으로 제위를 찬탈해 전한을 종식시켰다.
- 두헌
- 양기
- 염현
- 조등
- 하진
- 십상시
- 동탁 - 실질적으로 후한을 무너뜨린 장본인으로, 그의 폭정 끝에 후한 조정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지방 군벌이 발호하여, 중국은 분열기에 접어들었다. 이를 어느 정도 정리한 사람들이 조조, 유비, 손권으로 이들은 삼국시대를 열었다.
- 왕윤
- 이각
- 곽사
- 원소
- 조조, 조비 - 조조는 군벌로 출발했지만, 이각•곽사의 난에서 헌제를 보호하며 실권을 쥐어 《삼국지연의》를 대표하는 권신이 되었다. 조위를 세운 문제 조비는 그의 아들이었다. 조조는 십상시의 난 이후의 대혼란을 정리하면서 후한 조정의 실권을 쥐었고, 그 아들인 조비는 헌제로부터 제위를 넘겨받아 조위를 세웠다.
2.3.4. 삼국시대
- 조상 - 조위의 황족으로 실권을 장악했지만, 정치력 및 판단력의 부족으로 사마의에 의해 권력과 목숨을 모두 잃고 말았다.
-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 - 사마의는 위군을 이끌고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한 공으로 위나라 군부의 실세가 되었다. 이후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권신 조상을 제거하고 스스로 권신이 되었다. 그의 장남 사마사와 차남 사마소, 사마소의 장남인 사마염 또한 조위의 황제들인 조방과 조모, 조환을 바지사장으로 만들고 권세를 누리다가 사마염이 조위를 무너뜨리고 서진을 세웠다.
- 동윤을 제외한 촉한의 사상 - 권신이었지만 자신들의 권력을 올바른 곳에 쓴 충신이기도 하다.
- 진지
- 강유
- 오질
- 유방
- 손자
- 여일
- 제갈각
- 손준
- 손침
- 복양흥
- 장포
2.3.5. 서진, 동진
2.3.6. 남북조시대
- 고조
- 이주영
- 고환
- 우문태
- 고징
- 후경
- 왕승변
- 우문호 - 사실상 북주 전반기의 권신이다. 우문태가 죽은 이후로는 우문호가 사실상의 실세였고, 그의 권위는 우문옹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2.3.7. 수, 당
2.3.8. 요
- 술률노속(述律魯速) - 거란과 요나라의 재상으로 태조 야율아보기의 처남이자 황후 술률평(述律平)의 오빠였다. 술률평이 섭정할 때는 대승상, 대장군이라는 고위직에 오르며 요나라의 군권을 손에 넣었고,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술률노속의 병사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도 있었다. 거기에 직설적인 성격때문에 당시 "하은(河恩)의 말은 거짓을 내놓지 않는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세종이 태후 술률평을 유폐한 뒤에도 술률노속 휘하 병사들의 기세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20] 목종에 이르기까지 70세가 넘는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떠나면서 생전에 모든 것을 누린 권신이 되었다.
2.3.9. 송
2.3.10. 원
2.3.11. 명
2.3.12. 청
-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 구왈기야 오보이
- 허서리 송고투
- 니오후루 허션(뉴호록 화신)
- 증국번 -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청나라의 군부를 지배하던 증국번은 주변 한족 출신 부하들로부터 제위에 오르라는 요청을 여러번 받았으나 이를 한사코 물리치며, 청나라의 신하로 일생을 마쳤다.
- 이홍장 - 증국번의 제자로, 청나라의 군권을 쥐었으나, 본인의 권력 확대에 사용하지 않고 청나라를 중흥시키는데 노력했다. 다만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실패했다.
- 위안스카이(원세개) - 청나라의 북양대신으로서, 서양식으로 훈련받고 서양제 무장을 한 청나라의 정예 부대인 북양군 100,000명을 지휘하여 청나라의 마지막 보루였으나, 대총통에 오르게 해주겠다는 중화민국의 유혹에 넘어가 제정을 폐기하는데 앞장섰다.
2.4. 기타 지역
2.4.1. 고대
- 요압(이스라엘) - 다윗의 조카이자 군사령관. 다윗의 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지휘하고, 압살롬과 세바의 반란을 진압한 당대의 명장이었다. 그러나 골수 유다 민족주의의 성향을 지녔기에 다윗과 종종 대립각을 세웠으며, 실제로 다윗의 정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유다 지파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보다못한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 때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요압의 직위를 해제시키고 다른 사람을 군사령관으로 삼았으나 요압은 그를 죽여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되찾아버렸다. 이때문에 다윗은 생전에 요압을 제거하지 못했고, 아들인 솔로몬이 즉위하고 나서야 간신히 그를 제거할 수 있었다.
- 포티우스, 아칠라스(이집트)
- 암네리스(이집트)
- 세네카(고대 로마) - 스토아파 철학자로 수많은 명언을 제공한 고대 라틴어 교본의 대명사이기도 하지만, 사실 오늘날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일대에서는 악랄한 수탈을 자행한 악인으로 유명한, 로마 제국 초기의 네로 시대를 대표하는 권신이자 탐관오리다. 젊은 시절부터 세네카는 유능함과 별개로 음모를 꾸미며 상대를 비방하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권력욕과 명예욕이 상당해서 갓 원로원 의원이 되었을 때인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1세의 치세때부터 개인적인 야심을 이용해 정치적 계략을 꾸미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 이를 자랑하듯 뽐냈다. 당연히 이런 세네카의 행동은 권력 강화를 통해 애매모호한 황제의 지위를 확실히 하려고 한 칼리굴라 황제의 신임을 잃도록 만들었다. 그러던 중 세네카는 황제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되었고, 이때 증거가 확실해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 판결 직전까지 갔다. 여기에 더해 그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불법 고리대 사업, 황실 내부의 암투에 가담한 일 등에 이름을 올리면서도, 무척 뻔뻔해 머리 끝까지 열받은 칼리굴라 황제가 아예 죽여버리려고 했다. 이때 세네카는 천식으로 몸이 너무 마른 것을 이용해, 자신의 깡마른 몸을 보여주며 황제에게 "심한 천식으로 오래 살지 못하니 관용을 베풀어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간곡히 읍소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렇지만 칼리굴라 황제 암살 후 제위에 오른 황숙 클라우디우스 1세 역시 세네카를 전적으로 신임하지 않았고, 자신의 전임자이자 조카인 칼리굴라처럼 세네카를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두 황제에게 일찌감치 "떡잎부터 노란 간신" 내지 "로마와 카이사르 가문 모두에게 큰 위협이 될 독약같은 자" 등으로 찍혔는데, 세네카는 그럼에도 늘 뻔뻔했고 이후에도 각종 계략으로 인해 황제와 황실 모두에게 견제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 황실 암투 개입과 간통 범죄에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다. 오랫동안 유배되어 잊혀지는 듯 했는데, 네로를 제위에 올리고 싶어한 소 아그리피나의 도움을 받아 겨우 로마로 복귀했다. 이후 세네카는 소 아그리피나의 의중에 따라 네로의 스승이 되었고, 소 아그리피나파와 함께 급사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유언장을 깡그리 무시한채, 궁중 쿠데타를 통하여 네로를 황제로 옹립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세네카는 네로의 치세 10여 년 동안 권신으로 있으면서, 네로 이전의 두 황제가 생전에 우려했던 것처럼 원로원과 팔라티누스 황궁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 시기, 친구인 부루스를 통해 군권까지 통제한 탓에 악행은 많이 가려졌지만,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 영국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부디카 여왕의 반 로마 봉기의 원인을 제공했다. 세네카는 가장 가난하기로 유명한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인신매매, 고리대, 노예무역, 공금 횡령 등으로 로마의 1년 예산 정도를 개인 재산(그것도 원금만!!)으로 불렸다. 함께 활동한 권신 부루스가 병으로 죽고, 티겔리누스가 후임 근위대장이 된 이후 네로와 티겔리누스가 자신을 뒷조사하기 시작하자 큰 두려움을 느끼고 은퇴한 뒤 몸을 사렸다. 하지만 워낙 구린 구석이 많은데다가 권모술수의 대가로 유명해, 서기 65년 피소 음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찌감치 용의선상에 올랐다. 피소 음모사건 당시, 세네카의 조카였던 루카누스가 연루되었는데 이때 고문을 못견딘 루카누스가 큰아버지의 이름을 내뱉으면서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이때 네로는 자신의 옛 스승이었던 세네카에게 스스로 정맥을 끊고 자살하는 형벌를 내려 고통스럽게 죽도록 했다.
- 페렌니스(고대 로마) - 폭군 콤모두스의 치세를 대표하는 두 명의 권신들 중 한 명이다. 당대의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였던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국정 통치 능력은 뛰어났지만 권신답게 권력을 쥐고 있었던 3년 내내 콤모두스의 호화롭고 방탕한 생활을 도왔고, 황제가 막장 짓을 하는 것을 방치했다고 한다. 따라서 제국 각지에서 다양한 인종 및 계층의 미녀 300명과 미소년 300명을 황궁으로 보내 콤모두스의 화려한 주연과 성교 파티를 만들어줬고, 이때부터 로마 제국에서는 공공연하게 원로원 의석과 고위관직이 매관매직되기 시작했다. 서기 185년 황제 또는 그에게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주둔 병사 대표 1,500명이 콤모두스에게 페렌니스 문제를 거론한 것이 계기가 되면서 콤모두스의 명령에 따라 아들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 클레안데르(고대 로마) - 폭군 콤모두스 시대를 대표하는 두 명의 권신들 중 한 명이다. 서기 185년에 일어난 페렌니스의 몰락 이후, 근위대장에 오른 뒤 190년까지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튀르키예의 프리지아 태생 노예로 황실에 운좋게 들어온 뒤 침실 시종을 거쳐 근위대장까지 올랐다. 따라서 그 재능과 눈치는 가히 최고였는데, 페렌니스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비양심적이었다. 클헤안데르는 페렌니스처럼 콤모두스의 방탕한 생활을 도왔고, 로마 역사상 최초로 '명예로운 경력'의 관직들까지 돈을 매겨 판매한 뒤 콤모두스에게 이를 상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190년에 일어난 곡물 파동 당시, 로마 민중들의 시위가 폭동으로 확산되고, 분노한 인파가 황제가 머무는 퀸틸리 빌라까지 확산되자 콤모두스의 명령에 따라 처형된 뒤 머리가 성난 군중들에게 보내졌다.
-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고대 로마)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외사촌이자 오른팔로 근위대장을 지내는 동안 권신으로 악명을 떨쳤다. 권세와 황제의 친척 및 측근이라는 점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쌓았고, 권력을 남용해 할 수 있는 잔인한 폭력과 불법행동을 모두 행사했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법상 불법으로 규정된 남자 노예를 거세시켰다는 낭설이 거리에서 나돌았을 정도로 악명이 대단했다. 서기 202년경 공동황제 겸 제위계승자였던 카라칼라의 장인이 되었지만, 사위와의 사이는 최악이었고, 황후 율리아 돔나까지 견제해 황후의 시종들을 불법으로 납치 또는 고문하는 일을 벌였다. 하지만 세베루스 황제는 그를 묵인했다. 반면 카라칼라는 장인과 아내를 모두 죽이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결국 205년 1월 22일 황태자 카라칼라가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 소속 백인대장 3명과 황궁 경비대 대원들을 포섭해 직접 궁중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플라우티우스 일가를 도륙했다.
- 티메시테우스(고대 로마) - 고르디아누스 3세의 장인이자 권신이다. 레반트 출신의 그리스계 로마인으로 행정 관료를 지내며, 세베루스 왕조의 율리아 마이사 및 율리아 마마이아의 금고지기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시해된 이후, 문맹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쪽에 붙어 그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리스 및 소아시아의 폰투스 일대에서 수탈을 하고 추가 세금까지 징수하는 일을 담당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의 즉위 이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몰락하자 계급이 강등당하고 함께 몰락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권토중래를 노렸다. 인맥과 갈리아 내 유력자들의 도움으로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이자, 고르디아누스 2세의 여동생이었던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주도한 것으로 추측되는,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 처형 이후 로마로 복귀했다. 이후, 고르디아누스 3세의 근위대장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고, 소년 황제의 보호자를 거쳐 황제의 장인이 되어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다. 근위대장 취임 이후, 상당히 훌륭한 섭정이었음에도 벌인 행적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권신으로 행동했다. 티메시테우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후, 같은 속주 태생의 율리우스 프리스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 등과 내각을 꾸려 완벽하게 권력을 장악했다. 그 다음 아퀼레이아 공성전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도륙날 뻔한 국가를 구한 장군과 원로원 의원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한 뒤 기록말살형을 내렸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와 달리 서방에서는 연공금 협상에서 실수를 하고, 지진으로 여러 도시들이 피해를 입는 와중에도 무책임한 행동을 벌였으며, 지진이 발생해 여러 도시들이 큰 피해를 입은 가운데 사위와 함께 신탁서를 보면서 주술행위를 하는 등 기행을 벌였다. 이런 가운데, 그의 근거지 격인 시리아 일대가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공격을 받았다. 이에 티메시테우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와 자신의 확실한 입지를 다지고, 페르시아의 계속된 위협에 맞서기 위해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계획하고 동방으로 떠났다. 이때 그의 지휘 아래 로마군은 계속 승리했는데, 원정 도중 갑작스럽게 병사했다.
2.4.2. 중세 ~ 근세
-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오레스테스(서로마 제국) -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의 경우 고려의 최영처럼 자기 절제에 매우 충실했던 케이스로, 권신이면서도 충신에 해당한다.
- 알 하지브 알 만수르(후우마이야 왕조) - 10세의 어린 칼리파 히샴 2세를 끼고 재상이 되어 권력을 행사했다. 가혹한 통치를 펼치고 기독교를 탄압했으나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나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할거하던 기독교 국가들과의 전투에서는 연전연승했다. 기록에는 20여 년 동안의 집권 기간 중, 기독교 국가와 벌인 전투에서 57회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 피핀 2세, 카롤루스 마르텔(프랑크 왕국)
- 아스파르,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동로마 제국)
- 가르통첸, 가르친링(토번 제국)
- 엘 테무르, 메르키트 바얀(몽골 제국, 원나라)
- 시몽 드 몽포르, 토머스 울지(영국)
- 리슐리외, 쥘 마자랭(프랑스)
-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포르투갈)
- 악셀 옥센셰르나(스웨덴)
-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John of Gaunt)(영국) - 에드워드 3세의 4남이자 리처드 2세의 숙부로 리처드 2세 치세때의 권신이었다.
- 바지라오 1세 등 바트 가문의 페슈와들(마라타 제국)
- 보야르들(러시아)
- 쩐투도(대월 리 왕조)
- 응우옌낌(대월 후 레 왕조)
- 찐씨 정권 집권자들(대월 후 레 왕조)
2.4.3. 근현대
- 오토 폰 비스마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독일 제국)
- 귤라 안드라시(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이온 안토네스쿠(루마니아)
- 쁠랙 피분송크람, 수찐다 끄라쁘라윤(태국)
- 라나 가문의 재상들(네팔 왕국)
-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그리스)
3. 대중매체
권신 겸 간신은 굵은 글씨 표시.- 고구(수호전) - 정사에서는 무능한 인물이었을뿐 악인은 아니었지만 소설에서 메인 빌런으로 입지를 확고히 한 케이스.
- 기자로프(랑그릿사 4)
- 김병희(닥터 진) - 김좌근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 김한성, 조르그문트 공작(소드 엠페러)
-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즉위 전),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 문벌귀족(은하영웅전설)
- 고지 밴다이어, 드라칸 반고리치, 로부테 길리먼(헤러시 이후), 말카도르(Warhammer 40,000)
- 박중헌(쓸쓸하고 찬란하神 - 도깨비)
- 윤대형(해를 품은 달)
- 타이윈 라니스터, 피터 베일리쉬(얼음과 불의 노래)
- 엘시 에더리(피를 마시는 새) - 이쪽은 아예 황제가 작정하고 차기 황제로 내정하고 밀어주는 케이스. 물론 개인적 능력도 먼치킨이다.
- 이경식(추노)
- 진서연(블레이드 앤 소울)
- 김좌근(명당(영화))
- 베라딘(창세기전 2)
- 체사레 보르자(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
- 최석주(이산) - 실존인물 심환지가 모티브.
- 이인겸, 홍인방, 길태미(육룡이 나르샤) - 순서대로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가 모티브.
- 석지성(밤에 피는 꽃)
4. 권신 역을 주로 맡는 배우
당연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중견 배우들이 맡는 경우가 절대 다수이다. 가끔은 젊은 배우들이 맡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엔 대부분 '권세만 믿고 날뛰는 찌질이' 역으로 나온다.- 김갑수
- 김응수 - 다만 실존인물 권신보다는 가공의 권신 역을 자주 맡는다.
- 박근형 - 주로 최종보스 역으로 많이 나온다. 현대물에서도.
- 박영지 - 주로 중간보스 역으로 많이 나온다. 찌질이 역으로 나올 때도 많고.
- 백윤식
- 서인석
- 송영창
- 이덕화
- 이순재
- 이재용
- 임혁
- 정동환
- 조경환
- 전국환 - 목소리 톤 때문인가 높으신 분들 중에서도 악역을 많이 맡는편.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최영 역을 맡기도 했다.
[1] 따라서 누군가를 '권신'으로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역모를 꾸미려 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간주되었다.[2] 유자광, 조광조, 정철, 홍국영 등.[3] 대표적으로 삼국지에서 나오는 후한 헌제가 유명하다.[4] 수양대군도 유명하지만, 수양대군은 출신 성분부터 왕족에다가 훗날 군주인 세조가 되었기 때문에 예외.[5] 일각에서는 장보고를 호족의 초기의 형태로 보기도 한다.[6] 물론 인종이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라 이자겸에 의해 강제로 한 혼인이었고, 후에 이자겸을 숙청하고 난 후 이모 두 명은 폐위된다.[7] 여타 조선의 주요인물에 대한 내용은 조선/주요인물 문서를 참고하라.[8] 사병 혁파를 주장한 사람들을 일컬어 '한 덩어리 고기' 같다고 했다.[9] 이 일파에는 수양대군 포함한 종친들은 당연하고 이후에 사육신에 포함되는 집현전의 신진관료들까지 모조리 포함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진급 불만이다. 어린 군주 주변을 세종 시기부터 활동하던 노대신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그 이하층에서는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자세한 것은 계유정난 참고.[10] 일례로 명종 21년의 기록을 보면 종친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군주인 명종은 자신의 종형이 간여된 일이므로 이를 조용하게 넘기려고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중지하도록 하였지만 정철이 명종의 요청을 거부해 명종의 눈 밖에 나서 파면되고 한직을 전전하게 된 적이 있었고, 선조에게도 '아무리 청천벽력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분노한 선조에 의해 삭탈관직당한적도 있다. 이런 면모와 더불어 이발을 위시한 동인들과 사이가 좋지 못해 붕당 간의 충돌을 막으려 한 이이가 자주 정철을 설득했었고 정여립의 난 때는 정개청과 이발을 비롯한 여러 동인계 인사들을 가혹하게 대했다.[11] 허적과 김만기, 김만중 형제는 인척이기도 하다.[12] 정확히 말해서는 그의 삼촌인 김우명이 바로 숙종의 외조부이고 숙종의 모친 명성왕후의 친사촌오빠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숙종의 외삼촌은 아니고 외당숙이다.[13] 이로 인해서 남인 재집권 초반기에는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쪽에 붙어있는 조정 대신들과 남인 중진들이 많았지만 중반기 이후 민암 쪽의 세력이 강해진다.[14] 백제계 도래인이란 주장이 있지만 아직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많다. 자세한 건 소가씨 참조[15]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16] 일본의 쇼군들은 그 자체가 권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국의 군주인 천황을 마치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마냥 상징적인 국가 원수로 만들어 놓고, 막부의 쇼군들이 실권을 쥐었으니 쇼군 그 자체가 사전적인 의미의 권신이라 할 수 있다.[17] 그렇지만 쇼군들도 전부가 권력을 휘두르진 못했다. 물론 유능한 이들이야 권력을 행사했지만, 정치력이 부족해서 부하들이나, 또다른 권신인 싯켄 및 간레이들에게 휘둘린 쇼군들도 많았다.[18] 일부 《삼국지연의》의 덕후들에 의해 동탁, 조조, 사마의와 함께 소위 '망탁조의'라는 개념으로 묶이지만, 애당초 이 네 명은 권신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왕망은 전한을 무너뜨린 인물이고 동탁, 조조, 사마의는 왕망 이후 200여 년이 지난 후한 말기에 활약한 인물들이다. 게다가 사마의는 아예 유씨의 한나라가 아니라 조씨의 위나라를 무너뜨린 인물이었다. 굳이 함께 묶일만한 인물은 후한을 무너뜨리는데 공헌한 동탁과 조조 정도지만 조조는 그래도 재평가론이 끊임없이 나올 정도로 동탁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다.[19] 혹독한 난세에 능력을 바탕으로 공을 세워서 출세한 후 권신화가 되었으나, 그러면서도 끝까지 당 황실을 배신하거나 말아먹지 않았고, 물러나야 할 때 잘 물러나서 천수를 누린데다가 후세의 평가까지 좋다.[20] 본래는 술률평을 처단하고, 술률노속의 관직도 박탈했지만 후에 복원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