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6 11:35:03

율리아 마마이아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4A3800; margin: -5px 0px"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리비아 드루실라 소(小) 안토니아 리비아 오레스틸라 롤리아 파울리나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메살리나 소(小)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포파이아 사비나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 스타틸리아 메살리나
네 황제의 해 갈레리아 푼다나
플라비우스 왕조 소 도미틸라 도미티아 롱기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폼페이아 플로티나 울피아 마르키아나 살로니아 마티디아 비비아 사비나 대(大) 파우스티나 소(小) 파우스티나 루킬라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다섯 황제의 해 플라비아 티티아나 만리아 스칸틸라 디디아 클라라
세베루스 왕조 율리아 돔나 풀비아 플라우틸라
마크리누스 노니아 켈사
세베루스 왕조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 아퀼리아 세베라 안니아 파우스티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
군인 황제 시대 카이킬리아 파울리나 파비아 오레스틸라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트란퀼리나 마르키아 오타킬리아 세베라 헤레니아 에트루킬라 코르넬리아 수페라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 코르넬리아 갈로니아 코르넬리아 살로니나 술피키아 드리안틸라 빅토리아 제노비아 울피아 세베리나 마그니아 우르비카
사두정치 아우렐리아 프리스카 에우트로피아 갈레리아 발레리아 발레리아 막시밀리아
콘스탄티누스 왕조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 미네르비나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딸 플라비아 에우세비아 파우스티나 헬레나
요비아누스 차리토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마리나 세베라 유스티나 알비아 돔니카 플라비아 막시마 콘스탄티아 레타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플라비아 갈라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마리아 테르만티아 아일리아 풀케리아 갈라 플라키디아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레오 왕조 아일리아 마르키아 에우페미아 플라키디아 율리우스 네포스의 아내 아일리아 베리나 아일리아 아리아드네 아일리아 제노니스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에우페미아 테오도라 아일리아 소피아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 콘스탄티나
포카스 레온티아
이라클리오스 왕조 파비아 에우도키아 마르티나 아우구스티나 아나스타시아 그레고리아 파우스타 아나스타시아 에우도키아 하자르의 테오도라
아나스타시오스 2세 이리니
이사브리아 왕조 마리아 안나 하자르의 이리니 마리아 에우도키아 이리니 암니아의 마리아 테오도테
니키포로스 왕조 테오파노 프로코피아
레온 5세 테오도시아
아모리아 왕조 테클라 에우프로시나 테오도라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 테클라 안나 아나스타시아
마케도니아 왕조 에우도키아 잉게리나 테오파노 마르티나키아 조이 자우치나 에우도키아 베아나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테오도라 엘레니 레카피니 소피아 안나 가발라 엘레니 테오파노 마마스 베르타 테오파노 테오도라 엘레니 알리피아 조이 테오도라
콤니노스 왕조 불가리아의 예카테리나
두카스 왕조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알라니아의 마리아
콤니노스 왕조 안나 달라시니 이리니 두케나 헝가리의 이리니 키예프의 도브로데이아 줄츠바흐의 베르타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프랑스의 아녜스
앙겔로스 왕조 헝가리의 머르기트 에우프로시나 두케나 카마테리나 에우도키아 앙겔리나
라스카리스 왕조 안나 앙겔리나 아르메니아의 필리파 마리 드 쿠르트네 이리니 라스카리나 호엔슈타우펜의 안나 불가리아의 엘레나 아세니나
팔레올로고스 왕조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헝가리의 언너 몬페라토의 이리니 아르메니아의 마리아 브라운슈바이크의 이리니 사보이아의 안나 이리니 아사니나 엘레니 칸타쿠지니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불가리아의 케라차 마리아 엘레니 드라가시 이리니 가틸루시오 안나 바실리예브나 몬페라토의 소피아 트라페준타의 마리아 }}}}}}}}}}}}

Julia Mamaea
율리아 마마이아
파일:율리아 마마이아.jpg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왕조 세베루스 왕조
(the Severan dynasty)
전임 아우구스타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공동 아우구스타 율리아 마이사(222–224)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226–227)
신상 정보
이름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Julia Avita Mamaea)
출생 서기 182-192년(불확실) 8월 14일/8월 29일
로마제국 시리아 에메사
사망 서기 235년
로마제국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비쿠스 브리타니쿠스(오늘날의 독일 브레트첸하임)
배우자 이름 미상의 남편(첫 번째 남편)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두번째 남편)
자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테오킬리아
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
자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1. 개요2. 생애
2.1. 가계와 초기 생애2.2. 황제의 어머니2.3. 최후
3. 여담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아우구스타. 아우구스타 시절, 개인적으로 제호를 모방해 취한 공적 이름은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아우구스타'이나, 처형 직후 원로원의 만장일치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져 의미없는 이름이 됐다. 세베루스 왕조의 소위 '시리아 여제(女帝)' 4인방 중 마지막 인물이다.

율리아 마이사의 차녀이자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여동생으로, 외사촌 카라칼라게타존속살해한 직후 이모 율리아 돔나와 외사촌 카라칼라에게 공식으로 세베루스 가문 황녀로 인정받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아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황위에 오른 뒤 황제의 어머니, 세베루스 황가의 황녀 자격으로 아들의 정통성 근거를 내세워 일찍부터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공할 만한 사실상 여제인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 생전에는 내정 개입을 자제했지만, 223년 말 혹은 224년 초 마이사와 울피아누스가 연이어 병사, 암살된 이후, 아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정부를 지키고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명분 아래 정치에 직접 개입해 황제에 버금가는 힘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에게 지나친 간섭을 일삼고, 여러 원로원 의원들을 견제해 정국을 위태롭게 했고, 군대 장악에도 실패하면서 아들의 치세에 먹구름을 일게 했다. 이런 까닭에 235년경 로마군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아들과 함께 피살됐다.

사후 원로원에게 패악을 저지른 악녀의 대명사로 단죄돼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사후 3년만에 완전히 신원복구된 아들과 달리,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몰락 이후에도 사후 복권되지 못했으며 이후 로마의 아우구스타들에게 최악의 아우구스타, 반면교사의 예시로 많이 언급됐다.

2. 생애

2.1. 가계와 초기 생애

시리아의 주요 도시인 에메사에서 부친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와 모친 율리아 마이사의 차녀로 태어났다. 생일은 8월 14일 또는 8월 29일로 여겨지지만,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다. 언니 소아이미아스가 180년에 태어났으니, 180년 이후 몇년 사이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은 로마의 기사계급 출신이었으며, 모친은 태양신 '헬리오가발루스'를 섬기는 대사제 율리우스 바시아누스의 딸이었다.

마마이아의 첫번째 남편은 전직 집정관이라고 알려졌지만, 그 외의 정보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후에 자신이 "메텔루스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데, 혹자는 이를 근거로 첫번째 남편이 메텔루스가의 일원이며, 세베루스는 첫남편의 아들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학계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그의 형제 자매 모두 명백한 시리아 혈통에서 내려온 이름을 사용하였다는 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마마이아는 첫번째 남편이 사망한 뒤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했다. 마르키아누스는 시리아 에메사 태생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서기 193년경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뒤 원로원 의원으로 발탁되었다. 마마이아는 208년 10월 1일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낳았고[1], 뒤이어 딸 테오클리아와 막내 아들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를 낳았다.

서기 217년, 카라칼라 황제가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세베루스 왕조는 무너졌고, 마마이아는 어머니와 언니 등 가족과 함께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이에 율리아 마이사는 왕조를 복구시키기로 결심하고, 장녀 소아이미아스가 낳은 엘라가발루스를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로 내세웠다. 카라칼라 황제를 그리워한 데다, 마크리누스가 파르티아와 굴욕적인 협상을 맺은 것에 반감을 품고 있던 3군단 갈리카는 그녀의 말을 믿기로 마음먹고, 서기 218년 5월 16일 엘라가발루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이후 새 황제의 군대는 안티오키아 인근에서 마크리누스의 군대와 격돌해 완승을 거두었고, 마크리누스는 로마로 가서 지원군을 규합하려고 북쪽으로 달아났으나 칼케돈에서 체포되었고, 카파도키아의 아르켈라이스에서 백인대장에게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새 황제는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군주가 되었고, 세베루스 왕조를 복구하겠다는 마이사의 계획은 성공했다. 어머니가 이렇듯 종횡무진 활약하는 동안 마마이아가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어머니와 행보를 함께 했을 것으로 보인다.

새 황제가 된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에서 온갖 기행을 저지르며 민심을 잃었다. 급기야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인 아내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와 이혼하고 은퇴 전까지 순결을 끝까지 지킬 의무가 있는 베스타 여사제 아퀼리아 세베라와 결혼하기까지 하면서, 로마인들의 반감은 극에 이르렀다. 마이사는 이대로 가다가는 민중이 봉기하거나 야심가가 반란을 일으켜 겨우 복구한 왕조가 또 다시 무너지고, 자신과 가문의 입지마저 위태로워질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구제불능이 된 외손자를 대체할 새 인물을 세우기로 마음 먹고, 221년 여름 엘라가발루스를 설득하여 마마이아의 아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카이사르에 지명하게 했다.

그러나 민심이 알렉산데르에게 급격하게 쏠리자, 엘라가발루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엘라가발루스는 알렉산데르를 제거하려 했고, 222년 초 부터는 아예 알렉산드르와 함께 대중 앞에 함께 서지 않았다. 마이사와 마마이아는 이에 맞서 원로원과 함께 알렉산데르를 지지했다. 222년 3월 11일 또는 12일, 엘라가발루스는 근위대장에게 알렉산데르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근위대는 알렉산데르 지지를 천명하고, 엘라가발루스와 어머니 소아이미아스, 총신 히에로클레스를 살해했다. 세 명의 시신은 온 로마 시내에 질질 끌려나다니다가 난도질당한 뒤, 머리는 사라지고 몸통은 티베리스 강 하수구에 버려졌다. 이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황위에 오르면서, 마마이아는 황제의 어머니가 되었다.

2.2. 황제의 어머니

로마 원로원은 알렉산데르를 새 황제로 추인했지만, 원로원 내부에 설치되었던 세나쿨룸을 폐지하여 황실의 여인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의 실정으로 인해 민심이 무척 안 좋아서 원로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세나쿨룸 폐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새 황제 알렉산드르 세베루스의 초상화를 새긴 동전에는 다음 글귀가 적혀 있었다.
Juliae Mamaeae Aug(ustae) filio Juliae Maesae Aug(ustae) nepote
율리아 마마이아 아우구스타의 아들이자 율리아 마이사 아우구스타의 손자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 때처럼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황제에게 조언하고 행정부의 업무를 통제하기 위해 선택된 16명의 평의회에 영향력을 일정부분 행사했다. 이때 마마이아는 자신과 친분이 두터웠던, 법학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를 아들의 보호자, 스승, 오른팔로 점찍고 16명 자문회의(평의회) 멤버 중 유일하게 임페리움(통솔권)을 내려주도록 힘을 썼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어머니 마이사가 세베루스 왕조 재건을 위해 힘을 쏟으면서, 마마이아의 의견을 많이 들어준 것이 컸다. 다행히 마마이아는 엘라가발루스 치세 4년 내내 꾸준히 힘을 기르며, 더 큰 권한 행사를 위해 잠자코 있어서 큰 소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이사가 사망한 뒤, 마마이아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학자들의 추측처럼 그녀가 무척 믿고 있던 울피아누스가 서기 223년 말 혹은 224년 초 팔라티노 황궁 한복판에서 암살된 이후, 그녀가 분신처럼 여긴 아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지키기 위해 노골적으로 힘을 기른 것 일 수도 있다. 마마이아는 근위대 병사들의 불만을 알고 울피아누스를 지키기 위해, 손수 황제 경호인력을 붙일 정도로 울피아누스 보호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대낮에 황궁 집무실에서 그가 살해당하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어쨌든 223년 또는 224년 초 울피아누스가 황궁에서 근위대 병사들에게 살해된 뒤, 마마이아는 권력 전면에 나섰고 이때부터 그녀의 전횡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녀는 "consors imperii"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이것은 '황제의 동업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녀가 사실상 공동 황제라는 걸 상징했다. 또한 224년에는 "Mater Castrorum(군대의 어머니)"를 받았고, 226년에는 "Mater Senatus(원로원의 어머니)"를 받았다. 그녀는 이렇듯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데 집착했고,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녀는 아들 알렉산데르를 일일이 간섭하다 못해 사생활까지 침해했다.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가 본인만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은 것에 심하게 질투했고, 그녀의 출신 가문과 장인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가 가진 명예와 권력도 질투했다.

결국 알렉산데르의 장인은 마마이아의 농간에 의해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고, 오르비아나는 227년 북아프리카 속주로 유배되었다. 또한 부유한 귀족들이 재산을 탐낸 마마이아에 의해 살해되었다. 알렉산데르는 어머니의 전횡에 큰 불만을 느꼈지만, 감히 어머니의 의사를 거역하지 못했다. 마마이아는 급기야 " senatus et patriae(온 국민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받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런 마마이아의 행동은 그렇지 않아도 불만 투성이였던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를 자극해,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근위대장들을 무시하고 황제 모자를 비이냥대는 이유가 됐다. 하지만 울피아누스 피살 당시부터 마마이아 모자는 군율조차 서지 않는 근위대 병사, 장교들을 통제도 못하고 그들을 처벌해도 솜방망이 수준으로 형식상 징계만 한 뒤, 눈치를 보다가 풀어주는 일을 반복했다. 따라서 이를 직접 본 동시대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이런 황제와 모후의 행동에 경악하며, "근위대와 각 군대, 황제 경호대까지 군율이 서지 않고 세상에서 황제를 우습게 본다"고 이를 기술하거나, "군율이 형편없고 병사들은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불평을 터트렸다"고 이를 평했다.

2.3. 최후

231년 봄, 알렉산데르는 로마를 떠나 도나우 방어선 일대의 최정예군을 규합한 뒤 늦여름에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이때 마마이아도 아들의 원정에 동행했다. 이후 알렉산데르의 로마군은 국경을 번번이 침범하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교전했다. 로마군은 3로로 나눠서 진격하였는데, 그중 한 부대는 큰 타격을 받고 패주했고, 다른 두 부대는 페르시아 영역 깊숙이 진격하여 타격을 입혔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철수했다.

233년 로마로 귀환한 알렉산데르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라인강 일대의 게르만 부족들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라인강 국경을 돌파해 요새들을 파괴하고 이 일대의 로마 영내를 유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알렉산데르는 제국 동부 일대의 군단에서 병력을 차출한 뒤 전선으로 향했다. 물론 마마이아도 아들과 함께 갔다.

전선에 도착한 뒤, 로마군은 게르만족을 라인강 너머로 격퇴하였고, 부교를 만든 뒤 라인강을 도하하여 게르마니아에 산재한 부족들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그런데 알렉산데르는 돌연 전쟁을 그만두고 게르만족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 평화를 이루려 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어머니 마마이아의 견해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로마군 장병들은 "전쟁은 이제 시작되었고, 지금 승기를 잡았는데 어째서 전쟁을 멈추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돌아갈 하사금을 어째서 게르만 놈들에게 줘야 하느냐?"라며 강한 불만을 품었다.

결국 235년 3월 21일, 라인강 전선의 병사들이 게르마니아 내 모군티아쿰(오늘날 독일 마인츠) 병영에서 반란을 일으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알렉산데르와 마마이아 모자를 황제 막사 안에서 살해했다. 당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알렉산데르는 처형되기 전에 온갖 일에 개입해 논란을 일으킨 어머니를 원망하면서, 그녀에게 죽기 전까지 모든 불만을 쏟아냈다고 한다. 원로원은 소식을 접한 뒤 알렉산데르가 부당하게 살해됐다고 보고 일단 신격화만 보류한 뒤 제대로 장례를 치러줬고 그마저도 정적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죽은 238년 곧바로 신격화도 단행하여 정식으로 복권하였으나, 마마이아는 아들에게 온갖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여 국가를 망쳤다는 점을 들어 기록말살형에 처했다.[2]

3. 여담

기독교측 기록에 따르면, 마마이아는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지도자인 오리게네스에게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 출생 당시의 이름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이다.[2] 다만 그녀의 악행이 그대로 기록에 엄청나게 많이 남은 걸 보면 엘라가발루스와 마찬가지로 선고만 하고 실제 말살조치는 행해지지 않은 듯 싶다. 애초에 선고만으로도 당사자가 사람같지 않게 살았다는 증명은 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