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01:22:35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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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Flavia Maxima Fausta
파일:플라비아 막시미아 파우스타.jpg
출생 289년
로마 제국 로마
사망 326년
로마 제국 로마
아버지 막시미아누스
어머니 에우트로피아
형제자매 막센티우스
남편 콘스탄티누스 1세
자녀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헬레나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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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왕조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황후.

2. 생애

289년경 로마 제국 사두정 시대 로마에서 서방의 아우구스투스(정제)였던 막시미아누스에우트로피아 사이의 황녀로 출생했다. 막센티우스는 그녀의 오빠였다. 307년 아들 막센티우스와 갈등을 빛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귀순한 막시미아누스는 딸 파우스타를 콘스탄티누스 1세와 결혼시켰다. 그는 트리어의 궁정에서 존경받았으나, 310년 사위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라인 강을 도하해 침략한 프랑크족과 맞서러 라인 강에 간 틈을 타 반란을 꾀했다가 실패했고, 갈리아 남부 마실리아(마르세유)로 도주했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넘겨진 뒤 그해 7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버지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막센티우스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동전을 주조하고 아버지의 헌신적인 아들로서 복수하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파우스타의 입장이 어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12년 10월 28일 파우스타의 오빠 막센티우스는 역사적인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다음날 그의 시신은 테베레 강에서 발견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잘려나간 처남의 머리를 창문에 꽂아 로마의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이 잔혹행위에 대한 파우스타의 반응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렇듯 아버지와 오빠가 잇따라 남편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손에 죽었지만, 그녀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그녀는 316년 8월 7일 콘스탄티누스 2세를 낳았고, 317년 8월 7일에 콘스탄티우스 2세를 낳았으며, 320년 또는 323년에 콘스탄스를 낳았다. 이 세 아들은 부친에 의해 카이사르로 임명되었다. 또한 파우스타는 두 딸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헬레나도 낳았다. 그녀들의 출생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콘스탄티나가 언니인 것만은 확인된다. 파우스타는 '노빌리시마 페미나'(nobilissima femina: 존귀한 부인)의 지위를 가졌으며,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리키니우스를 상대로 승리한 직후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그런데 아우구스타로서 존경받던 그녀는 돌연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파우스타 황후와 간통한 혐의로 모진 고문을 받은채 처형당하고, 몇 달 후 파우스타도 로마의 뜨거운 목욕탕에서 질식사한 것이다.

4세기 말에 출간된 《카이사르의 전형》은
"콘스탄티누스가 전투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로마 제국 전체를 지배하게 된 뒤, 그는 아내 파우스타의 제안에 따라 아들 크리스푸스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어머니 헬레나가 손자의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하며 꾸짖자, 콘스탄티누스는 파우스타를 끓는 목욕탕에 던져 죽였다"

라고 기술했다. 또한 아리우스파 역사가 필로스토르기오스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계모의 속임수에 의해 아들 크리스푸스를 사형에 처했고, 그후 그녀가 자신의 시종 중 하나와 간통한 걸 알아내자 뜨거운 욕조에 질식시키라고 명령했다.

갈리아 아르베르눔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집정관 아블라비우스가
"궁궐의 누가 지금 토성의 황금기를 원하겠는가? 우리는 네로의 다이아몬드 시대이다."

라는 시를 쓴 것에 대해,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아내 파우스타와 아들 크리스푸스를 거의 동시에 뜨거운 물로 목욕시킨 걸 빗대었으니 실로 용감하다"

라고 칭송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한편 6세기 초의 역사가 조시무스
"콘스탄티누스가 자연법에 대한 고려도 없이 크리스푸스가 계모 파우스타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혐의로 죽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는 이 잔혹행위에 슬퍼했고, 황제는 마치 그녀를 위로하려는듯 병보다 더 나쁜 치료제를 발랐다."

라며 콘스탄티누스 1세의 행위를 비판했다. 한편 12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이 사건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파우스타는 크리스푸스를 미친듯이 사랑했지만 쉽게 그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콘스탄티누스에게 크리스푸스가 자신을 사랑하며, 종종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그러므로 크리스푸스는 아내를 믿었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황제가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아내의 방탕함과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아내도 처벌했다. 파우스타는 과열된 욕조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폭력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가 서로 목숨을 걸고 사랑했다는 의혹을 받아들이길 꺼린다. 역사가 거스리(Guthrie)는 크리스푸스의 처형은 파우스타의 세 아들이 제위를 계승하게 하기 위해 사생아인 크리스푸스를 제거하려 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계획 살인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7년 크리스푸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하여 후계자로 내세웠고, 크리스푸스는 리키니우스의 해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는 등 충분히 능력을 보여줬는데, 굳이 그런 더러운 짓을 할 이유가 있느냐는 반박을 받고 있다. 게다가 크리스푸스를 제위 계승에서 배제하기 위한 음모였다면, 파우스타까지 목욕탕에서 질식시키는 방식으로 죽여야 했느냐는 반론도 제기된다. 또 다른 설은 파우스타가 "크리스푸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라고 모함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걸 믿고 크리스푸스를 죽였으나, 얼마 후 그녀의 주장에 근거가 없다는 걸 알게되자 책임을 물어 그녀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 역시 그녀에게 적용된 간통 혐의와 특이한 사망 방식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게다가 크리스푸스가 무죄라는 게 나중에 밝혀졌다면, 크리스푸스에게 쏟아진 비난은 거둬지고 명예가 복권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현대의 여러 학자가 이렇듯 두 사람의 간통 혐의가 사실이 아닐 거라고 여기는 이유는 다양하다. 티모시 D. 반스는
"크리스푸스는 아버지의 궁정이 있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떨어진 트리어에 주로 거주했다"

는 점을 근거로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육체적 접촉도 없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여러 학자는 파우스타와 크리스푸스의 관계가 그리스 신화의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의 관계와 유사하다며, 그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히 이 신화를 모델로 하여 지어낸 이야기라고 간주한다. 또, 이교도 역사가들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 점도 역사가들이 사건의 진실을 의심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캠브리지 대학의 데이비드 우즈(David Woods)는 색다른 주장을 제기한다. 즉
크리스푸스가 계모인 파우스타를 강간해 파우스타가 임신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격노하여 크리스푸스를 처형했다. 이후 뱃속의 아기를 낙태하라고 목욕탕에 보냈으나 파우스타는 도중에 죽어버렸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헬레나가 낙태를 시도하다 죽은 그녀를 수치스럽게 여겨 아들에게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 모두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했다.

는 것이다. 이는 파우스타가 사망한 장소인 칼리다리움이 로마 시대에 임신을 원치 않은 여인들이 자연 유산을 유도하려고 이용한 장소라는 사실을 근거로 제기된 가설이다.#

파우스타가 의붓아들인 크리스푸스와 간통한 게 사실인지, 정치적 음모에 의해 희생당했는지, 아니면 크리스푸스에게 겁탈당한 뒤 아기를 낙태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것인지는 현재까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두 사람의 모든 기록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파우스타의 세 아들들은 제위에 오른 뒤에도 어머니인 파우스타에게 내려진 형벌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파우스타는 수치스러운 황후로 낙인찍혔고,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의 저자인 카이사레아에우세비우스는 크리스푸스나 파우스타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