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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아버지 | 페트로니우스 |
남편 | 발렌스 |
자녀 | 아나스타시야, 카로사, 발렌티니아누스 갈라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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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아우구스타이자 로마 황제 발렌스의 황후.2. 생애
돔니카의 부친 페트로니우스는 판노니아 사람으로, 동부 야전군 군단인 마르텐세스 세니오레스의 장군을 역임하면서 심한 탐욕을 일삼았다고 한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페트로니우스가 딸 덕분에 귀족이 된 후 죄가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온갖 고문을 가해 막대한 재산을 뜯어냈으며, 심지어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빚을 찾아내 끝까지 받아내기도 했고, 만약 누구라도 무사히 풀려난다면 과도하게 슬퍼했다고 기록했다. 민중은 그런 그를 무척 싫어했고, 발렌스가 동방의 황제로 즉위한 직후 율리아누스의 이종사촌 프로코피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를 들먹이며 반란을 부추길 때 열성적으로 호응했다. 한편 세라의 니케타스에 따르면, 폰토스 교구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 시장)을 맡은 에우세비우스가 돔니카의 삼촌이라고 한다. '돔니카(Dominica)'는 그리스 이름 '돔니코스(Domnicus)'의 여성형이다. 또한 그녀의 부친 페트로니우스, 삼촌 에우세비우스 역시 그리스어 이름이다. 이로 볼때, 그녀의 집안은 그리스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돔니카는 354년경 발렌스와 결혼한 뒤 아나스타시야, 카로사를 낳았고, 366년 발렌티니아누스 갈라테스를 낳았다. 그녀는 아리우스파 신자였으며, 발렌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이며 대표적인 아리우스파인 안티오키아의 에우도시오스에게 세레를 받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발렌스는 아타나시우스파 신자들을 탄압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아리우스파 기독교인들과 성직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딱히 다른 종파를 탄압하지는 않았다. 다만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발렌스는 형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함께 마녀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돔니카는 어린 아들 갈라테스가 병에 걸렸을 때 카이사레아의 주교이자 대표적인 아나타시우스파인 바실리오를 잘못 대우한 것에 대한 처벌로 신께서 아들을 병에 걸리게 하였다는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돔니카는 남편에게 바실리오를 풀어달라고 요청했고, 발렌스는 바실리오를 불러들였다. 바실리오는 황제에게 갈라테스에게 아타나시우스파로 공인하는 세례를 내리라고 요구했다. 발렌스가 거부하자, 바실리오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이라고 하고 떠났다. 얼마 후 갈라테스는 곧 사망했다고 한다. 갈라테스는 369년 이전 집정관에 임명된 적이 있어서, 이 일은 369년이나 370년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378년 8월 9일, 발렌스는 약 1만 5천에서 3만명에 달하는 로마군을 이끌고 고트족 1만 5천명과 맞붙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고트족 지도자 프리티게른의 절묘한 지휘에 휘말려 약 1만에서 2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고, 발렌스는 전사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돔니카는 금고를 털어서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무장할 용의가 있는 시민 의용군에 임금을 골고루 지급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도착할 때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에 전념했다고 하며,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