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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출생년 미상 2월 18일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 | 140년 10월 또는 11월 |
로마 제국 로리움 | |
아버지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2세 |
어머니 | 루필리아 파우스티나 |
형제자매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3세,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 |
남편 | 안토니누스 피우스 |
자녀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갈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렐리아 파딜라, 소 파우스티나 |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 |
왕조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Domus Nerva-Antonina) |
전임 | 비비아 사비나 |
후임 | 소 파우스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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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아우구스타.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황후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고모이면서 장모였다.
2. 생애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히스파니아 속주 출신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2세와 루필리아 파우스티나[1] 사이에서 출생했다. 서기 227년 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미레네 제20보병대가 숭배해야 할 신들의 명단이 기록된 《페리알레 두라눔》(Feriale Duranum)에는 신격화된 그녀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데, 탄신일이 2월 18일로 기재되었다. 출생년은 기록이 부족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100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향은 어머니의 고향인 로마 근교의 라치오 현 혹은 부모의 고급저택이 있었던 로마로 추정되는데, 대 파우스티나의 고향은 로마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그녀는 로마에서 유년기, 청소년기, 성년기를 모두 보냈다. 4남매(추정) 중 첫째 혹은 둘째로 추정된다. 남자 형제로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와 법무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3세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모두 대 파우스티나의 동생들이었다. 자매로 안니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개의 로마인 부부들의 자녀 작명법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성씨만 여성형으로 사용한 안니아가 첫째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안니아는 일찍 요절한 것으로 보이며, 대 파우스티나와 두 남동생은 성인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허나 바로 아래의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3세는 누나인 대 파우스티나, 동생인 안니우스 리보와는 달리 법무관을 지내던 시절에 요절했다. 그렇지만 그는 로마 근교에 벽돌공장을 소유한 부유한 상속녀 도미티아 루킬라와 결혼해 아들과 딸을 두었다. 동생 안니우스 베루스 3세의 아들(대 파우스티나의 조카)은 훗날 안토니누스 피우스, 대 파우스티나 부부의 사위이자 양자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였다.
본래부터 집안이 로마, 이탈리아, 히스파니아에 고급저택과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히스파니아 일대에 올리브유 정제시설과 올리브 농장, 포도 농장을 보유한 부자였기에, 어릴 적부터 교양이 있고 미모도 갖추고 있어서 평이 좋았다. 가족 배경 역시 아버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2세가 집정관을 세 번이나 역임한 대정치가였고, 어머니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는 다른 여자 형제들과는 달리, 오래된 노빌레스 중 하나인 스크리보니우스 가문[2] 출신이었으며 트라야누스 대제의 먼 후손이었다. 또한 외할아버지가 보결 집정관이었으나 이탈리아 귀족 사회에서도 여러 파트리키 가문들의 피를 이어 받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3]였다. 이런 가족 관계 중 대 파우스티나의 이모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황후였던 비비아 사비나였고, 아버지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친구이면서 동서지간이었던 것은, 대 파우스티나가 일찍부터 이탈리아 귀족 가문들의 며느리감으로 인기가 높아진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대 파우스티나는 110년에서 115년 사이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한 노빌레스 가문인 안토니누스 가문의 상속자로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4]의 외손자이며 양자였던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 그녀는 아들 2명, 딸 2명 등 4명의 자녀를 낳았다. 맏딸 아우렐리아 파딜라는 아일리우스 라미아 실바누스(혹은 실란누스)와 결혼했지만 부친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안토니누스와 마르쿠스 갈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는 어린 시절에 죽었고, 오직 막내딸인 소 파우스티나만이 오래 살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황후가 되었다.
서기 138년 7월 10일, 남편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한 뒤, 원로원은 그녀에게 아우구스타 칭호를 부여했다. 대 파우스티나가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는 기록은 얼마 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남편이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본인의 이름으로 로마와 이탈리아의 빈민 및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단체를 후원하고, 로마와 이탈리아 소녀들의 교육에도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인기가 높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타 취임 이전부터 아름다움과 뛰어난 교양, 지혜로 존경받은 귀부인으로 평가받았고, 직설적이고 당당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하면서도 목가적인 성품의 남편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많은 부분에서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 파우스티나는 남편과 함께 대부분의 삶을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보냈고, 남편이 무척 좋아한 토스카나 시골 집과 풍경을 무척 사랑했다.
허나 믿을 수 없는 4세기 경의 사서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대 파우스티나가 남편이 황제이면서 너무 검소하게 생활한다며 불평하자,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그녀를
"바보"
라고 부르며 "제국이 우리의 것이 되었으니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라고 했다고 한다. 또 대 파우스티나는 한 성격하는데다가 기가 셌고, 직설적인 까닭에 남편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아시아 속주 총독이던 시절에 여러 사람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다."
는 이유로 "방종하고 단정치 못한다."
는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아내가 죽기 전까지 그녀의 성격으로 벌어진 일이 있을 때마다 슬픈 마음으로 여러 번 참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가정교사였던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주고받은 서신이 남아있는데, 안토니누스는 이 서신에서 "나는 그녀가 없는 황궁보다는 그녀가 있는 기아라 섬[5]에서 함께 살겠다."
라고 서술했다.대 파우스티나는 불과 약 2년 동안 황후로 활동하다가 140년 10월 또는 11월에 로마 인근의 로리움에서 사망했다. 원로원은 즉시 그녀를 신격화하고,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는 특별 경기를 실시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그녀의 동상을 모든 경기장에 세우라고 지시했다. 또한, 원로원은 대 파우스티나의 금입상을 세울 것을 결의했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안토니누스는 20년 더 살았는데, 애처가이자 공처가인 까닭에 아내 대 파우스티나의 해방노예였던 갈레리아 리시스타라테를 첩실로 두고 재혼하지 않았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사후 아내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3. 여담
- 로마 공화정 말기의 원로원 의원으로, 제1차 삼두정치를 이끈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8대손이었다. 이런 이유로 대 파우스티나는 친조카이며 자신의 사위이자 양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이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 해당 문서 사진에 나온 대리석상의 머리 스타일은 대 파우스티나가 소녀 시절부터 해온 본인만의 실용적이고 고풍스러운 특유의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본래부터 여장부였고, 성격이 호방했는데 거기에다가 타고난 미녀였다. 그러면서도 대 파우스티나는 자기 주장이 강했다. 따라서 소녀 시절 유행한 머리 손질법 대신, 아우구스타가 아닐 때부터 머리 뒤쪽이나 위쪽에 땋은 머리들을 틀어올려 뒤로 묶었다. 그런데 이 독특한 머리 스타일이 그녀가 아우구스타에 오른 뒤, 그녀를 실제로 본 귀부인들이 누구나 자발적으로 따라하면서, 대유행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로마 제국의 서기 2세기를 상징하는 뒷머리를 총 6개로 따고, 아름답게 틀어올린 귀부인들의 머리 스타일이 그것인데, 이는 파우스티나식 머리라고 불릴 만큼, 서기 2세기부터 3세기 후반까지 그 인기가 대단했다. 네로 황제의 아내인 포파이아 사비나가 처음 유행시킨 포파이아 스타일의 파마 머리와 달리, 유지와 관리도 쉽고, 여기서 본인 개성에 따라 변형도 쉽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 사교계를 시작으로, 본국인 이탈리아 반도 전체로 퍼지더니, 각 속주의 도시와 시골 유지의 아내와 소녀들까지 선호한 스타일이 되었다고 한다.
- 스스로를 신격화했던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등의 아우구스타들과 달리, 인품과 특유의 호방함 등 개인적인 매력과 노블리스 오블리제 때문에, 짧은 아우구스타 재임에도 불구하고 생전과 사후, 모든 로마인 남녀노소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고 존경받았다. 따라서 그녀가 병사했다는 말에, 원로원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요청하기도 전에 그녀를 신격화시켜줬다. 이는 사후에도 비슷했는데, 대 파우스티나는 디바 파우스티나로 불리면서, 로마 제국 전역의 신혼부부와 자녀를 둔 어머니들에게서 가정과 소년, 소녀를 보호하는 여신으로 떠받들어졌다. 이는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 외에는 누리지 못한 존경이라서, 안토니누스 황실이 멸문한 이후에도 제작된 대리석상들이 튀르키예와 레반트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 남동생의 아들로 친조카이자 양자였으며 사위이기도 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의 사이가 무척 각별했고, 또 다른 양자인 루키우스 베루스에게도 좋은 어머니로 유명했다. 그래서 마르쿠스, 루키우스 형제는 제위에 오른 뒤 황제의 어머니로 찬사받게 하면서, 대 파우스티나의 인품과 사랑을 기념한 많은 건축물 및 비문을 제국 전역에 전시했다.
- 기가 쎄고, 한 성격하긴 했지만 동생들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6] 및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와 사이가 무척 각별했고, 아랫사람이나 신의로 맺어진 사람들에게도 진심으로 다정했다. 따라서 이런 태도는 훗날 그녀의 친조카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피를 나누지 않은 법적 형제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
[1] 트라야누스 황제의 조카인 살로니아 마티디아 황후의 막내 딸이었다.[2]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두 번째 아내였던 스크리보니아의 친정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친혈육이었던 대(大) 율리아의 외가였으며 명장 폼페이우스의 처가로도 유명했던 공화정 시기의 노빌레스 가문이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아우구스투스 일가와 대립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집안이면서도, 일찍부터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의 친정과 인연을 맺어 리비아 드루실라의 동생이었던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의 혈통적인 본가이기도 했다.[3] 살로니아 마티디아와는 정략혼으로 그 효과가 끝난 101년, 상호 합의하에 이혼했다. 본래 출신 가문은 리키니우스 씨족 중 크라수스 가문이었으며, 입양으로 맺어진 가문은 스크리보니우스 씨족 중 리보 가문이었다. 그 외에도 프루기는 직계 양친을 통해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 발레리우스 가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등 유력 파트리키 가문들의 피를 이어 받았다. 참고로 이 사람의 숙부가 갈바 황제의 양자가 되었던 피소 리키니아누스였으며, 혈연적인 친척 중에는 로마 왕국의 제2대 왕 누마를 시조로 둔 칼푸르니우스 씨족의 피소 가문 사람들도 있었다.[4] 플라비우스 왕조와 네르바 황제의 치세 동안 정치적으로 매우 영향력이 있었던 이탈리아 출신 귀족 가문인 안토니누스 가문의 수장으로서 원로원 중진 의원이었다. 서기 1~2세기 경 로마 귀족 사회를 이끈 이탈리아 혈통 귀족의 상징격인 인물로,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는 과정속에서 네르바 황제를 설득하거나 혹은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교양인이자 청렴한 원로원 중진 의원으로 존경을 받았던 전직 집정관으로, 소 플리니우스의 오랜 친구였으며 네르바 황제의 최측근이기도 했다.[5] 로마 시대 동안 흉악범과 정치범 등이 추방형에 처해질 경우 보내진 유형지였다.[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친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