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9:38:23

테오도라(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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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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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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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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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코코 샤넬 도로시아 랭 프리다 칼로 카라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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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dora / Θεοδώρα
성 테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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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제2대 아우구스타
왕조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Justinian Dynasty)
전임 에우페미아
후임 아일리아 소피아
신상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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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cd21 이름}}} 테오도라
(Theodora/Θεοδώρα)
{{{#fecd21 출생}}} 500년
시리아 만부즈 (추정)
{{{#fecd21 사망}}} 548년 6월 28일 (향년 48세)
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fecd21 배우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
{{{#fecd21 자녀}}} 딸(이름불명), 요한네스(입양), 테오도라(입양)
{{{#fecd21 }}} 아카시우스
{{{#fecd21 }}} (이름불명)
{{{#fecd21 종교}}} 동방 정교회
{{{#fecd21 모노그램}}} 파일:Theodora-Monogram.png
{{{#fecd21 축일}}} 11월 14일[1], 6월 28일[2]
}}}}}}}}} ||

1. 개요2. 상세3. 창작물에서

1. 개요

동로마 제국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황후. 동명이인들과의 구별을 위해 'Theodora I(테오도라 1세)'로 칭해지기도 한다.

2. 상세

동로마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권세를 누렸던 여인 중 하나.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녀를 그녀의 남편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함께 성인으로 기리고 11월 14일에 기념한다. 시리아 정교회와 콥트 정교회를 위시한 오리엔트 정교회 역시 자신들의 지위와 권리를 신장시켜준 위인이자 교회의 성인으로서 기리고 있으며 축일은 6월 28일이다.[3] 동방 그리스도교 전반에서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셈이다.

원래는 천한 신분으로, 아버지는 곰 사육사였고 어머니는 배우이자 댄서,[4] 테오도라 역시 술집의 댄서를 겸했는데... 확실히 보통 댄서는 아니었다. 스트립쇼도 했었고[5] 가끔 몸도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남자에게 내주는 천한 계집이란 프로코피우스의 언급은 일방적인 욕설에 가깝지만, 그녀가 대단히 천한 신분에 있었음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에도 나이트클럽에서 스트립댄서를 겸하는 AV 여배우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대단히 좋지 못한 것을 감안해 보면, 테오도라가 얼마나 불리한 처지에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비사>에 의하면 그녀는 실제로 낙태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6] 창녀나 다름없던 직업의 특성 및 변변한 피임법이 없던 시대적 상황상 낙태를 밥먹듯이 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긴 하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와 총명함에 반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부인이 되어서,[7] 단순한 부인이 아닌, 아우구스타로서 사실상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테오도라는 결혼 전엔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도, 결혼 후엔 대단히 정숙하게 살았으니 자기 절제에도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원대한 야망과 유능함은 여러 일화에서 드러나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로는 '니카의 반란'이 있다.

5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원형 경기장을 방문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부부는 매우 성난 시위대와 마주한다. 월드컵 경기가 열려서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관람객들이 대통령을 죽이자면서 국빈석을 에워싼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를 탈출하려 항구로 도망쳤는데, 테오도라는 '자줏빛 옷[8]은 가장 고귀한 수의'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꾸짖었다. 이에 마음을 다잡은 유스티니아누스는 도시로 돌아가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 과정에서 거의 3만 명이 학살당한다. 이 때 집정관인 히파티우스는 시민들에게 강제로 황제에 추대되었다가 진압 후 체포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는 본래 그와 관계가 나쁘지 않았고 억지로 추대된 점을 고려해서 목숨은 살려주려 했다. 그러나 테오도라가 이유야 어쨌든 죽여야 한다고 설득해서 결국 처형했다. 사실 로마의 공화정 전통을 이어받은 제국에서, 황제 퇴위를 요구하는 시민 봉기를 진압한 경우는 이때가 유일하다. 다른 경우 퇴위를 안 하고 버틸지언정 진압은 하지 않았다. 경기장 때문에 일어난 폭동인 점과 몇천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온 면에서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테살로니카 학살과 비슷하다.

게다가 프로코피우스 비사에 의하면 궁전 지하에 사설 감옥을 불법적으로 운영하며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가두어 고문하기도 했다. 지하감옥에 잡혀 온 사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고문당하고 재산을 빼앗겼다. 이런 테오도라의 악행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 왜냐하면 황제 자신도 로마 시민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정치가로서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기에,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고 창녀들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했다. 프로코피우스의 비사에 따르면 창녀들을 갱생 시설에 보냈지만 강제였기 때문에 탈출하는 창녀들도 있었다. 또한 외국 사절단을 접견하고 남편을 평생 보좌했다. 황제 몰래 독단으로 페르시아 황제에게 평화 사절을 보내기도 했다. 이것을 페르시아 귀족들이 알게 되어 로마는 여자가 지배하는 나라라는 비아냥을 듣는 구실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남편을 지지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자신과 남편의 의견이 다르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유스티니아누스를 꺾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했다. 또한 그녀는 단성론을 신봉했기 때문에 종교면에서는 정통파인 황제와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테오도라의 친 단성론적 성향이 나중에 볼 때는 제국에 큰 재앙을 낳기도 했는데, Wiley-Blackwell 출판사에서 나온 고대사 총서 중 하나인 'A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AD 284-641'라는 책에는, '(단성론을 믿으며 동로마의 제후국 격 되는) 가산 왕국의 지배층이 일부러 황제 대신에 친 단성론적인 테오도라에게 접근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자기네에게 사제를 파견해주기를 요청했고, 요청을 받은 테오도라는 남편을 설득해서 두 주교를 파견했는데, 이들이 결국 시리아 동부에서 메소포타미아에 걸쳐 30명의 주교를 구심점으로 한 방대한 단성론파 조직을 창설했다'는 대목이 있다.[9]

허나 유스티니아누스가 테오도라가 죽은 후에야 진정한 친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얘긴 과장이 지나치다. 역사책에 확연히 드러나는 큰 업적만 정무 활동이라고 보는 큰 편견이 이유인데, 재정 관리를 비롯한 회계 사무와 행정적인 건 철저히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이 직접 챙기던 분야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병에 걸려 골골골 하자마자 제국의 국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던 게 이것의 명확한 예.

유스티니아누스가 테오도라를 사랑한 증거는 현재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야 소피아 본관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통로는 계단이 아닌, 수레가 다닐 수 있는 오르막길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공사 당시 다리가 불편한 황후가 편하게 1층과 2층을 오갈 수 있게 일부러 이렇게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3. 창작물에서

문명 시리즈문명 3문명 5, 문명 6에서 비잔틴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1] 동방 정교회.[2] 오리엔트 정교회.[3] 후술하겠지만 테오도라는 남편과 달리 칼케돈파 계통의 주류 교의가 아닌 합성론 계통의 그리스도교를 신봉했던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으며, 이 때문인지 몰라도 합성론이 주류였던 지역에서 테오도라에 대한 기록들은 프로코피우스의 <비사>에 비하면 굉장히 우호적이다.[4] 춤을 의외로 잘 못 췄으나... 역시 이쁘면 다 되나 보다[5] 음문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고 한다.[6] 단 프로코피우스는 이상한 루머까지 쓰기도 했다. 테오도라가 남편을 마법으로 조종하거나 유스티니아누스의 머리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는 내용도 있다.[7]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당시 동로마 황제이자 외삼촌인 유스티누스 1세를 꼬셔서 귀족과 천민의 결혼을 허락하는 법을 만들었으나, 법 이전에 유스티누스의 반대가 워낙 심했다. 하지만 유스티누스 1세 본인도 군인이 되기 전엔 가난한 농부 출신, 유스티누스의 황후, 즉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외숙모인 에우페미아도 해방노예 출신이라 반대할 만한 명분도 별로 없어서 결국은 법안에 도장을 찍어 줬다.[8] 당시에는 오직 황실에서만 입을 수 있어 제위를 상징했다.[9] 책 130p 중, 'When Ghassanid Arab leaders, who were Christian Monophysites, approached Theodora and asked for new clergy to be sent from Constantinople, she prevailed on her husband to send two bishops, Theodore and Jacob Bar' Addai, who in turn created an entire church hierarchy of thirty bishops and innumerable clergy across eastern Syria and Mesopotam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