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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293년~296년 사이 |
로마 제국 갈리아 트리어 | |
사망 | 330년경 |
아버지 | 콘스탄티우스 1세 |
어머니 |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 |
형제자매 | 콘스탄티누스 1세(이복 오빠),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아나스타시아, 에우트로피아 |
남편 | 리키니우스 |
자녀 | 리키니우스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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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사두정치 시대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리키니우스의 황후.2. 생애
아버지는 사두정치 시대 서방의 카이사르(부제) 콘스탄티우스 1세이며, 어머니는 서방의 아우구스투스(정제) 막시미아누스의 친딸 또는 의붓딸인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이다. 출생 시기는 콘스탄티우스와 테오도라가 결혼한 293년에서 콘스탄티우스가 브리타니아로 출정한 296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되며, 출생지는 서방 부제의 궁정이 있는 트리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자 형제로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가 있고, 여동생으로 에우트로피아가 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 1세의 전 아내인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녀의 이복 오빠이다.311년 말 또는 312년 초,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와 연합하기로 하고 이복 누이인 콘스탄티아와 리키니우스를 약혼시켰다.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의 경쟁자 막센티우스에 전력을 기울이고 싶었고, 리키니우스 역시 동방의 경쟁자 막시미누스 다이아에 전념하고 싶었다. 이러한 둘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약혼이 성립되었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전사시켜 서방의 지배자에 등극한 지 몇달 후인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만나 밀라노 칙령을 결의했다. 이때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아를 정식으로 황후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각각 서방과 동방의 지배자가 된 두 황제는 곧 대립했고, 결국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314년 10월 8일 판노니아의 키발라이에서 양군이 출동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압승을 거뒀다. 그 후 316~317년 트라키아 마르디아에서 다시 한 번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두 황제는 콘스탄티아의 중재로 317년 3월 1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리키니우스는 이 조약에서 트라키아를 제외한 발칸 반도 전역을 넘겨줘야 했고, 리키니우스가 316년 말에 세웠던 부제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처형해야 했다. 한편 콘스탄티아가 315년 7월에 낳은 아들 리키니우스 2세는 317년 3월 콘스탄티누스의 큰아들 크리스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 후 콘스탄티아는 니코메디아에서 베리티아의 주교였던 에우세비우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313년에서 324년 사이에 카이사레아의 다른 주교인 에우세비우스와 콘스탄티아가 주고받은 서신이 전해진다. 콘스탄티아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자 주교는 다소 무례하게 그리스도는 그림으로 표현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때 에우세비우스는 콘스탄티아를 "Augusta"라고 불렀다. 이렇듯 아내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리키니우스는 320년 주교들의 종교회의를 전부 금지했고 주교와 사제를 다수 유배보냈으며, 자신의 부하들 중 기독교의 신이 아닌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전부 쫓아냈다.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콘스탄티누스로 대거 이반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는 재차 전쟁을 벌였다. 그해 7월 3일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벌어진 대규모 회전에서, 콘스탄티누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리키니우스는 비잔티움으로 퇴각한 뒤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대규모 해전을 벌였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크리스푸스에 의해 또다시 완패했다. 이후 소아시아로 피신한 그는 9월 18일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 크리소폴리스에서 적과 맞섰으나 또 대패했다. 니키니우스는 니코메디아로 도주한 뒤 다시 병력을 징발하여 맞서려 했지만, 콘스탄티아가 이제 그만 싸우고 항복해야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설득하자 결국 항복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가 테살로니카에서 민간 시민으로 살게 해줬다. 그러나 325년 봄, 리키니우스는 고트족과 내통한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조시무스, 에우트로피우스, 예로니모 등 당대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이 행위는 콘스탄티아와 맺었던 언약을 위반한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린 리키니우스는 적어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죽음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325년 콘스탄티누스가 큰아들 크리스푸스와 아내 파우스타를 잇달아 죽였을 때, 어린 리키니우스 역시 살해되었다. 남편과 아들의 죽음은 콘스탄티아에게 큰 타격이었을 테지만, 그녀는 이후에도 존중받았다. 역사가 테오도레투스는 "콘스탄티누스는 그녀를 모든 종류의 보살핌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겼고 그녀가 과부의 시련을 겪도록 허락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티란니우스 루피누스 역시 콘스탄티아는 헬레나가 죽은 후 콘스탄티누스의 사랑을 받았다고 기술했다.
콘스탄티아는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파 의원들에게 공의회에 의해 공식화된 신조를 받아들이라고 조언하였다. 이것은 필로스토르기오스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필로스토르기오스는 아리우스파였다. 그러나 가톨릭 작가들은 콘스탄티아가 아리우스파를 지지했다고 기록했다. 예로니모는 아리우스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황제의 누이를 유혹했다고 주장했다. 루피누스는 콘스탄티아가 아리우스의 교리를 고수하였으며, 임종 전에 콘스탄티누스에게 아리우스를 유배지에서 불러오라고 설득했다고 밝혔다. 다만 아리우스는 콘스탄티아가 죽기 전에 소환되었기 때문에, 임종 전에 요청한 게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콘스탄티아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콘스탄티누스의 모친 헬레나가 329년 사망한지 얼마 안 돼서 죽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대략 330년 즈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테오도레투스와 루피누스는 콘스탄티아가 눈을 감았을 때 콘스탄티누스 1세가 곁에서 지켜봤다고 밝혔다. 콘스탄티아가 죽은 후 기념주화가 발행되었는데, 330년 5월 11일부터 333년 12월 25일 사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만 주조되었다. 이 동전에는 'Constantia Soror Constantini AVG(콘스탄티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누이)'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모이시아 속주의 토미스(Tomis)를 '콘스탄티아나(Constantiana)'로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