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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 왕조 Domus Severena | |||||
세베루스 왕조의 가계도.[1]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시기 | 193년~235년 | ||||
성씨 | 셉티미우스(Septimius)[2] 안토니누스(Antoninus)[3] 세베루스(Severus)[4] | ||||
창건자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
주요 황제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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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네 번째 세습 왕조.로마 제국 안팎에서 벌어진 국내외 문제가 산재된 상황이던 193년에 시작되어 235년을 끝으로 단절되었다. 과거에는 3세기의 위기때의 군인 황제 시대와 묶여 서술되거나, 창건자 외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세습 왕조였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제정 중기 원수정의 변화와 3세기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의 업적과 그들의 노력이 주목받고 재평가되고 있다.
로마 제정 중기와 후기의 구분을 오현제 시대가 끝나는 서기 180년보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죽는 211년 또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당하는 235년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암살로 세베루스 왕조가 단절된 이후, 로마는 '3세기의 위기'(Crisis of the Third Century)[5]라고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로 접어들었다.
창건자는 리비아와 튀니지로 대표되는 푸닉(옛 카르타고) 일대의 식민도시 렙티스 마그나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그의 제위 등극은 찬탈과 쿠데타 방식이었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2세기 후반의 격변 이후 제국의 평화를 성공적으로 회복했다. 그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폭군 중 하나로 꼽히는 콤모두스가 암살된 이후 벌어진 내란(다섯 황제의 해)을 수습하고 동방 문제를 파르티아와의 전쟁으로 해결했는데, 이때 일찌감치 부자 세습 방식으로 왕조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 왕조는 다른 세습 왕조와 비교하더라도 매우 불안정한 가족 관계와 창건자의 직계 후손들간의 불화로 인해 단명했다. 그래서 '3세기의 위기'를 예고하는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또 창건자 이후 즉위한 세베루스 황실의 황제들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점과 카라칼라와 게타, 엘라가발루스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사이의 긴장은 일명 시리아 여제들의 섭정 통치 아래에서 일시적인 안정만 가져왔을 뿐 혼란을 가중시켰다고 비난받았다.
혈통으로 따지면, 창건자의 세베루스 가문과 그의 아내 율리아 돔나의 친정 에데사 가문이 세습과 입양을 통해 제위를 잇고 있다. 하지만 법적인 성씨는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의 이탈리아계 기사계급 가문인 세베루스 가문이었고, 정식 칭호는 '안토니누스'였다. 창건자의 직계는 카라칼라 이후 혈통이 끊겼다. 따라서 다음 두 황제는 모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두 번째 아내이자 황후였던 율리아 돔나의 가문, 즉 시리아의 에메사에서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모시던 율리우스 바시아누스의 두 딸을 통해 이어진 세습 왕조였다. 이런 이유로 혈통상으로는 카라칼라 암살 이후의 두 황제가 모계를 통해 이 가문의 계보를 이었으며, 그 정당성 역시 퇴색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과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외가의 정치적 입김이 상당히 강했다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통성 측면에서는 모계의 영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이 측면에서도 왕조가 단명했다고 평가받는다[6].
이런 이유로 인해,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 이후 율리아 돔나와 그녀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 마이사의 딸 율리아 마마이아가 어린 황제를 앞세운 모양새를 띠거나, 대놓고 섭정을 했다. 그래서 세베루스 왕조 시대는 시리아 출신의 황실 여성들이 '시리아 여왕, 여제' 소리를 들었고, 그들의 권력 조종은 첫 번째 왕조의 초대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를 능가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2. 역사
폭군 콤모두스가 몰락한 이후, 페르티낙스가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를 이끈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도움으로 즉위했지만 프라이토리아니와 라이투스를 개혁 대상으로 삼다가 살해당했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는 제위를 경매로 내놓으며 야심가들 사이의 경쟁을 유도했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계승은 문제가 많았고, 콤모두스 몰락 이후 제위를 노린 야심있는 이들이 연이어 황제를 참칭하게 되었다. 이중 한 명이 원로원 의원으로 당시 상 판노니아 속주 총독을 맡고 있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그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프라이토리아니를 제압했다. 이후 세베루스는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상대로 연이어 승리하고,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격해 약탈했다.세베루스는 두 아들과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양자로 스스로 입양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후계를 자처했다. 이는 그가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원로원 내 반대파를 숙청하는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잔혹하고 비열한데다, 통치술은 강압적이고 냉혹했다. 그러나 이런 통치술은 , 콤모두스 치세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단절 이후 벌어진 정치•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 제국을 안정시켰다. 세베루스는 스코틀랜드 원정을 나섰다가 브리타니아 북부에서 병사했다.
세베루스 사후,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가 공동 황제 신분으로 뒤를 이어받았다. 장남 카라칼라는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 신분이었고, 차남 게타는 본래 카이사르 칭호만 받았다가 뒤늦게 공동 황제가 된 후계자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두 형제는 정적 관계가 됐고, 세베루스의 독단적인 인격 교육과 비열한 방법의 통치술 교육은 왕조의 종말을 앞당겼다. 따라서 1년도 못 가 카라칼라가 모후의 방으로 친동생 게타를 유인해 손으로 직접 죽인 후 단독 황제가 되었다.
카라칼라는 군사적으로 상당한 공을 세웠지만, 동생과 그 지지자, 옛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출신 인물들을 재판없이 학살했고, 로마에서 기행을 벌였으며, 이집트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의 대학살 등 제국 동부에서 연이은 실책을 벌였다. 그러다가 파르티아 원정때 행군 중 암살당했다. 중간에 마크리누스가 끼어들어서 잠시 왕조가 단절되었으나, 니시비스 전투 이후 벌어진 혼란을 이용한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쿠데타로 곧 재건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외손자로 카라칼라의 오촌 조카[7]인 엘라가발루스를 '카라칼라가 자신의 장녀와 근친상간해 낳은 아들'로 내세워 마크리누스를 무너뜨렸고, 왕조를 재건했다.
엘라가발루스는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재치로 즉위했지만, 온갖 기행을 펼쳤고 즉위 당시 알려진 이야기가 거짓말로 들통나 제국 동부를 시작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따라서 온갖 기행을 펼친 엘라가발루스는 4년도 안 되어 조롱과 멸시속에 암살되었고, 이후 이종사촌 동생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8]가 뒤를 이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시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후계자들 중 그나마 내치에 능한 황제였으나, 우유부단하고 마마보이였다. 설상가상 선제 엘라가발루스의 기행과 실책으로 근위대는 세베루스 왕조를 무시했고, 명령도 제대로 먹히지 않는 한계가 뚜렷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사산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고트족과의 전쟁이 터졌을 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그 단점을 이기지 못한채 병사들에게 암살되었고, 파란만장했던 왕조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자세한 내용은 각 황제의 개별 항목 참조.
2.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북아프리카의 아프리카 속주 동쪽에 위치한 트리폴리타니아 속주(오늘날의 리비아 타라불루스 지방) 내의 로마 식민도시 렙티스 마그나 태생으로, 조상은 포에니 전쟁 이후 이탈리아에서 북아프리카로 건너간 이탈리아 평민이었다. 조부대부터 아프리카 속주, 누미디아 속주, 트리폴리타니아 속주 일대에서 법률가, 행정가로 명성을 쌓았던 푸닉 최상류층 태생으로, 조부의 형제들은 일찍부터 조상들이 살던 이탈리아로 거주지를 옮겨 집정관, 법무관, 속주 총독, 황제 위원회 위원 등을 배출했다고 한다.태어날 때부터 잘 살기로 유명한, 옛 카르타고 일대(푸닉 지방)에서도 최상류 기사계급 출신인데다, 조부 푸블리우스 시절부터 법률, 행정쪽에서 수많은 명사들을 배출해온 집안 출신답게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재위 기간 내내 스스로를 항상 군인으로 강조했다고 해도, 즉위 이전까지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그리스 아테네로 유학까지 갔다 온 엘리트이자 변호사, 웅변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상 판노니아 총독 시절, 페르티낙스의 암살 이후 로마가 내란에 빠진 틈을 타 황제를 자칭한 뒤 형 푸블리우스 게타, 친척 어른 셉티미우스 아페르 등의 도움을 받아 판노니아와 다누비우스(다뉴브) 강 전선 일대의 주력 군단들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한 후 황제로 인정받았다. 로마 입성 후 이탈리아 출신들로 구성된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산시키고, 자신이 이끌었던 판노니아 군단병들로 새로이 프라이토리아니를 재건했다[9]. 이후 정적인 니게르와 알비누스를 모두 제압하고 황제에 등극한지 4년 만인 197년 마침내 로마 제국 전역을 장악했다.[10] 내란 당시 자신을 반대한 자들을 모조리 숙청해버린 데다가, 원로원의 권위를 무시한 채 콤모두스에게 내려진 기록말살형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던 탓에 원로원과의 관계는 재위 기간 내내 냉랭했고[11],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정적들을 처단한 까닭에 민중들에게 푸닉 술라(북아프리카의 술라)라는 나쁜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단독 황제 등극 이후 그의 치세 때 다시금 로마에 평화와 경제적 안정[12]을 가져왔다는 점과 ‘빵과 서커스’를 시혜하고 하드리아누스 이후 처음으로 로마에 대규모 공공건축 사업을 재개한 점, 부정부패 척결과 이탈리아 경제 재건 등에 힘을 쏟은 까닭에 대중들에게는 꽤나 지지를 받았다.
그는 군대의 지지로 제위에 올랐고, 지지 기반도 일반 군단병들이었던 까닭에 스스로를 '군인 황제'라고 칭했고, 사이가 상당히 틀어진 원로원의 구성원들을 갈아치우며 자문기관화시키고, 군단병들로부터 권위를 빌렸다. 또한 병사들의 처우를 상당 부분 개선해줬다. 따라서 군대 역시 세베루스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월급 인상 + 보너스 + 복무 중 결혼 허용은 로마 군인의 오랜 숙원이었는데, 갈수록 군인을 충당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세베루스는 병사들에게 무얼 해줘야 하는지 섬세하게 아는 황제였다. 또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여러 원정을 성공시키면서 군인들로부터 호감을 얻었다.
선군정치를 했고, 적극적인 영토 확장을 시도하기도 한 황제였던 그는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속주화하고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하여 약탈했으며 스코틀랜드 원정도 진행해 칼레도니아 전역을 정복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안토니누스 방벽을 일시적으로 재점령하고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보수하기도 했다.
2.2. 카라칼라(211~217)
황제로 사용한 정식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로, 줄여서 안토니누스 또는 세베루스 안토니누스라고 했다. 본명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였다. 당대부터 통칭으로 쓰인 '카라칼라'는 그가 애용한 갈리아식 망토를 일컫는 별명이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솔직하고 직설적인 언행으로 일반 병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황제였다. 하지만 지나친 거만함과 사치스러운 사생활, 잔혹한 행동이 문제가 돼, 일반 병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로마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10세도 안 된 나이에 카이사르가 됐고, 10세의 나이에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공동 황제가 됐다. 14세 때 아버지의 동향 친구이자 최측근인 근위대장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딸 플라우틸리아와 결혼했는데, 17세때 사이가 극도로 틀어진 장인과 처가집 식구들을 처남의 어린 자녀들[13]을 제외하곤 반역 혐의를 이유로 살해하고 아내를 외딴 섬으로 추방시켰다. 10대때부터 거만하고 과격한 성격으로 악명을 떨친데다, 분노조절장애와 비열함, 잔인함으로 살아 생전부터 폭군으로 공인된 까닭에 어머니 율리아 돔나가 카라칼라의 동복동생 게타의 미래를 걱정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공동 황제를 같이 내려줄 것을 제안했다고 전해진다.
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 원정에서 병사한 이후, 연년생의 동복동생 게타와 로마 제국을 공동통치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이후, 원수보다 못한 사이였던 친동생 게타를 여러번의 암살 시도를 거쳐 죽이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어머니 돔나의 편지를 위조해 동생 게타를 모친의 방으로 유인한 뒤 자기 손으로 직접 암살했다. 이후 게타의 친구, 지지자를 시작으로 자신이 게타를 죽인 조치를 열렬히 지지하지 않은 셉티미우스 아페르 가문 등 방계 친인척과 옛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족들, 원로원 의원, 장군, 시인, 유명배우, 전차기수, 프로검투사 등 로마 각계의 유명인사들을 인간사냥하듯 모조리 참살했다. 그리고 이때, 추방시킨 아내를 사람을 보내어 죽인 뒤 그 머리를 자신의 앞으로 가져오게 했다.
허나 동생 게타를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 이후부터 종종 환청, 환각에 시달렸고, 동생과 일가 친척을 죽인 죄책감으로 발기부전을 겪게 돼 20대의 젊은 나이에 후사도 볼 수 없게 되는 고통에 시달렸다. 이에 그 고통을 씻고자, 일찍부터 제국 순방을 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모든 내치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 다 맡겨놓고, 병사들과 먹고 자며 제국 여기저기를 오가며 로마를 위협한 모든 적을 회복불능 상태로 박살냈다. 서쪽에서는 게르만족을 예방전쟁을 명목삼아 보이는 대로 박살내 원로원으로부터 승리를 가져다 줬다는 찬사를 받았고, 동쪽의 파르티아를 빈사 상태로 만들어 놓고 흐트러진 동부 방어선을 재정비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은 카라칼라의 조카이자 법적인 손자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재위 말년인 235년까지 유례없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해 제국 내 모든 자유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것이 카라칼라 시기의 일이었다. 법의 배경이나 목적에 대해서는 현대 학계에서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14]. 세금을 더 걷기 위함일 뿐이라는 디오 카시우스의 평가부터, 레기온(군단)의 질적 저하를 해결하기 위한 입대 대상 확대[15], 《로마법》의 보편적 적용, 로마인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의 확립 등에 주목하기도 한다.
군사적으로는 비교적 재능이 있어서 게르마니아 원정 과정에서 꽤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즉위 전부터 대립하던 장인과 아내를 죽인 전례라든지, 동생이자 공동 통치자로 지명된 게타를 직접 칼로 찔러 죽여버린 것에서 보이듯이 성격이 난폭했고 다혈질인 데다 잔인했다. 국고가 고갈나자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서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해 ‘언 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위기를 넘겼으나, 결과적으로 로마 시민들과 속주민들이 세금으로 고통받고 제국 전역에서의 수탈이 심해져 민생이 피폐해지고, 제국의 세수 체계를 완전히 망가뜨렸다라고 디오 카시우스는 카라칼라를 신나게 까고 있지만 현대 많은 고고학적 성과로 디오의 글이 과장되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제국의 재정은 특정 속주의 세금을 면제해 줄 정도로 여유가 있었으며, 제국 경제 역시도 안토니누스 역병 시기를 견뎌내며 견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당대 로마인들의 기록이나 현대 연구 결과처럼 카라칼라는 디오의 주장처럼 분명 내치 재능이 부족한 황제였다.[16]
군사적으로 뛰어난 황제였고, 과격하고 잔혹했어도 제국 순방을 하면서 싸움박질만 하지 않고 속주 총독들의 기강을 확실히 잡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개인적인 성격적 결함과 동생 등 정적 및 죄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결과, 폭군으로 공인돼 수없이 많은 암살 시도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자신도 이런 결점 때문에, 파르티아 원정길 도중 근위대에게 암살되었다. 카라칼라의 뒤를 이어 마크리누스가 등극하면서 잠시 동안 세베루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2.3. 게타(21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둘째 아들이자 카라칼라의 동복 친동생으로 형과는 연년생 형제였다. 재위 기간은 209년부터 211년까지이며, 이 중 209년부터 211년 2월 4일까지는 아버지 세베루스와, 211년 2월 4일부터 같은 해 12월 26일까지는 형 카라칼라와 공동 황제였다. 아버지 세베루스 사후 211년 카라칼라와 함께 제위를 이어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한 살 위인 형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형인 카라칼라의 다혈질적이고 난폭한 성격 못지 않게 그 역시 여자를 밝히고 사치스러웠으며 성품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형제 편에 붙은 사람들의 이간질과 중상모략이 계속 벌어지면서 부모조차 어떻게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원수가 됐다. 그래서 205년 1월, 형과 공동 집정관에 취임할 당시, 불화가 너무 심해 아버지가 명령을 내려 가까스로 취임하기도 했다. 208년부터 아버지의 명령으로 형과 아버지를 따라 브리타니아 전쟁에 참전했으며, 아버지가 211년 사망하자 즉위 후 로마로 귀환했다. 이후 형과 황궁을 반으로 나눠 사용할 정도로 반목했는데, 211년 12월 형에 의해 어머니 앞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이때 카라칼라는 동생을 거짓 편지로 속여 어머니 방으로 유인했으며, 어머니 앞에서 동생을 칼로 찔러 죽였다. 게타는 어머니에게 안겨 사망했는데,“어머니, 살려주세요. 형이 절 이렇게 했어요”
라며 말했다고 전해진다. 게타가 죽은 뒤, 카라칼라는 동생의 친구들과 지지자 등 20,000여 명을 재판없이 모조리 죽였으며, 제 손으로 죽인 동생을 기록말살형시키도록 추인한 뒤 로마 내 모든 황제 가족 초상화와 조각상에서 게타의 흔적들을 지워버렸다.2.4. 엘라가발루스(218~222)
카라칼라의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동생인 율리아 마이사에 의해 마크리누스를 제거하기 위한 패로 쓰여 황제로 추대됐다. 즉위 당시, 로마군에게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로 소개됐는데, 즉위 전까지는 외가가 있는 시리아 일대에서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섬기는 사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 황제로서의 자질이 0점에 가까웠고, 로마 문화에 대한 이해 역시 0점이었다. 그래서 첫 등장부터 로마인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매일같이 정상인의 범주에서도 이해못할 행동들을 선보였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엘라가발루스는 희대의 돌아이로 공인되고 있다.애초에 전해지는 사료도 거의 없고, 고대 사료 특유의 과장성을 생각하면 어디까지 진실인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상상 속에서 일어날 기행들을 실제로 다했다. 또한 거리낌없이 동성애를 자행하고[17] 심지어 베스타 여사제를 강간하기도 했다.[18] 이런 까닭에 훗날 엘라가발루스의 발언이 와전돼 트렌스젠더 수술을 받았다는 말조차 나올 정도(...)
다행히 통치 자체는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배후에서 처리했기 때문에 콤모두스 시대와 같은 개판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섭정 역할을 한 외할머니, 어머니, 이모가 세나쿨룸에 소속되도록 황제가 입법한 탓에, 황실 여인들이 대놓고 원로원에 상시출석한 뒤 발언권을 강하게 행사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가짜 안토니누스' 이야기가 나오던 황제의 권위가 떨어졌다.
4여년간 재위에 있는 동안, 말 그대로 모든 계층의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최악이었다. 따라서 엘라가발루스로 인해 멸문될 것을 우려한 율리아 마이사는 둘째딸 율리아 마마이아가 낳은 외손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선택해, 그를 양자로 삼을 것을 엘라가발루스에게 요구했다. 처음에는 이 요구를 별다른 생각없이 받아들였던 엘라가발루스였지만, 알렉산데르가 대중과 병사들에게 인기를 끌자 갑자기 질투심이 발동했는지 자신의 근위대에게 알렉산데르를 암살할 것을 명령(...)했다. 애초에 암살 명령 자체가 정신이 나간 짓인데, 암살 명령을 은밀히 킬러를 고용한 것도 아니고 로마의 공적인 군대, 그것도 로마군의 꽃이라고 불리는 근위대에게 명령했으니 엘라가발루스가 얼마나 미친놈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엘라가발루스의 정신나간 명령을 들은 근위대장은 애초에 부하들과 함께 알렉산데르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 명령을 고스란히 반대로 실행했고, 엘라가발루스는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함께 화장실에 숨어있다가 조리돌림을 당하고 끔살되었다. 이후 어머니, 최측근과 함께 시신의 팔다리가 짤려 로마 거리에서 조롱을 받고, 테베레 강과 연결되는 하수구에 버려졌다.
2.5. 세베루스 알렉산데르(222~235)
본명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Marcus Julius Gessius Bassianus Alexianus). 입양 후 개명한 이름은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Caesar Marcus Aurelius Alexander ).엘라가발루스와는 외사촌 관계로, 221년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세베루스 왕조를 유지하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소년으로 로마 정계에 등장한다. 율리아 마이사는 재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부터 엘라가발루스를 옹립하고 세베루스 왕조를 재건시켜준 동방 로마군을 시작으로 하여 항명과 반란이 일상화되자 위기감을 느꼈다. 장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엘라가발루스가 온갖 기행, 폭정을 저지르면서 무너질 위기를 재차 실감한다. 하지만 그녀는 장녀와 함께 엘라가발루스를 앞세워 원로원 안에 세나쿨룸을 설치하고 공개적으로 정사에 개입할 뿐이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가 베스타 여사제 아퀼리아 세베라를 강간하고 결혼을 선포한 일 직후, 원로원이 강하게 항의하고, 세베루스 왕조 재건과 율리아 마이사 권력 유지에 도움을 준 근위대장 겸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이 분명히 경고하고 등을 돌리면서 율리아 마이사는 왕조 존속과 본인의 안전을 목표로 생각을 바꾼다. 그녀는 장녀와 경쟁 중인 차녀 율리아 마마이아와 손을 잡기로 한다. 그리고 차녀 마마이아의 두 아들 중 나이가 어린 알렉시아누스를 세베루스 가문에 입양시켜 오늘날 잘 알려진 이름인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로 개명시키고 후계자로 선언하도록 엘라가발루스를 속여넘긴다.
알렉산데르는 형제와 함께 일찍부터 로마식 교육을 받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 모두 전형적인 로마인 억양을 구사했다. 귀족 예법을 숙지했고, 성격이 진중하고 차분했으며, 스스로 로마인이라는 자각이 대단했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과 비슷한 조건을 가진 형과 달리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매우 순종적이었고, 코마존, 마리우스 막시무스, 디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등 마이사의 친구이자 원로원 중진인 인사들에게 아주 공손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는 공개 직후부터 원로원과 근위대에게 호감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는 알렉산데르 이름으로 근위대, 군대, 수도경비대, 소방대에게 현금을 보너스로 지급했다.
이후 뒤늦게 외조모에게 속은 것을 안 엘라가발루스는 그를 살해하기 위해 두 근위대장과 근위대에게 알렉산데르를 제거하라고 지시를 내린 후 알렉산데르와 함께 근위대 병영으로 들어가 황제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선언과 알렉산데르 처형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근위대장으로 있던 코마존, 안티오키아누스은 이미 등을 돌린 뒤, 엘라가발루스가 자신의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함께 근위대 앞으로 오도록 모든 판을 깔아 놓고, 근위대가 항명하면 여세를 몰아 알렉산데르를 옹립할 작전을 시행 중이었다. 두 근위대장의 예상처럼, 근위대는 오히려 알렉산데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겁에 질려 황궁으로 도망친 엘라가발루스가 그 모후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총신 히에로클레스 등과 함께 모조리 살해되면서 222년 3월 11일, 근위대 병영 안에서 병사들의 충성 아래 14세의 나이에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데르는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변방 시리아 출신이라는 콤플렉스가 상당히 컸고, 로마 정계에 데뷔할 당시 사실상 기록말살형 선고를 받고 몰락한 전임자의 양자로 세베루스 가문에 입양되었다는 점 때문에 정통성의 한계가 뚜렷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3월 11일 근위대 병영에서 차녀 율리아 마마이아, 외손자 알렉산데르와 있던 외조모 율리아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 시해 후 다시 영웅으로 떠오른 코마존, 마리우스 막시무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등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들은 율리아 마이사에게 원로원 중진들이 내건 모든 조건을 수용한다면, 대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게 신격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손자라는 타이틀을 주게 하여 문제 많은 엘라가발루스에게서 기인하지 않는 별개의 정통성을 세우는 방식으로 면을 세워 주겠다고 밝혔다. 결국 율리아 마이사는 원로원 중진들이 내건 모든 조건을 수용하겠다고 밝혔고, 이틀 뒤인 222년 3월 13일 알렉산데르는 원로원의 공식 승인 아래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됐다.
이때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는 울피아누스, 파울루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디오 카시우스 등과 손을 잡고 울피아누스에게 임페리움(통솔권)과 근위대장 자리를 동시에 내려 안정을 도모한다. 하지만 이 조치를 하면서, 율리아 마이사는 자신의 책임을 혼란 수습에 만전을 기울인 인사들에게 어거지로 뒤집어 씌워, 안티오키아누스, 게미나투스 등을 살해했다. 이 일은 당시에는 유야무야 넘었지만 227년부터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정부가 근위대, 로마군에게 온전한 지지를 받지 못한 시발점이 된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종교적 광기에 휩싸여 있었던 전임자와 달리 천성적으로 조용하고 진중하며 굉장히 로마 귀족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레 엘라가발루스와 비교됐고, 곧 카라칼라와도 대조되면서, 어릴 때부터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가 됐다. 하지만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도 부, 모가 각각 시리아인, 아랍인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약점이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일가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 이 부분에서도 정통성상 약점이 뚜렷했다. 이에 알렉산데르와 그를 보필한 인사들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즉위 직후부터 황제의 부계를 강조하는 족보를 위조해 만들고 이를 선전했다. 그렇지만 이런 선전보다 강조된 일은 알렉산데르가 생활에서도 철저히 로마인으로 사는데 최선을 다했던 모습이었다. 또한 여걸인 외할머니 마이사가 울피아누스를 필두로 한 법학자들, 원로원 내 핵심 권력가들인 마리우스 막시무스, 디오 카시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등과 손을 잡아 원로원 내부에도 지지세력을 만들었으며, 이들의 추천으로 선정한 당대의 훌륭한 고문들의 보좌를 받았다.
재위 내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로 돌아가자'라는 모토 아래 내치에 상당히 신경썼으나 통치 방식 등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달리 고전적인 원수정 스타일과 비슷했다고 한다. 따라서 당대 로마인들로부터 이런 평가를 듣는다.
“그의 치세는 13여년에 불과했지만, 로마가 카라칼라 이후 하락의 길로 가지 않은 것은 알렉산데르 덕분이다”[19]
그러나 곧 위기는 시작됐다. 집권과 군대 장악에 도움을 준 코마존, 마리우스 막시무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줄줄이 다양한 이유로 정계 은퇴를 했다.더해 외조모 율리아 마이사가 외손자와 본인 일가의 버팀목 역할을 해줄 울피아누스를 위한다며, 그의 경쟁자가 됐거나 위험요소가 될 수 있는 장군, 관료를 기습 체포한 다음 처형해 근위대와 군대의 신임이 서서히 추락한다. 특히, 알렉산데르 즉위 직후, 엘라가발루스 시해의 1등 공신인 전직 집정관 출신 근위대장 안티오키아누스가 율리아 마이사가 한 악행까지 뒤집어 쓰고 처형된 사건과 울피아누스의 군대 경력 전무로 보완재로 동료 근위대장이 된,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 출신의 게미나투스가 마이사의 지시 아래 살해된 일은 근위대의 불만을 제대로 산다. 그러다가 228년, 227년에 벌어진 요란한 황제의 이혼, 초여름에 벌어진 로마 폭동 진압 후의 미흡하고 의문스러운 대처로 제대로 열받은 근위대는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된 근위대장 울피아누스를 황궁 안에서 마구 찔러 죽인다. 울피아누스 암살은 근위대 전체, 수도 경비대, 소방대, 황궁 경호대가 힘을 합쳐 벌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 모후 율리아 마마이아는 자신들 눈 앞에서 울피아누스가 살해되는 것을 본 뒤 겁에 질렸고, 이후 뒷처리 문제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근위대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설상가상 여자이지만 상당한 정치력으로 원로원을 통제해주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마저 225~226년경 죽으면서 치세에 먹구름이 끼게 된다.
외할머니가 서거할 당시에도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모든 권력은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 손에 들어갔는데, 율리아 마마이아는 율리아 마이사보다 능력은 부족하면서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자만은 더 컸고, 정치적인 감각은 부족하면서 개입은 지나치게 많이 하였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어머니에게 정신적으로 완전히 종속된 마마보이였다. 그 결과, 모든 로마인은 공개적으로 두 사람을 합쳐 알렉산데르 마마이아라고 부르며 이를 조소했다.
율리아 마이사가 살아있던 225년 당시, 황제의 모후 마마이아는 아들의 혈통적, 사회적 약점을 만회하고자 집안으로는 뼈대있는 로마 귀족이고 조상으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죽마고우였던 할아버지를 두었으며 개인적으로도 사회적 명망이 대단했던 루키우스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마크리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자리를 주고, 그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다가 2년만에 소박을 맞히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알렉산데르의 모후 마마이아는 227년 8월 황제의 결혼 2주년 기념을 앞둔 날 속에서 자신의 며느리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가 아우구스타 칭호를 수여받은 일에 큰 불만을 품는다. 그녀는 "나만 가져야 할 '아우구스타'를 왜 며느리도 받아야 하냐"며, 이때부터 며느리를 온갖 이유로 구박했다. 그리고 8월 말, 결혼한지 2년이 되었음에도 임신조차 못한다며 애써 결혼시킨 명문가 태생 황후를 내쫓고, 아들 알렉산데르에게 이혼하라고 명한 다음, 며느리에게 사람을 보내 스스로 추방을 강요한다.
이렇게 되자 보다 못한 원로원 중진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소 세네키오 알비누스 등 극소수나마 있던 세베루스 왕조 창건 협력자 겸 율리아 마이사 친구들이 정계 은퇴 후 은둔하거나 등을 돌린다. 하지만 율리아 마마이아는 신경쓰지 않고, 이를 기회삼아 '국가의 어머니', '병영의 어머니' 칭호를 받아 낸 뒤, 스스로 고안해낸 '인류의 어머니', '세계의 어머니' 칭호까지 통과시키고, 부정적 생각을 보여준 인사들을 반역죄로 고발해 그들을 죽이고 이들 재산을 전부 차지했다. 따라서 황궁에서 추방되고 이혼 절차를 밞게 된 딸에게 마마이아가 자진추방을 강요한 것을 겪으며 위기를 느낀,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는 알렉산데르와 울피아누스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알렉산데르는 이를 외면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딸과 함께 근위대에게 도움을 요청해 근위대가 궁중에서 벌어진 고부갈등에 개입하는 초유의 촌극까지 벌어진다.
이미 전임자의 '가짜 안토니누스 파동', 이어진 코마존 은퇴 선언, 안티오키아누스 처형, 게미나투스 처형 때문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정부를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고 있던 근위대와 군대는 울피아누스 암살과 율리아 마마이아의 전횡을 거치면서 점점 더 황제로부터 멀어져 갔다. 이제는 가정법원 역할까지 맡게 생긴 근위대는 율리아 마이사가 사돈댁을 반역죄로 거의 멸문시키면서 자신들까지 징계받자, 분노했다. 하지만 당시 울피아누스는 건재했고, 일단 근위대는 좀 더 지켜보자는 식으로 참는다. 그렇지만 상술한 로마 폭동 후, 울피아누스와 율리아 마마이아가 시민들과 화해 후 올바른 대처를 한 근위대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 존경받던 두 대대장을 신속히 처형한 일은 울피아누스 암살로 이어진다. 이제 모든 근위대는 황실의 통제를 따르지 않게 되었다. 율리아 마마이아는 아들 알렉산데르와 함께 이를 수습한답시고 디오 카시우스에게 집정관 자리를 주었지만, 근위대는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디오를 증오해 그가 집정관에 당선되면 울피아누스처럼 죽여버리겠다고 떠들었고 이는 실제 움직임으로까지 번졌다.
위기를 느낀 디오 카시우스는 아무리 집정관 선거가 형식적인 절차가 되었다지만 자기가 출마한 선거를 놔두고 캄파니아 별장에 은둔하면서 황제와 모후가 어떤 언질이라도 해주기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디오는 집정관 취임과 동시에 황제에게서
"당신을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고 로마와 이탈리아는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그만 낙향해 몸이라도 보존하시오"
라는 로마 건국 사상 유례없는 조언을 받았고, 가족들 대부분을 남겨두고 아내와 고향 비티니아까지 망명하듯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은퇴생활을 하다가 죽는 처지가 됐다.
그럼에도 알렉산데르는 성인이 된 뒤, 내정 측면에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후 최고 수준으로 로마 제국을 안정시켰다. 그렇지만 군대 장악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이런 상황에서 사산 왕조가 페르시아 부흥 기치를 내걸며 로마 제국 동부의 중심부인 시리아 코엘레 속주의 주도 안티오키아 목전까지 침공한다.
다행히 이 위기는 로마군의 병참능력과 애매모호한 승리를 교묘히 포장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정치술로 모면하고, 제국 동부의 민심은 나락으로 떨어졌으나 어쨌든 수도에서는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었는데, 개선식을 거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게르만족이 쳐들어오면서 이번에는 북쪽으로 친정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초반에는 승기를 잡았는데, 여기에서 그는 마마보이 기질을 못 버리고 어머니 마마이아의 말만 들어서 돈을 주어 평화협정을 맺으려고 했다. 장군들과 게르마니아 일대 로마군들은 그에게 완전히 실망했고, 불만을 가진 부하들에게 모자가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후 어쨌든 시원하게 싸워주는 것 하나는 잘하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황제에 오르면서 세베루스 왕조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로마는 '위기의 3세기'라고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3. 세베루스 가문의 시리아 여제들
세베루스 왕조 Domus Severana | ||
시리아 에메사 왕가 |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 | 율리아 돔나 | |
카라칼라, 게타 시대 |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 |
엘라가발루스 시대 |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 |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 |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 |
세베루스 왕조가 이전의 여러 세습 왕조와 비교해 가장 특이했던 점은,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여동생 셉티미아 옥타빌라가 있음에도, 그녀의 영향력이 거의 없고, 창건자의 아내와 처가 식구들이 그 실권을 장악한 부분이었다. 이런 모습은 모계의 영향이 강했던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트라야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부분이었다.
율리아 돔나와 그녀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를 중심으로 한 세베루스 왕조의 두 아우구스타는 당대부터 그 힘이 엄청났다. 이들은 세베루스 황제에게 아우구스타, 황녀 지위를 각각 받았고, 이 공식 지위를 기반삼아, 노골적으로 로마 제국 전반의 일에 개입했다. 그 결과, 율리아 돔나 자매의 가문인 에메사의 율리우스 가문[20]은 입양 관계와 제위 계승 과정에서 창건자 아내의 친정 가문이 황실 안팎에서 가계가 단절되는 순간까지 힘을 행사했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시리아 여제들로 불린 에메사 왕가 이야기는 곧 세베루스 왕조의 역사이자 정체성으로 서술된다.
3.1. 에메사 왕가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의 출신 가문으로 유명한 에메사 왕가는, 삼프시게라미드(Sampsigeramid) 또는 삼프시게라미(Sampsigeramid) 혹은 삼프시게라무스(آل شمسيغرام (아랍어)/ʾĀl Šamsīġirām(라틴어))으로도 불린 가문이다. 이들은 공화정 시절부터 로마의 오랜 속국 왕조(클리엔테스 지방정부)로, 로마시민권자로 사용한 대외적 성씨는 카이사르에게 하사받은 율리우스였다. 하지만 이들의 계급은 파트리키, 노빌레스가 아닌 에퀴테스(기사계급)에 준한 평민 내지 에퀴테스 신분에 준한 대우를 받은 속주 향토 호족이다.이 가문 출신의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자매 및 마이사의 차녀 율리아 마마이아와 친구, 협력자였던 디오 카시우스는 이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라비아 부족의 왕"
동시에 디오는 그들이 귀족이 아니라고 분명히 전했다. 이런 디오의 기록처럼 동시대 역사가이자 시리아 일대에서 관료 생활을 한 헤로디아누스 역시 그들의 혈통이 고귀하다고 기술하지 않고, 단순히 시리아에 살던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또 헤로디아누스는 혈통이나 습속은 페니키아인이라고 적었다.이런 로마인, 로마화된 그리스계 로마인의 시선처럼 에메사 왕가 출신의 인물 역시 비슷하게 적었다. 이 가문 출신인 헬리오도루스 에메세누스 또는 에메사의 헬리오도루스가 자신의 집안을 기록에 적었는데, 그는 본인 일가를 이렇게 표현했다.
"태양계의 페니키아인들"
그렇지만 고대 기록, 오늘날 연구 등을 종합하면, 에메사 왕가 또는 삼프시게라무스 가문은 바알을 태양신으로 숭배하고, 페니키아 풍습에 동화된 아랍인으로 소개되고 있고, 실제 평가 역시 다수설은 오늘날의 레바논, 시리아의 토착 아랍인으로 평한다.돔나, 마이사 자매의 고향 에메사는 전통적으로 아랍어를 우선적으로 사용하면서도, 그리스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했는데, 그리스어는 아랍 사투리가 심해, 그리스어 화자들조차 알아 먹는데 애를 먹었다. 또한 에메사는 로마 통치 아래에서 라틴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장려됐다.
이런 배경 때문에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자매는 물론, 같은 왕가 출신의 헬리오도루스 에메세누스, 자매의 사촌 파피니아누스 모두는 라틴어, 그리스어, 현지 토착언어 모두 사용이 능했는데, 율리아 돔나와 율리아 마이사는 사촌오빠 파피니아누스와 함께 라틴어와 그리스어 발음이 표준화되고 정갈했다. 또 이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내전을 치룰 무렵 전후부터 로마 시민권을 보유해온 터라, 이런 점에서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는 로마인 자각이 분명했다. 특히, 율리아 마이사는 아랍어 사투리가 아주 강했던 외손자 엘라가발루스 황제와 달리 이국적 색채가 억양상 덜했다.
그 이유에는 자매의 아버지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장인, 카라칼라와 게타의 외조부 영향도 컸다. 그는 동시대부터 이런 평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태양의 사제였으며, 페니키아인들은 그를 엘라가발루스라고 불렀다."
즉, 돔나, 마이사의 아버지는 현지 시리아 지방 주민들 사이에서도 아랍인들이 그들 언어로 "산의 신"이자 태양을 모신 바알을 뜻한 엘라가발 숭배 색채가 매우 강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영향 아래 율리아 마이사의 장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차녀 율리아 마마이아와 이들의 자녀는 각각 에메사 문화에 극단적으로 따르는 성향, 에메사 문화와 거리를 두면서 철저히 로마인으로 남겠다는 성향을 보였다. 3.2. 율리아 돔나
세베루스 왕조의 여자 황족들은 이전까지의 황후, 황녀들과 달리, 모두 창건자의 여자 형제 혹은 조카가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 창건자의 황후 율리아 돔나 외에는 모두 처가 식구들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세베루스 황제의 여동생 셉티미아 옥타빌라가 제대로 된 지위를 받지 않았고, 그녀의 자녀 중 장성한 아이는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셉티미우스 아페르 옥타비아누스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로마에서 거주한들, 실제 생활 지역은 푸닉 지방이었다가 상경한 상황이었고,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감시와 견제 속에서 알아서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이는 세베루스 황제보다 먼저 로마로 이주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에 이미 집정관까지 지낸, 세베루스 황제의 사촌형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와 그의 자녀들 역시 비슷했다.더군다나 세베루스 황제는 일찍부터 자신의 본가, 외가의 연합만으로는 도저히 드넓은 제국을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해, 가장 믿을 수 있는 아내 율리아 돔나와 처제 율리아 마이사, 처제의 남편으로 본인의 로마 진군부터 함께 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에게 의도적으로 많은 지위와 권력을 내줬다. 그 결과, 세베루스 왕조는 창건자 생전부터 이들 세 명을 중심으로 한 처가 식구들이 자신들이 황제에게 받거나, 황제를 움직여 받아낸 지위로 로마제국과 황실 내 권력을 휘두르게 됐다. 이때 그들은 황제를 대신해 세나쿨룸을 만들어 직접 정사에 관여하고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더 강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를 아예 여제(女帝)라고 표현하고, 마이사의 딸인 율리아 마마이아의 경우에는 여제 이상의 여제로 표현하면서, 과거 아우구스타 중 노골적으로 정사에 관여한 소 아그리피나보다 훨씬 노골적이고 대담했다고 평가한다.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로 이어진 시리아 여제들은 세베루스 왕조의 성공과 실패 모두에서 절대적이었다. 이들은 모두 아우구스타 지위를 독점했고, 그 지위 이상의 추가 지위를 만들어, 본인들이 황제라고 해도 좋을 환경을 조성했다. 따라서 당대부터 오늘날의 레바논에서 그리멀지 않은 에메사 출신의 시리아 여성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시리아의 여왕들이라고 불린 평가 그대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걸고 주화에 얼굴과 본인이 바라는 선전 구호 등을 새기게 했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두 번째 부인인 황후 율리아 돔나, 돔나의 여동생인 율리아 마이사 외의 시리아 여제들은 그 정통성이 매우 취약했다. 그 이유는 세베루스 황제에게 아우구스타, 황녀 칭호를 합법적으로 부여받고, 카라칼라에게 추가로 그에 어울린 명예를 받아낸 이는 오직 율리아 돔나 자매 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카라칼라가 게타를 살해한 뒤 율리아 마이사의 두 딸인 외사촌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에게 황녀에 준하는 지위를 내리긴 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그에 준하는 지위'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 결과, 창건자의 직계가 불과 집권 2대만에 끝나고 다시 세베루스 왕조가 엘라가발루스 등장 속에서 이어질 때, 이 부분에서 정통성상 큰 약점을 갖게 된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아우구스타 지위를 그 정통성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는 엘라가발루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율리아 마이사, 코마존, 안티오키아누스 등에게 제거된 뒤, 아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즉위하면서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아낸 율리아 마마이아도 비슷했다. 즉, 창건자에게 황녀 내지 그에 준하는 권한을 보유한 이는 율리아 돔나 외에 율리아 마이사 정도였고, 마이사의 두 딸은 그들의 아들이 집권하면서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아낸 까닭에 그 정통성이 취약했다. 따라서 이들은 왕조의 성립부터 멸망때까지 제국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해도, 그 기본 전제는 동서고금의 황녀들과 달리 혈통적 후광이 전혀 없었다. 하여 이전 세습 왕조의 황후, 공주들과 달리, 본인들이 스스로 취하거나 얻어낸 지위 아래 특정개인의 역량이 절대적이었던 특징이 강했고, 이 부분은 마지막 시리아 여제인 율리아 마마이아가 아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자신의 밑에 종속시키고, 며느리를 쫓아내는 악수까지 벌어지게 했다.
하지만 이는 로마 사회의 특성, 로마 제정의 특성상 시리아 여제들이 부각될수록 황제와 황실의 위엄이 추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악영향은 엘라가발루스 즉위 직후 원로원에 출석해 정사에 직접 관여하면서, 권력을 쥔 율리아 마이사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공존 속 상호 견제, 아들 알렉산데르를 올리기 위해 노력한 율리아 마마이아의 시도 등 속에서, 함량 미달의 엘라가발루스 치세를 더 큰 혼동으로 몰았다. 그리고 이는 율리아 마마이아의 아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최후의 승리자가 됨에도 아우구스타 지위 소유 문제로 벌어진 황실 내 권력투쟁이 왕조 멸망때까지 불씨로 남게 됐다.
창건자의 아내이자 후임 황제들의 어머니인 율리아 돔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시리아 지역에서 근무할 때, 재혼한 여인으로 다마스쿠스 북쪽의 에메사 출신의 시리아인이다. 그녀는 과거 리비아 드루실라를 연상시킬 만큼 철학과 교양이 깊었고, 남편 생전부터 남편과 아들 카라칼라가 외정에 주력하는 사이 내정을 사실상 주관할 정도로 정치적 자질이 빼어났다. 따라서 과거 리비아 드루실라, 대, 소 아그리피나 등 정치에 개입했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후, 황녀들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녀의 권력은 카라칼라와 게타, 카라칼라 단독 통치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능력과 별개로 리비아 드루실라, 폼페이아 플로티나, 대 파우스티나와 달리 정치적 역량 외의 측근 관리, 지위를 통한 위엄 외의 조율 능력이 굉장히 떨어졌다. 따라서 카라칼라가 212년부터 단독통치를 한 이후부터 이런 부분은 그녀와 아들 카라칼라 모두 어이없게 무너진 원인 중 하나가 됐다.
3.3. 율리아 마이사
그녀의 가문은 상술한 그대로 에메사에서 대대로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모시던 토착 신관 집안이었는데, 황후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처제) 율리아 마이사는 자신의 언니 이상으로 능력이 상당한 여걸이었다. 그녀는 미녀였지만, 언니 돔나와 달리 골격과 이목구비가 크고 중성적 매력이 넘쳤다. 성격 역시 언니와 달리 상무적 기질이 강하고, 남성적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자신을 20대 중반 ~ 30대 초반으로 초상을 묘사하게 명한 언니와 달리 항상 자신의 나이를 50~60대의 완숙한 노부인으로 묘사하게 할 정도로 원숙함, 강인함을 중요하게 여겼다.이런 성격 차이처럼 율리아 마이사는 언니의 남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생전부터 남편이 왕조 창건의 공신이 되도록 했다. 그녀는 남편이 오스티아 항구에서 곡물 관리를 맡던 관료였을 당시, 남편에게 형부의 로마 진군에 합류하게 했다. 그리고 적절히 나설 때와 나서지 않을 때를 구분하면서, 영리하게 행동했고, 시리아에서 살면서 형부를 도우며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몰락에 기여했다. 그 공로로 율리아 마이사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단독황제가 된 직후, 일찌감치 황녀 지위를 얻었고, 황족이 됐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치세 내내, 그녀는 언니 부부의 도움 아래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조카 카라칼라, 게타가 제위에 오른 이후부터는 정사에 개입한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그녀는 골육상쟁을 벌인 조카들 아래에서 정치 개입의 기회를 얻고도 차분히 기다리면서, 팔라티노 황궁에서 두 딸, 사위들과 거주하는 식으로 자신을 철저히 낮췄다. 그 결과,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살해한 직후, 율리아 마이사의 두 딸인 자신의 이종사촌자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에게 황녀의 준하는 권한을 부여하며 반(半) 황족 반열에 올려줬다.
그러다가 조카 카라칼라가 어이없이 암살되고, 언니가 충격으로 자살한 이후 로마에서 추방됐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이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때 마이사는 첫째 사위, 남편이 연달아 병사하고, 둘째 사위가 첫 결혼에서 얻은 딸 내외와 함께 에메사로 가던 중 마크리누스의 명으로 처형된 상황에서도 교묘한 정략을 펼쳤다. 그녀는 마크리누스의 니시비스 전투 이후부터 완전히 마크리누스에게 등을 돌리고, 새로운 황제감을 찾던 장군이자 원로원 의원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과 손을 잡았다. 마이사는 교묘한 정략을 펼쳐 친카라칼라파 군단을 봉기시켜 마크리누스를 축출하고, 코마존의 도움 아래 로마에서 원로원의 협상 대리인으로 선정된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정치적 협상을 통해 지지세를 모은다. 그 결과, 율리아 마이사는 언니 율리아 돔나 자살 후 멸문 위기가 된 형부 가문을 오롯이 장악한 다음, 본인과 두 딸, 외손주들을 세베루스 가문으로 만든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코마존의 도움 아래, 자신의 손자인 엘라가발루스를 제위에 올리면서 대가 끊길 뻔한 세베루스 왕조를 재건했다.
3.4.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이사의 장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어릴 때부터 부모 아래에서 철저히 그리스, 로마, 이집트식 교육을 받고 자랐고, 시리아 출신 남편을 맞이해 두 아들을 낳고 로마와 로마 근교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사별 후, 두 아들 중 요절하지 않은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엘라가발루스)를 데리고 에메사에서 살면서, 아들을 철저히 에메사 왕가의 가업인 태양신 대사제로 키웠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녀는 어머니, 동생 율리아 마마이아와 달리 아들 엘라가발루스와 함께 로마시민권자임에도 에메사인과 가까웠고, 엘라가발루스는 라틴어는 전혀 할 줄 모르고, 그리스어 역시 에메사 현지 사투리가 아주 강한 억양을 구사하고 로마 문화에 무지했다.첫 남편 사별 후, 애인이자 사실혼 관계를 맺고 있던, 당대 최고의 플레이보이 간니스의 잔꾀에서 시작된, "카라칼라의 사생아이자 이종사촌 간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가짜 안토니누스 신화를 꾸미고, 자신이 병사들 앞에서 실감나게 이를 고백해, 소아이미아스는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곧 어머니 마이사와 함께 공동 아우구스타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그녀는 어머니 마이사와 함께 엘라가발루스를 통해 '세나쿨룸'이라는 로마 건국 사상 초유의 특별기구를 원로원에 설치해, 대놓고 원로원 회의에 출석하며 국정에 직접 참여했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의 각종 기행과 막장 행각으로 왕조가 다시금 위기에 빠졌고, 로마인들 사이에서 가짜 안토니누스 이야기가 퍼지자 마이사는 위기감을 크게 느꼈다. 설상가상 엘라가발루스가 베스타 여사제 아퀼리아 세베라를 강간하고, 그녀와 결혼을 선포한 일로 원로원과 코마존이 등을 돌리고, 어머니 마이사 역시 위기감 속에서 엘라가발루스 숙청 계획에 가담한다. 그렇지만 소아이미아스는 어머니 마이사와 안티오키아에 머물 무렵부터 경쟁관계였고, 아들의 행동을 개혁으로 여겨, 로마 제국의 엘라가발 숭배를 가속화시킬 것을 아들에게 조언했다.
결국 이런 그녀의 행동은 율리아 마이사가 소아이미아스와 경쟁 중인 그녀의 동복친자매 율리아 마마이아와 손잡고, 엘라가발루스의 대체 경쟁자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정한 일로 귀결된다. 이에 소아이미아스는 위기를 돌파할 생각으로 마이사, 코마존의 경고를 수락해, 아퀼리아 세베라를 소박내 이혼시키고,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옛 황족인 부유한 귀부인 안니아 파우스티나를 엘라가발루스의 새로운 황후로 만든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이 과정 속에서 엘라가발루스는 안니아 파우스티나의 남편으로 선친과 함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를 적극 지지했던 이탈리아의 오랜 명망가 출신 원로원 의원 폼포니우스 바수스를 죽이고, 갓 맞이한 안니아 파우스티나를 남자애인 히에로클레스 등과 함께 난교에 가담시키기 위해 가정폭력을 행사한 일로 모든 로마인의 원성을 사게 된다.
소아이미아스는 아들 엘라가발루스가 경쟁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죽이기 위해 고심할 때, 안니아 파우스티나와 이혼 후 다시 아퀼리아 세베라를 강제로 황궁으로 불러 이들을 재결합시키도록 하며 반격을 꾀한다. 하지만 군권을 장악 중인 코마존은 이미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와 손을 잡았고, 코마존의 동료 근위대장마저 존경받는 장군이자 전직 집정관인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에게 넘어간 뒤, 안티오키아누스마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지지하면서 대세를 뒤집기 어려워진다. 그러다가 그녀는 아들 엘라가발루스와 함께,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코마존, 안티오키아누스와 손을 잡은 어머니 마이사의 계획 아래 222년 3월 11일 약 4년여의 사실상 집권을 마무리한다. 그녀는 이때 아들 엘라가발루스와 함께 프라이토리아니에게 붙잡혀 온갖 험한 꼴을 당한 뒤 끔살되고, 그 시신이 전차 뒤에 매달려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한 바퀴 돈 뒤에 머리는 효수되고, 몸은 조각이 난 채 테베레 강에 던져진다.
사망 직후, 기록말살형을 선고받았다.
3.5. 율리아 마마이아
율리아 마마이아는 시리아 에메사의 시리아 여제 중 가장 권력욕이 강했고, 과시적이었다. 일찍부터 그녀는 이모 율리아 돔나를 롤모델로 삼았고,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장점을 동경했는데, 유감스럽게 그녀는 자신의 두 롤모델인 돔나, 마이사 자매와 달리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그녀는 친자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엘라가발루스 시대부터 경쟁관계였지만, 철저히 권력에서 밀려 있었다. 하지만 마마이아는 포기하지 않고, 두번째 결혼을 통해 맞이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을 철저히 전통적인 그리스-로마식 교육법으로 키워냈다. 그녀의 장남은 카라칼라 생전에 아우구르 직책과 아르발레스 사제 자리를 받았고, 철저한 로마인으로 살았지만, 그를 다루기 어렵고 나이도 엘라가발루스와 비슷해 황제로 내세우기 힘들다고 판단한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 결정 아래 페니키아로 거처를 옮겨 살았다. 그렇지만 나이 어린 차남은 율리아 마이사에게 엘라가발루스를 대체할 꼭두각시로 간택됐고, 율리아 마마이아 역시 그런 어머니의 결정에 동조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의 아들 알렉산데르는 222년 3월 11일에 근위대에 옹립되고 3월 13일 로마 황제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실권은 큰딸과 외손자를 죽인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몫이었다. 율리아 마마이아는 카라칼라 생전에 황녀에 준하는 지위만 얻은 반쪽짜리 황녀였고,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와 나란히 공동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고 국가의 어머니 칭호를 얻어냄에도, 차석 신분의 부제 개념에 가까운 처지였다. 그렇지만 마마이아는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알렉산데르 시대 이후에도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내내, 여러 지식인을 후원하고, 임페리움을 쥔 근위대장으로 섭정 내지 수상 역할을 한 울피아누스와 의남매 가까운 친분을 쌓으면서 세를 불렸다. 동시에 마마이아는 어머니의 말을 철저히 따른 공동 아우구스타로 자신을 숨겼다.
율리아 마이사가 죽은 후, 율리아 마마이아는 아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게 이전 못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때 알렉산데르는 이미 성년식을 치루고 결혼까지 한 성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못지 않게 야심은 많았어도 지나칠 정도로 과시적이었고, 본인이 왕조 창건자와 사촌 카라칼라에게 황녀에 준하는 지위만 겨우 받아 아우구스타 지위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또 그녀는 오랫동안 기다려 얻어낸 단독 아우구스타 자리를 얻고 실권을 휘두르고 싶어할 만큼 생각이 분명했다.
따라서 스스로를 여제로 생각하면서, 아들 알렉산데르의 모든 결정에 직접 개입하는 식으로 본인의 존재감을 정당화했다. 먼저 그녀는 아우구스타 중 최초로 제호를 만들어, 자신을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아우구스타로 선포하고 서명하면서, 아들과 공동황제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마마이아의 행보는 적절한 선에서 개입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인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와 달리 모든 국사와 군무까지 개입해 혼란을 야기했고, 이는 마이사가 마련한 주변 지지세력의 불만, 프라이토리아니 장악 실패로 이어진다. 설상가상 며느리와 사돈 일가와의 대립도 지나친 나머지, 그 실수로 근위대장이자 본인의 버팀목인 울피아누스가 암살되고, 그녀가 지키려고 한 디오 카시우스의 강제 은퇴 등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울피아누스를 보호하려고 자신의 경호대까지 붙여주면서 신경쓸 정도로 대비했고, 디오 카시우스를 지키기 위해 그에게 도움이 될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철저히 대비한 노력에도 무용지물이 됐고, 설상가상 새로 맞이한 며느리와 처가는 그녀에게 철저히 복종함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마이아의 결정 아래 16인의 황제자문회의가 순조롭게 돌아가면서, 내정에서는 안정감을 유지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군대 장악 실패와 함께 프라이토리아니 통제 부분 실패는 정부에게 부담이 됐다. 228년 말 혹은 229년 초, 아들 알렉산데르가 울피아누스 죽음과 디오의 위기를 막고자 벌인 황궁 관료이자 세베루스 왕조의 해방노예 에파가투스를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으로 임명해 보내는 척 했다가, 중간 기착지 크레타 섬에서 물에 빠뜨려 사고사 형태로 살해한 행동이 발각된 일은 이를 유심히 지켜본 군부 전체의 정부 신임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에 마마이아는 여러 학문의 권위자를 초빙해 의견을 듣고 이들의 의견을 아들에게 수용하도록 하는 등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정부는 약점은 노출됐고, 그녀의 잘못된 판단, 개입 등은 사태 수습에 큰 도움이 안 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산왕조의 페르시아가 시리아 코엘레 속주와 카파도키아 속주를 공격하고, 아르메니아 왕국과 전쟁을 벌인다. 마마이아는 아들 알렉산데르가 친정을 갈 때 따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에게 1년 가까이 외교적 노력으로 이 문제를 풀도록 권했고, 이는 시리아 일대의 반역, 군대 항명으로 확대됐다. 설상가상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졸전에 가까운 무승부라고 할 법한 결과를 얻는다. 그렇지만 마마이아는 아들 알렉산데르와 함께 페르시아에게 포획한 전리품, 페르시아 포로를 증거 삼아 이를 포장해 개선식을 거행하면서, 여러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꾀했다. 그러나 개선식 이후 곧 소규모 분쟁만 벌어진 라인 강 방어선을 게르만족 중 하나인 고트족이 중심이 되어 침공한다.
게르만족과의 전쟁이 벌어지자, 신흥 강대국 페르시아를 상대로 '무려' 승리하고 동방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자랑했던 알렉산데르는 다시 친정을 하게 됐다. 마마이아 역시 아들을 따라 게르마니아로 향했는데, 첫 해 전투에서 승전하며 승기를 가져간 알렉산데르에게 마마이아는 돈을 주고 평화교섭을 통해 전쟁을 끝내라고 조언한다. 마마보이로 재위 내내 어머니와 한 사람으로 묶여 알렉산데르 마마이아로 조롱받던 알렉산데르는 이번에도 어머니의 말에 따라 다음 해 전투 준비에 한창인 로마 장군과 병사들을 곁에 두고도 연공협상을 맺었다. 이 일은 곧 들통났고, 황제를 따라 전선으로 온 원로원 의원과 장군들은 배신감 속에서 마마이아, 알렉산데르에게 등을 돌린다. 병사들은 곧 제4군단 신병교육대장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옹립했고, 황제에게 실망해 등을 돌린 원로원 의원, 장군들은 함께 온 근위대와 함께 새 황제 막시미누스를 승인한다. 결국, 율리아 마마이아는 아들 알렉산데르와 함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보낸 로마군 손에 마인츠에서 함께 살해됐다. 이때 어머니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게 몰락하게 된 알렉산데르는 처형 직전까지 어머니에게 모든 원망을 털어놓고 욕을 하다가 살해됐다. 마마이아 역시 함께 죽었는데, 모성애가 강했던 만큼 아들이 병사들에게 칼을 맞기 전 아들을 껴안고 아들을 보호하려고 하다가 먼저 살해됐다.
이렇게 게르만족과의 전쟁 중 발생하면서, 세베루스 왕조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옹립한 병사들의 손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다.
자신의 경쟁자였고, 전임자이기도 한, 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마찬가지로 사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다만, 그녀는 로마의 미치광이로 공인받고 조롱받은 언니와 언니의 아들인 엘라가발루스와 달리, 정상적인 사고를 가졌음에도 악행을 벌였다고 사회적 지탄을 받고, 아들의 치세를 망쳤다고 로마 제국 멸망 뒤에도 비난받았다.
4. 평가
과거 세베루스 왕조는 존속 기간도 길지 않고, 창립자 외에는 크게 주목받을 황제가 없다고 인식되어 연구자들에게 중요도가 크지 않은 세습 왕조였다. 그러나 로마 제정의 역사에서 원수정 시대 후기 연구를 비롯해 로마 제국의 위기라고 불리는 ‘3세기의 위기’ 또는 군인 황제 시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에 대한 재평가가 끊임없이 이뤄지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제정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분석 과정에서 이 시대에 있었던 조치들이 재평가되면서 세베루스 왕조 치하의 연구가 활발해지게 되었다.네로 몰락 이후 벌어진 네 황제의 해 혼란을 수습한 플라비우스 왕조처럼,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를 거치며 생긴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콤모두스 암살 후 더 큰 혼란으로 이어질 뻔한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는 노력을 보여줬다. 하여 그들이 통치한 기간동안 제국은 일시적인 안정과 평화를 이룩했다.
세베루스 가문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플라비우스 가문처럼 창건자 대에 로마 원로원에 들어간 신흥 원로원 집안으로, 여러 부분에서 플라비우스 왕조와 비슷했다. 특히 창건자 세베루스 치하 아래에서, 이전과 달리 황제의 권력 기반을 원로원보다 군대에 집중하면서 이전 세습 왕조 아래에서 문제로 지적된 부분을 고쳐 나간 부분은 서기 1세기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그 업적이 대단했다. 이는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세베루스 왕조의 최대 업적으로 거론된다.
이런 평가처럼 실제 로마군의 기병 전환, 종심 방어 전략 계획의 도입 진행, 화폐 절하, 재정 긴장 완화, 제국 행정 및 속주통치방법 개선, 계서제 형식의 중앙집권적 관료제 시행, 본국 이탈리아와 속주 간의 차별 철폐의 시초가 모두 이 왕조 아래에서 이뤄졌다. 즉, 실제 업적만 놓고 보면 당대 및 후대 로마인들의 증언처럼 로마 제국 최고의 번영기이자 황금기가 바로 이 왕조때였다. 그래서 이 시대를 경험했거나, 3세기의 혼란을 체험한 뒤 태어난 로마인들에게 세베루스 왕조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좋았다.
그러나 과거 플라비우스 왕조처럼 세베루스 왕조는 존속이 짧았고, 창건자 생전부터 황족들간의 불화와 긴장은 이전 세습 왕조들 이상으로 잔혹했다. 설상가상 창립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후, 그 뒤를 이은 후계자들이 다들 어린 나이였던 데다 정치력도 초대 황제 셉티미우스 외엔 뛰어난 인물이 없었다. 카라칼라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유했지만 지나칠 정도로 잔인하고 과격한 독불장군이었고, 모든 내정은 어머니 돔나에게 다 맡겨 당대부터 뛰어난 군인황제로 인정받으면서도, 내정에는 지나칠 정도로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 다음 세베루스 가의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나이도 어렸지만, 로마 제국의 77명 황제 중 최악의 황제답게 모든 부분에서 함량미달이었고, 그가 벌인 실책은 세베루스 왕조가 어이없게 몰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내치에서는 무척 훌륭했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자질은 있었지만 마마보이였고, 자신을 호위하는 병사들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이는 세베루스 왕조의 황족들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친인척 관계 속에서 세야누스, 마크로, 티겔리누스 등의 개입으로 '황궁 내 궁중암투=로마 중앙 정계의 공포정치' 형태로 빚어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이상으로 세베루스 왕조는 궁중 모략이 끝없이 펼쳐졌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숙청 규모는 이전 세습 왕조의 여러 대규모 숙청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존속기간 내내 카라칼라와 게타의 불화,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벌어져 다른 세습 왕조들과 달리 후계 문제가 여러 혼란으로 확산됐다.
더욱이 창건자 외의 어린 황제들은 늘 자신의 처가와 갈등을 빚었다. 이는 카라칼라처럼 황제가 아내, 장인, 처남과 사이가 나빴던 점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창건자 생전부터 세베루스 가문과 한몸이 되어 움직인 시리아 에메사 왕가의 영향도 컸다. 하여 창건자가 죽고, 카라칼라 암살 뒤 율리아 돔나마저 죽자 세베루스 왕조는 급격히 흔들리게 된다. 따라서 창건자 사후 시작된 시리아 출신 황실 여인들의 지나친 월권 행동과 어린 황제들의 무책임한 행동 등은 종국적으로 그 정통성에 큰 상처를 내면서 왕조의 단명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생전 정치적 안정성과 황실의 안정 및 가계의 번영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오래 존속하길 원하여, 서기 2세기를 주름잡은 고향 푸닉 일대의 여러 집안과 교류하고 외가인 풀비우스 가를 장남의 든든한 처가로 삼아 이를 확고히 하고자했다. 또 자신을 황제가 되기까지 끌어준 형 푸블리우스 게타, 5촌 당숙 세베루스 아페르 등을 통해 세베루스 가문의 전체 파이를 키우려고 했다. 이는 창건자 이후 이런 부분에서 가장 능력치가 훌륭했다고 평가받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창건자의 직계와 사돈 일가는 그가 걱정한대로 두 아들의 대립, 골육상쟁 속에 카라칼라 생전 거의 박살나고 만다. 이는 창건자의 몇 안 되는 남자 친족 중, 처가쪽 사람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아래에서 다시 만들어 놓은 직계 일가와 사돈 일가도 비슷해, 왕조 존속의 모든 보호막들은 왕조 존속 당시부터 없어지게 됐다고 평가받는다. 다행히 창건자 직계의 경우, 아내 돔나의 뛰어난 능력과 카라칼라가 가진 군사적 재능과 업적은 훌륭했다. 그렇지만 불행히 카라칼라는 어이없게 원정길 중 암살됐고, 그가 살해됐을 때 창건자의 직계•방계 남자 혈육들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서 창건자의 직계 혈육들은 일찌감치 그 대가 끊어졌다. 다행히 카라칼라 생전부터 세베루스 황실의 일원들 중에 능력이나 업적에서 그나마 가장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버금갈 만한 사람은 한 명이 남아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사람은 셉티미우스의 황후인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이자 셉티미우스의 처제였던 율리아 마이사였다. 마이사는 육체만 여성일 뿐 모든 것은 남성이었다는 평가처럼 그 능력과 결단력은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못지 않았던 여걸이었다. 하여 그녀 손에 세베루스 왕조는 안정을 되찾게 된다. 따라서 율리아 마이사 생전, 세베루스 왕조는 울피아누스, 파울루스, 디오 카시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등과 손을 잡고 카라칼라 생전 박살난 왕조 존속의 보호막을 모두 재건했다. 하지만 마이사가 죽은 뒤, 그녀가 애써 만들어 놓은 모든 안전장치들은, 살아 생전 그녀의 걱정대로 그녀의 둘째딸인 율리아 마마이아(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모후)의 질투와 권력욕으로 벌어진 깽판으로 박살나고 말았다. 명문대가의 로마 귀족인 황제의 장인은 반역죄 누명을 뒤집어 쓰고 숙청됐고, 울피아누스는 피살, 디오는 반강제로 은퇴하는 일련의 과정이 터지게 됐다. 설상가상 속주 총독 인사 역시 현상유지 정책으로 일관해 세베루스 왕조는 그나마 남은 신망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카라칼라 이후 군을 제대로 장악못한 어린 황제들 치하에서 정치는 어지러웠고 황제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다고 말한다. 반면 율리아 돔나와 그녀의 여동생이자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의 이모,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의 외할머니였던 율리아 마이사의 능력 및 정치적 판단은 시리아 여제라는 말처럼 평균 이상으로 훌륭했으며, 그녀들을 도운 당시 로마의 인재들은 뛰어난 법률가, 행정가들이 많아 돔나 자매 생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마이사에 의해 어느 정도 제어되고 있었던 율리아 마마이아는 마이사의 사후 폭주하고 군대 문제와 외교 부분에도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의 주장처럼 더 혼란은 커졌고, 이는 원로원의 실권이 거의 상실된 시대적 특징으로 인하여 전무무후한 내전의 시대로 치닫는 이유가 되었다. 게다가 카라칼라 암살 이후에 즉위했던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는 창건자와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고 방계 후손에 불과한 바, 이러한 단점은 끝내 왕조의 단명으로 귀결됐다. 따라서 마이사의 정치적 능력과 안목이 아니었다면, 자칫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 더해 창건자 세베루스가 다섯 황제의 해 승리 과정과 세베루스 가의 항구적 세습을 위해 벌인 군대 지지 확보 과정, 유지의 기반에서 주화 대량 발행과 의도적인 평가 절하 속의 정당화 역시 문제로 지적받는다. 집권 후 콤모두스 대의 80%대 귀금속 함유량을 최종적으로 210년, 211년 은화 귀금속 함유량이 44~45%까지 의도적으로 줄인 부분은 제국의 경제적 취약성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이는 초인플레이션을 세베루스 시대 후반부부터 일으켰다. 이는 정치적 목적에서 이용된 부분이 많아, 그 여파는 군인황제 시대를 넘어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 제국의 경제적 취약성 극복의 한 원인이 됐다. 그래서 이 부분은 해당 왕조의 평을 당대부터 깎아내렸다.
이런 까닭에 세베루스 왕조는 한때 제위를 잃기도 했고, 존속기간도 짧아 로마 제국의 쇠퇴기를 연 왕조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그냥 통사적으로 간추릴 때 하는 얘기지 액면 그대로 전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상술한 것처럼 세베루스 왕조는 후기 로마 제국에서 보이는 변화들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고, 단명한 왕조임에도 존속 기간 내내 팍스 로마나를 이끌어줬다.하여 디오 카시우스와 헤로디아누스로 대표되는 당대 사가들 및 후대 사가 중 행정관과 원로원 의원으로 명성을 떨친 섹스투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으로부터 가장 안정된 평화기를 구축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빅토르의 경우에는 디오와 헤로디아누스의 것과 달리 유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 속주(프로빈키아 아프리카)에 그 본적을 뒀고 존속 기간동안 북아프리카 일대와 동방 속주 출신들을 중용한 이유로, 빅토르를 비롯한 이 지역 태생 로마 지식인들에게는 그 평이 다른 속주 태생 사가들보다 상상 이상으로 더 좋았기 때문이다[21]
4.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후계자들의 한계
오늘날 재평가를 통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세베루스 왕조에 대한 평판은 상당히 좋아진 상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 후계자들은 사용한 통치술이 비열하고 냉혹하거나(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지나칠 정도로 고풍스럽고 유순해(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비판을 받고 있지만, 함량 미달의 엘라가발루스를 제외한 네 황제(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당시 상황에 맞게 불가피한 상황까지 훌륭하게 대처했다. 특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통치 기간은 로마 역사상 가장 훌륭한 현군, 명군 소리를 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조차 해결하지 못한 국경 수비와 중구난방의 행정체제 문제 및 법치주의 회복에 있어 더 빨리 변형과 해체의 늪에 빠질 법한 로마 제국을 구하는데 성공했다.그렇지만 동서고금의 모든 군주들이 그렇듯,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 역시 아쉬움이 있었고, 그 후계자들은 상술했듯 모두 단점이 뚜렷했다. 카라칼라는 지나칠 정도로 잔인하고 과격했고, 게타는 형에게 살해돼 순교자 이미지가 있지만 반대파를 포용하지 못하는 단점이 뚜렷했다. 엘라가발루스는 함량미달인데다, 4년의 치세가 짧았다고 해도 3세기 이후 재평가 과정에서 드러나듯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후계자 중 가장 나은 인물이나, 지나칠 정도로 유약했고 그 유약함이 몰락을 자초했다.
이런 개인적 결함보다 심각한 문제는 세베루스 왕조 내의 남녀황족 상호간의 끝없는 갈등과 골육상쟁으로 벌어진 혼란이었다. 이는 궁중 암투가 심각했던 여느 세습왕조들보다 노골적이고 심각했다. 카라칼라와 게타의 관계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으며, 엘라가발루스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관계 역시 미묘한 갈등에서 노골화된 권력투쟁 양상으로 확전됐다.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자매의 관계는 좋았지만, 율리아 마이사의 두 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율리아 마마이아는 엘라가발루스 재위 기간 내내 라이벌 관계였고 율리아 마이사와 율리아 마마이아 사이의 관계 역시 상호공존이라는 공통분모가 없다면 정적과 가까운 사이였다. 여기에 더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아내들과 율리아 마마이아의 관계 역시 최악이었고, 고부 갈등은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 아우구스타끼리 프라이토리아니를 공개적으로 개입시켜 궁중음모의 암울함을 키웠다.
이렇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세베루스 왕조는 그 후계자들의 한계와 구성원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아쉬움이 많았다. 따라서 팍스 로마나의 절정을 이룩했음에도 이들은 저평가 받았다. 설상가상 그 후계자와 이들을 보좌 내지 보완해줄 수 있는 측근세력, 원로원, 프라이토리아니, 로마군 모두 따로 국밥처럼 움직여,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로 얻은 안정을 흔들어 놓았다. 즉, 세베루스 왕조는 안팎의 한계와 존속 기간 내내 벌어진 각종 파열음 속에서 왕조는 단명하고, 이들은 저평가받았다. 따라서 당대의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고,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 후계자들이 1,000년 넘게 군사 1인정, 선군정치 등의 안 좋은 평을 받는 이유가 됐다.
그렇지만 이들이 저평가받는다고 해도, 그들의 실정으로 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졌다고 단정지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에서 원로원 신분과 기사계급 신분간의 애매모호한 관계, 본국 이탈리아를 제외한 서방 속주와 동방 속주 사이의 지나친 괴리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이라고 하는 기원전 29년 이후의 로마 제국 이전부터 이는 로마의 여러 통치자들에게 많은 고민을 안겼던 문제로 인식됐다. 더욱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서기 180년경 당시 상황을 보면, 로마 제국은 특정인의 개인기로는 더 이상 여러 문제를 동시해결할 정도로 사태수습이 어려워진 상태였다. 이는 최악의 폭군, 암군으로 비난받은 콤모두스의 잘못도 아니었으니, 어떻게 보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라는 걸출한 인물의 개인기량과 냉혹하고 비열한 통치술로 중병 직전 제국의 목숨줄을 연장시켰다고 해도 좋았다.
세베루스가 즉위하기 전부터, 정확히 말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가 즉위하기 훨씬 전인 하드리아누스 집권 직전부터 로마 제국은 황제들이 시기에 맞게 숱한 상황을 대처한다고 해도 큰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속주들의 국경 수비와 그에 따른 비용 부담 문제였다. 각 속주들은 국경 수비를 위해 막대한 인력과 대부분의 비용을 오롯이 부담했다. 특히, 트라야누스 시대 당시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이유로 동방의 부유한 속주들은 서방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부담하고 엄청난 인력을 황제의 전쟁 수행을 위해 소모해야만 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 이래 로마 황제들은 어쩔 수 없이 속주 출신 인재들을 끝없이 새로운 엘리트 계급으로 수용했다. 특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이 부분에서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군대 경험이 풍부하고 행정적 역량이 풍부한 장병 출신의 백인대장, 대대장 베테랑들을 원로원에 편입시켰다. 이는 그가 제국이 원하는 숫자의 정무관, 관리, 장군을 손에 넣지 못하고 있는 현실과, 기존 원로원 지배층의 뚜렷한 한계와 질적 약화로 인해 제국 통일과 평화 유지에 어려움을 겪어 벌어진 개혁이기도 했다. 다행히 세베루스의 조치는 급한 불을 껐다. 그럼에도 세베루스의 이런 방법은 왕조가 무너지기 전까지 제국 통치에 필요한 관료, 군인 수습 문제가 부족한 상태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이런 수단은 아들 카라칼라 치세기부터 여러 한계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세베루스가 기용한 이들이 종국적으로 세습 의원으로 변모한데다, 황제의 노력에도 보수화되고 아전인수격으로 제 잇속만 챙기는 원로원 인사들의 이기심이 그 경직성을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후, 카라칼라 시대부터 벌어진 대대적인 인재풀 숙청 작업은 가까스로 모아둔 제국 인재들을 일거에 박살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다행히(?) 카라칼라의 불안하고 과격한 통치 시대는 짧았다. 하지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까지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와 처제 율리아 마이사, 조카 율리아 마마이아로 대표되는 시리아 여인들의 제 측근, 친구 선호는 세베루스 집권 이후 900명에 육박할 정도로 많은 수의 원로원 의원들이 끝없이 유지됐음에도, 정무관 배출이 제한되고 이마저도 그리스, 푸닉, 아나톨리아 등지 출신이나 이탈리아의 부유한 특정 권세가들의 전유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종국적으로 황제와 황실 권위를 크게 추락시킨 엘라가발루스 시대의 완전한 실패, 내정에서는 뛰어났지만 군사적 문제와 국경수비에 있어서는 무능하고 비양심적이었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의 한계는 카라칼라 사후 창건자의 친혈육이 완전히 끊긴 현실과 맞물려 세베루스 왕조의 실패로 연결됐다. 그리고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혁 중 핵심 가치인 권위와 위엄까지 추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5. 역대 황제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1대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193년 4월 14일 ~ 211년 2월 4일 |
2대 | 카라칼라 | 211년 2월 4일 ~ 217년 4월 8일 |
공동황제 | 게타 | 211년 2월 4일 ~ 211년 12월 26일 |
3대 | 엘라가발루스 | 218년 6월 8일 ~ 222년 3월 11일 |
4대 |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 222년 3월 11일 ~ 235년 3월 18일 또는 19일 |
6. 여담
- 앞서 존속했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공통점이 많듯, 플라비우스 왕조와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은 왕조로 평가받고 있다.
- 세베루스 왕조의 직계는 남녀황족을 통틀어 카라칼라가 암살된 직후 완전히 끊겼다. 하지만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외사촌이자 카라칼라의 장인이 되는, 악명높은 근위대장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쪽의 가계는 플라우티아누스 부자 사후에 겨우 살아남아 콘스탄티누스 왕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중 한명이 창건자의 외가 풀비우스 가의 피를 직접 이은 율리아누스의 이복형이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다.
-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경쟁자 중 한 명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역시 세베루스 가문 태생이었으며, 푸닉 일대와 연관이 많았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모계가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부모 가계처럼 북아프리카에 정착한 이탈리아 귀족 가문이었기 때문이다[22]. 그래서인지 몰라도, 냉혹하고 무자비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공동 황제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막상 로마 입성 후, 이 사람의 시신을 온전히 수습해 유가족에게 전달하고 정식 장례를 치르게 했다.
-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의 요한나 스킨 중 백인대장 스킨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세베루스 황제가 신에게 도전하는 상황이다.세베루스 황제의 명에 따라 전 군단이 신들의 문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그중 단 한 명, 백인대장 하나만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는 인류의 오만방자함에 대한 신들의 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 보라색 네모 안에 들어간 인물들이 황제 자리를 지낸 인물이다.[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본래 성씨다. 이탈리아의 평민 씨족 성씨(노멘)로, 로마인 개인 이름(프라이노멘) 중 인기가 많지 않았던 이름인 '셉티무스'에서 유래했다.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서 희귀한 성씨(희성)인데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등장 이전까지는 원로원 의원을 거의 배출하지 못한 가문의 성씨인지라 본래 성씨임에도 불구하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집권 이후 성씨인 '세베루스'보다 주목도가 떨어진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직계인 셉티미우스 가문 내 세베루스/아페르/게타 일족의 경우, 포에니 전쟁 직후 푸닉 지방으로 그 조상들이 이주해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최상류 기사계급으로 명성이 자자했다.[3]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두 아들 바시아누스와 게타에게 정치적 목적으로 내린, 이전 세습왕조의 성씨이다.[4]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장남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의 이름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개명시키고, 자신과 두 아들 및 그 일가의 새로운 성씨로 '안토니누스'를 삼은 이후, 제호로 내세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때까지 내려온 새로운 성씨이다.[5] 학계에서 부르는 명칭으로, 군인 황제 시대의 다른 표현으로 최근 더 많이 쓰이고 있다.[6] 어느 정도로 시리아 에메사 가문 여인들의 위세가 대단했는지,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두 딸은 로마 여성 중 최초로 원로원에 상시 출석했다.[7] 이종사촌 누이의 아들.[8] 이종사촌은 엄마끼리 자매인 평행사촌이므로, 카라칼라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모네 쪽 오촌 조카가 된다.[9] 이렇게 재정비했다고 해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예전처럼 이탈리아 출신들로 다시 채워지게 된다.[10]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를 적대한 자들과 그 가족들의 목숨을 남겨놓지 않는 비정함과 비열한 수법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니게르와의 대결에서는 경쟁자의 어린 자녀들을 납치해 인질로 삼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경쟁자 알비누스에겐 공동 황제를 제안해 동맹을 맺은 뒤 배신하는 등 비열한 행동을 내전 기간 내내 선보였다고 비난받았다. 심지어 알비누스의 경우, 패사한 경쟁자가 인망있고 존경받는 인물임에도 이 사람의 시체를 말발굽으로 짓밟았고,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들까지 죽인 뒤 시체를 강물에 버리기까지 했다. 인과응보인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뒤를 이은 아들, 처조카 등 직•방계 혈통의 황제들은 암살당하거나 골육상쟁을 벌여 서로를 죽이거나 적대시해 본인 가문과 인척 가문까지 20여년 만에 모두 멸문하는 진기록을 세웠다.[11] 그렇다고 해서 세베루스와 콤모두스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세베루스는 콤모두스의 현역 황제 시절에 군단장이었는데, 콤모두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고 그걸 결코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베루스가 콤모두스에 대한 기록말살형 철회를 명령한 것은 정치적인 명분을 쌓고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1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의 경제적으로 소득없는 게르만족과의 전쟁과 안토니누스 역병에 더불어 콤모두스 황제 사후 엄청난 내전으로 고갈된 국고를 수습했다.[13] 이때 살아남은 플라우티아누스의 손자, 손녀들의 직계 후손 중 한명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동생과 결혼해, 율리아누스 황제의 이복형 콘스탄티누스 갈루스를 낳았다.[14] Imrie, Alex. Introduction, The Antonine Constitution: An Edict for the Caracallan Empire. Brill, 2018.[15] Imrie, Alex. The Military Rationale, The Antonine Constitution: An Edict for the Caracallan Empire. Brill, 2018.[16] 다행히 카라칼라는 이런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어머니 율리아 돔나와 아버지 시절부터 이 분야를 맡고 있던 황실 관료, 법률가들에게 내치를 담당하도록 했다.[17]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야 전혀 문제가 아니겠지만, 고대 로마에서 동성애는 그리 썩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닌 것으로 인식됐다.[18] 약간 과장 보태서 현대적인 관점으로 설명하자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카톨릭 수녀를 성폭행했다고 생각해보라...[19] 아우렐리우스 빅토르가 자신의 저서에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삶과 치세를 평가하면서 한 말이다.[20] 갈리아의 부족장들 중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성씨를 받고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은 이들과 비슷한 케이스이다. 에메사 왕가의 로마식 성씨는 율리우스였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다른 지중해 동부의 향토 아랍가문들과 달리, 동부 전역에서 이름 높은 폼페이우스 대신 카이사르를 믿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내전과 알렉산드리아 해전 모두에서 보조군을 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감사의 뜻으로, 에메사 왕가와 이 왕가를 따라 아랍인 보조군에 합류한 사람들에게 로마시민권, 기사계급 처우와 함께 자신의 성씨를 줬다.[21]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자신의 저서 《황제열전》에서 이런 감정과 평을 숨기지 않았는데, 엘라가발루스를 제외한 세베루스 왕조 역대 황제들과 황족들에 관한 부정적 측면은 죄다 삭제하고 비판조차 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부터 콘스탄티우스 2세까지의 로마 제정사를 기술하면서, 그가 다른 황제나 세습 왕조들을 서술할 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면서 논평한 부분까지 비판받고 있다. 이는 당대 로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빅토르는 자신을 중용해준 황제(율리아누스, 테오도시우스 1세)나 세베루스 왕조를 기술할 때 중립적인 척하면서도 편향적으로 서술한 이유로 저서의 인기가 없어 그나마 필사본도 단 2권에 불과할 정도다. 따라서 현대 사가들 중 일부는 내용도 부실하고 다소 편향적인 빅토르의 저서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거의 동급으로 묶어 세트로 봐야 그나마 낫다고 혹평하기도 한다.[2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부계는 푸닉 혈통도 섞인 이탈리아 기사계급이었지만, 모계는 포에니 전쟁 직후 푸닉 일대에 정착한 노빌레스 계급 출신의 풀비우스 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