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9-21 12:57:11

네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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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제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파일:external/www.art-prints-on-demand.com/bust_marcus_cocceius_nerva_c3_hi.jpg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Marcus Cocceius Nerva)
임페라토르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Marcus Cocceius Nerva Caesar Augustus)[1]
생몰년도 30년 11월 8일 ~ 98년 1월 27일
재위 기간 96년 9월 18일 ~ 98년 1월 27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콤모두스

1. 소개2. 황제 즉위 전3. 황제 즉위4. 평가

1. 소개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는 로마 제국의 제12대 황제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첫 황제이다. 그와 동시에 오현제 시대 다섯 명의 황제 중 첫 번째 황제이기도 하다.

2. 황제 즉위 전

이탈리아 중부 지방인 움브리아주 나르니 출생으로 30년 11월 8일에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와 세르기아 플라우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네르바의 개인 이름인 마르쿠스는 증조부때부터 연이어 물려받은 이름이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같은 이름을 썼다.

베스파시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 기원을 둔 로마 상류층 엘리트로 잘 알려진 네르바는 플라비우스 가문과 달리, 공화정 시절부터 원로원 의석을 차지해온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네르바의 가문은 대대로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가문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협력한 귀족 가문이었는데, 단순히 협력한 일개 귀족가문이 아니라 영향력이 상당했던 정치명문가였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2](1세)는 내전기때 삼두파 중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한 원로원 귀족이었고, 공화정 시대 말인 BC 36년도 집정관을 역임했다. 네르바의 할아버지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2세)는 뛰어난 법률가로 상당한 명성을 떨쳤던 원로원 의원으로, 젊은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티베리우스의 몇 안되는 가장 친한 친구로도 상당히 유명했다. 이런 이유로 네르바의 조부는 친구 티베리우스의 오랜 법률 조언자로 있으면서 티베리우스 시대가 된 이후, 그의 추천 아래 21년(또는 22년) 7월에 집정관에 올랐다. 네르바의 조부는 집정관에서 물러난 이후 황제가 조카와 아들을 연이어 잃고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부터 자발적으로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거처를 함께 옮긴 최측근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33년에 카프레아이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네르바의 아버지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3세) 역시 원로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비텔리우스[3] 등과 함께 원로원 내 중진 중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파의 대표적인 인사였다. 이런 연유로 그는 칼리굴라 집권 기간 중에 집정관을 지냈다. 네르바의 외가 역시 제정시대부터 서서히 줄어들던 이탈리아 귀족집안이었다. 네르바의 외숙모는 기사계급 출신 가문에서 태어난 루벨리아 바사인데, 그녀는 티베리우스의 손녀딸인 율리아 리비아가 남편 네로 카이사르와 사별한 후 재혼해 낳은 딸이었다. 한마디로 네르바는 몇 안 되는 공화정 시대로부터 내려온 명문가에 속해 있던 사람이었고, 본인을 포함해 4대가 모두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지지하던 원로원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네르바에게는 코케이아라는 이름의 동복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네로 사후 즉위한 황제 중 한 명인 오토의 친형 루키우스 살비우스 티티아누스 오토와 결혼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던 네르바의 어린 시절의 삶과 초창기 시절 경력, 사생활 등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네르바는 네로 시대동안 30대의 젊은 나이에 이미 로마 원로원 의원 중에서 이탈리아 귀족을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친황제파 인사로 이름을 날렸다. 맡았던 업무 역시 제국의 주요 행정 업무, 외교 업무에 개입했는데, 성격이 원만해 적이 많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였던 네로는 네르바를 총애했고, 네르바의 문학적 재능과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의 문학 작품을 극찬할 정도로 사랑했다. 그래서 네르바에게 이에 대한 상으로 각종 영예와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다가 가문 대대로 협력했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를 끝으로 막을 내리자, 네르바는 네로 사후 내전 기간동안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대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했다. 이후 그가 지지한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를 이기고 내전을 종식시켰다. 이때 그는 플라비우스 왕조를 개창한 베스파시아누스 치세 아래에서 71년[4]에 집정관을 지냈다. 90년에 도미티아누스는 사트루니누스의 반란이 있었을 때 네르바와 함께 집정관직에 올랐다.[5] 반란이 일어났을 때 도미티아누스가 그를 선택했다는 것인데, 이는 네르바가 원로원 내에서 신망이 두터운 중진이었음을 의미한다.

3. 황제 즉위

도미티아누스가 96년 암살당하자, 네르바는 고령인 데다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에 의해 황제에 옹립되었다. 고령인 데다 자식도 없었던 네르바를 황제로 지목한 것은 조종하기 쉬운 노인을 자리에 앉혀 원로원이 정국을 장악하려는 의도였다.[6] 네르바는 그가 재임하는 동안 단죄당하는 원로원 의원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7] 동시에, 네르바는 사재를 전부 기부해 사심이 없음을 밝힌다.

제위계승이 잡음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덕분에 내전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군대의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자리에 노인이 들어앉은 것에 근위대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군대는 불만을 품고 있었고 지지기반이 없는 늙은 황제는 계승자도 없었다. 군대는 폭동을 일으켰고, 네르바는 유폐되었다.[8] 이 과정에서 네르바는 군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내전 직전까지 갔던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제위에 오른 지 채 2년이 지나기도 전인 98년 1월 27일,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화장된 유해는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되었다. 네르바 황제를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 영묘의 묘실이 가득 차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아일리우스 영묘를 새로 건설해 황제 일가의 무덤으로 삼았다.[9]

4. 평가

재위기간이 짧았던 탓에 네르바가 이룬 업적은 적다. 포룸이 완공되었을 때 당시 황제였던 네르바의 이름이 붙어 네르바 포룸이 되었지만, 이는 도미티아누스가 착공을 지시했던 건축물이다.[10] 그래서인지 나무위키에는 오현제 중 가장 늦게 등재되었다.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 이외에 한 일이 없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하지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지명했던 결단은 내전 직전까지 몰린 국가를 구해냈다. 거기에 반은 타의였지만 양자계승의 원칙을 확립했다. 다른 왕조들과는 달리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내전 없이 성립되었고, 원로원과의 관계가 대단히 좋은 편이었는데[11] 이는 네르바의 공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 친 원로원 성향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네르바의 치세를 일컬어 황제의 권력과 시민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기라고 평가한다. 여기에서의 시민이란 곧 원로원. 다르게 말하자면 여태까지 권력을 가진 황제들은 좋든 나쁘든 원로원을 호구로 만드는 데에 열심히 몰두했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트라야누스의 후계자 지명 자체가 군부가 주동하고 네르바는 도장만 찍어준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근위대가 네르바를 유폐하고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자들을 처형했을 때 이미 네르바는 실권을 잃었을 거라는 것. 한국에도 비슷한 예가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사실에 의하면 유배 당한 사도 요한을 그가 풀어주었다고한다.


[1] 즉위 후[2] 황제 네르바와 이름이 같으며, 네르바 황제까지 4대의 이름이 모두 똑같다.[3] 네로 사후 내전기동안 제위를 차지한 비텔리우스의 아버지[4] 베스파시아누스는 69년에 집권했다. 다시 말해 베스파시아누스의 중요한 측근으로, 반정공신에 속했음을 의미할 것이다.[5] 황제와 함께 집정관직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형식상으로 집정관은 로마의 최고 관직이었고, 황제와 동격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6] 도미티아누스가 실각한 것이 아니라 암살당했는데도, 원로원은 사후 도미티아누스를 단죄한다. 원로원을 억압했던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분풀이이기도 했지만, 이는 원로원이 원로원 주도의 정국을 구상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7] 이는 하드리아누스 시기를 제외한 오현제 시대 내내 이어진다. 하드리아누스는 집권 과정에서 몇몇 반대자들을 숙청해야 했다.[8]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혐의를 받은 자들이 체포되어 살해당한다.[9] 그럼 트라야누스 는? --> 아예 생전에 자신의 이름이 부여된 포룸에 자신을 위한 신전과 함께 무덤까지 미리 지었다.[10] 그에게 기록말살형이 내려졌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서민들의 항의로 도미티아누스 경기장 - 현재의 나보나 광장 - 의 이름은 그대로 남는다.[11] 네르바의 제위는 원로원에 의해 정당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기의 원로원은 다른 때에 비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