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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투스 Tacitu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본명 | 푸블리우스[1]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Publius Cornelius Tacitus |
출생 | 56년경 |
사망 | 120년경 (대략 64세) |
지위 | 에퀴테스 |
직업 | 역사가, 정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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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정 초기의 역사가이자 정치가.2. 생애
출생지[2]와 태어난 날짜, 이름(프라이노멘)은 알려져 있지 않다. 부유한 환경[3]에서 태어나 로마로 가서 공부한[4] 타키투스는 연설과 더불어 정치적인 성공을 갈망해 정계로 진출해 서기 81년에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을 치르던 티투스 밑에서 군단 재무관을 지냈다.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치세 때는 원로원 의원이자 유능한 장군인 아그리콜라의 딸[5]을 아내로 맞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티투스 황제,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걸쳐 재무관, 호민관, 법무관 등 정무관 코스를 역임하여 원로원 계급에 편입되었다. 특히 법무관 시절이던 서기 88년에는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명예로운 직책인 '퀸데킴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quindecimviri sacris faciundis: 15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 멤버로 들어갔으며 로마를 나와 군단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6]
93년에 타키투스는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그가 몸담고 있었던 원로원은 여러 의원들을 고발해 숙청하던 도미티아누스와 대립 중이었다. 그럼에도 타키투스는 다행히 황제를 필두로 한 감찰관들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제정을 내심으로는 싫어하면서도 겉으로는 티내지 않은 데다가, 어느 정도 유연하게 제정을 인정하는 비교적 온건한 세력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96년, 도미티아누스가 황후와 근위대장 등에 의해 암살당하자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한 뒤, 새 황제로 로마 원로원 의원 중 한 명인 네르바를 지명해 잇도록 했다. 네르바 때인 97년 타키투스는 보결 집정관에 당선되었으며, 98년 네르바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의 치세 때도 평온하게 잘 지냈다. 그 뒤 15년간은 사료가 부족해서 알 수 없지만 노년기인 113년에는 아시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후로는 사실상 정치적 경력을 끝냈다.
타키투스는 원로원 의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여러 관직을 역임했는데, 다른 로마 엘리트들과 달리 군사적 업적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즉, 그는 단지 명에로운 경력이라고 불리는 엘리트 코스를 거쳤지만, 장인인 아그리콜라 및 네르바 황제 등의 추천으로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군사적, 행정적 명성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적부터 쌓은 다양한 경험과 재능을 토대로 부단히 노력한 신참자답게 상당히 학식이 풍부했다. 이런 까닭에 타키투스는 자신의 시각에서 갖가지 책들을 저술했다. 그중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죽음부터 네로 황제의 죽음까지를 다룬 《연대기》와 그 뒤의 역사인 《역사》가 유명하다. 그 외에도 장인인 아그리콜라의 생애와 업적 등을 다룬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생애에 관하여》, 《게르마니아》등을 저술했다. 이 책들은 고대 로마를 비롯해 고대 게르만 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취급된다.
3. 저서
- 《연대기[7] Annals》: 그 이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기원전 27~기원후 68)의 역사를 다룬 책.
- 《게르마니아 Germania》: 동시대 게르만족에 대해 쓴 책.
- 《아그리콜라 Agricola》: 장인이자 로마 제국의 명장이었던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일생에 대해 다룬 책.
4. 성향
공화주의적인 이상을 가지고 제정을 싫어했지만 제정의 필요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상류층 지식인 중의 한 명이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반감이 유명하지만, 타키투스가 정말 최악으로 생각했던 정치 체제는 마리우스와 술라가 지배한 시기 로마의 그것이었다. 대놓고 '도미나티오'라고 규정하며 까는 데, 이는 나쁘지만 그나마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프린키파투스가 마리우스와 술라의 그것보다는 좋다는 바로 그 견해였다.정확히는 원로원의 권위를 존중하며 세습이 없는 원수정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 중에서 그 자신이 직접 언급하는 문장이 둘 있는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군주정 아래 있으나 노예는 아니며, 민주체제 아래 있으나 불화는 없다. 동방의 그것보다 우월하다. 이는 동의와 권한 위임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습왕조에 대해서는 어떤 공로가 있던 상관없이 과오를 신랄하게 들이까면서 폭군으로 묘사했다. 특히 티베리우스와 도미티아누스에 대해서는 제정 혐오자가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깠다.
현대 이탈리아의 언론인이자 역사가로 로마사 개괄서를 저술한 몬타넬리의 평가에 따르면, 변호사로 유명했던 사람답게 기록과 객관적인 증거에 바탕을 두면서도 자신의 논지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저서들을 서술했다고 한다. 허나 이런 평가는 타키투스의 대표적인 저서인 《연대기》와 《역사》의 문체 서술상 평가에 가깝다. 도리어 타키투스의 서술 성향은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처럼, 객관적인 관점에서 한 인물를 주제로 그 장•단점을 기술했음에도 지극히 원로원 중심적이었으며 엘리트주의적이라는 평가가 따라온다.
예를 들어 그는 원로원 의원들을 고발하는 '델라토르 제도'에 대해 무한한 증오와 비난을 표출하는 태도를 곳곳에서 보이며, 황제에게 대항하여 직언을 행사하는 원로원 의원에 대해서는 매우 큰 찬사를 보낸다. 또한 팍스 로마나 등을 언급할 때 으레 같이 나오는 비판적인 시각을 대변하는 아래 말[8] 또한 타키투스가 기록하였다.
그들(로마인)은 폐허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이런 평가처럼 타키투스는 자신의 저서를 쓸 때 상당히 시니컬한 문체와 서술 태도를 보였다. 그는 원로원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로마 제정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한 사람이었다. 이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를 다룬 동시대인들의 1차적인 사료를 그들의 호적 등본 외에는 거진 참고하지 않고, 길거리 소문과 본인 가족들의 증언에 의거한 동시대 사람 수에토니우스와 다른 점이었다. 타키투스는 수에토니우스처럼 유명 변호사이자 교양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으나, 두 사람의 저술 방법과 기준은 차이가 분명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소위 뇌피셜에 기반한 유추적인 해석을 당연하게 서술했다. 또 '내 기준에서 봤을 때 도덕적'이라는 주관적 관점을 합리화하길 무척이나 좋아했고, 본인 스스로를 로마 최고의 교양인이자 행정가라는 전제 아래 이를 절대선으로 규정했다.
반면 타키투스는 원로원 의원이자 귀족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했어도[9],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을 강조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따라서 1차 사료에서 동시대 원로원 의원들의 기록과 《로마 관보》, 《원로원 회의록》을 기반으로 둔 다음, 황제 개인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는 동시대 원로원 동료들과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역사가와 교양인들이 타키투스의 기록을 1차 참고문헌으로 애용한 이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타키투스의 저술은 기본적으로 원로원 중심주의 관점에서 서술했고, 황제와 그 측근들의 기록을 동일하게 놓고, 함께 기술하지 않아 이 부분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타키투스의 삶을 돌이켜보자면 알 수 있듯이, 그는 갈리아 남부 출신으로 출세를 꿈꾸며 로마로 와서 개인 능력과 장인의 도움으로 원로원 의석을 꿰찼고, 변호사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타키투스는 온건하고 유연한 공화정 회귀론자이면서 동시에 철저한 원로원 중심론자였다. 따라서 개인적인 이유 외에도 정치적인 신념으로도 원로원 중심 시스템을 뒤엎고 원수정을 열어 혈통 세습을 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뒷세대의 수에토니우스처럼 온갖 소문들을 무차별적으로 집어넣지 않았으므로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했다고 평가받는다. 또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밑에서 현실과의 타협, 공공도덕에 대한 올바른 가치 실현과 같은 부분에서는 자신이 비판한 황제들에 대해 마냥 비방만 하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자신이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있으면서 직접 경험한 도미티아누스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정적이었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막장 황제로 이름난 가이우스(칼리굴라)[10], 악명 높은 폭군 네로,[11] 원로원 의원들에게 빅엿을 먹였던 티베리우스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내용을 통해 이들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외에도 그는 《원로원 회의록》, 《로마 관보》를 통해 당대의 표기를 그대로 쓰거나, 실제 황제들의 서한과 연설을 옮겨 적었다. 일례로 그는 후대에 '칼리굴라'로 잘 알려진 가이우스 황제를 당대 사람과 원로원, 자신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의 표기대로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기술하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연설이나 티베리우스의 서한 및 원로원 의원들의 법정 증언 등도 증거에 기반해 기록했다.
따라서 타키투스의 이런 저술 스타일은 당대 로마 원로원 귀족들에게 높이 평가받았고, 장인인 아그리콜라와 프린키파투스 체제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원로원 내 유력인사들로부터, 그는 첫 번째 저서의 발표 이후 후속 역사서 저술을 권유받아 그 유명한 《연대기》 등의 작품을 남겼다. 이때 소 플리니우스는 이런 타키투스를 "키케로보다 위대하고, 뛰어난 변호사이자 저술가"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타키투스는 모든 저서에서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면서도, 자신과 원로원이 중요하게 여긴 귀족의 품위(자유와 귀족적인 미덕)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타키투스의 저서는 원로원 입장에서 원수정 시대를 서술했다고 평가받는데, 그럼에도 역사가 입장에서 소문과 사실을 명확히 구분해 전달했으며 《로마 관보》와 《원로원 회의록》을 기반으로 작성해 신뢰도가 높다. 또 티베리우스 시대의 고리대금업 처벌 등과 같은 부분에서 드러나듯이, 원로원의 입장에서 황제를 비판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행동이 무조건 부정적이지 않았음도 명확하게 지적했다. 따라서 타키투스의 저서들은 비슷한 세대의 수에토니우스와 비교해 상당히 높게 평가받고, 원수정 시대를 이해하는 1차 사료로 많이 활용된다.
다만, 저술 스타일에서 드러나듯 원로원 중심에서 프린키파투스 체제를 평가한 만큼, 마냥 그의 주장만 신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타키투스는 자신을 원로원의 핵심으로 이끌어준 장인 아그리콜라의 부친(아내의 할아버지)이 칼리굴라의 지시를 어기고 항명죄로 처형된 개인적인 이유 등으로 그가 살지 않았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없었다. 또한 도미티아누스가 활용한 델라토르 제도 등의 폐단을 체험했고 공화정 체제가 옳다고 믿는 신념 때문에 《연대기》에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모든 황제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로 당대부터 유명했다.
또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황제들을 모두 직접 체험한 인물이 아닌데다가[12], 그가 맨 처음 다룬 역사책의 주제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네로부터 도미티아누스 시대까지 이야기라서 그가 주장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네 황제 시대를 있는 그대로 평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네로를 두고는 본인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했거니와 원로원 활동을 할 당시 직접 경험한 인사들과 함께 활동하거나 친구가 된 만큼, 네로 시대의 기록은 여타 다른 황제들과 비교해 꽤 신뢰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5. 여담
- 그리스도교에서 가끔 다루는 고대 역사가이기도 하다. 요세푸스(《유대고대사》)와 마찬가지로 예수와 그를 기원으로 하는 그리스도교 관련 언급을 했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를 설명할 때도 언급된다. 타키투스는 네로 황제 치세 때 그리스도교인들이 탄압받았는데, 그네들이 본티오 빌라도에게 그리스도를 기원으로 하는 종교인들임을 기술했다.
- 《연대기》 제1권 제1장에서 사용한 sine ira et studio(분노와 호의가 없이)라는 표현이 '불편부당하게'라는 숙어로 사용된다.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역사를 그렇게 다루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집필 동기라고 밝히면서 한 말이다. 그러나 '서술 성향'에도 언급되었듯이, 정작 이 책은 해당 시대에 대한 저자의 분노가 느껴지는 서술로 유명하다.
-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로 제정 찬미파였던 소 플리니우스와 막역한 친구였다.
[1] 혹은 가이우스(Gaius)[2] 알프스 산맥 남부의 나르보넨시스 속주 출신으로 추정되나, 다른 출생지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3] 선조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고 숙부, 혹은 조부는 벨기카 속주에서 황제 대리인을 역임했다(Plinius Historia naturalis, 7.76.).[4]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타키투스의 저서인 《연설가들에 대한 대화》에서 당대 수사학의 1인자였던 퀸틸리아누스의 수사학 이론을 타키투스가 잘 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5] 그의 장인이 바로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로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브리타니아를 거의 평정할 뻔한 사람이었다. 평정에 실패한 이유도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브리타니아를 거의 평정하던 참에 동방 전선에 위기가 닥치자 하릴없이 휘하의 병력을 돌린 것이다. 만일 다른 지역의 전황이 안정적이었다면 스코틀랜드 지역도 로마화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사위 타키투스가 쓴 그의 전기는 칭찬 일색이다.[6] 당시 도미티아누스와 원로원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아서 숙청당했음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7] '연대기'라는 명칭은 16세기에 붙여진 것으로, 원래는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으로부터》였다. 다른 저서들도 마찬가지이다.[8] 아그리콜라의 칼레도니아 침공 당시 그에 맞선 칼레도니아 연합군의 지도자 칼가쿠스가 했다는 연설을 타키투스가 기록한 것이다. 자신들의 땅을 침공한 로마인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발언이었다.[9] 수에토니우스는 변호사이자 황실 비서까지 역임했으나 기사(에퀴테스) 계급이었다.[10] 칼리굴라 항목 중 평가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등이 쓴 후세의 기록처럼 막장 행보를 계속하다가 구제불능이라고 암살된 황제가 아니었다. 이미지와 달리 칼리굴라는 개인적인 사치를 위해서 돈을 펑펑 쓴 황제도 아니었다. 그가 까인 이유는 초기 원수정이라는 복잡한 성격 등을 고려치 않았던 그의 노골적인 권력 강화와 티베리우스의 막대한 유증금을 아우구스투스 유언 집행에 따른 공공사업 재개, 즉위 직후 열린 국가축제 등으로 거의 써먹었기 때문이었다.[11] 네로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그럭저럭 국정도 잘했으며 나라도 굴러갔다. 항목 참조.[12] 타키투스는 클라우디우스 1세 시대에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