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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 Praetor |
1. 개요
고대 로마의 관직. 사법(私法) 재판의 진행을 맡고 치안을 관리하는 치안 판사이자 집정관을 대신하여 특정 부대의 지휘권을 행사하는 정무관이다. 집정관, 감찰관과 함께 로마 3대 정무관 중 하나로 취급되었다. 연령 제한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39세였지만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30세로 변경되었다.2. 기원
라틴어 단어 '프라이토르(Praetor)'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 로마 역사가들이 로마 공화국 초기의 집정관들을 다룰 때 종종 사용되었다. 리비우스는 최고 행정관이 처음에 "프라이토르"라고 불렸다가 나중에는 "콘술(consul)"로 불렸고 프라이토르는 법무관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현대 학자들은 여러 씨족이 뭉친 로마 사회에서 각 씨족의 군대를 통솔해 외적에 맞서 싸우는 군사 지도자가 Praetor를 칭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 공화국 초기 최고 관료는 '프라이토르 막시무스(praetor maximus)'로 일컬어졌을 것이며, 집정관은 이 직함을 가진 이들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로마 공화국 초기 기록이 워낙 듬성듬성해서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는 어렵다.집정관을 뜻하는 또다른 호칭이었던 프라이토르가 법무관이란 별도 직함으로 자리잡은 것은 로마 사회에서 빈번하게 벌어진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사이 계급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368년, 로마는 벨레트레이 전쟁 과정에서 심각한 경제 침체로 인해 사회 전반의 갈등이 극심해졌다. 이에 로마는 국민들의 동요를 수습하기 위해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를 독재관에 임명했다. 이때 호민관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는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평민으로 선출하자는 법안을 제출했다. 카밀루스는 내심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민회가 이러한 법안을 승인하기 위해 모이지 못하도록 훼방을 놨다. 이에 분노한 민회 구성원들은 카밀루스가 독재관에서 물려났을 때 탄핵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켈트족이 라티움으로 쳐들어오자, 카밀루스는 다섯 번째로 독재관에 취임해 이들을 격파했다. 하지만 평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집정관 1명을 평민 계급에서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귀족들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카밀루스에게 의존했다. 평민 지도자들은 이에 맞서 카밀루스를 체포하려고 했다. 갈등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카밀루스는 원로원을 소집해 계속 평민들과 마찰을 빚는다면 국가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설득했다. 그 대신, 그는 귀족만이 재임할 수 있는 법무관 직을 새로 설립하여 귀족의 권리를 보호하게 하자고 제안해 원로원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이리하여 기원전 367년 평민이 집정관에 선임되는 것을 용인하는 것과 동시에 법무관 직을 신설하는 내용의 섹스티우스-리키니우스 법이 반포되었다. 리비우스는 법무관 설립을 통해 전쟁의 책무에 짓눌러 있던 집정관들이 사법적 책임을 덜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무관은 처음에는 귀족 한 사람만이 맡아서 로마 시민들의 재판을 주관했다. 하지만 기원전 337년 평민인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가 법무관에 선임되면서, 평민들에게도 법무관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후 기원전 242년에 이탈리아 동맹시들 간의 법률 문제를 담당하는 2번째 법무관 직이 신설되었고, 기원전 227년에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및 코르시카를 담당하는 2개의 법무관 직이 추가로 도입되었으며, 기원전 197년 히스파니아 속주가 신설된 뒤에는 법무관 수가 6인으로 늘어났다. 이후 100여 년간 그 수를 유지하던 법무관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개혁을 통해 8인으로 늘어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10인으로 늘렸다가 다시 16인으로 늘렸다.
3. 역할
법무관은 켄투리아회에서 선출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법률을 제정하고 특정 재판의 판사를 임명하고, 로마의 풍기양속을 해칠 수 있는 것을 금지하거나, 사형 등 형벌을 집행하는 사법 권한만 맡았다. 하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면서 전쟁 규모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수많은 희생자가 양산되면서 지휘관을 대량으로 양성할 필요가 생기자, 기존에 임페리움(지휘권)이 없던 법무관에게 집정관보다 적은 규모의 군대를 통솔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 결과, 법무관은 집정관에 버금갈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처음에 신설된 법무관은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Praetor Urbanus: 도시 법무관)'로 일컬어졌다. 이들은 집정관 다음으로 로마시에서 가장 높은 순위의 치안판사였다. 오직 2명의 집정관만이 그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두 집정관이 로마에 없을 때에는 그가 사법 문제에 있어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다. 그는 한 번에 열흘 이상 로마를 떠날 수 없었고, 로마에서 일어나는 모든 법률 문제를 총괄해야 했다. 또한 그는 다음의 2가지 임무도 별도로 수행해야 했다.
1. 루디 아폴로나레스(Ludi Apollinares): 아폴로 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개최된 엄숙한 경기.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212년, 칸나이 전투의 재앙을 예언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키우스가 "로마인들이 아폴로를 기리기 위해 헬라스식 의식을 거행해야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원로원은 시빌라 예언서를 참조해 마르키우스의 예언이 합당한지 확인한 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아폴로를 위한 엄숙한 행사를 거행하기로 결의했다. 이 행사를 주관한 법무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이 행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후에도 도시 법무관들이 이 행사를 계속 개최했고 나중에는 연례 행사가 되었다. 매년 7월 13일에 개최되어 8~9일 동안 지속되었다.
2. 법무관의 칙령(Edictum praetoris) 제정: 법의 원칙에 대한 연례 선언으로, 한 해 동안 이루어질 사법 절차 및 판결 추론에 대한 지침이다. 대부분 기존 칙령을 그대로 시행했지만, 법무관은 재량에 따라 이 칙령을 수정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법에 대한 전문지식이 있는 로마 법률가들과의 협의하에 이뤄졌다.
2. 법무관의 칙령(Edictum praetoris) 제정: 법의 원칙에 대한 연례 선언으로, 한 해 동안 이루어질 사법 절차 및 판결 추론에 대한 지침이다. 대부분 기존 칙령을 그대로 시행했지만, 법무관은 재량에 따라 이 칙령을 수정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법에 대한 전문지식이 있는 로마 법률가들과의 협의하에 이뤄졌다.
기원전 242년 이탈리아 동맹시들 간의 법률 문제를 담당하는 법무관직이 신설된 이래[1], 로마는 세력을 확대할 때마다 외국인들을 상대할 법무관 직책을 늘렸다. 이들은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Praetor Peregrinus: 외국인들의 법무관)'로 일컬어졌으며, 로마 바깥에서 외국인들과 로마 간의 사법 문제를 다뤘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각 속주에서 군사 및 행정 등 광범위한 분야를 책임지게 되었으며, 최대 2개 군단의 지휘권이 부여되었다. 나중에는 사법 문제보다는 전쟁에서 더욱 활약했기에, 사실상 군 사령관으로 취급되었다. 또한 전직 집정관이 임페리움을 계속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전직 법무관도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원로원의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군대를 계속 지휘할 수 있었다.
이렇듯 법무관은 집정관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과 권위를 누렸다. 따라서 그에 어울리는 갖가지 특혜를 받았다. 그들은 원로원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집정관과 더불어 셀라 쿠루일스(sella curulis: 두 쌍의 청동 다리가 받치는 접이식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또한 보라색 줄무늬가 있는 토가인 '토가 프라이텍타(Toga Praetexta)'를 착용할 수 있었으며, 법무관 임기를 정상적으로 수행한 뒤에는 신발에 초승달 모양의 금속 장식을 달아 다른 원로원 의원들과 쉽게 구별할 수 있는 특권도 받았다.
그렇지만 이런 특혜보다 원로원 의원들에게 매력적이었던 것은, 원로원 회의에서 프린켑스 세나투스, 집정관, 전직 집정관의 뒤를 이어 발언권을 당연행사했다는 점이다. 원로원과 로마 사회에서 발언권을 순서에 따라 갖는다는 것은 특권 중 특권이었는데, 이는 곧 수백명이 모인 회의에서 자신을 홍보하고 로마귀족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본인과 가문의 자유와 위엄을 강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법무관은 집정관처럼 호위병인 릭토르(Lictor)를 배정받았다. 현직 법무관에게 릭토르를 허용하지 않게 하는 것은 모욕과 같게 인식될 만큼, 그 의미는 현대인의 상상을 능가할 만큼 컸다.[2]
법무관이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서 가장 중요한 실권도 쥘 수 있었다. 왜냐하면 상술한 군대 지휘권 외에도, 1년의 임기 종료 이후부터는 흔히 총독으로 불리는 로마 속주 최고 행정관으로 파견됐기 때문이다. 전직 법무관이 총독으로 부임한 경우 임기는 최소 3년이었다. 총독의 권력이 대단하고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총독직 재직 중 군공을 통한 야망 실현이 유리함을 떠올릴 때, 법무관을 지내고 이를 통해 명예로운 경력의 꽃으로 불린 집정관을 노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 됐다. 이런 까닭에 법무관을 지낸 뒤, 총독으로 최소 3년간 있었던 인물들은 막강한 권력과 권위 아래에서 부임지에서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법무관을 맡다가 총독으로 넘어간 행정관들이 속주민들을 착취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설령 들통이 나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넘어가는 일 역시 상당히 많았다. 이로 인해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와 총독은 한몫 두둑하게 챙기려는 이들의 주요 수단으로 전락했고, 속주민들은 대체로 법무관들의 무자비한 수탈에 시달린 나머지, 아시아 속주와 페르가몬 속주처럼 속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보호자를 원로원이라고 선포하고 이들의 위엄에 기대어 수탈에서 벗어나려는 일도 벌어졌다.
4. 로마 제국 시기의 법무관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 승리하여 지중해 세계의 1인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은 채 속주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며 무분별한 수탈을 일삼고, 로마시 내에서도 사법권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하는 법무관을 통제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법무관의 수를 12인으로 고정했다. 그 다음으로, 로마의 행정 체계를 본국인 이탈리아, 클레오파트라 7세 사후 아우구스투스가 파라오를 승계받으면서 편입된 이집트,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아온 식민지인 원로원령 속주, 아우구스투스 본인이 직접 통치하는 황제령 속주로 개편했다.원로원은 원로원령 속주(시칠리아, 사르데냐, 갈리아 나르보네시스 속주, 베티카 속주, 마케도니아 속주, 아카이아 속주, 아시아 속주, 비티니아 속주, 크레타, 키프로스, 키레나이카, 아프리카 속주, 누미디아 속주)에 법무관이나 집정관 출신 총독을 계속 임명할 수 있었지만, 황제령 속주(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아퀴타니아 속주,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벨기카 속주, 게르마니아 속주, 타라코넨시스 속주, 루시타니아 속주, 베티카 속주 등)에는 오직 황제의 의중에 따라 총독이 선임되었다. 이집트의 경우, 아우구스투스가 "신(카이사르)"의 아들이자 파라오로서 아이깁투스 속주로 개편된 이집트의 주권자가 되고 그의 행정관으로 선임된 관료들이 대리 통치했다.
황제령 속주에 부임한 총독들은 기존의 집정관, 법무관 출신 인사 외에도 황제를 옆에서 보좌하던 에퀴테스 출신이 많았다. 임기는 법적으로는 5년으로 고정되었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의중에 따라 해임 또는 임기 연장이 자유자재로 이뤄졌다. 따라서 그들이 속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간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 중도에 해임된 뒤 혹독한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매우 높기에, 이전과는 달리 황제의 의중을 살펴야 했다. 또한 명목상으로 원로원의 의중에 따라 '원로원령 속주'에 부임한 법무관 및 총독들 역시 실제로는 황제의 눈치를 잘 살펴야 했다. 특히 기원전 19년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에게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imperium proconsulare maius)를 수여하면서, 황제는 그가 직접 임명한 총독뿐만 아니라 원로원이 지명한 총독까지 통제할 권리를 합법적으로 누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사법 체계에도 손을 댔다. 기존의 체계에서는 법무관이 최고 재판관으로서 판사를 임의로 선임하고 형량을 확정한 뒤 형벌을 집행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누렸지만, 이제는 모든 판결이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며, 기존 재판에서 판결이 내려지더라도 피고인이 황제에게 항소할 수 있었다. 그 대신, 도시 법무관들은 조영관이 맡았던 경기 관리와 미풍양속을 위한 퇴폐 풍조 단속을 수행할 권한이 주어졌다. 이리하여 이전과는 달리 권력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드넓은 제국을 통치하는 데 필요한 행정관을 양성하는 역할로서 법무관의 중요성은 여전히 컸다. 티베리우스 치하에서 법무관의 수는 다시 16인으로 늘어났고, 클라우디우스 1세는 상속과 관련된 법적 문제를 담당하는 2인의 법무관을 별도로 선임했다. 네르바는 재무부와 시민간의 법적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법무관 직을 세웠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후견인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법무관을 선임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거의 모든 정치, 행정 권한이 황제와 황실 고문회 및 비서실에 집중되면서, 법무관은 갈수록 권력을 상실했다. 특히 사두정치를 출범한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위시한 사두 황제들이 제국 각지에 중심지를 별도로 세우면서, 법무관은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해외에서 군사, 행정, 사법권 등을 맡았던 법무관(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는 전반적인 속주의 군사, 행정권을 황제가 선임한 둑스(Dux)에게 넘기고 지방자치 권한을 담당하는 역할로 축소되었다. 로마시를 담당한 법무관(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는 서커스, 검투사 대회 등 경기를 개최 및 관리하거나 공공 사업에 대한 돈 지출을 관리하는 역할만 남기고 치안을 관리하고 형벌을 집행하는 등의 권한을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 도시 치안관)에 넘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호민관, 조영관, 감찰관 등 다른 관직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에 비해, 법무관은 집정관, 재무관과 더불어 수명이 길었다. 지방자치 업무를 위해 자금을 인출할 수 있는 재력을 보유해야 했기에 부유층이 도맡았으며, 서방 또는 동방 원로원에 진출하여 황제의 눈에 들 수 있는 관직이었기에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었다. 동로마 제국 시기에도 법무관은 계속 활약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행정 개혁을 단행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안을 담당하던 프라이펙투스 비길룸(praefectus vigilum)을 광범위한 경찰 권한을 가진 프라이토르 포풀리(praetor populi)로 대체했고, 트라키아 교구 행정을 다스리던 비카리우스를 '프라이토르 유스티니아누스(praetor Justinianus)'로 대체했다. 또한 피시디아, 리카오니아, 파플라고니아 총독들도 프라이토르 유스티니아누스로 승격되었고 비르 스펙타빌리스(vir spectabilis: 경탄할 만한 사람) 계급을 수여받았다.
9세기 무렵엔 각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 행정관 스트라티고스에 종속된 테마의 하급 행정 관리가 되었다가 10세기에 비로소 크리테(kritai: 판사)로 대체되었다. 니키포로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최고 사법관으로 법무관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법무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후 법무관은 다른 관직들로 대체되어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프라이토르'라는 이름은 종종 황실이 고위 관리들에게 부여하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1] 최초로 이 역할을 맡은 인물은 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다.[2] 이런 배경 때문에,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카이사르 사후 파벌 내부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된 상황에서 안토니우스를 편들다가 도주하던 중 이 문제로 큰 모멸감을 느꼈다. 그는 가족 전체와 함께 나폴리까지 도주했다가 옥타비아누스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배를 구해 시칠리아로 도망쳤다. 이때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총독으로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아버지, 형의 원수인 카이사르 부관이자 카이사르를 따른 젊은 귀족 무리 중 한 명인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공개적으로 릭토르와 그들의 파스케스 위엄을 공개적으로 금지하겠다는 선포를 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시칠리아 상륙 불허보다 이 부분에 큰 모멸감과 증오심을 느낀 나머지 그리스로 망명지를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