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8 22:10:54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기원전 42년 법무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라틴어: TIBERIVS CLAVDIVS NERO
이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Tiberius Claudius Nero)
공적 서명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의 아들", "티베리우스의 손자", 네로
(Tiberius Claudius Ti. f. Ti. n. Nero)
가문 클라우디우스 네로(Claudius Nero, 라틴어: Claudii Nerones)
출생 기원전 82년,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 기원전 33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향년 49세)
직위 원로원 의원
선출직 기원전 42년 법무관
경력 재무관
조영관
카이사르군 해군제독
폰티펙스 막시무스 보좌 사제
갈리아 행정 감독관
법무관(기원전 42년)
참전 카이사르의 내전
알렉산드리아 전쟁
페루시아 내전
부모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부), 이름 미상의 어머니(모)
형제자매 클라우디아(누나)[1]
배우자 리비아 드루실라
자녀 티베리우스(장남)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차남)

1. 개요2. 생애3.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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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말의 로마 원로원 의원, 법무관, 해군제독. 로마 제국의 초대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의 첫 남편이자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아버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 4명과 황족 대부분의 직계 조상이다.

젊은 시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따른 카이사르파 청년귀족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한 삼두파 일원 중 한명이다. 하지만 대중들에게는 장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강경 옵티마테스인 이유, 페루시아 내전 참전 이유 등으로 인해, 카이사르파임에도 대척점에 선 옵티마테스로 종종 오해받고 있다.

2. 생애

전체 이름에서 드러나듯, 로마 공화정을 대표한 3대 파트리키 씨족 가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다. '맹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막내아들(4남)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차남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그 아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직계후손이다. 아버지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로, 화폐 발행 감독관을 지낸 법무관이다. 어머니 역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후손인데, 먼 친척에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평민지파 마르켈루스 가 등이 있었다.

위로는 평민 계급이나 에트루리아 귀족의 후예인, 원로원 의원 퀸투스 볼루시우스와 결혼한 누나 클라우디아가 있다. 누나 클라우디아는 그와 나이 차이가 꽤 있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행적은 모른다. 다만, 매형 퀸투스 볼루시우스는 에트루리아 지방의 유서 깊은 도시 페로니아 출신으로, 뛰어난 인품과 높은 수준의 교양에도 조영관도 지내지 못한 평범한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는 키케로의 웅변, 수사학 직계 제자였고, 킬리키아에서 스승 키케로 비서이자 관료 역임 후, 키프로스로 파견 근무를 간 이력이 있었다. 그는 스승 키케로, 현지 주민, 율리우스 카이사르 모두에게 "신뢰할 수 있고, 매우 온화한 신사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받았다. 네로의 누나 클라우디아와의 사이에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트로니누스, 볼루시아 사트로니나,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얻었다. 이중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는 기원전 12년 보결 집정관을 지냈다. 그는 사촌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와의 혈연관계를 이유로 이들 형제의 양부 아우구스투스에게 거의 황족 대접을 받아, 명예로운 경력을 전부 추천받아 올랐고, 서기 4년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시리아 속주 총독 임명을 받고 제국의 중책을 떠맡았다.

비슷한 또래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와 마찬가지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따른 젊은 귀족이었다. 그는 1살 차이 밖에 나지 않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처럼 젊을 때부터 카이사르를 따랐고, 명예로운 경력을 카이사르를 정치적 스승으로 삼아 거쳤다. 이 점은 아버지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지중해 해적들을 소탕할 때 폼페이우스 해군 대대장을 지낸 경력상 의외일 수 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아버지와 그 일가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한 사람도 아니었고, 애초 그 일가는 골수 옵티마테스도 아니었으며,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동안 술라 쪽 인사도 아니었다. 되레 카이사르의 아버지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파트리키이지만 심정적으로는 포풀라레스 입장을 이해한 쪽에 가까웠다.

성년식 이후의 초기 경력인 10대, 20대 시절 이야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기원전 48년 카이사르 휘하에서 재무관으로 있으며, 카이사르가 아낀 휘하 부관으로 카이사르 군에서 사령관 카이사르를 보좌하며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던 이집트로 망명한 폼페이우스가 살해되고 그 머리가 바쳐진 가운데에서, 여러 카이사르파 젊은 귀족 부관 중 34살이던 재무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선별해 이집트로 떠났다. 이후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 전쟁 속에서 본인의 19척 함선 지휘권을 재무관 신분의 부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해군 지휘권을 내려 자신의 뒤를 받치게 했다. 이때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카이사르군 해군제독에 임명됐는데, 침착하고 영리하게 해군을 통솔해 지원 함대로 온 로도스 해군, 포티아 해군과 함께 얕은 해안을 전장 삼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해군을 박살냈다. 이 해전 후에도 그는 또래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등과 함께 카이사르의 내전에 카이사르파 일원으로 참전했는데, 이 시기에 안찰관을 지내면서 카이사르 아래에서 명예로운 경력을 쌓았다.

카이사르는 네로를 휘하 부관으로 두고 일처리와 업무 태도를 만족해 하고, 크게 신임했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갈리아 일대와 일리리쿰 일부의 속주화 작업과 로마 퇴역병 식민시 건설 감독관이라는 중책을 내렸다. 그래서 네로는 카이사르의 명령에 따라, 갈리아 일대로 파견돼 이곳에서 갈리아 일대의 속주화 작업의 토대를 마련했는데, 카이사르는 이런 성과를 앞세워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고위직인 법무관과 집정관을 될 때 필요한 경력의 기회를 계속 내려줬다.
카이사르파 젊은 원로원 의원임에도, 법무관 후보로 이름이 공공연하게 사람들 입에 오를 당시, 골수 원로원파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의 차녀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했다. 따라서 심정적 옵티마테스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 결혼은 혈통상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풀케르 가 출신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여러 부분에서 친가인 클라우디우스 가문과의 연결 고리를 유지하는데 중점을 두면서, 꾸준히 자신이 입양간 가문과 친가를 합쳐 새로운 강력한 귀족 가문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에 온 힘을 쏟았던 배경 때문에 성사된 것이었다. 앤서니 베렛 등은 네로와 리비아가 혈연상 사촌일 수도 있다고 가설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이 가설은 수에토니우스가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를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라고 잘못 표기하면서 생긴 오류에 근거해 다수설은 이들이 사촌이라는 주장은 폐기 중이다.

어쨌든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혈통적으로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 그 자체이며, 나이가 제법 있어도 초혼이고 외모와 능력 모두 출중한 네로를 사위로 점찍고 혼사를 진행시켜 결혼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오늘날까지 네로 골수 원로원파의 핵심인사 딸 리비아가 결혼적령기가 된 직후 결혼식을 올린 점에서, 여러 사람에게 종종 옵티마테스 인사로 분류된 근거가 되기도 했다.

네로는 리비아 드루실라를 아내로 맞이하기 전까지 미혼이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초혼이면서도 가문과 가문의 동맹과 다름 없었다. 그래서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는 카이사르파의 젊은 귀족이 골수 원로원파 인사의 딸과 약혼했다는 소식을 듣곤, 원로원파로 전향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네로는 상당히 명민했고, 당시 로마귀족들 사이에서 이런 경우는 흔해 카이사르 아래에서 법무관 직을 보장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44년 3월 15일 종신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됐다. 이 당시, 장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를 비롯한 골수 원로원파는 갓 결혼한 네로에게 국가와 원로원을 향한 충성과 봉사를 제안했다. 이때 그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등 다른 또래 카이사르파 인사들처럼 칩거하면서 돌아가는 정국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제안을 덥썩 물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이런 그의 행동은 가문과 본인의 흥망을 앞두고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행동한 대개의 원로원 의원들이 보인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 뒤에는 그가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와 깊은 관계였고, 카이사르가 그를 기원전 42년 법무관 직에 입후보해 당선이 확정적으로 보장해주고 부관 시절 사제, 복점관 등의 지위를 내려 꾸준히 믿음을 보여준 것도 컸다. 그래서 카이사르 암살 정국 속에서 네로는 동료들을 버리지 않고, 삼두파에 남았고, 이는 카이사르 생전의 결정에 따라 예정대로 기원전 42년 법무관에 출마해 당선되는 결과물로 이어졌다.

법무관 시절, 안토니우스와 그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쪽의 인사로 활약했고, 삼두파를 대표하는 법무관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를 도왔다. 이 시기,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을 얻었다. 기원전 42년 11월 16일 태어난 장남 티베리우스가 그의 첫 아이인데, 이런 기쁨에도 며칠 후 그의 장인은 공화정 수호와 삼두파에 대한 저주를 외치며 그리스에서 장렬히 자결했다.

법무관 임기가 끝날 즈음,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경쟁이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네로는 다시 한번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그는 숙고 끝에 가문과 자신의 미래를 안토니우스에게 걸었다. 이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중 경력, 조직 모두 우위인 전자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기원전 41년, 그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풀비아가 페루시아에서 반 옥타비아누스 운동을 하며 군을 일으키자(페루시아 내전), 이들 진영에 합류한다. 그러나 네로가 로마를 떠나 페루자로 거의 올 무렵, 옥타비아누스 군대를 지휘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풀비아 군을 제압하고 도시를 포위해 상황은 급변한다. 그래서 그는 기원전 40년 페루자에 입성했다가 도시가 함락되기 전, 가족들을 데리고 캄파니아 지방으로 탈출한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로마를 떠나며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장남 티베리우스, 가솔들을 모두 데리고 온 터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나폴리로 피신했다. 이때 그는 옥타비아누스에 맞서고자 노예 대대를 조직하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물리적 시간은 부족했고 자금 역시 턱없이 모자라 이를 포기한다. 설상가상 옥타비아누스군의 추격이 거세지고, 그의 목에 현상금까지 걸린다. 따라서 몇 번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죽을 뻔 했다. 이후 그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의탁하고자, 배를 구해, 가족들과 함께 시칠리아로 도망쳤다. 허나 폼페이우스는 매우 고지식해, 자신과 '급'이 맞지 않고 카이사르파인 인사와 교섭할 생각도 없다는 이유로 네로의 면담 요구를 거부한다.

이런 이유로 네로는 시칠리아에 정박해 있다가 이탈리아를 떠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있는 그리스로 탈출한다. 다행히 그리스에서 만난 안토니우스는 자기 아내와 동생 때문에 고생하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파의 추격은 피할 수 있었는데, 그 사이 네로의 어린 아들 티베리우스는 부모 손을 떠나 스파르타에 있는 가문 클리엔테스들 손에 있다가, 스파르타 공공 탁아소에서 사는 등 온갖 고생을 다했다.[2] 그래서 어릴 적 이런 경험을 강렬히 기억한 티베리우스는 부모의 여러 물품 중 몇 개는 고이 간직했다고 한다.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화해하고 옛 카이사르파 인사들에 대해서는 특별사면을 내린다. 이때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도 수배령이 해제되고, 사면령이 발동된다. 그래서 네로는 아내, 아들을 데리고 3년 만에 로마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귀국 후 열린, 카이사르파 화합 파티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네로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를 보고 한눈에 반해 기원전 39년 강제 이혼한다. 이때 리비아는 네로의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젊은 권력자가 집까지 찾아와 담판을 요구했다. 따라서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장남과 아내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있다는 조건을 보장받는 약속을 받아내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네로와 리비아의 둘째 아들은 기원전 38년 태어났다. 이때 네로는 옥타비아누스 집에 있던 아들을 자신의 아이가 맞다고 인지 후 손수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허나 옥타비아누스는 네로의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여겨 젖을 떼고 걸음마를 할 때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에서 논란이 벌어지는데, 세간에서 계속 이 문제로 수근거리자 옥타비아누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네로의 차남을 돌려보낸다. 네로는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차남을 돌려 받는데, 이때 그는 차남의 이름을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로 개명시킨다.

아내와 강제 이혼 후, 옥타비아누스의 강압적 요청으로 기원전 39년 1월 17일 열린 결혼식에서 아버지가 하는 역할처럼 리비아를 옥타비아누스에게 건내주는 것을 수행한 뒤, 두 아들을 키우며 홀로 지냈다. 이때 그는 재혼 제안을 모두 거절한 뒤, 공적 활동을 최소화하며, 두 아들의 예의범절, 기초교육, 교양을 모두 가르쳤다. 그래서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는 예의있고 검소하고 절제적인 습관을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의에 잠긴 네로는 기원전 33년 병에 걸렸고, 향년 49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두 아들은 친권을 발동한 리비아 드루실라의 요구와 네로의 차남 드루수스에 대한 양육을 열망한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클라우디우스 가의 네로 가문을 떠나 옥타비아누스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세간의 비난을 의식해 내란이 격화되고 있어 두 아이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풍자시인과 정적들 입과 손을 묶는 등 강경하게 대처했다. 그래서 네로 사후, 그가 끝까지 지킨 두 아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사실상 친아들로 자라게 되고, 네로 가문은 후일 아우구스투스의 카이사르 가문과 완전히 결합해 새로운 가문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사후, 열린 장례식은 9살이었던 장남 티베리우스가 상주 자격으로 로스트라에 올라 추도사를 낭독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이후 미래의 황제 티베리우스는 양부 아우구스투스,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의 도움 아래 아버지 이름, 외조부의 이름으로 두 번의 검투 대회를 개최한다.

3. 창작물

  •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 드루수스 네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그는 야심많고 영리한 로마귀족인 실제 모습과 달리, 술라 이전의 공화정 정신을 사랑한 이상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로 언급된다. 그러면서, 차남(주인공의 아버지) 드루수스와 주인공의 형인 손자 게르마니쿠스가 가진 좋은 인품을 물려준 할아버지로 소개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순수한 마음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존경해 이집트까지 건너가 카이사르파로 활동하고, 갈리아에서 카이사르군 퇴역병 정착촌을 건설하고, 사제직까지 받은 '달콤하고 싱싱한 사과' 같은 좋은 클라우디우스 사내로 나온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자신의 이상을 훼손할 야심 많은 옥타비아누스를 따르지 않았다고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클라우디우스는 언급한다. 도피생활을 마친 뒤, 야심 넘친 악녀이자 돌사과, 독사과 같은 클라우디우스 여성인 아내 리비아에게 '내 자궁에 있는 아이는 옥타비아누스의 씨앗이다"고 이야기를 듣고 좌절하고, 이혼 후에 티베리우스, 드루수스를 공화주의자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직접 담당하다가 이 말을 들은 전처 리비아에게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리비아에게 불쌍하게 저녁식사에서 독살됐다고 언급된다. 그럼에도 그는 좋은 사람이라서 유언장에 두 아들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맡기며 보호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 콜린 맥컬로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 실제 모습과 정반대의 최악으로 나온다. 그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첫 남편으로, 부유한 친정을 가진 아내에게 자격지심 때문에 무신경한 구두쇠임에도 돈을 아끼라고 닦달하고, 어린 아내와 갓 태어난 첫째 아들에게 온갖 고생을 다 시킨 무능력한 인물이자, 둘째를 임신한 아내에게 비난을 퍼붓는 좀생이 귀족으로 묘사된다. 그러다가 둘째를 임신 중인 아내에게 홀딱 반한 옥타비아누스의 종용으로 이혼하고, 재혼하지 않은 채, 아내에 대한 불만을 두 아들 티베리우스, 드루수스에게 퍼붓고 학대하며 살다가 병에 걸려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실제 모습이 건실하고, 능력이 뛰어난 귀족으로,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것을 떠올리면, 지나칠 정도로 왜곡해 묘사된 셈.


[1] 플레브스 계급의 에트루리아 귀족 가문의 후예인, 원로원 의원 퀸투스 볼루시우스와 결혼해,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딸은 볼루시아 사투르니나이다.[2]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때를 떠올리며 부모를 이해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부모가 도피 생활 중 이탈리아에 있을 당시에 했던 결정도 컸다. 처음 도피 생활을 할 당시, 아기였던 티베리우스가 자꾸 울어 몇 번이나 죽을 뻔 했을 때, 참다 못한 친인척들이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에게 "아이는 또 낳아도 된다"는 식으로 제안해, 티베리우스 황제가 유기될 뻔한 일이 있었다.(이때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는 아들을 아끼고 있어 화를 내면서 반대해, 그 제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