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4 02:15:40

카이사르의 내전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고대 로마의 내란·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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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사 전투 마그넨티우스 vs 콘스탄티우스 2세
프리기두스 전투 파일:east_roman_mon_256.png 테오도시우스 1세 vs 파일:western_roman_mon_256.png 에우게니우스 }}}}}}}}}
카이사르의 내전
Secundum Civile Bellum
Ο Εμφύλιος Πόλεμος του Καίσαρα
Caesar's Civil War
파일:카이사르 전쟁.jpg
시기 기원전 49년 1월 12일 ~ 기원전 45년 3월 17일
장소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그리스, 폰투스, 이집트, 북아프리카
교전 세력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카이사르
파일:cimmeria_emblem_256.png 보스포루스
파일:judea_mon_256.png 하스몬 왕조 유대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폼페이우스
파일:massilia_emblem_256.png 마실리아
파일:masaesyli_emblem_256.png 누미디아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투스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지휘관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1]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2]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3]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카시우스 스카이바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디디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푸블리우스 시티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파일:cimmeria_emblem_256.png 미트리다테스 2세
파일:judea_mon_256.png 안티파트로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티투스 라비에누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4]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피우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마르쿠스 옥타비우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파일:masaesyli_emblem_256.png 유바 1세
파일:masaesyli_emblem_256.png 사부라†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파르나케스 2세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토르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아르시노에 4세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가니메데스†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포티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테오도투스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아킬라스†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결과카이사르의 승리. 로마 공화정의 종말과 제정의 시작

1. 개요2. 기원전 49년 전반기
2.1. 전조2.2. 카이사르와 원로원과의 교섭2.3. 카이사르의 대응2.4. 카이사르의 남하2.5. 코르피니움의 싸움2.6. 폼페이우스의 탈출2.7. 카이사르의 로마 방문2.8. 히스파니아 전쟁
2.8.1. 마실리아의 저항
2.9. 일레르다 전투
2.9.1. 대치2.9.2. 궁지에 몰린 카이사르2.9.3. 반전2.9.4. 진영을 버린 아프라니우스2.9.5. 궁지에 몰린 아프라니우스2.9.6. 항복
3. 기원전 49년 후반기
3.1. 마실리아 공방전3.2. 바로의 항복3.3. 1차 아프리카 전역 (쿠리오)
4. 기원전 48년
4.1. 집정관 카이사르4.2. 폼페이우스의 병력4.3. 카이사르의 도해4.4. 양군의 움직임4.5.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군의 대치4.6. 해군 사령관 비불루스의 죽음4.7. 강화 시도4.8. 로마의 소동4.9. 해상 보급 성공4.10. 메텔루스 스키피오군의 움직임4.11. 디라키움 포위4.12. 테살리아로 진격4.13. 파르살루스 전투4.14. 전투 후4.15. 폼페이우스의 죽음
5. 기원전 48년 후반기~기원전 47년6. 종막(기원전 46년~기원전 36년)7. 평가8. 주요 전투

1. 개요

고대 로마 시대에 발발했던 거대한 내전. 기원전 49년 1월 12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루비콘 강을 도하함과 동시에 시작되어, 기원전 48년 9월 28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옛 부하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아울러 카이사르의 유명한 역사적 명언, ‘주사위는 던져졌다.’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전쟁이기도 하다. 이 내전으로 인해 이전부터 위태롭던 고대 로마의 공화정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렸고, 로마 '제국'으로서의 제정이 자리잡게 되었다.

고대 유럽사에서 포에니 전쟁과 더불어 상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전쟁이며, 이 내전의 결과로 로마 제국이 꽤나 안정된 정치적 구조를 마련하여, 추후 오랫동안 유럽 대륙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던 전쟁으로 평가된다.[5]

2. 기원전 49년 전반기

2.1. 전조

기원전 58년 카이사르가 하이두이족의 요청으로 헬베티족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갈리아 전쟁은 기원전 51년에 8년의 싸움 끝에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로마는 이 전쟁의 결과로 라인 강 서쪽의 모든 갈리아 지역을 패권하에 넣게되었으며 단기간에 이탈리아 반도와 맞먹는 규모의 야만족의 땅을 제패한 카이사르의 군사적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기원전 50년 새해 카이사르는 총독 임기가 만료되는 기원전 49년에 있을 집정관 선거운동에 주력하기로 하였고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잇따라 방문하였다. 시민들은 놀라운 군사적 업적을 이룩한 민중파의 거두 카이사르를 엄청난 환호로 맞이하였다. 카이사르가 방문한 거리는 곳곳마다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시민들은 그를 보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길거리로 나왔다. 또한 이들 도시에선 카이사르가 입성할 때마다 신에게 감사드리는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해 내내 로마 시민들로부터 놀라운 환영을 받은 카이사르는 겨울이 다가오자 10개 군단에 달하는 자신의 군단들을 갈리아 동쪽으로 이동시킨 뒤 숙영케 하였다.

이때 로마 본국에서는 카이사르가 매수한 호민관 쿠리오가 로마 원로원에 맞서 카이사르의 부재 중 집정관 입후보를 허락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는 폼페이우스가 이전에 받았던 것과 동일한 혜택이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 원로원 측에서는 계속해서 쿠리오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쿠리오는 호르텐시우스 법에 의거한 평민 집회를 열어 이 법안을 통과시키려하였다. 이에 맞서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퇴역병을 동원하여 평민 집회를 여는 것을 물리적으로 저지하였다. 때문에 로마 내의 정세는 교착상태에 빠졌고 이러한 와중 원로원은 파르티아 원정을 선포하였다.

파르티아 원정의 선포는 표면적으론 크라수스카르헤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 파르티아가 시리아 속주를 계속 공격해 들어왔으므로 그들을 군사적으로 응징하겠다는 로마 정부의 결의였다. 하지만 원로원의 속내는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10개 군단의 수를 줄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갈리아 전쟁 5년째, 즉 기원전 54년에 카이사르는 사비누스가 이끄는 14군단이 전멸하는 손실을 잃은 바 있었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1개 군단을 빌렸었다. 이를 알고 있던 원로원은 파르티아 원정을 선포한 뒤 각 총독들에게 1개 군단씩 차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카이사르에게 빌려준 1개 군단을 내놓겠다고 답함으로써 카이사르에게서 사실상 2개 군단을 빼앗는 결과를 낳게 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휘하에 있었던 1군단과 15군단을 로마로 보낸다. 당시 로마 집정관이었던 마르켈루스는 그 군단을 인수한 뒤 로마 인근에 주둔시킨다.

2.2. 카이사르와 원로원과의 교섭

로마 내에서 위와 같은 정세의 변화가 있는 동안 집정관과 호민관 선거가 치러졌다. 기원전 50년 내내 카이사르의 입장을 꾸준히 대변해온 쿠리오는 호민관에 재선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기원전 51년 카이사르 휘하에서 군단장의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던 재무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된다.[6]

겨울 내내 원로원과 카이사르 측의 교섭은 계속되었다. 카이사르는 부재 중 입후보를 원로원 측에 요청하였으나[7] 원로원은 상당히 고집스럽게 카이사르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마침내 카이사르는 한 발 양보하여 부재중 입후보를 허가해 준다면 자발적으로 8개 군단에 이르는 자신의 군대를 즉시 해산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폼페이우스의 군단의 해산을 요청한다.

집정관들이 물러나고 새로운 집정관과 호민관들의 임기가 시작된 1월 초, 카이사르의 서신이 집정관들에게 전달되었다. 집정관들은 원로원파의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이를 원로원에 공개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호민관의 항의를 받은 뒤에서야 이를 공개한다. 이 서신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이 로마에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는 법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언급한 뒤 원로원이 원한다면 즉시 군단을 해산하겠다고 답하였다. 다만 그는 이를 위해서라면 폼페이우스 역시 군단을 해산해야한다고 대답하였고 만일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8]

카이사르의 의견은 사실상의 최후 통첩이었고 이를 전해들은 원로원 의원들은 안건을 토의에 붙였다. 원로원 회의에서 집정관 렌툴루스는 카이사르의 서신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하면서 만일 원로원이 카이사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카이사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또한 폼페이우스의 장인인 스키피오가 발언을 하길 원로원이 폼페이우스를 지지한다면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위해 의무를 다할 것이지만 만일 의원들이 등을 돌린다면 폼페이우스에게 나중에 도움을 요청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원로원 의원들은 스키피오의 발언을 폼페이우스가 직접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뒤 원로원 의원 중 여럿이 발언을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우선 이탈리아에서 군대를 즉시 모집해 원로원을 지킨 뒤 논의를 다시하자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고 다른 이들은 폼페이우스가 속주에 돌아간 뒤 카이사르를 군대없이 이탈리아로 불러들이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대해 카이사르 측 원로원 의원들은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서 빼앗아 둔 2개 군단이 로마 인근에 주둔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카이사르는 로마 귀환시 위의 군대로 그의 신변이 위협당할 가능성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 발언을 들은 집정관 렌툴루스는 매우 격분하여 이런 온건한 발언을 한 의원들에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이들 원로원 의원들의 신변에 무슨 위협이 있을지 보장하지 못한다는 협박과 함께 이들의 의견을 철회하게 만든다. 그리고 즉시 표결에 붙여 다음과 같은 제안을 가결시킨다.
"카이사르는 정해진 날짜 이전에 군대를 해산해야하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이에 대해 호민관 안토니우스는 거부권을 발동시킨다. 그날의 회의는 일단 그렇게 끝이 난다.

그날 저녁 폼페이우스는 모든 원로원 의원들을 불러모았다. 그는 의원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한 뒤 온건한 견해를 내놓은 의원들에겐 훈계성 질책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장교들도 불러모아 이들을 원로원 의원들에게 과시하면서 원로원에게 원로원 최종권고를 선포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열린 회의에서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의 선포를 가결한다. 이로써 호민관의 거부권은 무효화되었고 목숨을 위협받은 호민관들은 즉시 로마를 떠나 카이사르를 향해 출발하였다.[9]

그로부터 며칠 뒤 폼페이우스는 다시 원로원 의원들을 불러모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에겐 10개 군단이 있음을 선포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한다. 그러면서 카이사르 대책은 자신에게 맡기면 된다고 호언한 뒤 원로원의 결심을 촉구한다. 마침내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전권을 맡긴 뒤 이탈리아 전역에서 군대를 모집할 군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즉시 자금을 모으기 시작한다.

2.3. 카이사르의 대응

로마에서 벌어진 이런 일들은 곧바로 카이사르에게 알려졌다. 카이사르는 이때 13군단과 함께 루비콘 강 인근에 머물면서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었다. 그는 원로원이 자신에게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했다는 소식을 듣자 실망하여 병사를 소집한 뒤 그들에게 연설한다.

이 연설에서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비판한 뒤, 자신이 여지껏 로마를 위해 갈리아 전역을 평정했으나 원로원이 이러한 대우를 한 것이 부당하다며 호소하였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그들은 총사령관을 위해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고 외쳤다. 포에니 전쟁 이후 기존 로마의 군사체계가 무너지면서 로마의 군사령관은 사실상 용병대장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이는 카이사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운명을 사령관인 카이사르에게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10] 당연히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의 결의를 확인한 카이사르는 즉시 병사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때는 1월 12일의 일로 이로써 또다른 로마 내전이 발발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이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말그대로 주사위를 던지는 심정으로 그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도박에 뛰어들었다.

2.4. 카이사르의 남하

파일:attachment/카이사르의 내전/italy.jpg

13군단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아리미눔(리미니)에 도착한다. 그리고 전령을 보내 갈리아에 머무는 모든 군단병들에게[11] 이탈리아로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뒤 아리미눔에 입성하여 그곳에서 카이사르를 기다리고 있었던 카이사르 측 호민관들과 폼페이우스가 보낸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만난다.

카이사르의 일족인 루키우스는 폼페이우스 파였는데 그는 폼페이우스의 서한과 그의 입장을 전한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위로하면서 국가를 위한 선택이니 양해해달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자신이 동시에 무장해제를 하고 폼페이우스는 임지인 히스파니아 속주로 떠날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집정관 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한다. 이러면서 폼페이우스와 직접 만나 상의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한다.

폼페이우스는 카푸아의 별장에 있었는데 루키우스는 바로 돌아가 카이사르의 답변을 전한다. 카이사르의 답장을 받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돌아가 군대를 해산한다면 자신도 속주로 돌아가겠다고 응대하였다. 또한 회담 요청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전했다.

회신을 받은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속주로 돌아간다는 약속 외엔 아무것도 확약을 준 것이 없음을 알고 실망한다. 따라서 계속 남하하기로 결심한 카이사르는 13군단을 쪼개 5개 대대를 안토니우스에게 주어 아레티움(아레초)으로 보내고 자신은 2개 대대와 함께 아리미눔에 남았다. 그 뒤 카이사르는 아리미눔에서 병력을 새로 뽑는 한편 남은 3개 대대를 주변 도시에 보내 점령하게 한다.

이때 법무관 테르무스가 5개 대대와 함께 이구비움(구비오)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쿠리오에게 3개 대대를 주어 그를 공격하게 한다. 이구비움 주민들은 카이사르에게 우호적이었으므로 테르무스는 군대와 함께 달아난다. 테르무스의 군대는 후퇴 도중 모두 탈영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구비움을 점령한 카이사르는 남하하여 아욱시뭄(오시모)으로 이동하였다. 아욱시뭄을 지키는 장수는 아티우스 바루스였는데 그는 전직 법무관이자 아프리카 총독을 역임한 바 있었다.[12] 카이사르가 접근하자 아욱시뭄의 유력인사들은 바루스에게 카이사르에게 붙을 것이라고 통보한다. 깜짝 놀란 아티우스는 즉시 아욱시뭄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를 카이사르군이 추격하기 시작하였고 곧 아티우스군을 따라잡는다. 아티우스군은 잠시 맞서는 시늉을 하다가 지휘관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지고 많은 수가 카이사르에게 항복한다.

이렇게 되자 피케눔 전역이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결정하였다. 싸움다운 싸움없이 피케눔 지역 전체가 카이사르에게 자발적으로 붙자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이때 로마 시내에선 카이사르가 기병과 함께 전속력으로 로마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이 소문은 의원들의 공포심을 부채질하였다. 이들은 서둘러 로마를 버리고 떠나기로 하였고 폼페이우스 역시 바로 아풀리아 지역(지도)으로 이동하여 카이사르에게서 빼앗아 둔 2개 군단과 합류하였다.

이러는 동안 갈리아에서 귀국한 12군단이 카이사르의 휘하에 합류하였다. 카이사르는 12, 13군단과 함께 아스쿨룸(아스콜리 피체노)에 접근한다. 아스쿨룸에서는 전직 집정관 스핀테르가 10개 대대와(10개 대대 = 1군단) 함께 주둔 중이었는데 휘하 군대가 카이사르에게 붙고 싶어하자 그는 군대를 버리고 탈출한다. 스핀테르는 소수의 병사와 함께 도망가다 폼페이우스가 보낸 비불리우스 루푸스를 만났고[13] 루푸스는 스핀테르를 해임한 뒤 그의 군대를 인수하고 자신의 병력과 합쳐 13개 대대를 편성한다.

이렇게 13대대를 편성한 비불리우스는 코르피니움(코르피니오)에 머물고 있는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군대와 합류하러 떠났다. 아헤노바르부스는 이미 12개 대대를 편성한 뒤 주둔 중이었고 둘이 합류하자 2.5개 군단의 전력을 갖추는 데 성공한다. 전직 집정관인 아헤노바르부스는 카이사르의 후임으로 갈리아 총독으로 내정되어 있었던 거물이었다. 그는 자신과 카이사르의 전력이 엇비슷하다고 보고 코르피니움에서 카이사르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한다. 그러면서 폼페이우스의 구원군을 기다렸다가 힘을 합쳐 맞서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2.5. 코르피니움의 싸움

카이사르와 맞서기로한 아헤노바르부스는 5개 대대를 보내 코르피니움 근처에 있는 다리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재빨리 병사를 보내 아헤노바르부스의 군을 격퇴한 뒤 다리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그 뒤 조금 있다가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가 도착해 성 근처에 진을 쳤다.

카이사르의 도착을 안 아헤노바르부스는 2개 군단과 함께 아풀리아에 머물고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전령을 보내 같이 합류해 맞서길 요청하였다. 그렇게 한 뒤 도시 곳곳에 방어용 무기를 설치하였다. 이때 카이사르쪽에 붙고 싶어하는 병사들이 많았는데 아헤노바르부스는 그들에게 이기면 자신의 땅을 일인당 25에이커씩 나누어주기로 약속함으로써 일단 그들의 이탈을 막았다.

이때 코르피니움 근처에 술모(술모나)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곳엔 원로원파 의원들이 7개 대대를 이끌고 주둔 중에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게 5개 대대를 인수받은 안토니우스가 접근하자 술모의 시민들과 병사들은 모두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한다. 의원들은 술모에서 도망쳤고 그러다가 카이사르 휘하 군단에 생포되었으나 카이사르는 그들을 조건 없이 풀어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리아에서 새로 징집된 22개 대대(2.2군단)와 갈리아의 부족장이 보낸 기병 3천이 카이사르가 있는 곳에 도착해 합류한다. 카이사르는 이 부대를 모두 쿠리오에게 주어 독자적으로 지휘하게 한다.[14][15] 이것은 카이사르가 쿠리오를 상당히 신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뒤 카이사르는 군대를 동원해 코르피니움을 에워싸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헤노바르부스는 폼페이우스의 답신을 받았는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아헤노바르부스는 안절부절하며 측근들과 밀담을 나누었다. 궁금해진 병사들에 의해 곧 소문이 나 진상이 밝혀졌는데 폼페이우스는 아헤노바르부스에게 "어째서 멋대로 행동하는가. 당장 성을 버리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합류하라"고 질책하는 답신을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땐 이미 카이사르가 성을 에워싼 뒤었으므로 아헤노바르부스는 달아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병사들이 성을 지키는 동안 측근들과 함께 몰래 성을 버리고 빠져나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아헤노바르부스의 병사들은 분노하여 아헤노바르부스를 카이사르에게 넘기기로 결심하였다. 이때 아헤노바르부스 휘하의 보조병으로 마르시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병사들이 아헤노바르부스를 넘긴다고 하자 격분하면서[16] 도시의 요소처를 점거하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곧 마르시족도 진실을 알게 되면서 이들은 만장일치로 아헤노바르부스를 사로잡아 가둔 뒤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카이사르는 소동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여 한밤중에 성을 접수한 뒤 다음날 동틀 무렵 포로로 끌려온 아헤노바르부스와 카이사르에 맞선 군 사령관, 원로원 의원들, 도시의 유력자들을 불러모아놓고 자신이 베푼 은혜를 배신하였다고 질책한 뒤 그들을 모두 조건없이 석방하는 대인배적인 결정을 내린다. 그 뒤 아헤노바르부스가 군자금으로 쓰려고 모아놓은 그의 재산이 담긴 금고를 병사들이 가져왔다. 카이사르는 이 석방하기로 결정된 아헤노바르부스에게 이 돈을 돌려줌으로써 그가 대인배라는 것을 다시 확인해 준다.

이렇게 코르피니움을 점령한 카이사르는 아풀리아에 머물고 있던 폼페이우스와 싸우기 위해 아풀리아로 향했다. 이때 카이사르가 지나는 도시들은 모두 그에게 붙는다.

2.6. 폼페이우스의 탈출

카이사르가 남하하면서 근방의 도시들이 전부 카이사르에 붙는 선택을 하자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이탈리아 도시들이 원로원의 훈령을 무시하고 카이사르에게 잇달아 붙은 이유는 불과 한세대 전에 있었던 동맹시 전쟁의 여파가 남아서 그리한 것으로 보인다. 40여 년 전까지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시 취급을 받아왔고 따라서 로마 시민권이 아닌 라틴 시민권을 소유한 동맹시 시민들은 참정권이 없었다.

이러한 제도는 로마의 지배가 수백 년이 계속되어 이탈리아 도시들이 로마와 거의 완벽히 동화되었음에도 유지되었다. 마침내 이탈리아의 도시민들이 이러한 불평등을 없애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로마 정치가들이 바로 민중파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이 민중파 정치가들이 연이어 살해당하는 일이 생기자 마침내 이탈리아 도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어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였고 로마 원로원은 마지 못해 이들을 로마 시민으로 격상해 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원로원 측에서 그런 결정을 내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상당히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로마가 마침내 이들 반란군을 군사적으로 분쇄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전쟁 이후로도 이들 동맹시 시민들에게 어떻게 참정권을 부여할 것인가가 주요 정쟁이 되었는데 원로원 측에서는 이들 라틴 도시들에게 선거구 4개를 주고자 하였다. 선거구는 30여 개에 달하였는데 이들에게 4개 정도를 주는 것은 이 동맹시 시민들을 차별하는 것이었으므로 민중파 정치가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마침내 이 선거구 문제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였고 민중파 인사였던 킨나와 마리우스가 로마를 점령한 뒤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을 살해하였고 몇 년 뒤 원로원파 인사였던 술라가 로마를 점령한 뒤 민중파 정치가들을 집단 처형하면서 로마 정치는 피로 얼룩지게 된다. 그 뒤 술라가 물러난 후 술라측 인사들이 원로원을 계속 장악한 상태가 유지되었고 동맹시 도시들은 계속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중파 인사인 카이사르가 남하하자 이탈리아 도시들은 전부 술라쪽 출신의 로마 원로원보다는 그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막 갈리아 제패라는 군사적 업적을 남긴 상황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지지도 상당히 높았다.

이러한 이탈리아 도시들의 연이은 이탈은 로마 원로원 측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초기 원로원측은 카이사르가 남하하였을 때 이탈리아에서 군사적으로 맞설 움직임을 보였다. 원로원은 로마 인근에서 징집을 시행하였으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서 거둬들인 2개 군단을 카푸아에 머물게 하면서 북상할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막상 루비콘 강을 건너 남하를 개시하자 이탈리아 도시들은 카이사르의 군대가 접근하는 것만으로 카이사르에게 붙어버리고 이탈리아 도시들에게서 징집한 로마 군단병들[17]은 원로원 의원인 지휘관을 버리고 탈영하거나 카이사르에게 가담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원로원 의원들은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와 맞설 의지를 잃어버리고 폼페이우스 역시 이탈리아를 버리고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의 발부리 끝에 있던 항구인 브룬디시움(브린디시)으로 이동하였다. 각 법무관들과 전직 집정관 등이 군대를 이끌고 속속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하였고 집정관들은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에서 군대를 편성하는 업무를 맡기 위해 디라키움(두러스)으로 떠났다. 폼페이우스가 브룬디시움에 남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불어난 휘하의 6개 군단을 이끌고 그를 추격하기 위해 떠났다.

카이사르는 이 상황에서도 폼페이우스와 교섭을 시도한다. 그는 생포된 폼페이우스의 측근을 폼페이우스에게 보내 자신이 브룬디시움에 도착한다면 회담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집정관들이 브룬디시움에서 그리스로 떠나 없으니 회담이 어렵다고 답신을 보낸다. 이에 카이사르는 대화로 해결하기를 단념하고 곧 항구 봉쇄에 들어간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병을 동원하여 항구에 커다란 제방을 쌓아 둘러싸고자 하였다. 그리고 수심이 깊은 곳은 뗏목을 동원해 바리케이드를 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폼페이우스는 커다란 상선을 무장시켜 공사중인 병사들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매일같이 전투를 벌인다.

그러면서 9일이 지난 뒤 디라키움에 집정관들과 군단을 운반하였던 대규모 수송선들이 임무를 마치고 귀한한다. 카이사르는 공사를 절반쯤 마쳤을 때라 이들의 입항을 저지하지 못했고 폼페이우스는 이 배들에 병력을 싣고 곧장 그리스로 떠나고자 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우선 브룬디시움 성벽 곳곳에 병사들을 배치하여 카이사르의 공격에 대비한 뒤, 병력이 승선하자 바로 신호를 보내 이들 수비병들을 범선으로 불러들였다. 신호가 떨어지자 수비대는 지체없이 범선으로 달려갔고 이들이 승선하자 수송선은 그리스로 향해 출발하였다. 카이사르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항해하다 충돌하여 전복한 배 두척을 나포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대부분의 병력과 함께 이탈리아를 떠나는 데 성공하였다.

2.7. 카이사르의 로마 방문

폼페이우스가 떠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 전역이 카이사르의 지배하에 들어왔으나 카이사르는 곧 이탈리아 지역외의 다른 로마 영토는 모두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의 지배하에 있음을 파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측근인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해군을 편성하게 한 뒤 쿠리오에게 2개 군단을 주어 시칠리아와 아프리카를 공격하게 한다. 그 뒤 그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를 공격하려 떠날 준비를 하였다.

시칠리아에는 소 카토가 머물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당시 전형적인 귀족 젊은이처럼 호민관으로 경력을 시작하였는데 그는 스파르타쿠스의 난, 마케도니아 전쟁 등에서 휘하 대대를 지휘하면서 유능한 군인으로 병사들의 인기를 얻었다. 그 경력으로 재무관에 당선한 뒤 대담하게도 독재관 술라 치하의 밀고자들을[18] 탄핵하였다. 하지만 술라의 빽으로 인해 이러한 고발이 소용없게 되자 실망한 카토는 재무관을 사임하였다. 이러한 태도로 민중 사이에 유명해진 카토는 그 유명세 때문인지 호민관이 되기도 전에 원로원 의원으로 발탁되었고 그 뒤 얼마 안 있어 호민관에 당선된다.

호민관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카토는 카틸리나의 음모 때 집정관 키케로를 지지하여 그를 재판없이 처형하는데 일조하였고 그 와중에 카이사르가 그 음모에 연루되어있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옵티무스의 일원이 되어 기존체제를 흔드는 움직임을 여러 차례 보여왔던 폼페이우스를 정치적으로 공격하였다. 훗날 폼페이우스가 동방에서 귀국한 뒤 개선식과 집정관 선거를 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자 원로원을 움직여 양자택일을 강요하게 만들었다. 그 뒤 법무관을 지낸 뒤 총독으로 부임하여 지금의 포르투갈 지역을 제패한 성과를 거두고 귀국한 카이사르에게도 이러한 양자택일을 강요하였으며 그 결과 폼페이우스는 집정관 직을 포기하고 개선식을,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포기하고 집정관 출마를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 이후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에 의한 삼두정치가 결성되고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당선되는 일이 생긴다. 그해에 법무관에 당선된 카토는 장광설로 회의를 방해하는 등의 일을 벌였고 훗날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에 넘어온 이후 로마에 큰 소동이 벌어져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해야하는 상황이 되자 독재관을 주는 대신 단독 집정관을 주어야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키는 등의 까칠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옵티무스쪽에서의 활약 덕분인지 호민관 이후로 민중의 인기를 얻지 못한 카토는 집정관 선거에서 번번이 낙선하였다. 하지만 그는 원로원 의원들의 신임을 받은 데다 혼인으로 인맥을 쌓아두었으므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 임기를 마치고 루비콘 강 인근에 주둔하면서 부재 중 집정관 출마를 요구하자 카토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강경하게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카토는 폼페이우스와는 약간 다른 태도를 보였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군사적으로 저지할 수 있다고 자신한 뒤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넌다면 자신이 가진 10개에 달하는 군단병으로 분쇄할 것이라고 호언하였다. 하지만 카토는 이러한 폼페이우스에게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며 불필요한 전쟁을 피해야한다는 의견을 내면서 즉각적인 전쟁을 원했던 폼페이우스에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 뒤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너자마자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연달아 카이사르에 붙자 의원들은 모두 로마를 버리고 탈출하였는데 카토는 시칠리아로 달아나 그곳에 머물면서 해군을 편성하는 데 힘을 키운다.

그 뒤 쿠리오가 2개 군단을 이끌고 시칠리아 섬으로 상륙하자 시칠리아 전역이 카이사르에게 붙고자 하였고 이에 카토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폼페이우스를 맹비난한 뒤 아프리카로 달아났다. 그리고 시칠리아는 쿠리오가 접수한다.

한편, 브룬디시움에서 폼페이우스를 놓친 카이사르는 로마를 방문한다.[19] 이는 4월 1일로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넌 지 넉 달 만의 일이었다. 그는 로마에 남아있던 원로원 의원들을 소집해[20] 그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는데 즉 자신이 부재 중 집정관 선거를 치르게 해달라는 법안이 호민관들에 통과되어 평민집회에서 회부되는 것을 폼페이우스가 옛 퇴역병을 동원해 물리적으로 저지한 것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런 발언을 한 뒤 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벌여야한다고 말하며 원로원 의원들 중 누군가가 폼페이우스에게 로마 원로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절로 파견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의원들은 사절 파견엔 동의하였지만 폼페이우스에게 가는 것은 카이사르 편에 붙었다고 인증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라 생각하여 모두 사절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게다가 로마에는 호민관 루키우스 메텔루스가 있었는데 골수 원로원파인 그는 대담하게도 로마에 머물며 집회와 회의에 출석하면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배짱을 보였다. 이를 본 카이사르는 문제를 덮어두고 자신의 옛 속주였던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떠났다.

2.8. 히스파니아 전쟁

2.8.1. 마실리아의 저항

갈리아 트란살피나는 지금의 남부 프랑스 지역으로 카이사르가 10년에 걸쳐 갈리아 총독으로써 다스린 지역이었다. 카이사르는 남부 갈리아를 떠난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다시 3개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에 진입하였다.

이때 마실리아(마르세유)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여 카이사르에게 대항하기로 하였다. 마실리아는 폼페이우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폼페이우스는 과거 히스파니아 원정을 수행하면서 마실리아에 야만족의 땅을 상당수 양도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코르피니움에서 쫒겨난 아헤노바르부스가 마실리아에 입성하여 이들에게 과거의 은혜를 상기시키면서 카이사르에 맞서 성을 지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자신이 이끄는 3군단으로 마실리아를 포위 공격하도록 한 뒤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해군을 편성해 마실리아의 해상을 봉쇄하라고 하고 자신은 나르보(나르본) 지역에서 월동하고 있었던 또다른 3개 군단을 가이우스 파비우스에게 주어 히스파니아로 떠나도록 하였다. 히스파니아는 폼페이우스가 과거 세르토리우스와 5년에 걸친 전쟁을 끝냄으로써 그와 인연을 맺었고 또한 삼두정 이후 10년에 걸쳐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다스렸으므로 그의 완전한 속주가 되어있었다. 이곳엔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의 3개 군단,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의 2개 군단,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의 2개 군단, 총 7개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8개 군단에 달하는 보조병이 참가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들에 맞서기 위해 앞서 파비우스의 지휘 하에 보낸 3개 군단에 3개 군단을 원군으로 합류시킨다. 그리고 자신은 잠시 갈리아에 남아서 3천 기병을 갈리아 부족들로부터 제공받아 기존의 고참 기병 3천과 합친, 즉 6천 기병을 편성한다. 기병 편성을 마치자 그는 마실리아 포위에 동원된 3개 군단을 부관인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히스파니아 군대를 지휘하러 떠났다.

2.9. 일레르다 전투

2.9.1. 대치

카이사르가 앞서 보낸 파비우스는 빠른 행군으로 피레네 산맥의 통로를 무사히 통과한 뒤 히스파니아 영토로 진입하였고 이곳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폼페이우스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말꼴을 먹이기 위해 기병을 내보냈고 따라서 이 두 기병들은 자주 마주쳐 이때마다 교전을 벌였다.

어느 날 파비우스의 2개 군단이 말꼴을 먹이기 위해 다리를 건넜을 때 다리가 무너지는 일이 생겼다. 그 때문에 2개 군단이 고립되자 폼페이우스군의 지휘관 아프라니우스는 4개 군단을 보내 맹공을 퍼부었고 파비우스의 2개 군단은 협공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열을 넓게 핀 뒤 공격을 버텼다.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 측 지휘관 파비우스는 서둘러 2개 군단을 급파해 무너진 다리 위에 있었던 또다른 다리를 건너 구원하였고 두 병력은 교전하다 서로 각각 군대를 물린다.

그로부터 이틀 뒤 카이사르가 도착한다. 그는 파비우스로부터 지휘권을 양도받은 뒤 파비우스를 휘하의 군단장으로 남게 한다. 카이사르는 부서진 다리를 수리한 뒤 6개 대대를 남겨 수비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다리를 건너 폼페이우스군의 진영 앞으로 병력을 포진시킨다.

이를 본 아프라니우스 역시 군을 이끌고 진영을 내려와 대치한다. 양군은 서로 대치했으나 아프라니우스는 회전을 벌이지 않았다. 이를 본 카이사르는 그곳에 진영을 새로 구축하기로 마음먹고 1, 2열이 포진한 동안 3열의 병력으로 몰래 4.5미터의 폭을 가진 참호를 파게 한다.

그날 밤 참호가 완성되자 그는 병사를 참호 뒤로 후퇴시키고 방책을 짓게 한다. 상황을 파악한 아프라니우스는 공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병력을 출동시키지만 참호가 완성되었으므로 미처 공격을 하지 못하고 군을 철수한다. 다음 날 진영 건설이 완료되자 그는 다리 건너의 모든 병력과 군수품을 그 진영으로 옮겼다. 그 뒤 카이사르는 지역을 정찰한 끝에 아프라니우스군의 인근의 작은 언덕을 발견하고 그 언덕 정상을 점거하여 요새를 구축해 아프라니우스의 보급로를 괴롭힐 구상을 한다.

이 계획을 위해 카이사르는 3개 군단을 직접 이끌고 진영을 빠져나와 언덕을 점거하러 떠났다. 아프라니우스는 이 첩보를 바로 전해들었고 그도 서둘러 병력을 내보내 언덕으로 출동시킨다. 두 군대는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아프라니우스의 군이 더 빨랐고 이들은 카이사르군의 도착전에 이미 언덕 위를 점거한다. 카이사르군이 도착하자 아프라니우스의 군은 언덕 위에서 아래에 있던 카이사르군에게 과감하게 돌진하여 그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카이사르군이 혼란에 빠져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그는 갈리아 시절부터 10년 넘게 복무한 고참병인 9군단을 출동시킨다. 이들은 추격해오는 아프라니우스군을 거꾸로 격파한 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였다. 그러다 이들은 너무 깊숙히 들어가 불리한 지형으로 진입하였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낮은 골짜기였는데 이곳은 높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아프라니우스군은 언덕 위 사방에 모습을 드러낸 뒤 마구 필룸을 던져댔다. 그 뒤 카이사르가 보낸 지원군이 도착하고 아프라니우스군도 지원군을 보냄으로써 양측 군대는 이곳에서 5시간 동안이나 전투를 벌인다.

비록 지형이 불리한 곳에서 포위까지 당한 상태였나 갈리아 전쟁 시작했을 때부터 군사 경험을 쌓아온 9군단의 전투력은 엄청났다. 이들은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버텼으며 언덕을 기어올라 적에게 돌진하여 적을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마침내 아프라니우스군의 기세가 수그러들었고 결국 9군단과 남은 병사들이 모두 철수하는 데 성공한다. 이 전투 뒤 아프라니우스군은 승리를 자축하였는데 언덕을 점거하려는 카이사르를 격퇴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군은 불리한 지형에서도 철수를 성공한 것으로 그들이 승리했다고 믿었다.

2.9.2. 궁지에 몰린 카이사르

다음 날 아프라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습격한 바 있던 언덕에 대규모 방어시설을 건설한다. 그로부터 이틀 뒤 엄청난 비가 쏟아져 카이사르군이 확보한 두 개의 다리가 휩쓸려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되자 강을 건너 아프라니우스와 대치 중인 카이사르군은 보급이 차단된 상태로 고립되게 되었다.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이사르는 병력을 동원해 다리를 건설하게 하였으나 이 움직임은 아프라니우스의 눈에 띄었다. 아프라니우스는 카이사르군이 보이면 투석기, 스콜피온, 궁병, 투석병 등을 모두 동원해 공병대를 공격했고 따라서 카이사르군은 다리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보내온 수송대가 부근의 강 앞에 도착하였다가 아프라니우스에 의해 엄청난 손실을 입는다. 그 수송대는 도착과 함께 아프라니우스가 보낸 기병 전부와 3개 군단과 맞닥뜨렸다. 수송대는 서둘러 언덕 위로 올라가 항전하였고 덕분에 많은 인명을 구하였지만 수송물자를 전부 상실한다.

이렇게 되자 아프라니우스는 승리를 확신하여 로마의 친척들에게 승전보를 전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이탈리아 전역에 퍼졌고 이탈리아에 머물던 귀족들이 줄을 이어 폼페이우스에 합류하러 그리스로 떠났다. 폼페이우스를 따라가다 도중에 자신의 별장으로 이탈한 키케로도 그중 한 명이었다. 로마에 있었던 아프라니우스의 저택은 승리를 축하하러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2.9.3. 반전

물자 보급이 막힌 채 고립된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 원정시 배를 건조한 경험이 있었던 군단병들을 동원해 배를 건조하게 하였다. 적 몰래 진영 한복판에서 건조한 배는 완성되자 여러대의 마차를 연결한 수레에 태워져 한밤중에 30킬로미터를 이동하여 강위에 띄워졌다. 그 뒤 병사들이 옮겨타서 강을 건너 강둑의 작은 언덕을 점거한 뒤 그곳에 서둘러 요새를 짓는다.

그들이 요새를 짓는 동안 강위의 작은 배는 계속 병력을 수송하였고 밤동안 쉼없이 왕복하면서 마침내 1개 군단이 강을 모두 건너는 데 성공한다. 그 뒤 강 건너의 1개 군단과 진영 쪽의 군단병들이 다리를 건설하기 시작해 단 이틀 만에 다리를 완성한다. 이로써 마침내 카이사르군은 고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다리가 완공되자마자 카이사르의 기병대는 모두 출동하여 말꼴을 먹이느라 흩어져있던 아프라니우스군을 습격한다. 아프라니우스군은 여전히 카이사르군이 다리를 완성한 것을 몰랐으므로 이들의 기습에 무방비 상태였고 때문에 큰 손실을 입는다. 카이사르군은 상당수의 전리품을 챙긴 채 다리를 건너 진영으로 되돌아온다.

카이사르의 본군이 곤경에서 벗어났을 때 마침 마실리아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은 양군이 서로 15척 남짓의 군선을 동원한 소규모 해전이었으나 이 해전에서 카이사르 측의 지휘관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승리한다. 폼페이우스 측의 마실리아 해군을 지휘한 아헤노바르부스는 노예와 용병을 동원한 뒤 이들에게 자유와 엄청난 보수를 약속하며 사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은 카이사르가 전 병력에서 가장 정예한 병력만 차출해 승선시켰으므로 접근전이 벌어질 때마다 카이사르군이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고 결국 해전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실리아는 육로로도, 그리고 해로로도 완전히 차단된 채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갈리아 속주 한가운데에 고립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둘의 싸움을 관망하던 히스파니아의 많은 부족들이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결심하고 그에게 사절을 보내 협조를 약속한다. 카이사르는 이들로부터 상당수의 식량을 제공받아 군량 보급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프라니우스는 이 진영에서 카이사르군과 대치하는 것을 단념하고 켈티베리아로 군대를 물리기로 결심한다. 켈티베리아는 지금의 누만티아 인근의 도시로 이곳에서 사는 야만족들은 카이사르의 명성에 대해 잘 모르고 폼페이우스가 과거 히스파니아에서 활약했을 때를 기억하며 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9.4. 진영을 버린 아프라니우스

아프라니우스는 이번 해만 무사히 넘긴다면 그리스에서 열심히 군대를 편성 중인 폼페이우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어떻게든 장기전으로 끌고가고자 하였다. 이들이 카이사르를 1년만 붙들어두면 폼페이우스는 편성이 끝난 병력으로 배후에서 이탈리아를 침공하거나 히스파니아로 상륙하거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우스의 해군전력도 카이사르군을 크게 앞섰기 때문에 이들의 상륙을 저지할 수단이 카이사르에겐 없었다. 카이사르는 어떻게 해서든 이번해에 아프라니우스를 격파해야하고 아프라니우스는 어떻게 해서든 이번해를 무사히 넘겨야했던 것이었다.

아프라니우스는 켈티베리아로 이동한다면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것은 문제없다고 판단하였고 따라서 그는 배를 징발한 뒤 에브로 강을 건너 내륙지방으로 갈 것을 계획한다.

그 뒤 배를 확보하기 위해 아프라니우스는 슈리스 강의 본류인 에브로 강 인근의 도시들에 전령을 보내 배를 징발해 옥토게사에 집결케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 뒤 그들은 진영을 거두고 옥토게사로 떠날 준비를 한다. 이들은 우선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배를 동원해 2개 군단을 슈리스 강을 건너편에 보내 진지를 구축하였다.

장기전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카이사르는 이 움직임을 어떻게든 막아야했다. 따라서 그는 군단병에게 밤낮없이 운하를 파서 불어난 슈리스 강을 얕게 만들게 하였다. 드디어 슈리스 강의 수량이 어느 정도 줄어들자 우선 기병을 건너게하였다.

기병이 강을 건넜을 때는 새벽 3시의 일로 이때 아프라니우스는 옥토게사를 향해 행군 중이었다. 한밤중에 카이사르의 기병이 후미에 도착하여 후방을 교란하기 시작하자 아프라니우스군은 행군에 지장을 받는다. 이윽고 동이 트기 시작하여 아침이 되자 두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 광경이 강 건너의 보병인 로마 군단병들의 눈에 띄었다.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은 카이사르에게 강을 건너 기병과 합류해 싸우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였고 이때 아직 강물이 보병이 건널 만큼 얕지는 않았으나 병사들의 의지를 본 그는 몇몇 체격이 작은 병사들과 1개군단을 빼놓고 전원에게 도하를 명령한다. 군단병들은 모두 무사히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하였고 이들은 오후 3시경에 폼페이우스군의 후방에 도착하였다.

카이사르의 보병대가 후방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아프라니우스는 행군을 중단하고 높은 지대에 병력을 포진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들과 전투를 치르지는 않은 채 진영을 세웠으며 아프라니우스도 그 장소에 진지를 구축한다.

밤이 되자 아프라니우스는 몰래 진을 버리고 떠날 것을 계획하였고 이 첩보를 생포한 아프라니우스의 군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동원해 구령소리를 크게 내게하였다. 이것에 놀란 아프라니우스는 철수를 단념한다.

다음 날 아침 양측 군대는 첩보를 풀어놓았고 지형을 정찰한 이들은 오후에 그들의 진영에 돌아가 행군로의 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길목이 좁아지는 지형이 있고 그곳을 점거하면 적의 행군을 틀어막을 수 있다는 정보를 보고하였다. 카이사르와 아프라니우스 모두 이 정보를 파악하게 되었다.

아프라니우스 측은 이 길목을 차지하기 위해서 밤에 즉시 출발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때 밤에 행군을 반대한 이들의 의견은 폼페이우스군의 사기가 낮으므로 밤에 행군하면 틀림없이 행군 중 탈영하는 병사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그들은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동이 트자 카이사르는 곧장 병력을 모두 철수케 한 뒤 그 길목을 차지하기 위한 행군을 개시하였다. 앞서 말한 길목과 카이사르군 사이엔 아프라니우스가 진영을 구축하였으므로 카이사르는 우회하여 골짜기를 넘고 암벽을 타야만 하였다. 아프라니우스군은 처음엔 카이사르군이 철수한다고 생각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상황 파악이 되자 서둘러 행군하기 시작하였다. 두 군대는 어느 누가 빨리 저 지형을 점거하는지 경주를 하게 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아프라니우스의 속도를 지체하기 위해 기병을 풀어놓아 아프라니우스의 후방을 계속 교란케 하였다. 이것은 아프라니우스군의 행군속도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후방의 기병의 공격을 무시하고 군대를 내보내 언덕을 점거하면 후방의 군수물자는 모두 상실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양군이 7킬로미터의 행군을 하였을 때 카이사르군이 마침내 그 언덕을 점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되자 아프라니우스군은 행군로를 완벽하게 틀어막히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아프라니우스는 주변의 언덕 중 높은 언덕에 4개 대대를 보내 점거케 하였으나 이 움직임을 지켜본 카이사르의 기병대는 즉시 이들에게 공격을 퍼부어 이들을 모두 전멸시킨다.

2.9.5. 궁지에 몰린 아프라니우스

아프라니우스군은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다. 이들의 전방엔 카이사르의 보병대가 길목을 틀어막았고 후미엔 기병대가 위치한 것이었다. 아프라니우스는 그들이 머문 곳에 진영을 세웠지만 그곳엔 식수가 없었고 따라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력으로 돌파를 시도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머문 곳의 높은 지대에 카이사르의 보병대가 이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프라니우스는 군대를 내보내 물을 길어 오게 하였다. 물을 수송할 때마다 병사들이 카이사르 기병대의 공격을 받으므로 아프라니우스는 자신의 군단병으로 하여금 개울과 그들의 진영 사이에 보루를 건설하여 물 보급로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 건설을 감독하기 위해 아프라니우스와 그의 동료인 페트레이우스는 진을 떠나 있었다.

사령관이 자리를 비우자 아프라니우스의 병사들은 카이사르쪽에 붙을 것을 계획한다. 이들과 카이사르군은 매우 가까이 붙어있었으므로 이들은 진영 밖에 머무는 카이사르의 군인들에게 접근해 그들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이들 중 몇몇은 카이사르 병사들과 안면이 있었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선처를 호소하였다.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이 호의적으로 대답하자 이들은 자신의 진지에 카이사르 병사들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즉각 본진으로 되돌아왔고 페트레이우스는 격분하여 길길이 뛰면서 자신의 노예와 호위대, 그리고 야만족 기병들을 무장시켜 그들의 본영에 버젓이 머물고 있었던 카이사르 병사들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군은 깜짝 놀랐지만 얼른 대형을 짠 뒤 공격을 버티면서 그들의 진영으로 퇴각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놓이자 최고 사령관인 아프라니우스는 아예 전의를 상실한채 지휘를 손놓았으며 페트레이우스만이 자신의 병사들을 설득하기 위해 진영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눈물로 호소하였으며 이 열의에 감복한 병사들은 다시 싸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전세는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식량은 병사들이 휴대한 것이 전부였고 외부로부터의 수송은 카이사르에 의해 철저히 차단된 상태였다. 때문에 밤마다 많은 병력이 탈영하였다.

마침내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일레르다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일레르다는 이전에 카이사르와 대치하였던 바로 그 장소였다. 하지만 이들이 철군하기 시작하자 카이사르는 곧장 자신의 병사를 이끌고 그들의 후위를 바짝 따라가면서 틈이 보일 때마다 공격하였다. 때문에 아프라니우스군은 계속 싸우면서 철수하고 그 다음 멈추고 싸우는 것을 반복해야만했다. 그래서 아프라니우스군의 행군은 느렸다. 그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대략 6시간 가까이 고작 6킬로미터를 전진한 게 고작이었다.

이때 정오가 되어 양측이 행군을 멈추고 잠시 쉬게되었을 때 갑자기 아프라니우스의 군대가 카이사르군을 습격한다. 카이사르군이 혼란에 빠지자 아프라니우스의 전군이 행군을 개시하였다. 카이사르는 즉시 기병을 불러들인 뒤 이들의 후미를 급습하였고 그 결과 많은 수가 전사한다.

아프라니우스는 다시 행군을 멈추고 밤이 가까우자 그곳에 진영을 세우기로 하였는데 아프라니우스는 또 다시 식수 문제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카이사르는 아예 막사를 세우지 않은 채 대오를 유지한 채 병사들에게 쉬게하였는데 이는 아프라니우스가 움직을 때 신속히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밤에 카이사르는 병사를 동원해 아프라니우스군의 길목에 보루와 참호를 지어 움직임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사흘이 지나자 상황을 파악한 아프라니우스는 전군을 진영 밖에 빠져나오게 한 뒤 전투대형으로 포진하였다. 카이사르 역시 군단병을 불러들여 병력을 포진시킨다. 그런데 두 사령관들은 병사들을 회전으로 내몰고 싶지 않았다. 아프라니우스군은 사기가 저하된 데다 카이사르군보다 전투능력이 떨어졌으므로 그는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21]

카이사르 역시 궁지에 몰린 아프라니우스군과 굳이 회전을 치를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두 군단은 해질 때까지 대치하다가 밤이 되자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다음 날 카이사르군이 마침내 공사를 마친 뒤 기병을 따로 보내 근처의 슈리스 강 건너에 기병을 보내 강을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게 한다. 이로써 아프라니우스군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몰렸고 비축해놓은 물과 식량도 모두 바닥났다. 이로써 더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비공개 회담을 요구하였지만 카이사르는 병사들 앞에서 공개 회담을 하겠다고 답한다.

2.9.6. 항복

다음 날 아프라니우스는 그의 아들을 볼모로 카이사르에게 넘긴 뒤, 카이사르가 지정한 장소에서 만났다. 아프라니우스는 의연한 목소리로 자신의 처지를 조목조목 설명했으나 어차피 그 내용은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애원이었고 그 말을 들은 카이사르는 자신을 노린 원로원의 행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뒤 앞서 회담을 하고자 하였던 병사들의 의견을 묵살해놓고선 이제 와서 항복하는 태도를 질책한다. 그 뒤 그는 그들을 모두 제대시켜 줄 것을 약속한다.[22]

카이사르에게 항복한 아프라니우스군은 카이사르군의 지휘하에 그대로 머물고 있으면서 제대지로 지정된 에브로 강을 향해 같이 행군하게 되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그들은 아프라니우스에게 봉급을 내놓으라고 항의한다. 카이사르는 이를 조정하여 그들의 소동을 진정시킨 뒤 에브로 강에 이르러 이들을 전부 해산시켜 버린다. 이로써 히스파니아에서 카이사르를 대적하는 폼페이우스의 세력은 분쇄되고 만다.

3. 기원전 49년 후반기

3.1. 마실리아 공방전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군을 분쇄하였을 때 마실리아 공방전을 지휘하는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23]는 3개 군단을 이끌고 포위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마실리아인들은 로마인들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어마어마한 수성병기를 동원해 버텼기 때문에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때 폼페이우스가 그리스에서 파견한 16척의 군선이 마실리아에 도착한다. 당시 마실리아인들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와의 1차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바다로부터의 보급이 차단된 상태였다. 16척의 군선의 도착은 마실리아인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이들은 기존의 5척의 배와 합류해 20척의 배로 다시 브루투스에게 해전을 걸기로 하였다.

브루투스 역시 20여 척의 배를 가지고 있었고 두 함대는 곧바로 맞붙는다. 두 함대의 싸움은 처음엔 호각이었으나 브루투스의 기함이 두척의 배를 침몰시키자 폼페이우스가 파견한 해군들은 서둘러 철수한다. 결사적으로 싸우고자 한 마실리아인들과는 달리 16척의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목숨걸고 싸우고자할 의지가 별로 없었고 때문에 두 척이 침몰되자마자 바로 해전을 포기한 것이었다.

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군은 안심하고 계속 공성전을 벌였다. 공성전이 길어지자 카이사르의 병사들이 아이디어를 냈는데 이는 성벽 근처에 벽돌로 탑을 쌓는 것이었다. 처음엔 벽돌로 방공호를 만들어 적의 공성무기를 막아냈다가 나중엔 이것의 규모를 늘려 50미터 높이의 벽돌탑을 건축한 뒤 그곳에 머물면서 계속 공성전을 시도하였다. 이 탑은 성벽에 바로 붙어있는 데다 두께가 1.5미터의 콘크리트로 지어졌기 때문에 마실리아인들이 공성무기로 공격해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탑을 건설한 뒤 카이사르군은 그 탑과 성벽을 연결하는 지붕달린 통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통로는 탑과 성벽의 사이인 땅 위에 건설되었는데 엄청나게 튼튼하게 지어서 마실리아인들이 거대한 돌을 던졌는데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특히 지붕이 경사지게 지어졌으므로 돌이 명중해도 미끄러져 떨어질 뿐이었다.

이 통로를 통해 성벽에 접근한 로마군은 곧바로 성벽 해체작업에 돌입한다. 이들은 성벽 바로 밑을 삽으로 파고들어갔으며 곧 주춧돌이 있는 곳까지 흙을 파낸 뒤 그 돌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바로 성벽은 기울기 시작하였고 곧 붕괴되기 일보직전이 되었다.

이를 본 마실리아인들은 크게 놀라 곧바로 성문을 열고 몰려나와 카이사르군 앞에서 항복하겠다고 애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잠시 휴전하고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귀국하거든 입성하라고 간청하였다. 이들의 간청이 그럴듯 하다고 생각한 로마 장교들은 이것을 허락하고 곧바로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그러나 며칠 뒤 이들은 몰래 횃불을 들고 접근하여 공성병기에 불을 질렀다. 이 공격은 성공하여 카이사르군의 공성무기는 모두 잿더미가 돼버리고 만다.

이것은 카이사르 측 지휘관 트레보니우스가 큰 실수를 한 것이었으나 그는 정신차리고 바로 공성병기를 재건설하기 시작한다. 로마 병사들은 마실리아인들의 행동에 열받은 상태였으므로 밤낮없이 일해 빠른 속도로 공성병기를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카이사르군이 대부분의 공성병기를 복구해내자 마실리아인들은 마침내 완전히 체념하고 또다시 성벽을 나와 항복하였다. 이번에도 이들의 항복이 받아들여졌는데 그 이유는 카이사르가 마실리아인들을 살육하지 말라는 엄격한 지시를 내린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레보니우스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카이사르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성내로의 입성을 늦춘다.

3.2. 바로의 항복

이때 히스파니아에선 속주 총독인 바로가 남아있었는데 그는 아프라니우스군에게 합류하지 않고 형세를 관망하며 누구에게 붙을까 가늠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프라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잠시 곤경에 처했을 때 승전보를 전했고 그 소식을 듣자 그는 바로 폼페이우스에게 붙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2개 군단병과 3개 군단에 해당되는 보조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이들과 함께 아프라니우스를 도우러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라니우스의 군이 괴멸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히스파니아 전체 속주와 부족들이 바로를 버리고 모두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결정한다. 바로는 조금이라도 카이사르의 전력을 분산하고자 거느리고 있었던 군단과 함께 가데스(카디스)라는 도시를 점거해 버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이러한 바로의 계획을 눈치채고 재빨리 휘하의 6백 기병만 거느리고 히스파니아의 내륙으로 강행군하였다. 그리고 그는 속주에 도착하자마자 칙령을 보내 히스파니아 부족 회의 개최를 선포한다. 이 선포는 곧바로 모든 히스파니아 부족장들에게 전달되었고 이를 본 부족장들은 전원이 이 회의에 참여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렇게 되자 바로는 궁지에 몰렸는데 그 이유는 가데스의 지도자들도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결정하고 바로에게 전령을 보내 그에게 협력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은 군대내에 퍼졌고 바로가 거느린 2개 군단 중 1개 군단이 바로와 다른 군단이 보는 앞에서 멋대로 진영을 떠나버린다. 이를 본 바로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였고 카이사르에게 전령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군단병을 넘길 테니 사람을 보내달라고 전했다. 이 전갈을 들은 카이사르는 자신의 일족인 섹스투스 카이사르를 보냈고 그를 만나자 진짜로 바로는 자신의 군단을 그에게 넘긴다. 그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는 카이사르가 머무는 곳을 방문해 카이사르를 만났고 그곳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군자금을 모두 넘기고 비축한 물자의 위치를 모두 알려준다. 카이사르는 바로를 풀어주었고 바로는 곧바로 폼페이우스가 있는 그리스로 떠났다.

이렇게 히스파니아를 완전히 평정한 카이사르는 마실리아로 이동해 성 밖에 머물던 군단병과 함께 입성하여 마실리아를 접수한다. 그 뒤 카이사르는 그가 수석 법무관에 의해 독재관으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24] 곧바로 로마를 향해 떠났다.

3.3. 1차 아프리카 전역 (쿠리오)

그때 카이사르에게서 아프리카 원정을 위임받은 쿠리오는 주어진 4개 군단 중 2개 군단과 500기병만 이끌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이렇게 적은 규모의 군대만 이끌고 간 것은 그의 상대인 아티우스 바루스를 얕보았기 때문이었다. 아티우스는 이전에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마자 맞닥뜨린 바로 그 장수이며 싸워보지도 못하고 내뺐으므로 쿠리오는 그를 가볍게 본 것이었다.

쿠리오는 우선 카르타고 멸망 후 아프리카 최대도시가 된 우티카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그는 우티카 인근에서 시민들이 물자를 성내로 운반 중이라는 첩보를 듣고 기병을 보내 공격하였다. 이 공격을 아티우스 바루스가 600명의 누미디아 기병과 400명의 보병으로 맞섰으나 쿠리오의 기병이 승리한다. 이렇게 승리한 뒤 우티카 항 인근의 보급선 200척과 그 선박에 실려있었던 물자를 수중에 넣는 짭짤한 전과를 거둔다.

당시 누미디아의 왕 유바는 쿠리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쿠리오는 호민관 시절 누미디아 왕국을 없애고 속주로 편성해야 한다는 법안을 제출하였으나 유바가 폼페이우스에게 적극적으로 로비함으로써 이를 무효화한 적이 있었다. 유바는 아티우스에게 구원군을 파견하였고 이 군대가 행군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쿠리오는 기병을 동원해 기습한다.

이 기습은 성공을 거둬 유바의 누미디아 군대는 많은 손실을 입는다. 이렇게 전과를 다시 거둔 쿠리오는 진영으로 되돌아온다.

이때 쿠리오의 병사들은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이후 위의 코르피니움에서 카이사르에 맞서다 투항한 병사들로 원래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이며 아티우스 바루스와도 안면이 있었다. 쿠리오의 상대인 아티우스 바루스는 코리피니움에서 그들의 상관으로 있었고 그래서 그는 두 군대가 포진한 틈을 타 쿠리오 대열 근처에서 말타고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붙으면 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외쳤다. 쿠리오의 병사들은 미동도 안했지만 해가 진 뒤 그들의 진영으로 돌아온 후 서로 대화하면서 동요하였다. 이 정보를 들은 쿠리오는 자신의 웅변술로 병사들을 설득하기로 하고 병사들을 모두 불러모은 뒤 연설을 시작하였다.[25]

쿠리오는 위 연설에서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승리한 것을 언급한 뒤 과거 코르피니움에서 에노발루스와 아티우스가 그들을 배신한 것을 생각하라고 말하였다. 그 뒤 아프리카 상륙 후 두 차례에 걸친 승리를 언급한다. 이 웅변으로 병사들의 마음은 한데 뭉쳤고 이를 본 쿠리오는 다음 날 회전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다음 날 쿠리오와 바루스 모두 병사를 이끌고 왔는데 회전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골짜기를 향해 서로 행군하다 둘이 만나 교전이 벌어졌다. 이때 쿠리오의 기병전력이 우세하였으므로 쿠리오군은 승리를 거두었고 쿠리오는 1명의 백인대장만 죽었을 뿐이나 적은 600명이 죽고 천명이 부상을 입는다.

이때 바루스가 연이어 패배하였으므로 우티카는 쿠리오에게 붙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누미디아 왕 유바는 그가 가진 전 병력을 이끌고 바루스를 지원하기 위해 직접 진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우티카 시민들은 계속 항전하기로 하였다.

유바는 쿠리오가 호민관 시절 누미디아를 병탄시킬 움직임을 보였으므로 쿠리오가 승리하면 누미디아는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유바의 입장에서 이는 국운을 건 싸움이었고 상당한 대군을 동원하여 이를 지휘한 것이다. 유바가 접근한다는 소식은 쿠리오에게도 전달되었으나 그는 이 소식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유바의 군대가 38킬로미터 떨어진, 즉 하루 거리에 접근하자 그제서야 병력을 철수하고 시칠리아에 있는 2개 군단을 불러들이기 위한 전령을 보낸다. 그리고 쿠리오는 숙영지를 지은 뒤 이곳에서 버티기로 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나쁘지 않았는데 이때 쿠리오는 누미디아의 탈주병으로부터 유바가 내분으로 인해 진지를 비웠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그리고 그들의 병력을 이끄는 자는 사부라라는 장수이며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알려졌다. 이 소식을 듣고 유바가 전투를 피한다고 착각한 쿠리오는 유바가 돌아오기 전에 사부라의 소규모 부대를 공격하여 격파하기로 계획하지만 실제로 유바왕은 전군을 이끌고 사부라군에서 9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었다.

쿠리오는 기병을 내보낸 뒤 자신의 보병을 15개 대대(1.5군단)를 동원하여 사부라를 공격하러 떠났다. 쿠리오의 기병은 곧 사부라의 진영에 도착하였는데 사부라군은 자고 있었으므로 야습은 대성공을 거둔다. 그 뒤 되돌아온 기병대가 쿠리오의 보병대에 합류한다. 행군 중인 쿠리오군은 더더욱 기세가 올랐고 마침내 24킬로미터의 행군 끝에 사부라의 군대와 조우하게 된다.

쿠리오가 당도하였을 때 그가 도착할 것임은 사부라와 유바 모두 알고 있었다. 유바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면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사부라는 휘하 병사들을 겁먹은 것처럼 위장하여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흉내를 낸다. 이에 낚인 쿠리오는 자신의 병력을 재촉해 즉각 낮은 지대로 내려와 사부라의 군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이때 쿠리오의 기병대는 밤을 새워 행군을 하였으므로 지쳐 싸울 수 없는 상태였고 사부라의 병력은 누미디아군답게 기병대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쿠리오군이 사부라군의 후미를 따라잡아 마침내 두 군대가 전투를 벌이자 사부라는 우세한 기병을 동원하여 로마군을 포위한 뒤 틈이 보일 때마다 돌격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강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바의 지원군이 도착하였고 이 시점에서 쿠리오의 군대는 패배가 기정사실화되었다. 쿠리오는 자신의 부대를 근처의 언덕에 보내려 하였으나 이 움직임을 파악한 누미디아군이 재빨리 기병을 보내 그 자리를 선점한다. 마침내 희망이 사라진 로마군은 도주하다 살해당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기병 장교 중 하나가 쿠리오라도 살려보내려고 기병대를 이끌고 쿠리오를 호위한 뒤 진영으로 퇴각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쿠리오는 카이사르의 군대를 잃었으므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외친 뒤 계속 싸우다 그대로 전사한다. 이때의 기병은 일부가 퇴각하는데 성공하였고 나머지 보병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진영에 남아있던 5개 대대의 병사들도 떠난 사령관과 남은 병사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게 된다. 이들은 우왕좌왕하면서 달아나고자 하였고 역시 겁먹은 함장들과 선원들도 군대를 수송하는 대신 얼른 시칠리아로 달아났다. 결국 진영에 남겨진 쿠리오의 군대는 유바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했으나 유바는 대부분을 살해한 뒤 일부만 노예로 끌고 갔다. 이로써 쿠리오가 이끈 2개 군단은 비참하게 소멸되고 아프리카 원정은 실패하게 된다.

또한 그해에 아드리아 해를 장악하라는 임무를 맡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키케로의 사위인 돌라벨라[26]가 패배하여 2개 군단 중 1.5군단을 빼앗기는 일이 있었다. 비록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승리하였으나 원로원파 역시 두 차례의 승리를 통해 어느 정도 체면치레를 한 것이었다.

4. 기원전 48년

4.1. 집정관 카이사르

독재관에 임명된 카이사르는 로마에 귀국하자마자 선거를 관리하면서 집정관에 입후보하였다. 곧 선거가 치러졌고 카이사르는 세르빌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된다. 집정관이 된 뒤 그는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가상승분을 반영하지 않은 원금을 지급하게 하는, 상당히 채권자들에게 불리한 정책으로 빚을 탕감하게 하였다. 그 뒤 며칠간 로마에 머물면서 여러가지 축제를 주관한 뒤 12개 군단, 즉 기존의 갈리아에 머물던 자신의 8개 로마 군단병에 예전에 속주에서 편성되어 종다리 군단이라고 불리다 정식 군단병으로 승격한 1개 군단, 그리고 신규 3개 군단이 합쳐진 12개 군단을 브룬디시움으로 소집하라고 명령하였다. 카이사르는 그 뒤 독재관을 사임한 뒤 현직 집정관의 신분이 되었고 그 신분으로 폼페이우스와 싸우고자 하였다.

4.2. 폼페이우스의 병력

폼페이우스는 1년 동안 그리스에 머물면서 카이사르와 싸울 군수물자와 병력을 모집하였다. 그는 자신의 옛 고참병으로 구성된 1개 군단과 역시 키케로 휘하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었던 고참병으로 1개 군단을 편성하고 전해의 집정관이었던 렌툴루스[27] 휘하에서 군적을 올린 바 있었던 2개 군단에 추가로 이탈리아에서 소집한 5개 군단까지 총 9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그의 장인인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시리아에서 2개 군단을 이끌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밖에 보조병으론 크레타 궁병 3천, 투석병 6백, 기병 7천이 있었다. 이 기병들은 폼페이우스가 동방 원정 시 인연을 맺은 바 있었던 동방 각국의 왕들이 보낸 기병들이었고 그중 자신의 노예와 목동에서 8백의 기병을 편성해 보충하였다.

이렇듯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고참병으로 구성된 2개 군단을 제외하고는 모든 군단이 군사 경험이 없었던 반면 카이사르군은 3개 군단을 제외한 나머지 9개 군단은 갈리아 전쟁에서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마침내 갈리아 제패까지 마무리 지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병력들이었다. 또한 폼페이우스의 기병들 역시 정예와 거리가 먼 자들로써 주로 왕국의 귀족들로 구성된 반면 카이사르의 기병은 즉 갈리아 전쟁에서 눈부신 용맹을 발휘한 게르만 기병과 갈리아의 모든 전쟁에 참여한 3천의 기병에서 선발된[28] 기병들이었으므로 개개인의 전투력에서는 훨씬 앞섰다.

4.3. 카이사르의 도해

파일:attachment/카이사르의 내전/mapjw.jpg

이런 병력을 가진 카이사르는 브룬디시움에 도착, 병사들을 모아놓고 승리할 경우의 엄청난 보수를 약속한다. 그 뒤 7개 군단을 승선시킨 뒤 바다를 건넌다. 군단의 수만 본다면 폼페이우스의 9개 군단과 비슷해보이나 카이사르의 군단병은 갈리아 전쟁을 치르느라 결원이 많았다. 따라서 이때 승선한 병력은 대략 2만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신규 편성군이었기 때문에 각 군단의 결원이 없었으며 따라서 병력의 수는 5만에 가까웠다.

당시 그리스 연안의 수비를 담당한 폼페이우스측 해군 사령관은 비불루스로 그는 카이사르와 정치적 출세를 계속해온 동료였다. 그는 안찰관, 법무관, 집정관을 카이사르와 같은 해에 지냈는데 당대 출세 가도를 달린 것으로 알려진 카이사르와 동시에 출세한 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유망한 정치가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하필 카이사르의 동료가 되었기 때문에 화려한 언변과 스타성이 높은 카이사르에 의해 잊혀진 존재가 되기 일쑤였다. 그는 안찰관 시절 카이사르의 설득에 넘어가[29] 둘이 같이 화려한 검투 경기를 개최하였는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카이사르가 개최한 것으로 기억하였다.[30] 뿐만 아니라 그는 하필 집정관도 카이사르와 같이 역임하였는데 이때 카이사르는 삼두연합을 맺어놓고 권력을 독점하였으며 비불루스는 민중의 위협을 받아 정치에 배제된 채 저택에 틀어박혀 불길한 전조를 선포하는 정도의 일밖에 못하였다. 본래 집정관의 불길한 전조의 선포는 국가의 상업을 마비시켜야하는데 카이사르가 가진 직책중 하나가 최고 제사장이 그런 미신적 일을 담당하는 자리라서 그의 일당들은 이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국정을 운영하였다. 결국 비불루스는 사람들로부터 올해는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는 비아냥을 받게 되었고[31] 따라서 일생에 한 번뿐인 최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던 집정관 직위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낸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비불루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원한이 대단하였고 이를 알고 있는 폼페이우스는 그에게 해군 총 지휘권을 맡겨 카이사르의 해군을 저지하게 한 것이었다.[32] 그러나 비불루스는 카이사르의 도해를 저지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웠고 또한 카이사르가 매우 기습적이고 신속하게 바다를 건넜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일부러 위험한 해안에 상륙하였다. 모든 배가 무사하였고 그 뒤 즉시 추가 병력을 싣고 오라고 수송선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뒤늦게 출동한 비불루스의 본대가 이들을 가로막았고 이 중 30척이 억류되고 말았다. 이때 카이사르의 도해를 막지 못한 비불루스는 격분한 상태였으므로 그는 그 배의 선원들에게 가혹한 복수를 하였는데, 그 배에 선원들이 승선한 채로 배를 모두 불살라버린 것이었다. 그 뒤 비불루스는 자신의 함대 기지였던 코르키라 섬에서 아예 나와 브룬디시움 근처에 함대를 머물게 하며 총사령관인 자신이 직접 배 위에서 숙식을 하면서 해상에 머물렀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카이사르의 추가 병력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4.4. 양군의 움직임

폼페이우스의 부하 중 마르쿠스 옥타비우스가 있었는데 그는 카이사르에게 붙은 살로나이(살로나)라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원주민에게 폼페이우스에게로 넘어오라고 설득하였으나 이들이 말을 듣지 않자 도시를 포위하였다. 살로나이 주민들은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견디다 마침내 이들은 기습을 하기로 마음먹고 어느 날 갑자기 성문을 열고 전원이 돌격하였다. 이들은 다섯 겹의 진지를 모두 격파하는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옥타비우스는 패주해 달아났다.

한편, 그리스에 상륙한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에서 자신에게 항복한 루푸스를 폼페이우스에게 사절로 보내서 강화를 맺자고 제의하기로 하였다. 그는 폼페이우스가 상실한 속주와 자신의 손실을 언급한 뒤 지금이 강화를 맺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라면서 폼페이우스가 원한다면 3일 내에 서로 군대를 해산하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전달할 말을 전해듣고 풀려난 루푸스는 즉시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폼페이우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상하게도 해군을 맡은 비불루스로부터 카이사르에 대한 어떤 소식도 전해듣지 못하였고 따라서 카이사르가 도착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테살리아에서 신병들을 훈련시킨 뒤 디라키움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곧 루푸스가 도착해 소식을 알리자 폼페이우스는 크게 놀랐다. 카이사르가 도착하였다면 해안 도시들이 카이사르에게 넘어갈 위험이 있었고 그렇게 되면 아드리아 해에 위치한 비불루스의 함대는 고립되므로 제해권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의 보급은 원할할 것이기 때문에 지구전의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폼페이우스는 아폴로니아를 향해 강행군하였다.

카이사르는 도착하자마자 오리쿰으로 강행군하였고 오리쿰 주민들은 카이사르가 직접 오자 그에게 항복하였다. 그 뒤 카이사르는 바로 아폴로니아로 이동하였으며 그들 역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쉽게 항복한 이유는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언제 도착할 것인가에 대한 기약이 없던데다 카이사르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속주민의 눈으로 보기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싸움은 로마의 내분이었으며 이 상황에서 로마의 현직 집정관에 현 로마 원로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카이사르는 로마 정부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4.5.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군의 대치

카이사르가 아폴로니아로 이동한 뒤 디라키움으로 이동하였을 때 폼페이우스도 디라키움에 도착하였다. 카이사르가 먼저 도착하였음에도 디라키움은 카이사르에게 넘어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상당히 근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카이사르 또한 디라키움을 공격하지 못했는데 섣불리 공격했다간 폼페이우스가 도착해 후방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강 건너에 진을 구축하였고 곧바로 도착한 폼페이우스 또한 진을 구축한다. 그렇게 서로 포진한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계속 대치하였다. 이때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5만에 가까웠고 카이사르의 부대는 2만이 채 안 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군은 대부분이 테살리아에서 몇개월 훈련받은 신병들로 구성되었으므로 실전 경험이 전무하였다. 고대 전쟁에서는 일선 병사들이 어떤 전투력을 보여주느냐에 의해 전체 판세를 결정짓는 상황이 매우 많다. 전쟁은 어찌 되었건 사람들이 하는 것이므로 일선 병사가 적과 마주쳐 저항도 못하고 끔살당한다면 곧 투입될 2열, 3열의 병사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도망칠 생각만 하게 된다. 따라서 전투력의 우열이 클 경우 병력의 차이는 의외로 승부를 결정짓는 요소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도착하기 전 디라키움 부근에 이미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도착 전 이미 요소와 초소를 세웠다는 기록을 남겼으며 로마 장군들이 진영을 구축할 때 방어하기 좋은 언덕 위에 참호와 방벽을 세운 뒤 공성무기까지 배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본다면 방비가 상당히 되어있을 것이 분명하였다. 비록 폼페이우스군의 병력이 많으나 카이사르의 이런 진영을 공격하는 것은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했다. 공격에서 만일 일선 병사가 심각한 피해를 입고 격퇴당한다면 폼페이우스의 병력 전체가 그를 신뢰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너무도 정예였다. 카이사르는 작정하고 첫 배에 그가 가장 신뢰하는 정예군단병들만 승선시켰으며 따라서 이들의 전투력은 당시 지중해 최강이라 불릴 만하였다. 이들의 전투력을 보여주는 일화는 바로 윗부분에 언급한 히스파니아 원정에서 9군단이 궁지에 몰렸을 때 대처능력이었는데 이들은 골짜기의 낮은 지대에 몰린 뒤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5시간 동안이나 아프라니우스군의 공격을 버텨내고 언덕까지 기어올라가 격퇴하지 않았는가. 뿐만 아니라 이들은 훗날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을 때 카이사르가 3천 명만 데리고 가는 배짱을 보였다가 병력의 차이가 많은 것을 깨달은 이집트 왕가가 카이사르가 머무는 저택을 2만 병력으로 공격했음에도 격퇴한 일이 있었다. 당시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단병을 상당수 배치하였고 따라서 위 2만 병력은 로마 사령관이 지휘하는 군단병이나 다름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적은 병력으로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카이사르의 군단병은 매우 강력했고 따라서 폼페이우스는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이렇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대치하는 동안 브룬디시움에서는 카이사르의 제2진이 출발하였다. 하지만 항해하자마자 비불루스의 선단이 나타났다는 첩보가 전해졌고 배는 즉시 귀항한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한 척은 나포되었고 비불루스는 이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이들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다.

4.6. 해군 사령관 비불루스의 죽음

이때 카이사르는 디라키움 북쪽의 모든 해안선을 장악한 상태였고 따라서 비불루스의 함대는 정박해서 보급할 만한 항구를 인근에서 구할 수 없었다. 브린디시움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카이사르군의 2진이 출항할 수 있었으므로 비불루스는 보급받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때문에 코르키라 섬에서 보급을 받으면서 해상에 머물러야 했고 병사들과 비불루스 모두 큰 고통을 겪는다. 이때 폼페이우스가 보낸 리보가 합류하였고 리보와 함께 비불루스는 카이사르에게 휴전을 요청하였다. 카이사르는 강화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33] 이들의 요청을 들은 리보는 즉시 카이사르를 만나러 떠났다. 여기서 카이사르에게 켕기는 바가 있었던 비불루스는 가지 않았고 리보만이 카이사르와 회담을 가졌다. 두 사람의 회담에서 리보는 강화를 위한 사절을 폼페이우스에게 보내겠다라고 말하고 그러는 동안 잠시 휴전하자고 제안하였다. 카이사르는 이 휴전의 조건으로 서로의 봉쇄를 같이 풀자고 대답한다. 즉 브룬디시움에 대한 해상 봉쇄를 풀면 자신도 리보와 비불루스에 대한 보급로의 봉쇄를 풀겠다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에 대해 리보는 대답을 하지 않고 휴전만 요구하였으며 마침내 카이사르는 휴전 제안이 해상 보급이 차단되어 궁핍된 상황을 일시적으로 모면하려는 술책임을 간파하여 회담을 중단하였다.

비불루스는 계속 배 위에 머무는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다 마침내 중병에 걸렸다. 그는 이런 와중에서도 해군 최고 지휘권을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배 위에서 죽고 만다. 비불루스가 죽자 각 해군 장교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자신의 휘하 선단들을 지휘하였다.

4.7. 강화 시도

그 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대치하면서 겨울을 나고 있는 동안 적당한 기회가 오자 루푸스가 드디어 입을 열어 카이사르의 제안에 대해 언급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잠시 듣다가 루푸스에게 더이상 말하지 말라고 대답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카이사르 덕에 내가 로마로 돌아간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대체 목숨을 건지거나 로마를 다시 보는 게 무슨 소용인가? 내가 어떻게 행동하건 간에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가 나를 잡아가지고 온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뒤 겨울을 서로 나는 동안 양측의 군대는 압수스 강 사이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넘긴 바 있었던 2개 군단은 카이사르의 병사들과 잘 아는 사이였으므로 종종 강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부하를 보내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선동케 하였다. 그의 명령을 받은 장교는 강둑에 서서 동포끼리 피를 흘리면 안된다고 외친 뒤 서로 사절을 보내 대화를 나누어 보아야한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폼페이우스 진영측에서도 장교 하나가 나서서 강화에 대해 서로 논의해 보는데 동의한다고 외친다. 다음 날 열린 회담에서 과거 카이사르 밑에서 갈리아 전쟁의 2인자 노릇을 하다가 폼페이우스에게로 넘어간 라비에누스가 나서서 논쟁을 벌인다. 라비에누스가 말하자 갑자기 폼페이우스 측에서 돌과 무기를 던지기 시작한다. 라비에누스는 재빨리 방패로 몸을 가려 보호하였으나 카이사르의 부장들은 부상을 입었다. 이 소동이 진정되자 라비에누스는 강화를 맺으려면 오직 카이사르의 목이 필요할 뿐이라고 강경하게 대답한다.

4.8. 로마의 소동

이때 로마에서는 법무관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가 소동을 부린다. 그는 카이사르가 채무자의 탕감을 하게 마련한 법을 뒤집어 재심의하겠다고 나섰으나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한다. 그러자 시민들의 냉담한 반응에 당황한 루푸스는 막나가 빚을 모두 탕감하겠다는 법안을 내놓는다. 이전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시민들은 대환호하였고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동료 법무관을 집무석에서 쫒아내고 폭력을 휘둘렀다.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는 이를 원로원 토의에 붙였고 성난 원로원은 루푸스를 파면하기로 결의한다. 루푸스는 분노하여 과거 클로디우스와 로마 시내에서 패싸움을 벌인 바 있었던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에게 접근하여 둘이 로마를 습격하기로 계획한다. 밀로는 폼페이우스의 이름을 빌어 이탈리아로 귀국하여 도시 코사를 습격하였는데 둘의 계획은 어설펐고 인망도 두텁지 않은데다 카이사르의 인기가 높았으므로 루푸스는 쫓겨나고 밀로는 살해당한다.

4.9. 해상 보급 성공

비불루스 사후 50척의 함대를 거느린 리보는 브룬디시움 항구 앞의 작은 섬을 점거한 뒤 코 앞에서 항구를 봉쇄하였다. 이 때문에 며칠간 고통을 겪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60척의 함대를 무장시킨 채 기습적으로 공격해 리보를 격파하였고 이에 리보는 철수하였다.

잠시 봉쇄가 풀리자 안토니우스는 바다를 건너 카이사르에게로 합류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는 겨울이었고 남풍이 부는 시기였다. 디라키움을 중심으로 해안가의 북쪽은 카이사르가 남쪽은 폼페이우스가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바다를 건너려면 남풍이 부는 겨울 밖에 기회가 없었다. 이것을 안 카이사르는 어떤 상황이 있더라도 바다를 건너야한다고 지시하였고 폼페이우스는 틈만 나면 전령을 보내 애초에 비불루스의 함대가 카이사르의 군이 바다를 건넌 것을 막지 못한 것을 꾸짖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2진이 합류하는 것을 막아야한다고 전령을 보내왔다.

그런데 폼페이우스군은 비불루스 사후로 해군 사령관이 공석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로는 해군 사령관의 자리를 놓고 정치적 암투가 계속된 상황인데다 누구도 납득할 만한 군사적 업적이 있는 인재가 폼페이우스 측 진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전권을 휘두르는 사령관이기 보단 옵티무스측이 대표로 내세운 인물이므로 자신의 부하를 멋대로 임명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해상 봉쇄는 일사불란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흐트러진 지휘체계는 북쪽 해안가가 봉쇄되어 장거리로 보급받아야만 했던 해군측에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비불루스 사후로 브룬디시움의 해상 봉쇄는 느슨해졌으며 그 결과 안토니우스에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카이사르의 지시를 받은 안토니우스는 무조건 출항키로 하고 배에 3개 고참병 군단, 1개 신참 군단을 싣고 수송한다. 이들은 한밤 중에 전원이 출항하였으며 한참 지나서야 폼페이우스 측 해군이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서로 대치하고 있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게도 보였고 병력으로 가득찬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해안가에 이르러 폼페이우스측 해군에 따라잡혔으나 믿을 수 없게도 남풍이 갑자기 남서풍으로 바뀌면서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해안가로 밀어줬다. 곧바로 해안에 상륙한 카이사르의 육군을 본 폼페이우스군은 결국 철수하고 마침내 카이사르의 2진이 도착함으로써 카이사르군은 두 배 가까이 증강된다.

이때 고참병과 신참병의 능력 차이를 카이사르가 그의 저서에 소개한다. 신병 200과 고참병 200명이 낙오된 곳에 도착해 폼페이우스군의 포위를 받은 바 있었다. 신병들은 항복한 뒤 처형당했으나 고참병 200명은 교섭하는 척을 하면서 밤이 되자 배를 타고 내뺐다. 그리고 폼페이우스군은 곧바로 기병 400과 수비대를 보내 이들을 따라잡은 뒤 공격했지만 이들 고참병은 이들을 격파하고 무사히 안토니우스의 본군에 합류하였다.

안토니우스가 상륙한 곳은 폼페이우스의 후방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당연히도 이를 차단하려 하였고 카이사르는 이들과 합류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둘은 모두 병력을 이끌고 진영을 나선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병력을 매복하여 안토니우스군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군이었던 폼페이우스군이 눈에 띄지 않게 매복하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곧바로 안토니우스에게 들통이 났고 행군을 중단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기다리기로 결정한다. 다음 날 카이사르가 도착하자 협공을 두려워한 폼페이우스는 군을 이끌고 진영으로 되돌아간다. 그 뒤 진을 거두고 디라키움 영토 내의 후방으로 철수한다.

4.10. 메텔루스 스키피오군의 움직임

당시 시리아 총독으로 있었던 메텔루스 스키피오는[34] 시리아에서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고 모든 병력을 긁어모아 시리아를 떠났다. 시리아는 파르티아의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내전을 벌이기 위해 시리아를 비운 스키피오의 행보에 대해 카이사르는 이를 강하게 비판한다.

스키피오가 마케도니아에 이르자 카이사르 역시 자신의 군을 쪼개 그를 상대키로 하였다. 그는 자신의 부하인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1개 군단과 200명의 기병을 주어 테살리아로, 그리고 가이우스 사비누스에겐 5개 대대와 약간의 기병 주어 아이톨리아 지방으로, 그리고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겐 고참병 2개 군단과 500명의 기병을 주어 마케도니아로 보냈다.[35]

사비누스의 5개 대대가 도착한 아이톨리아 지역은 폼페이우스의 지원으로부터 차단된 상태[36]였으므로 카이사르에게 붙는다. 그리고 테살리아는 양분되어 어느 곳은 지지하고 어느 곳은 반대하였으며 마케도니아의 경우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2개 군단을 이끌고 도미티우스와 대치하였으므로 누구 편에 설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테살리아로 파견된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곧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코티스 왕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를 격퇴한다. 카시우스는 이 공격을 스키피오 본군 기병의 공격이라 생각하고 퇴각하였다. 스키피오는 카시우스군을 추격하고자 하였으나 도미티우스의 2개 군단이 스키피오 진영의 빈집털이를 나섰으므로 추격을 중단하고 서둘러 본군에 복귀한다.

이로써 서로 마주친 스키피오와 도미티우스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사흘째에 스키피오는 강을 건넜고 그 다음날 아침에 군대를 진 밖으로 나와 포진하게 하였다. 이를 본 도미티우스도 군을 이끌고 나와 포진한다. 둘은 9킬로미터의 평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이때 도미티우스의 군단은 11, 12군단으로 사비스 전투를 비롯한 갈리아 전쟁을 치른 우수한 병사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전투를 벌이고 싶은 충동이 대단히 강하였고 이것을 눈치챈 스키피오는 전투를 단념하고 군을 진으로 복귀시킨 뒤 다음날 다시 강을 건너 원래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그 뒤 강가의 높은 지대로 진을 옮긴다.

이때 스키피오는 기병을 몰래 매복한 뒤 말꼴을 먹이러 나온 카이사르의 500여 기병대를 급습한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기병들 역시 갈리아 전쟁을 치른 고참병들이었으므로 매복한 군을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하여 800명을 살해하고 단 두명의 전사자만 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전의를 상실한 스키피오는 진영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는다.

도미티우스는 스키피오를 전투에 끌어들이기 위해 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시늉을 하였다. 그 뒤 병사를 매복을 한 뒤 스키피오의 본대가 추격하기 위해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스키피오도 만만치 않아 낚이는 대신 우선 기병을 먼저 출동해 이들의 후방이 어떤지 살펴보게 하였다. 이들 기병은 퇴각로를 살펴보다 매복지 입구에서 말울음소리를 들었고 이를 듣자마자 매복을 눈치챘다. 이들은 서둘러 달아났고 도미티우스는 서둘러 추격하여 약간의 피해를 입힌다.

4.11. 디라키움 포위

한편 카이사르는 자신의 함대를 오리쿰에 정박시키고 3개 대대를 배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공격했다.[37] 그나이우스는 우세한 병력으로 전방위를 동시공격하고 병력을 끊임없이 교체하면서 괴롭혔다. 마침내 카이사르의 병력은 버티지 못하여 후퇴하고 그곳을 장악한 그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함대를 모두 불태운다.

한편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폼페이우스가 주둔한 곳을 향해 이동한다. 이곳에서 진영을 구축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포진한 뒤 폼페이우스에게 결전의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38] 폼페이우스가 교전를 거부한 것은 카이사르군이 매우 정예한 병력인 데다 이탈리아로부터 차단된 채 고립된 카이사르를 상대로는 지구전으로 가는 것이 더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우스가 꼼짝도 않는 것을 본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디라키움을 포위하기로 하였다. 디라키움이 포위되면 폼페이우스의 진영과 디라키움 사이의 보급라인이 차단되므로 그는 진에서 나와 군을 이끌고 지름길로 디카리움 바로 옆으로 이동하여 진영을 차린다. 이튿날 도착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군의 진영을 보고 그 앞에서 진영을 구축한다.

폼페이우스는 이때 언덕 위에 진영을 구축하고 그 배후에 배로 접근할 수 있는 해안을 확보해놓았다. 그 뒤 해로를 통해 보급을 하도록 명령한다. 그 앞에 진영을 지은 카이사르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각지에 병력을 파견하나 폼페이우스가 이를 내다보고 미리 인근 식량을 모두 징발해버렸기 때문에 식량난을 겪게된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카이사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이는 자신의 병력으로 폼페이우스의 진영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에겐 다수의 기병이 있으므로 포위를 해놓는다면 기병의 말꼴이 차단될 것이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자신의 병사로 식량을 수거하는데 폼페이우스 군의 습격을 예방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 도시에게 카이사르군의 우세를 과시하여 폼페이우스를 배신하게 할 수도 있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참호를 파고 망루를 세우는 공사를 폼페이우스 진영 부근에 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군의 참호건설을 방해하고 싶었으나 그의 병력과 카이사르 병력의 전투력 차이가 워낙 커서 병력을 내보내 공격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진영을 옮기는 것도 디카리움을 수비해야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했으므로 그도 병사를 내보내 그의 진영을 넓히는 공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양군은 서로 대치하면서 한쪽은 포위 공사를, 다른 쪽은 진영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러다 보니 두 부대는 소규모의 충돌을 자주하였다. 폼페이우스에겐 궁수와 투석병이 많이 있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군과 충돌할 때마다 이들을 동원해 카이사르군에게 많은 부상을 입힌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카이사르의 9군단이 한 고지를 점령하였는데 이 곳은 폼페이우스 진영 쪽으로 돌출된 부분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이런 무모한 카이사르군의 움직임을 비웃으며,
만일 카이사르 군단이 무리하게 점령한 고지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고 물러난다면 나를 무능한 총사령관이라고 불러도 좋다.

라고 말하며 궁수와 투석병으로 언덕 위를 에워싼 뒤 마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9군단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무기에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를 본 폼페이우스는 병력을 보내 추격하였다.

카이사르는 병력을 동원해 언덕의 퇴각로에 간이 차단막을 세운 바가 있었는데 폼페이우스군이 이곳을 넘어 공격해 들어오자 9군단은 적을 향해 일제히 돌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전투력에서 밀린 폼페이우스군이 후퇴하자 9군단은 그 틈을 타고 모두 안전하게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공사를 진행한 뒤 마침내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카이사르의 포위망은 26킬로미터였고 폼페이우스군의 포위망은 23킬로미터였다. 이런 엄청난 거리를 2만여 남짓의 병력으로 지키는 것은 카이사르군이 정예라 하나 상당히 대담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포위를 하였음에도 폼페이우스는 끊임없이 선박이 보급품을 날라왔으므로 포위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지 않았다.

반면 카이사르군은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그러다 카이사르군의 병사가 카라라 불리는 식물 뿌리를 빵으로 만들어 우유와 섞어먹는 방법을 생각해냈고 이러면서 버티기 시작하였다.[39][40] 그리고 가축을 잡고 보리와 푸성귀를 먹는 등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으면서 견뎌냈다.

그 뒤 계절이 바뀌어 곡식이 무르익기 시작하자 카이사르군에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폼페이우스는 포위된 열악한 환경에서 사기가 저하되고 있었으며 또한 말꼴을 배로 보급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모든 가축을 도살하는 등의 곤란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가 있는 곳의 물길을 전부 차단해 놓았으므로 물 부족의 곤란을 겪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폼페이우스는 마침내 카이사르를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우선 자신의 기병을 일부를 배에 싣고 디라키움 쪽으로 하선시킨다. 그 기병은 디라키움과 카이사르 진영의 길목에 매복하였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 진영에 소문을 내게 하는데 즉 폼페이우스 진영 바로 옆에 있는 도시 디카리움이 카이사르 쪽에 붙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잠시 진영을 떠나 디카리움 성으로 향하자 카이사르가 본진에서 떠났다는 첩보를 들은 폼페이우스는 즉시 병력을 총동원해 공세에 나선다. 특히 카이사르 진영의 한 보루에는 250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곳에 폼페이우스는 무려 4개 군단을 투입하는 초강수를 띄운다.

그와 동시에 폼페이우스는 1개 군단으로 다른 요새를 공격하는 한편 다른 군단병들로는 카이사르의 게르만족 부대가 지키는 요소를 공격하였다. 또한 디카리움에서도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진영을 떠날 것을 예상하고 그 지역에 기병을 미리 몰래 보내 매복해놓았는데 카이사르가 이 매복에 걸려든 것이었다. 이때의 교전은 세 번에 걸쳐 벌어졌다.[41]

이 싸움에서 카이사르군은 사력을 다해 폼페이우스를 격퇴한다. 250명이 지키는 보루에서는 백인대장 스카이바가 맹활약을 하여 무려 4시간동안이나 4개 군단병의 맹공을 견뎠다. 마침내 카이사르의 부장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42]가 2.5개 군단을 이끌고 당도하자 폼페이우스군은 물러난다.

그리고 다른 두 요새에서도 폼페이우스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매복에 걸려든 카이사르 역시 교전 끝에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달아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그날 하루 동안 무려 6번의 교전이 사방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 결과 폼페이우스군은 2천의 전사자를 내었고 카이사르는 20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나 모든 요새의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이때 백인대장 스카이바의 방패에는 무려 120발의 화살이 박혔으며, 그는 눈에 화살을 맞자 항복하려는 척하다가 그를 포로로 잡으려고 다가온 두 명의 적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용맹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그를 치하하며 무려 2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하사한다.[43]

포위망 돌파가 무산된 뒤 폼페이우스는 병력을 참호 뒤로 철수시켰다. 카이사르는 그 뒤 병사를 포진하여 회전을 치르자는 의사를 표시했고 폼페이우스는 자신도 병력을 포진하긴 했으나 전투를 치르지는 않았다.

그러는 중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2개 군단이 마케도니아 국경 내에 진입하였다. 스키피오는 마케도니아를 두고 도미티우스와 대치하였으나 카이사르와의 싸움이 더욱 급하다고 보고 이곳을 포기한 채 폼페이우스와 합류하러 온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스키피오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의 중재를 요청했고 폼페이우스의 장인인 스키피오는 이에 흔들렸으나 곧 동료의 책망을 받아 사절을 거부하였다.

그 와중에 마침내 폼페이우스군의 말꼴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 결과 말들이 쇠약해지자 폼페이우스는 다시 한 번 포위망을 뚫으려는 시도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때 갈리아 기병의 장교들 중 두 형제인 로우킬루스와 에구스가 있었는데 이들이 기병들의 봉급을 횡령하였다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카이사르 밑에서 오랬동안 종군한 이들로 카이사르가 매우 신임하여 이들을 원로원 의원으로 등록시켜 줄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의 횡령을 알게 된 카이사르는 그들을 막사로 불러 꾸짖고 훈계하였다. 이 정도로 그친 것은 전쟁 상황이었으므로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카이사르가 이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으나 이 일로 인해 카이사르군 내에서는 이 두 형제를 비웃게 되었다. 이를 견디다 못한 이들은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넘어가길 결심하고 우선 기병 사령관 볼루세누스[44]를 암살한 뒤 그의 목을 가져가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볼루세누스에게로 접근하는게 매우 어려웠으므로 이들은 병사들에게 돈을 최대한 빌리고 말을 구입한 뒤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

이들을 맞이한 폼페이우스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우선 이 두 기병장교들을 자신의 진영 내 곳곳을 다니게 하여 병사들에게 보여주었다. 여지껏 카이사르 쪽으로 넘어간 탈주병은 있어도 카이사르쪽에서 폼페이우스측으로 넘어간 이들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둘은 일반 병사가 아닌 높은 신분의 기병 지휘관이자 원로원 의원이기도 하였다. 이런 신분을 가진 탈주병은 폼페이우스 측에서조차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이 두 장교들은 폼페이우스에게 중대한 군사기밀을 알려준다. 이들은 모든 군사 전문가를 알고 있었고 초소의 배치, 지형, 지휘관의 성격을 모두 꿰뚫고 있었으며 또한 군인들의 일과표까지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정보를 전해들은 폼페이우스는 포위망 중 가장 약한 부분인 바다쪽의 9군단이 포진한 지역을 집중공격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 중 6개 군단에게 버드나무로 투구위를 덮게 한 뒤 본인이 직접 이들 6개 군단을 이끌고 밤중에 바다를 건너 포위망의 배후로 몰래 이동한다.

카이사르는 일찍이 이 포위망을 건설하였을 때 바다 건너의 공격을 예상하고 이중 포위망을 설치한 바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 포위망은 완성이 되지 않았었고 따라서 확실히 취약한 부분이었다. 이날 밤 새벽에 폼페이우스의 6개 군단이 이 방어벽을 돌파하기 위해 배후에 등장하였고 또한 나머지 군단병들이 전방에 나타났다.

9군단은 이들에게 투석을 하면서 저항했으나 이미 폼페이우스군은 버드나무 덮개로 투구를 쓰고 있었으므로 무용지물이었다. 9군단에 접근한 폼페이우스군은 엄청난 수의 궁병과 투석병으로 화살과 돌을 날려댔고 이들이 완성되지 않은 포위망에 몰려들기 시작하자 9군단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침내 9군단은 이 지역을 포기하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이때 마침 재무관이자 9군단의 군단장을 맡은 마르켈루스[45]가 몇개 대대를 이끌고 당도했으나 9군단의 공포가 워낙 심해 이들도 전염되어 같이 패주한다. 폼페이우스군은 추격하면서 많은 수의 카이사르군을 살해하였고 그 결과 6명의 백인대장 중 5명이 전사하고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는다.

승세를 탄 폼페이우스군은 계속 추격해 마르켈루스의 본진까지 몰려온다. 그런데 곧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1.2개 군단이 당도하자 폼페이우스군은 추격을 멈추었고 카이사르까지 당도하자 폼페이우스는 철수한다.

비록 폼페이우스군은 추격을 중단하고 철수했으나 그들이 공격한 초소는 점령당하고 포위망의 한쪽이 완전히 뚫려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폼페이우스는 즉시 기병을 이 포위망 밖으로 모두 내보내 들판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다. 카이사르는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푼 뒤 폼페이우스군과 나란히 진영을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진영이 건설되는 중 카이사르에게 정찰병이 귀환해 보고하길 숲 뒤편에 1개 군단이 행군 중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카이사르가 과거에 짓다가 말고 버린 진영을 점거하러 행군한 것이었다. 이들은 폼페이우스의 진영으로부터 7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고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면 전날의 패배를 다소 만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3.3개 군단을 이끌고 몰래 접근한 뒤 이들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이들은 금세 밀려 진영안으로 밀려들어갔고 카이사르군은 이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진영 안의 진입을 시도한다. 하지만 뚫리면 끝장이라는 것을 안 이들도 문앞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므로 이들은 곧 다른 울타리를 깨부수고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 뒤 폼페이우스의 1개 군단은 카이사르군에게 계속 살해당하였다.

이렇듯 성공이 눈앞에 있을 때 불운이 찾아왔다. 기병으로 구성된 카이사르군의 우익은 이들의 진영에 진입하려고 이 진영의 벽을 따라 기동하면서 출입구를 찾았다. 하지만 출입구는 보이지 않았고 이 벽은 계속 이어저 해안가까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병은 벽을 따라 우회하다 마침내 출입구를 찾아내어 벽을 넘어 진영안으로 들어간 뒤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폼페이우스가 직접 군을 이끌고 당도한다. 그는 기병을 모두 동원한 5개 군단을 이끌고 도착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군의 엄청난 규모는 곧바로 카이사르의 우익인 기병대의 눈에 띄었고 이들은 즉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우익의 기병대가 도망가자 변고가 일어남을 안 카이사르의 군대는 모두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다시피 하던 기존의 폼페이우스 군단도 정신을 차리고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몇몇 이들은 심지어 카이사르군을 향해 돌격하는 배짱까지 보였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카이사르군은 모두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퇴각은 매우 황급하였으므로 3미터 방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그 뒤 뛰어내린 병사에게 짓밟혀 죽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카이사르는 도망치는 이들에게 직접 나가서 꾸짖으며 도망치지 말라고 소리쳤으나 병사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도망가는 기수의 깃발을 움켜쥐고 멈추라고 외치기까지 했으나 기수들은 카이사르가 움켜진 깃발을 내던지고 다른 기수들 역시 깃발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멈추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46]

이런 카이사르에게는 천만다행으로 폼페이우스는 그를 추격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카이사르군이 공격한 장소가 좁은 문과 방벽을 넘어 공격한 것이었으므로 기병대가 추격하기엔 좁은 문과 방벽을 넘어야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폼페이우스는 추격이 불가능하였으며 따라서 카이사르군은 전면전익 패주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두번의 교전으로 1천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카이사르의 포위전은 완벽한 패배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

4.12. 테살리아로 진격

이때 카이사르군 중 일부가 포로로 잡혔는데 라비에누스가 그들을 모두 살해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폼페이우스 측의 신뢰를 받기 위해 그런 짓을 한 것이었다. 한편 카이사르는 적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달아난 병사들을 질책하였고 특히 자신의 눈 앞에서 깃발을 버리고 달아난 바 있던 기수들을 강등시켰다. 이러한 질책은 카이사르군을 크게 고양시켰다. 그 이유는 이들 병사들은 갈리아, 게르만, 이탈리아, 히스파니아를 제패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신참병을 상대로 고참병이 겁먹고 내뺐다는 것이 그들의 프라이드를 손상시켰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병사들은 모두 힘든 노역을 자처했고 장교들은 폼페이우스군의 포위하는 것을 다시 시도해볼 것을 원하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포위망이 이미 뚫려버렸으므로 더이상 포위전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아서 진영을 거둔다.

파일:attachment/카이사르의 내전/mpjw2.jpg
(양군의 진격로)

진영을 거둔 카이사르는 아폴로니아를 향해 이동하였다. 그의 기동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으므로 폼페이우스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폼페이우스는 서둘러 기병을 보내봤으나 오히려 반격을 받아 손실을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아폴로니아를 향해 두 군대는 경주를 하기 시작하였다. 아폴로니아는 카이사르의 주요 보급로였고 만일 폼페이우스가 먼저 도착한다면 앞서의 패배로 인해 그에게 넘어갈 위험이 있었기에 두 군대는 전력을 다해 이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군은 먼저 출발한 데다 고참병들이므로 재빨랐다. 폼페이우스는 전혀 따라잡을 수 없었고 중도에 마침내 추격을 포기한다.

폼페이우스는 진격을 포기하는 대신 도미티우스와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대치중인 테살리아로 이동해 도미티우스를 협공해 격파하고 스키피오와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미 아폴로니아로 도착한 카이사르는 그곳에 수비대를 배치하였고 그도 도미티우스를 향해 행군을 개시하였다.

이렇게 되자 두 군대는 또 다시 경주를 시작하였다. 이번엔 폼페이우스가 먼저 출발하였고 카이사르는 우회하는 루트로 접근해야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도미티우스에게 서신을 보내 그에게 합류하라고 지시하였는데 근처 길목의 부족들은 전부 폼페이우스 쪽으로 붙어버렸으므로 전령은 도미티우스에게 가지 못했다. 이때 카이사르에겐 행운이 찾아왔는데 즉, 도미티우스의 정찰병을 본 배신한 부족들이 도미티우스군을 조롱하며 카이사르가 패배하였으며 조금만 있으면 폼페이우스가 와서 그들을 무찌를 것이라고 놀렸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에 크게 놀란 도미티우스는 즉시 진영을 거두고 서둘러 카이사르가 있는 쪽으로 합류하였다. 이때의 합류는 간발의 차였고 카이사르는 그의 저서에서 4시간의 차이로 도미티우스의 목숨을 구했다고 서술한다.

도미티우스의 2개 군단이 합류한 뒤 카이사르는 병력을 이끌고 테살리아로 진입한다. 그는 우선 곰피라는 도시로 접근하였다. 곰피는 카이사르에게 붙은 바 있었으나 폼페이우스의 승리 후 그를 배신하였다. 카이사르는 하루 만에 이 성을 점령한 뒤 다른 도시들에 대한 본보기로 병사들을 보내 약탈하게 한다.[47] 그 뒤 곧장 메트로폴리스로 향했는데 그 도시민들은 처음엔 저항하려하다 곰피의 운명을 듣고 그에게 항복한다. 카이사르는 메트로폴리스에는 손 하나 대지 않았다. 이 소문은 각지에 퍼졌고 아직 폼페이우스가 테살리아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들이 카이사르를 따르기로 마음먹는다.

며칠 뒤 폼페이우스군도 테살리아에 진입한다. 이곳에서 카이사르와 마주친 폼페이우스는 파르살루스의 언덕에 진을 쳤고 카이사르와 마주보았다. 그리고 이 부근에 있었던 스키피오의 2개 군단이 폼페이우스에 합류하였다. 이로써 그의 병력은 11개 군단 5만 2천여 명의 병력이 되었다. 군세가 불어나자 병사들과 지휘관들의 자신감은 드높아졌다. 이들은 더 이상의 지구전은 오직 폼페이우스가 전직 집정관, 법무관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지휘권을 즐기는 것에 불과하다고 떠들 정도였다.

이때 폼페이우스 진영에 있었던 원로원 의원들은 승리 뒤 카이사르 측 진영 사람들의 재산을 요구하였고, 카이사르의 최고 제사장 자리를 두고 언쟁을 벌이며 자신들을 따르지 않았던 원로원 의원들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에 대한 논공행상을 벌였다. 이들은 어떻게 이길 것인가는 관심이 없었으며 오직 이긴 뒤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병사들의 사기를 염려하여 그의 병사들을 아침마다 폼페이우스 진영에 포진시켜 싸움을 걸었다. 폼페이우스도 자신의 병력을 포진시켜 마주보았지만 그는 전투에 응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카이사르군의 자신감은 날로 드높아졌다. 또한 카이사르는 기병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젊은 병사들을 선발하고 이들을 경무장시켜 기병과 함께 싸우도록 하였고 이로써 1천밖에 없었던 기병 전력을 보충하였다. 그리고 이러면서 소수의 기병전을 폼페이우스 측에 걸어 이들의 훈련도를 시험해보았다. 결과는 만족스러웠으며 폼페이우스 측 전사자 중엔 카이사르를 배신했던 두 형제도 포함되었다.

4.13. 파르살루스 전투

이렇게 대치하였으나 폼페이우스군은 언덕 위에서 포진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고 실망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진영을 거두고 다른 지역으로 출발하려고 하였다. 진영을 거두고 짐쌀 채비를 하였을 때 폼페이우스군이 비교적 언덕 아래에 내려와 포진한 것이 눈에 띄었다. 카이사르는 황급히 병사들의 일을 중단시키고 그들에게,
행군을 멈춰라.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원했던 전투를 생각하라. 용감하게 적들과 싸울 순간이 왔다. 오늘 같은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이다.

라면서 즉시 병사들을 포진시킨다.

훗날 카이사르가 알게된 사실인데, 실은 그 시점에서 폼페이우스도 회전을 치르기를 결심하였다고 하였다. 이때 그는 며칠전에 있었던 작전회의에서 자신의 2열의 병사가 투입되기도 전에 카이사르군은 패주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놀라자 폼페이우스는 다음과 같이 장담하였다.
내 말이 믿기 힘들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만일 내 계획을 듣는다면 여러분도 안심하고 전투를 치를 수 있을 것이오. 난 이미 기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 바 있소. 즉 두 군대가 만나자마자 이들은 우회하여 카이사르의 우익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것이오. 이들의 공격으로 우리가 무기를 던지기도 전에 그들이 혼란에 빠진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즉 치열한 교전없이 승리할 수 있소. 우리의 기병 전력이 적을 크게 앞서므로 이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오.

그렇게 장담한 폼페이우스는 지휘관들을 격려한 뒤 결전의 순간에 총사령관의 기대와 용기를 저버리지 말라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은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의 작전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카이사르의 군대는 많은 수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으므로 갈리아, 게르마니아를 정복한 군대와는 거리가 말다고 말한 뒤 승자가 되지 못하면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였다. 폼페이우스는 라비에누스를 치하한 다음 똑같은 내용으로 맹세하였고 이에 다른 이들도 모두 함께 맹세하였다.

이런 장담을 들은 폼페이우스측의 지휘관들은 모두 기쁨에 사로잡혔다. 이토록 중대한 문제에 대해 백전노장의 폼페이우스가 직접 호언장담을 하였으므로 결코 잘못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군대는 다음과 같이 포진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좌익에 카이사르에게 넘겨받은 2개 군단을 배치한 뒤, 중앙엔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데려온 시리아의 2개 군단을, 그리고 우익엔 자신의 고참병과 히스파니아에서 온 군단을 배치한다. 우익의 군단은 가장 정예병력이었다. 남은 군단은 좌익과 중앙, 우익 사이에 모두 배치되었다. 폼페이우스에겐 그를 따라 동방 원정에 종군한 적이 있었던 2천여 명의 고참병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열 곳곳에 배치해둔다. 보병은 약 4만 5천, 기병은 7천이다.

카이사르는 우익에 10군단을, 좌익에 9군단을 배치하고 나머지는 중앙에 둔다.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좌익에, 우익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그리고 중앙은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지휘하게 하였다. 카이사르 본인은 폼페이우스의 맞은 편에 위치한다. 그의 병력은 2만 2천, 기병은 1천이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배치를 보고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우익을 치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즉시 각 3열에서 1개 대대씩 차출해 4열을 만들어 두었다. 그는 4열에게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돌격하거든 그 앞에 뛰어들어서 진격을 저지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는 거대한 기병전력이 달리는 앞에 뛰어들라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용기가 특히 중요하다고 카이사르는 격려한다.

뒤이어 카이사르는 3열의 병사들에게 자신의 신호가 있기 전까진 돌격하지 말라고 전한 뒤 병사들에게 연설을 시작한다. 그는 이 연설에서 자신이 여지껏 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왔고 병사들을 전투로 내모는 것은 결코 그가 원한 바가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그 뒤 나팔이 울려퍼지며 전투가 시작을 알렸다. 카이사르군에서는 '승리의 여신, 베누스(아프로디테)'라는 군호가, 폼페이우스군에서는 '불굴의 헤라클레스'라는 군호가 각기 하달되었다.

이때 10군단의 수석 백인대장이었던 크라스티누스가 있었다. 10군단은 카이사르의 정예중의 정예로 알려진 용맹한 군단이었고 크라스티누스는 이 군단의 수석 백인대장이었으므로 그 용맹함은 두말할 것 없이 부대 내 최고 수준이었을 것이다.[48] 그는 병사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크게 외친 뒤 카이사르에게 자신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뒤 선두에서 가장 먼저 달려나갔다.[49]

양군의 사이엔 충분한 거리가 있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공격을 기다리라고 명령한다. 이는 카이사르의 군대가 달리다 지치기를 기다린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군은 폼페이우스군이 움직이지 않자 자발적으로 중간에 멈춘 뒤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달려나갔다.[50] 이는 엄청나게 많은 실전 경험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폼페이우스의 진영 앞에 다가서서 필룸을 던진 뒤 재빨리 글라디우스를 뽑아든다.

이를 본 폼페이우스군은 견디며 버티다 마침내 신호가 떨어지자 필룸을 던지고 검을 뽑아든다. 그와 동시에 폼페이우스군의 후방에서 기병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그 뒤에서 궁수와 투창병들이 벌떼처럼 따라나왔다. 이들은 왼쪽으로 크게 기동하여 카이사르군의 측면으로 향하였다. 카이사르의 기병이 이들을 슬쩍 피하자 이들은 보병의 측면으로 향해 달려갔다. 이 과정에서 폼페이우스의 기병 전열은 질서를 잃었고, 각 기병 중대들은 대형이 무너진 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이때 4열의 6개 대대에게 카이사르는 신호를 내린다. 그리자 이들은 부대기를 앞세우고 달려나가 폼페이우스의 기병대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4열의 카이사르군 보병들이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며 창을 쓰듯 필룸으로 찌르기 공격을 가하자, 곧 폼페이우스의 기병은 견디지 못하고 언덕을 향해 도망가기 시작했다.[51]

기병이 물러나자 그들의 뒤에 엄호하기 위해 뛰어나온 궁수와 투석병들은 4열 군단의 공격을 받아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4열 대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우회하여 폼페이우스의 좌익의 측면을 치러 갔다.

4열이 측면을 침과 동시에 카이사르는 3열 대대에게 1, 2열의 대대를 교체해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린다. 3열이 교체해 들어가면서 폼페이우스군을 살육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폼페이우스군은 견디지 못하고 패주해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이 승리를 자신의 4열의 병사들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고 흥분한 어조로 그의 저서에 남긴다.

폼페이우스는 기병이 패주한 뒤 자신의 병사들이 우왕좌왕하자 패배를 직감하고 그의 진영으로 곧장 달려가 백인대장들에게 큰소리로 어떤 일이 있어도 진영을 방어해야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폼페이우스는 7개 대대로 진영을 사수하게 하였고 패주한 병사들도 많은 이들이 진영에 들어왔으므로 이들로 자신의 진영을 방어해내는데 성공한다면 수습해 다시 맞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듯 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승세를 타 전군을 동원하여 진영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굉장히 치열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계속된 싸움에서 카이사르군은 끊임없이 공격하였고 마침내 폼페이우스측 병사들은 패배를 직감하고 방어구역에서 물러나 가까운 언덕으로 달아났다.

카이사르군이 드디어 방벽을 돌파하고 폼페이우스의 진영 안으로 진입하자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총사령관의 표창을 거둔 뒤 말을 타고 라리사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그는 소수의 호위기병 30명과 함께 밤중에도 계속 달려 해안으로 도착했고 때마침 지나가던 곡물 수송선을 타고 폼페이우스와 주요 요인들은 그리스를 떠난다.

폼페이우스는 도망가면서 여러 번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내가 터무니없는 실수한 것이 틀림없다. 나에게 전투를 치르라고 요구한 이들이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오리라 믿었건만 이들에게 배신당한 기분이다.

카이사르는 전투가 끝난 뒤 전장에 쓰러진 폼페이우스 측 원로원 의원들의 시체를 보고 이런 말을 남겼다.
그들이 원한 일이다. 내게 군대가 없었다면, 그들은 내 업적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소했을 것이다.

4.14. 전투 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진영을 함락시킨 뒤 병사들에게 약탈을 금지시키고 계속 전투에 임하라고 명령한다. 폼페이우스 병사들의 대부분은 언덕 위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총사령관과 지휘관 대부분이 내뺀 상황임에도 바로 항복하지는 않고 라리사로 퇴각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카이사르는 병력을 나누어 하나는 폼페이우스 진영에, 다른 하나는 아군 진영에 남기고 본인은 4개 군단과 함께 폼페이우스군의 행군로를 차단하였다. 폼페이우스군은 언덕 위에 자리를 잡는다.

카이사르는 밤에 참호를 파서 폼페이우스군의 식수를 차단하였고 버틸 수 없게 된 폼페이우스군은 사절을 보내 항복 조건을 협상하고자 하였다. 몇몇 원로원 의원들은 탈영하여 카이사르를 찾아와 목숨을 구걸한다.

아침이 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군을 만나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지시한다. 이들은 시키는대로 한 뒤 울면서 목숨을 구걸하였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자비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하면서 누구도 목숨을 잃지 않고 재산을 뺏기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 그 뒤 카이사르는 자신과 적의 전사자를 집계했는데 그의 전사자는 200여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폼페이우스군의 전사자는 1만 5000명에 이르렀고 포로는 2만 4000명에 달하였다. 또한 카이사르군은 폼페이우스군의 군단기 중 9개의 독수리 깃발과 180여 개의 수기(백인대기)를 노획하였다.

폼페이우스군 진영에 입성한 카이사르는 그곳에서 목격한 것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곳에는) 장식용 나무들이 즐비했고, 엄청난 무게의 은제 접시들이 널려 있었으며, 신선한 잔디가 깔린 텐트, 담쟁이 덩굴로 뒤덮은 루키우스 렌툴루스와 다른 여러 사람의 텐트들, 그 밖에 그들이 과도한 향락에 빠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는 많은 증거들을 볼 수 있었다.[52]

파르살루스 전투의 소식은 각지에 퍼졌다. 폼페이우스의 압도적인 해군은 계속 군사활동을 활발히 하여 일부는 브룬디시움을 철저히 봉쇄하고 일부는 시칠리아 섬을 공격하였다. 시칠리아의 메사나(메시나)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 빠졌는데 그때 파르살루스의 전투 결과가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폼페이우스군은 모두 해상봉쇄를 풀고 철수한다.

4.15. 폼페이우스의 죽음

전투 직후 카이사르의 군단 대부분은 제대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파르살로스 전투를 '마지막 전투'라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카이사르는 800기 남짓한 기병만 데리고 폼페이우스를 추격했으며 1개 군단에 그를 따르라는 명령을 해두었다[53].

폼페이우스는 달아나면서 그리스인들에게 포고를 내려 군무 서약을 지키기 위해 집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런 포고를 내렸음에도 그리스 도시들의 이탈은 매우 빨랐다. 폼페이우스는 우선 바다를 건너 키프로스 섬으로 간 뒤 이후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안타키아)에 가려했으나 안티오키아는 폼페이우스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통보하였다.

이 통보를 받은 폼페이우스는 시리아로 갈 계획을 포기한다. 그 대신 그는 이집트로 갈 생각을 하였는데 당시 이집트에선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자신의 누나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 전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에서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 왕에게 사절을 보내 그가 과거 그의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파라오로 등극하게 해준 것을 상기하며 곤경에 빠진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전갈을 보낸다. 그렇게 한 뒤 폼페이우스의 사절들은 쓸데없는 짓을 했는데, 그들은 이집트 왕의 밑에서 군사복무를 하던 많은 옛 폼페이우스의 군단병들에게 폼페이우스 밑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한 것이었다. 이들은 퇴역병으로 폼페이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등극시켰을 때 입성한 뒤 그대로 남아 군인으로써의 커리어를 계속 쌓아가길 선택한 자들이었다.[54]

이러한 폼페이우스의 사절들의 행동은 소년왕의 섭정들에게 알려졌고 이들은 크게 불안에 떨었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오려는 것이 이집트를 접수한 뒤 카이사르와 맞서고자 하는 의도라고 생각한 이들은[55] 폼페이우스가 올 때 그를 암살할 음모를 꾸민다.

암살 계획을 세운 이집트인들은 아킬라스와 과거 폼페이우스의 장교였던 루키우스 셉티미우스를 보내 폼페이우스를 배 위에서 맞이하게 한다. 폼페이우스는 배 위에서 그들에게 살해당한다. 폼페이우스와 같이 있었던 전직 집정관 루키우스 렌툴루스는 감옥에 갇혔다가 그들에게 살해당한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쫒아 보병 3200명과 8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 이로써 역사적인 두 라이벌의 대결은 카이사르의 승리와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5. 기원전 48년 후반기~기원전 47년

이하의 두 전투는 엄밀히는 타국과 싸운 것이므로 내전은 아니나, 내전 시기에 있었던 전투이므로 수록한다.

5.1. 알렉산드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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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젤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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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막(기원전 46년~기원전 36년)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대세는 완전히 카이사르 측에 기울어졌지만, 내전이 그대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아서 파르살루스 전투로부터 2년 뒤 북아프리카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루스피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이 카이사르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안겼지만(부상을 입었음에도 라비에누스가 전투 후에 몹시 만족해했다고 한다) 라비에누스가 말에서 굴러떨어진 건 안 비밀 이어지는 탑수스 전투(기원전 46년)에서 카이사르군이 승리했다. 양측의 병력 규모가 적은 것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파르살루스 전투보다도 규모가 커서 카이사르 측 최소 8개 군단(약 5만)과 폼페이우스 측 최소12개 군단 + 누미디아 동맹군(약 7만2천)이 맞붙었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파는 히스파니아로 달아났다. 폼페이우스군의 주요 의원들이 탑수스 전투 이후 거의 사망하면서 사실상 이때 내전이 종결된다.[56] 카이사르는 로마로 귀환하고 개선식을 치렀다.

1년 뒤 히스파니아 남부 문다(기원전 45년)에서 다시 한번 카이사르군(약 4만)과 폼페이우스군(약 7만)이 맞붙었고 여기서도 사상자 약 7천:3만으로 폼페이우스군이 패한다. 이때 라비에누스와 폼페이우스의 장남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전사하면서 폼페이우스군의 장군들은 모두 사망했다. 이 전투에 대한 카이사르의 개선식도 행해졌고, 카이사르의 오른팔과 같았던 10군단과 13군단이 해체되어[57] 각각 남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정착한다. 그리고 1년 뒤인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암살당한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둘째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살아남아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카이사르의 암살로 로마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급속히 세력을 팽창시켰다. 아직도 로마 공화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2차 삼두정치카시우스브루투스를 상대하느라 정신없던 사이에 상당한 병력과 함대를 모을 수 있었는데 로마를 해상봉쇄하여 곡식의 반입을 막을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이 때문에 로마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2차 삼두정치는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합법적 지배를 인정하는 대가로 임시 평화조약을 맺는다(미세눔 조약- 기원전 39년). 그러나 1년 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부하이던 메나스[58]가 사르데냐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한 것을 계기로 다시 전투가 벌어졌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37년 메사나에서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나, 기원전 36년 나우로쿠스 해전에서 아그리파에게 패하면서 카이사르의 내전은 완전히 끝난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또다시 살아남아 아나톨리아로 도망쳤으나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의 부하에게 사로잡혀 재판없이 처형당한다.

7. 평가

처음 내전이 발발했을 때 상황은 폼페이우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였다. 폼페이우스가 옵티무스파로 넘어간 이후 카이사르파는 원로원 내에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집정관, 법무관을 비롯한 모든 관리가 카이사르를 적대시하는 상황이었다.

원로원과 집정관 모두가 폼페이우스의 편에 섰으며 이에 옵티마테스 일파들은 로마 공화국 전체가 카이사르를 적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카이사르가 그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했다. 여기다 파르티아 원정을 명분으로 카이사르에게 2개 군단까지 받아내 카이사르의 군사력 2할을 줄이고 자신들의 군사력의 2할을 늘림으로써 카이사르가 이들에게 군사적으로 맞서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카이사르 역시 군사적 대결을 하는 것을 무리라 보았고 따라서 그는 원로원에게 자신을 지키는 수단만을 요구하였다. 그는 원로원측에게 자신의 8개 고참 군단병을 즉시 해산할 것을 약속하였고 그에 대한 대가로 오직 그의 집정관 출마를 보장해달라는 요청을 하였을 뿐이었다. 이러한 제안은 들어줄 수도 있는 것이었고 실제로 원로원 의원들도 초기엔 이 정도면 들어줄만 하다는 여론이 강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을 폼페이우스가 적극적으로 훼방놓기 시작하였다. 그는 옵티무스파 중에서도 가장 골수였던 카토와 마르켈루스도 반대할 정도로 즉각적인 군사적 대결을 벌이기를 원했다. 그가 삼두정치 결성 이후로 매사에 소극적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토록 내전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것은 다소 의외였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해 폼페이우스는 그의 군사적 업적이 카이사르에 의해 잊혀지게 된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내전기에 서술해 놓았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적극적인 선동으로 인해 카이사르를 파멸하고자 하는 원로원의 최종 권고가 내려지자 카이사르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내전을 벌인다. 이 싸움에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놀라울 정도로 간단히 로마 정부를 배반하고 반란군인 카이사르에게 붙는다. 이를 전혀 예측 못한 폼페이우스파는 그들이 애써 모아놓은 군자금, 병력 대부분을 카이사르에게로 대가없이 넘겨주고 그리스로 황급히 도피하게 된다.

폼페이우스의 이러한 전략적 오판은 상당히 치명적이었는데, 카이사르가 로마를 수중에 넣음으로써 그는 반란군에서 정통정부로,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정통정부에서 갑자기 반란군으로 신분이 뒤바뀐 것이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훗날 벌인 그리스의 내전에서 현직 집정관이라는 엄청난 정통성을 가지고 상당히 많은 협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만일 카이사르가 로마를 수중에 넣지 못하여 현직 집정관이 아닌 불투명한 신분으로 군단을 지휘했더라면 그가 접근하는 것만으로 그리스의 도시들이 자발적인 협력을 약속하는 일들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59][60]

결국 로마를 수중에 넣은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에서 반년 만에 아프라니우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1년 뒤 현직 집정관 신분으로 그리스로 건너가 폼페이우스와 내전을 벌인다. 이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의 급조된 군단은 테살리아에서 3개월간 겨울캠프로 군사훈련을 받은게 전부인 잡병들이나 다름없는 군대로 갈리아에서 10년 동안 전투를 치러 찬란한 군사적 업적을 세운, 공화국 내 최강의 베테랑 군단인 카이사르의 군대와 맞선 것이었다.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는 강력한 기병과 많은 병력의 수를 유지하면서 카이사르군과 교전을 피하다 약점이 보일 때 강수를 띄워 그를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카이사르군과 비교하여 폼페이우스군의 질적 차이가 컸음을 감안할 때 이를 가능케 한 것은 폼페이우스 자신의 놀라운 군사적 재능이었다. 특히 디라키움에서 있던 마지막 두번의 교전에서는 폼페이우스가 연이은 승리를 거머쥐었는데 그는 카이사르의 약한 부분이 파악되자 즉시 5~6개 군단을 총동원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쳐서 성공시킨 것이었다. 여기서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식견이 결코 과거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폼페이우스는 치명적인 오판을 하는데 그것은 파르살루스에서 회전을 치러 한 번에 그가 이룩해낸 것을 몽땅 날린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도망가면서 전투하라고 압력 넣은 옵티무스 일파들을 원망하는 말을 했는데 결국 판단을 내린 것은 본인이었고 전략적 오판한 책임은 총사령관인 그가 져야하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가 갑자기 전투를 치르기로 결심한 이유는 불분명한데 그 이유는 그의 전략의 일관성을 크게 버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파르살루스보다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치를 기회는 몇 번 있었으나 이를 모두 위험하다고 판단하였는데 파르살루스에서 갑자기 전투를 치른 것이었다. 가령 디라키움 공방전이 끝난 뒤 카이사르는 패배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킨다고 폼페이우스군의 바로 앞에 포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파르살루스보다 더 유리한 상황인데도 폼페이우스는 전투에 응하지 않았다. 파르살루스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2개 군단이 합류해서 전력이 증강되어 자신감을 얻었을 수도 있으나 엄밀히 따진다면 스키피오와 동시에 도미티우스의 2개 군단도 카이사르 측에게 합류하였으므로 서로의 전력차이는 합류 전과 이후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엄밀히 따진다면 카이사르가 더 전력보강이 되었는데 도미티우스의 2개 군단은 갈리아의 고참병인데다 스키피오의 2개 군단과 대치하면서 시종일관 우세함을 보여왔기 때문이었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전략도 석연치 않는데, 일단 카이사르가 포진하다 한 눈에 계획을 눈치챌 정도로 직선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파르살루스가 기병이 좌측으로밖에 우회할 수 없었던 지형이라면 그곳에서 회전을 치르는 것은 기병전력을 발휘하는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폼페이우스가 이런 평범한 전술을 들고 온 이유를 알 수 있는데, 그런 평범한 배치만으로도 숙련도의 차이를 뛰어넘어서 상대를 분쇄할 수 있는 엄청난 수적 우세가 폼페이우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폼페이우스군 기병을 막아선 카이사르의 별동대들이 조금만이라도 동요를 보였으면 그들은 기병에게 짓밟혔을 것이고 그에 따라 카이사르군이 포위 섬멸을 당했을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에선 카이사르의 군사들이 그 명성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용기와 기량을 보여주고 폼페이우스군은 2.5배에 가까운 수적 우세를 안고도 경험의 차이와 전술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면서 무너진다.

게다가 그때까지도 양군의 전투력의 차이는 분명했다. 아무리 전술적으로 패배했다고 해도 카이사르군의 희생자는 200명인데 폼페이우스군의 희생자는 전사자만 1만 5천이라는 것은 두 군대의 전투력의 차이가 뚜렷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파르살루스라는 곳에서 회전을 치른 것은 과연 이 폼페이우스가 그 폼페이우스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판단 미스였던 것이다.

파르살루스 전투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내전기에 언급되는데 폼페이우스는 두 번의 승리로 인해 병사들이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병사들의 사기가 올랐고 카이사르군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으므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카이사르군은 패배 이후 오히려 사기가 오른 상태였다. 이들은 그들이 갈리아, 게르마니아,[61] 히스파니아, 이탈리아를 정복했다는 프라이드로 똘똘 뭉친 군대였고, 이 태도는 디라키움에서 패배 후 카이사르가 이들을 질책하자 이들이 디라키움 포위를 다시하겠다고 대답한 점에서 여느 군대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후 계속 열받은 상태였던지 일부러 힘든 노역을 자처하고 전투를 고대하여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카이사르가,
너희가 그토록 원했던 전투를 벌일 기회가 왔노라.

라고 운을 뗄 정도로 이들의 사기는 올라있었다.

이러한 점을 폼페이우스는 파악 못했는데 실제로 폼페이우스는 내전 내내 이러한 인간 심리를 헤아리는 부분에서 약점을 보여 전략적 오판을 거듭했고 이 점이 문제가 되어 결국 몰락하면서 목숨까지 잃게 된다.

또한, 그가 옵티무스 일파를 원망했듯 그들이 보낸 무언의 압박도 폼페이우스의 개전 시기를 앞당겼을 확률이 높다. 앞선 디라키움 전투의 승리로 무적인줄 알았던 카이사르의 군단과 의외로 해볼만하다는 생각을 폼페이우스가 했다면, 전장에서 손을 뗀 시기가 훨씬 긴 옵티무스 일파들은 이미 승리를 확신했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그들은 전술과 전략을 논의해야할 자리에서 전후 논공행상을 두고 싸웠다고 나올 정도이며, 더 이상의 지구전은 폼페이우스가 자신들을 지휘하는데 희열감을 느끼는 행동일 뿐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들이 보낸 무언의 압박도 생각보다 심했을 것이다. 즉, 폼페이우스 입장에서도 더 이상의 지구전을 벌일 명분이 없기 때문에[62] 회전을 결정해야 했고, 그 시기가 파루살루스 전투가 됐을 뿐인 셈이다.

폼페이우스가 이러한 전략적 오판을 보이는 것은 그의 일생에서 그의 정치적인 감각이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제패한 직후 그의 찬란한 군사적 업적이 이탈리아 전체를 뒤덮는 상황에서 그런 업적을 이룩한 장군과 군대를 반란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봐도 전혀 타당해 보이지 않았고[63][64] 따라서 명분이 그다지 없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이를 고집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의 민심을 헤아렸다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65]

또한 폼페이우스의 죽음 역시 이러한 종류의 약점이 계기가 된 것인데, 그는 이집트에 망명 신청을 한 뒤 이집트 군인들에게 접근해 폼페이우스를 지지해 카이사르와 싸우자고 부추겼다. 폼페이우스가 살아있는한 카이사르와 내전을 계속하는 상태임은 분명하고, 이런 상황에서 폼페이우스가 뜬금없이 이집트로 간 이유는 이런 식으로 이집트를 손에 넣은 뒤 카이사르와 대항하겠다는 의도로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런데 이집트는 당시 오늘 내일하는 왕조긴 하였지만 엄연히 수백 년간 내려온 왕조가 있었으므로 폼페이우스가 그의 마음대로 이집트를 수중에 넣고 싸우는게 가능할 리 없었다. 폼페이우스가 파트리아-클레엔테스 관계를 생각했을 수도 있겠으나 이집트라는 하나의 독립된 왕조가 몰락한 한 개인에게 파트리아-클레엔테스라는 엄연한 인간적 의리관계에 계속 묶여있으리라는 생각은 상당히 무리였던 것이다.

이로써 폼페이우스는 이집트 망명길에서 그의 의도를 눈치챈 왕조의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고,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며 그가 이끄는 세력은 이후 2차 내전을 치른 뒤 원수정 로마의 핵심세력이 된다. 그리고 로마의 정치체제는 제국으로서 이후 멸망할 때까지 지속해 나간다. 1~2세기에는 때때로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 부활을 기도했으나 프라이토리아니가 번번이 무산시켰다.

8. 주요 전투



[1]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조카[2] 로마제국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3대 황제 칼리굴라의 조부,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아버지인 대 드루수스의 친부.[3]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4]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아들[5] 물론 이로 인해, 무려 2000여년 전에 구현되었던 공화정대의제 민주주의가 붕괴되어, 약 천 년 뒤 영국프랑스 등지에서 민주주의가 부활하기까지 전 유럽에 전제군주정이 창궐하게 된 원흉이라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6] 원래는 갈리아에서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으로 복무하였다가 카이사르의 집정관 당선 공작을 위해 먼저 로마에 돌아와 호민관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7] 원래 부재 중 입후보가 불가능한 법이 있었던 게 아니라 원로원에서 일부러 카이사르를 저격하기 위해 새로 법을 만든 것이다.[8] 여기에 얼마 남아있지 않은 원로원의 투표 결과가 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둘 다 군대를 동시에 내려놔야 하는가?' - 그렇게 해야 한다가 370표,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가 22표.[9] 카이사르가 로마로 진군한 법적인 근거들 중 하나가 이거다. 원로원 최종권고는 카이사르 상대로 내려졌지 호민관들을 상대로 내려진 게 아닌데, 원로원들은 호민관들을 물리적으로 폭행하고 위협했다. 이는 호민관의 특권들 중에 하나인 신체 불가침권을 침해한 것이기 때문이다.[10] 이미 이는 내전때부터가 아니라 갈리아 전쟁 때부터였다.[11] 카이사르는 2개 군단을 돌려보내고 8개 군단만이 휘하에 있었지만, 이 8개 군단은 지난 10년에 걸친 갈리아 정복전쟁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사기가 높고 전투 기술이 뛰어난 병사들로 단련되어 있었다.[12] 그는 훗날 쿠리오를 상대로 아프리카 전쟁을 치른다.[13] 비불리우스 루푸스는 훗날 그리스에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보내는 사절로 재등장한다.[14] 쿠리오를 매수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쿠리오가 지고 있던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다. 당시 선거는 돈질로 승부내는 경향이 있었고 또한 선거 관리 위원회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돈질로 하는 승부를 불법으로 여기질 않았다. 따라서 정치가들은 선거를 치르면서 출세할 때마다 막대한 빚을 지는 것이 특징이었고 카이사르 역시 집정관 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엄청난 빚에 허덕였다. 그러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시절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의 파라오 즉위를 돕는 대가로 어마어마한 돈을 받음으로써 빚을 탕감하는데 성공한다.[15] 쿠리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호민관 1년 선배로 젊은 정치가 중 필두로 손꼽힐 정도로 유망한 젊은이였다. 특히 웅변술로 유명하였고 웅변의 달인 키케로도 그를 극찬할 정도였다. 단 그에겐 눈에 띄는 군사적 경험이 없었고 이는 나중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그를 몰락하게 한다.[16] 병사들이 카이사르의 군대가 접근하자 겁을 먹고 자신들의 사령관을 팔아넘겨 목숨을 부지하려 든다고 생각했기 때문.[17] 로마 군단병은 로마 시민으로만 구성되어야 했다. 따라서 동맹시 전쟁 이전엔 로마 군단병은 오직 로마시에서만 징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맹시 전쟁 이후로 이탈리아 도시들이 로마 시민권을 갖게 되자 로마는 지역 도시들에게서도 로마 군단병을 뽑을 수 있었다.[18] 당시 술라 치하에선 살생부를 작성하여 유력 정치가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나눠가지는 상황이었다. 이때 이 정치가들의 약점을 찾아내 밀고하는 역할을 하는 자들을 밀고자라고 불렀는데 이런 자들을 카토가 탄핵한 것이었다.[19] 속주 총독은 로마에 못 들어가는 법이 있었고 카이사르는 이를 존중해서 로마 근교에서 카이사르파 법무관의 권한으로 원로원을 회의를 했다고 한다.[20] 비록 200명의 의원들이 떠났으나 아직 400명은 남아있었다.[21]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회전을 치르는 것이 아프라니우스에겐 유리하였다. 그는 보급로가 막히고 물조차도 구할 수가 없는 고립된 상황이므로 단판 승부인 회전은 그나마 희망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프라니우스는 카이사르를 이길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며 병사들은 전투력에서 명백히 열세인 데다 기병전력은 카이사르군이 크게 앞섰다. 카이사르는 6천여 기병을 동원하였는데 이는 폼페이우스가 1년간 공들여 준비한 7천 명의 기병에 육박하였다. 이렇게 카이사르가 강력한 기병전력을 갖춘 이유는 그의 속주인 갈리아가 바로 옆에 있어서 기병 공급이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22] 아우구스투스는 절대 이렇게 관대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는 자신의 업적론에 자신은 적을 항상 용서했다고 자화자찬했지만 카이사르가 이렇게 관대한 이유는 그의 성격도 그렇지만 오랜 원로원 의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적들 대부분과 어느 정도의 친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공화정이 유지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카이사르는 로마인들의 여론을 항상 신경 써왔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바로 그 관대함 때문에 암살당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당연히 적을 숙청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23]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는 로마 평민귀족으로서 재무관, 호민관을 역임한 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 종군하였다. 이때 나이는 아마도 40대로 전투를 지휘하는데 있어 원숙한 나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훗날 카이사르의 암살에 가담한다. 위에 언급된 데키무스 브루투스도 카이사르의 암살에 가담한 것을 본다면 카이사르는 그가 매우 신임한 최측근들에 의해 암살된 것이었다.[24] 집정관 둘은 폼페이우스와 함께 있었으므로 수석 법무관이 집정관직을 대행하였다. 따라서 그는 독재관을 지명할 권한이 있었다.[25] 쿠리오는 당시 웅변술로 유명한 젊은 정치가였고 키케로도 극찬하는 실력이었다.[26] 개인적으로 카이사르파였지만, 안토니우스와 사이가 나빠서 카이사르가 독재관이 됐을 때도 안토니우스랑 으르렁거렸다. 정작 안토니우스가 동방 원정을 계획하자 거기에 참여하였고, 동방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져서 자결한다.[27] 앞서 카이사르를 원로원 회의에서 맹렬히 성토하던 그 집정관이었다.[28] 내전기 1권 39장에 언급되어 있다.[29] 안찰관은 도시의 건축, 수리, 축제 등을 담당하는 관리로 각 도시에 네명뿐이었다. 따라서 로마 안찰관 역시 4명뿐이었고 이들 중 두명은 평민 안찰관으로 평민 집회에서 선출되었다. 안찰관은 평민 안찰관보다 권한이 컸고 이 두 직위에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선출된 것이었다. 안찰관은 비록 호민관, 법무관보다 낮은 직위라고 여겨졌으나 자리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법무관에 당선된 자들도 안찰관 역임한 경력을 갖기란 어려웠다. 가령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안찰관 선거에서 낙선하였다.[30] 비불루스에겐 안됐으나 심지어 현대 대부분의 역사서에서도 카이사르가 안찰관 시절 화려한 검투경기를 개최해 인기를 모았다라고 서술되어있다.[31] 본래는 비불루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고 불려야했지만 사람들은 비불루스가 존재감 없음을 이렇게 비아냥거린 것이었다.[32] 비록 집정관 시절 비불루스의 꼴이 우습긴 하였으나 전직 집정관이라는 신분은 매우 고명하였으므로 해군 총사령관을 맡을 권위는 충분하였다.[33] 카이사르가 내전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집정관이 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집정관이 된 상태였으므로 굳이 내전을 치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명성은 매우 높았으며 이 시점에서는 카이사르조차 이길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34] 스키피오는 전해의 원로원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보아 아직 총독이라는 공석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 시리아 총독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번해 겨울에 막 임명된 상태로 보인다. 스키피오는 3년전 집정관을 폼페이우스와 함께 역임하였으므로 총독에 임명될 권한은 충분하였다.[35] 즉 카이사르는 뒤이어 합류한 4개 군단을 전부 각지에 파견한 것이었다.[36]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대치한 디라키움의 북쪽지역이었다.[37] 내전이 끝난 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동생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끊임없이 저항하였으나 히스파니아에서 패배한 뒤 마침내 붙잡혀 처형된다. 하지만 섹스투스는 계속 살아남아 훗날 카이사르 암살 뒤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면서 아우구스투스를 위협한다.[38] 병력으로만 본다면 훗날 파르살루스 회전 때보다 폼페이우스에게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합류한 안토니우스의 병력을 모두 쪼개 각지에 파견하였으므로 초기 2만여 남짓의 병력만 있을 뿐이었고 폼페이우스는 스키피오의 2개 군단이 부족하여 대략 4만여 병력이 있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회전을 치르는 것을 거부한다.[39] 폼페이우스는 이 '빵'을 직접 본 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과 싸우고 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40] 이러한 식량난을 폼페이우스군이 비웃자 카이사르 측 병사들은 이 빵을 폼페이우스군 진영으로 집어던지는 것으로 응수했다고 한다.[41] 이 대목은 내전기에서 소실된 부분이므로 학자들이 이렇게 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세 번의 교전은 카이사르가 직접 언급한 내용이다.[42] 이 사람은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조카인데 카이사르편에 붙었다. 반대로 카이사르의 일족인 루키우스는 폼페이우스편에 붙었다.[43] 대략 1세스테르티우스는 대략 2달러로, 한화로 약 4억여 원 정도의 금액이었다. 스카이바는 이후 다시 언급되지 않으나, 훗날 갈리아 보조병 기병대 중 '스카이바 기병연대'라는 부대가 존재한 것으로 볼 때 이 부대의 지휘관으로 진급한 것으로 보인다.[44] 볼루세누스는 갈리아 전기 8권에서 등장하여 맹활약하던 인물로 마지막 부분에서 허벅지의 심한 부상을 입은 뒤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 상처를 치료한 뒤 복귀하여 기병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의 재등장을 보면 얼마만큼 카이사르군이 갈리아 전쟁을 수행하던 베테랑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지 짐작가능케 한다.[45] 로마 시대 재무관이면 대대장 바로 다음의 위치로 20대 중후반의 젊은이가 맡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대체로 군단장을 맡기엔 이른 나이였다.[46] 이때 카이사르군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냐면, 심지어 도망치던 한 기수가 자신의 앞을 막는 카이사르를 날카로운 깃대 끝으로 찌르려고 해서 호위병이 칼로 그 기수의 팔을 베어버려야 했을 정도였다.[47] 당시의 약탈은 상상 이상으로 잔혹하였다. 로마군도 예외는 아니어서 도시민 중 젊은이들은 노예로 삼고, 여자는 강간의 대상이었으며 모든 시민의 재물은 지휘관 앞에 진열된 뒤 그와 그를 따르는 병사들의 몫으로 분배되었다.[48] 그가 전 해에는 수석 백인대장이었으나 이때는 병사로 참여한 것을 본다면, 아마도 전해에 있었던 10군단이 주도한 파업사건으로 인해 강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49] 크라스티누스는 적이 찌른 칼이 입을 뚫고 목 뒤로 관통하면서 전사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카이사르는 그의 시체에 무공훈장을 올려놓은 뒤 장례를 치렀는데, 로마에서는 전사자에게 서훈을 추서하는 관습이 없었기에 이는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50] 이때는 카이사르가 없었다. 즉 기나긴 전쟁을 거치면서 경험이 엄청나게 쌓인 군단병들이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51] 사실 폼페이우스군 기병들도 그들 중 다수가 최근에 모병되었고, 병사들은 고사하고 장교들도 그들을 지휘하던 라비에누스를 제외하면 이처럼 대규모로 회전을 벌여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질적으로는 그들도 폼페이우스군 보병보다 딱히 나을 게 없었던 것이다.[52] 다만 이 기술은 비하의 의도가 담겨 있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53] 이마저도 사실은 군단이 아니라 에니페우스 강 근처에서 항복한 6군단의 2개 보병대였다[54] 이들을 가비니아니(Gabiniani)라고 하는데, 이름의 유래는 폼페이우스의 동방원정 때 2천 명의 군단병과 500명의 보조병을 남겨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즉위에 도움을 주었던 장군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이다. 이집트 문화에 동화된 이들은 파라오의 정예병으로 복무했다.[55] 폼페이우스가 굳이 그의 세력권으로 남아있던 아프리카로 안 가고 이집트로 가려고 한 것은 단지 망명이 아닌 이집트를 손에 넣은 뒤 카이사르에 대항할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집트 권신들의 우려가 이해못할 일은 아니었다.[56] 이미 탑수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집정관급 인사들(로마 공화정 시대에 집정관 취임 여부는 군통수권의 서열이 달라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이 모두 사망하거나 카이사르에게 투항했기 때문에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훗날 일어난 문다 전투는 카이사르가 이미 정벌한 적 있는 히스파니아에서 벌어졌고 개선식도 따로 쳤기에 세르토리우스 전쟁처럼 사실상 별개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57] 10군단은 1년 뒤인 기원전 44년 말~43년 초에 레피두스에 의해 재건되어 필리피 전투에 참가했고, 이후 안토니우스를 따랐으나 악티움 해전의 패배 이후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했고 그리스에 정착했다. 그 후 반기를 들었다가 진압당한 후 이름(에퀴스트리스)을 박탈당한다. 13군단은 기원전 41년 옥타비아누스가 재건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싸웠고 이후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싸웠으며 달마티아로 보내졌다가 최종적으로는 판노니아에 남게 된다.[58] 원래 폼페이우스의 해방노예 출신으로 한때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의 통치권자로 임명했다.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에게서 사르데냐를 빼앗아 통치자가 되었으며 기원전 38년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가 기원전 36년 다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돌아간다.[59] 하지만 동시에 근거 있는 오판이었다. 폼페이우스의 퇴각 시점에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히스파니아를 손에 쥐고 있었으며 누미디아는 쿠리오의 발언으로 인해 반 카이사르 정서가 컸다. 이집트 역시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였으며 아프리카 속주는 폼페이우스 휘하의 장수들이 지키고 있었다. 사실상 이탈리아의 식량줄을 쥐고있는 시칠리아는 카토가, 갈리아에 버금가는 정예군이 주둔한 시리아에는 장인인 스키피오가 총독으로 있었다. 원로원도 200명 가량 디라키움에 와 있어서 조세도 사실상 그리 흘러가고 있는 정통정부 취급받았다. 그리스의 도시들이 문을 연 것도 디라키움에 있는 폼페이우스 군보다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카이사르 군이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편하기도 하고.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통제하는 카이사르를 포위해서 고사시키는 전략 자체는 굉장히 좋았지만 폼페이우스의 결점은 휘하 장병들이 대부분 신병들이라는것이었고, 이들을 카이사르의 군단병급 베테랑으로 키워내기 위해 훈련하는 동안 카이사르가 전격전으로 스페인부터 빠르게 허물어뜨린 바람에 대전략이 어그러졌고, 뒷치기 걱정 없이 대부분의 휘하병력을 끌고 올 수 있게된것이 카이사르의 행운이라고 볼 수 있다.[60]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나 애시당초 카이사르는 민중파였고 이탈리아 각 도시의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자고 한 것은 민중파였으며, 반면 원로원파는 오히려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의 각 도시의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동맹시 전쟁이 벌어지기까지 했고, 이 때 각 동맹시를 제압한 사람이 바로 원로원파의 술라였다. 그러니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이 민중파와 원로원파 간에 내전이 벌어진다면 누굴 지원할 지는 뻔한 일이었는데 폼페이우스는 무골이라 이를 생각조차 못한 것이다.[61] 당시 카이사르가 정복한 먼 갈리아는 사실상 게르만족의 땅이었으므로 이들의 업적은 게르마니아를 정복한 것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실제로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에게 저들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한 군대가 아니라고 운운한 바 있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군단들이 7년간 갈리아 전쟁과 히스파니아전쟁으로 상당수의 병력을 손실했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6000명에 가까웠던 군단병의 정원이 10군단을 비롯한 고참 군단은 25%이상의 결원율을 보였다. 하지만 그 줄어들었어도 바로 직전까지 전쟁을 치룬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고 로마 본국에서 입대한 신병들도 고참병들을 본받으며 폼페이우스군 이상 숙련도를 보였다[62] 상술하듯 디라키움 회전에서 이미 폼페이우스군이 카이사르군보다 우위에 있다는걸 원로원 의원들이 확인했기 때문이다. 물론 디라키움의 승패는 굉장히 복합적인 이유가 있으나, 전장에서 손을 뗀지 오래인 원로원 의원들이 이를 고려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63] 꼭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폼페이우스가 주도했을 뿐 카이사르가 더 이상 권력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보는 원로원 의원이 분명 다수였기 때문에 내전까지 일어난 것이다. 현대정치로 비유해도 카이사르의 욕심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미국의 영웅이 된 루즈벨트가 대통령직을 4선까지 사실상 종신에 가깝게 역임했고 이는 세계대전이라는 유례없는 세계적 위기에 의한 것이였지만 그 루즈벨트조차도 4선은 선을 넘은게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64] 하지만 이 말은 말이 안 되는 게 애시당초 공화국에서 카이사르가 더 이상 권력을 잡아도 되는지 아닌지를 원로원 의원이 판단할 자격이 없다. 그걸 결정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로마 시민들 뿐이기 때문. 그리고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까지 위법 행위를 저지른 적이 없고 오히려 원로원 측에서 위법, 탈법 행위를 심각할 정도로 저질렀다. 미국의 상황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그 미국의 루즈벨트도 위법 행위는 한 적이 없고 물론 종신 비판을 받긴 했지만 미국은 루즈벨트 사후 원로원 최종권고가 아니라법으로 대통령의 3선을 제한한다는 훨씬 민주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위기를 회피했다.[65] 오히려 폼페이우스가 진짜 정치적 식견이 더 높았다면 그냥 카이사르와의 유대관계를 확실히하며 민중파로 들어갔을 것이다. 아무리 그 당시 율리아의 죽음으로 관계가 서먹해졌다고 해도, 엄연히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유대관계는 확실하고, 정치감각이 뛰어난 카이사르 입장에선 이후엔 원로원들과의 정치싸움을 계산하면 폼페이우스 휘하의 해산병들을 빌미로 이런저런 정책들을 시도할 수 있으므로 카이사르가 일방적으로 그를 내칠수도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크라수스의 죽음 이후 파르티아 정벌에 대한 목소리도 언젠가 해소했어야 하므로, 한번 소아시아 지방을 정벌한 전적이 있는 폼페이우스에게 이 일이 맡겨질 가능성이 높았기에 얼마든지 카이사르를 뛰어넘는 전훈을 쌓을 기회도 넘쳤었다. 한마디로 모자란 정치적 식견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