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15:30:47

일레르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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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카이사르군3.2. 옵티마테스군
4. 경과
4.1. 전초전4.2. 카이사르의 위기4.3. 전세 역전4.4. 옵티마테스군의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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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9년 6~8월, 히스파니아 속주의 변경 도시 일레르다[1]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옵티마테스파 로마군이 맞붙은 전투.

2. 배경

기원전 49년 1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부재 중 집정관 선거 입후보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군대 해산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원로원과 대립하다가, 이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들어갔다간 정적들의 맹공으로 정치생명이 끝장나고 명예가 실추된다고 판단해 내전을 감행했다. 이탈리아 주민들은 갈리아 전쟁의 영웅인 그를 열렬히 환영했고, 병사들은 앞다퉈 그에게 가담했다. 원로원으로부터 카이사르를 대신해 갈리아 전체의 총독으로 임명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코르피니움 시에서 33개 코호트를 주둔시켜 카이사르와 대적했다.(코르피니움 공방전) 그는 폼페이우스가 곧 도와줄 거라고 믿고 버티려 했으나, 폼페이우스는 구원 요청에 응하지 않고 "내 지시에 따르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지 마라"며 당장 귀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포위되었고, 그는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군대의 반란으로 사로잡혀 카이사르에게 넘겨졌다.

카이사르는 아헤노바르부스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귀순한 옵티마테스파 인사들을 군인들의 모욕으로부터 보호해준 뒤 자신과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한 뒤 각자 원하는 데로 가라며 풀어줬다. 물론 병사들 역시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않고 자신의 군단에 배속시켰다. 그는 코르피니움 원로원으로부터 6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전달받았으나, 이를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해서 전투는 마무리되었고, 카이사르는 7일간 코르피니움에 머물렀다가 폼페이우스가 있는 아풀리아로 진군했다. 카이사르의 승리를 알게 된 폼페이우스는 그때까지 모은 병력을 이끌고 루케니아에서 카누시움으로 갔다가, 다시 이탈리아 끝자락인 브룬디시움으로 이동했다. 카이사르는 그가 이탈리아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해서 내전을 조기에 끝내고자 브룬디시움으로 향했다.

기원전 49년 3월 9일에서 18일까지 벌어진 브룬디시움 공방전 결과, 폼페이우스가 무사히 브룬디시움을 빠져나오면서 내전을 조기에 끝내려던 카이사르의 계획은 실패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피체노움, 메시나 해협 등 전 해안 지역의 함선들을 총동원해 브룬디시움에 집결시키라는 통보를 내렸다. 하지만 그러려면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고, 그는 그 동안 히스파니아의 폼페이우스군을 물리치기로 했다. 당시 히스파니아 속주는 '가까운 히스파니아', '먼 히스파니아', '루시타니아'의 3개 속주로 나뉘어 있었다. 가까운 히스파니아엔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휘하 3개 군단이 주둔했고, 먼 히스파니아엔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휘하 2개 군단이 주둔했으며, 루시타니아엔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휘하 2개 군단이 주둔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그리스로 달아난 폼페이우스를 상대하러 간 사이에 저들이 이탈리아를 노릴 수 있다고 보고, 먼저 이들부터 토벌하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4월 1일 로마에 입성한 뒤 국고를 확보하여 군자금을 마련한 후, 일주일 뒤 히스파니아로 진군했다. 그런데 지중해 연안 도로를 따라 진군하던 중 마실리아가 복종을 거부했다. 그는 무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에게 3개 군단을 맡겨 육상에서 공격하게 하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해군을 맡겨 해상에서 봉쇄하게 한 뒤, 자신은 먼저 히스파니아로 간 군대와 합류하고자 계속 이동했다. 한편, 카이사르군이 히스파니아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접한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의 변경 도시 일레르다에서 군대를 집결해 적을 상대하기로 했고,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먼 히스파니아에서 행정을 전담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히스파니아 속주의 패권이 걸린 일레르다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카이사르군

3.2. 옵티마테스군

4. 경과

4.1. 전초전

카이사르가 이탈리아에서 히스파니아로 진군하다가 마실리아에서 가로막혔을 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이끄는 카이사르군이 갈리아에서 피레네 산맥으로 진군해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가 산악길에 배치한 수비대를 몰아냈다. 그 후 그 지역의 부족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각지에 전령을 보냈고, 기병대를 주변 농촌으로 보내 식량을 공출하게 했다. 그러면서 시코리스 강 위에 두 개의 목조 다리를 건설하여, 장차 인근의 일레르다 시를 공략할 준비를 했다. 반면 일레르다 수비대는 도시 근처의 석교를 통제했다.

기원전 49년 6월 20일 일레르다에 도착한 아프라니우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는 다리를 점령하는 걸 목표로 4개 군단을 이끌고 진군했다. 그러던 중 식량 공출을 마치고 본진으로 귀환하던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휘하 1개 군단과 마주치자, 이들을 포위 섬멸하려 했다. 플란쿠스는 적이 압도적인 수를 앞세워 쳐들어오자 프로피오르 언덕 위로 이동하여 사각형 모양의 방어 진형을 결성해, 구원군이 올 때까지 버텼다. 수 시간 동안 공격을 퍼부었지만 좀처럼 적을 무너뜨리지 못하던 옵티마테스군은 파비우스가 나머지 군대와 함께 플란쿠스를 구하러 달려오자 철수했다. 하지만 기병대를 주기적으로 파견해 적 식량 수집대를 공격해 보급이 원활하지 않도록 했다.

6월 23일, 카이사르가 9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호위대와 함께 파비우스의 진영에 도착했다. 그는 앞서 건설한 2개의 목조 다리 중 하나가 무너진 걸 확인하고, 군단병들을 투입해 다음날 밤까지 재건하도록 했다. 이후 언덕에 올라가 전황을 살펴본 그는 6개 코호트에게 숙영지 수비를 맡기고, 나머지 군대는 일레르다 시로 진군하게 했다. 이리하여 카이사르군은 2개의 목조 다리를 건너 도시로 진군해, 도시 앞 평야 지대에 3개 대열을 결성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옵티마테스군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진영 앞에 전투 대형을 조직했다.

적이 언덕 아래로 내려올 기미가 없자, 카이사르는 적진에서 불과 100 피트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세우기로 했다. 그는 진영을 건설하는 동안 적이 쳐들어오는 걸 방지하고자 깊이 4.5미터에 달하는 도랑을 먼저 파고 그 뒤에 일부 병력을 배치한 뒤 숙영지 건설을 착수하게 했다. 옵티마테스군은 이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카이사르군이 전투 대형을 갖추고 평야에서 전투를 신청하는 걸 일절 응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적이 전투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로 하고, 일레르다와 적 진영 사이에 위치한 약 450m 높이의 고지를 점거하기로 했다.

6월 27일, 카이사르는 3개 코호트를 고지로 파견했다. 아프라니우스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만약 고지를 내주면 일레르다 시로 돌아가는 길이 차단된다는 걸 알아채고 급히 병력을 파견했다. 양측은 곧 고지를 둘러싸고 격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히스파니아 보조병들이 오른쪽 측면을 위협하자, 카이사르군은 가까운 언덕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아군을 돕고자 제9 히스파니아 군단을 파견했다. 제9 군단은 아군을 쫓던 적을 물리쳐서 일레르다 성벽 앞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나 성벽에서 수많은 화살과 투창이 쏟아지면서, 그들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지만, 섣불리 철수했다가 적의 추격으로 괴멸될 것임을 파악하고 기병대를 파견해 그들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도록 돕게 했다. 5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카이사르군이 적의 첫번째 대열을 뚫고 도시 안으로 밀어붙였다. 그동안 공간이 없어서 침투하지 못하고 후방에 대기하던 기병대는 즉시 돌격하여 적을 몰아냈고, 제9 군단은 양측면이 기병대의 보호를 받게 되자 추격당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비로소 철수했다. 카이사르는 내전기에서 이날 전투 때 70명이 죽고 6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수석 백인대장 티투스 케실리우스와 백인대장 4명이 전사했다고 밝혔다. 한편, 아프라니우스는 고지에 새로운 요새를 세우고 수비대를 그곳에 남겼다.

4.2. 카이사르의 위기

6월 29일, 갑작스런 폭풍으로 인해 홍수가 발생했고, 목조 다리 2개가 파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시코리스 강을 건널 수 없게 되면서, 일레르다 시 인근에 주둔한 본군과 강 건너편에 남겨진 부대 간의 통신로와 보급로가 끊어졌다. 반면에, 일레르다 인근의 석조 다리는 홍수를 버텨냈기에, 옵티마테스군은 강을 마음대로 건널 수 있었다. 게다가 아프라니우스는 카이사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각지로부터 물자를 뜯어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현지에서 물자를 조달할 길이 막막했다.

카이사르는 어떻게든 다리를 재건하려 했지만, 적군이 노동자들을 향해 원거리 무기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에 공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얼마 후 갈리아 아키텐에서 파견된 6천 명의 보급 호송대가 강 지류를 건너 카이사르에 접근했지만, 아프라니우스는 기병과 3개 군단을 이끌고 이들을 급습했다. 카이사르는 즉시 기병대를 파견해 이들을 구하고 본진으로 후퇴하게 했으나, 그 과정에서 200명의 궁수, 일부 기병이 전사했으며, 다수의 보급품들이 적군에게 탈취당했다.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승리가 눈앞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로마에 이 사실을 널리 알렸다. 이로 인해 키케로를 비롯한 많은 이가 카이사르는 곧 끝장날 거라 여기고 폼페이우스에게 달려갔다. 실제로 카이사르 진영의 보급품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기아의 기미가 감돌았기 때문에, 이대로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활로를 뚫기로 마음먹었다.

4.3. 전세 역전

7월 9일, 홍수가 발생한 지 10일만에 강의 수위가 줄어들자, 카이사르는 강을 건너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다리 공사를 실시하면 적이 또다시 훼방을 놓을 거라 보고, 브리타니아 원정 때 경험을 살려 병사들에게 몇 척의 배를 비밀리에 건조하게 했다. 이 배의 용골과 프레임은 가벼운 목재로 제작되었고, 나머지 선체는 버들로 만들어졌으며, 바닥은 가죽으로 덮였다.

배가 완성되자, 카이사르는 야밤에 마차에 실어서 자신의 진영에서 30km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그 후 일부 병력을 배에 실어서 맞은편 강둑으로 보냈고, 그곳을 요새화하고자 근처 언덕을 점령했다. 그 뒤 강을 건넌 병사들에게 다리를 건설하게 하고, 아직 강을 건너지 않은 병사들에게 맞은 편에서 역시 다리를 건설하게 했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건설한 결과, 불과 이틀만에 다리가 완공되었다. 그 후 옛 숙영지를 지키던 부대와 성공적으로 접촉하면서, 보급로가 연결되었다. 카이사르는 뒤이어 기병대에게 도처에 흩어져 보급품을 모으고 있넌 적 식량 공출대를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기병대는 적병 다수를 사살했고, 소, 말, 식량 등 상당한 양의 전리품을 진영으로 가져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옵티마테스군의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식량을 공공연히 수집할 수 없었고, 밤에 몰래 사람을 보내 가져와야 했다. 여기에 마실리아 해상을 봉쇄하고 있던 데키무스 브루투스타우로엔토 해전에서 마실리아-옵티마테스 연합 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카이사르군의 사기가 치솟았다.

현지 주민들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카이사르가 이길 거라 판단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말과 소 등을 바쳤다. 옵티마테스군에 소속된 보조병 일부도 진영을 탈영해 카이사르에 가담했다. 또한 카이사르는 시코리스 강의 물길을 돌리는 공사를 시행해, 적이 물을 구하는 것까지 방해했다. 전황이 이렇듯 악화되자,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켈티베리아인들의 영역으로 후퇴하기로 했다.

4.4. 옵티마테스군의 항복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장병들에게 그들의 진영에서 20마일 떨어진 옥토게사(오늘날 메키넨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2개 군단을 맞은편 강둑으로 수송한 뒤 12피트(3.5m)의 방벽을 세워 수비를 강화한 후, 2개 코호트에게 옛 숙영지를 지키게 한 후 야밤을 틈타 본군을 이끌고 시코리스 강을 건너 반대편 강둑에 있는 2개 군단과 합류했다. 카이사르는 정찹병들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기병대를 투입하여 적의 행군을 지연시키게 했다. 갈리아와 게르만 족으로 구성된 기병대는 적군 주위를 맴돌며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했고, 옵티마테스군은 이에 대응하느라 진군 속도가 끔찍하게 느려졌다.

장병들이 "저러다 적이 도망칠 수도 있으니 어서 쫓아가서 섬멸해버리자!"라고 요구하자, 카이사르는 이를 받아들여 1개 군단에게 진영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5개 군단을 이끌고 추격했다. 그들은 매우 신속하게 행군해 적군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결국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인근 고지에 숙영지를 세워야 했고, 카이사르는 맞은 편 고지에 숙영지를 세웠다. 카이사르는 모든 보급로와 수로를 차단했고, 옵티마테스군은 먹을 것과 마실 물이 떨어져서 몹시 곤궁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카이사르의 병사들이 몰래 군영에 들어와서 접촉하면서, 아군이 전의를 잃고 카이사르에게 귀순하려 한다는 게 밝혀지자, 아프라니우스는 모든 희망을 잃고 항복하려 했다. 페트레이우스는 이에 불복하여 군대를 소집하여 폼페이우스를 위해 끝까지 싸우라는 내용의 연설을 해 군기를 다잡고, 군영에 들어온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보이는 대로 모조리 죽이게 했다. 그렇게 해서 군심을 다잡았지만, 이대로 있다간 굶어죽을 거라는 걸 잘 알았던 그는 행군을 재개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 기병대가 그들의 행군을 훼방놓았고, 카이사르가 먼저 파견한 별동대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적 별동대를 강행 돌파하여 행군을 이어갈 지, 자신들을 쫓는 적 본대와 대대적인 전투를 벌일 지, 아니면 숙영지를 다시 세울 지를 놓고 고민했다. 첫 번째의 경우, 적 별동대가 좁고 험준한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수적 우세를 제대로 살릴 수 없었고, 그 사이에 적 본대가 들이닥친다면 포위섬멸될 수 있었다. 두 번째의 경우, 8년간의 갈리아 전쟁으로 대단한 전투력을 갖춘 데다 사기도 충천한 적을 상대로 기아와 갈증에 시달리는 아군이 승리할 가망은 희박했다. 결국 그들은 세 번째 선택을 하기로 하고, 고지에 다시 진영을 세웠다.

그 후 카이사르는 적진 주변에 도랑을 파고 방벽을 설치해 적군이 빠져나올 틈이 없게 했다. 결국 아프라니우스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항복 의사를 밝혔고, 페트레이우스도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그리하여 기원전 49년 8월 2일 적의 항복을 받아낸 카이사르는 자비를 베풀어 아프라니우스, 페트레이우스에게 거취의 자유를 주었고, 두 사람은 에페이로스로 달려가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또한 카이사르에 맞섰던 장병들 역시 별다른 위해를 받지 않고 귀가했다. 그 후 카이사르군이 먼 히스파니아 속주로 진군하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2개 군단을 소집하여 맞서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카이사르와 싸울 의지가 없자 결국 항복했고, 카이사르의 사면을 받고 카시눔의 시골 별장으로 이주하여 문학 작품 집필에 몰두했다. 이리하여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평정에 성공하고, 마실리아로 돌아가서 그들의 항복도 받아낸 뒤, 이탈리아로 귀환 후 발칸 반도로 건너가 폼페이우스와 일전을 벌일 준비에 착수한다.


[1]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레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