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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귀부인 코르넬리아 킨나 Cornelia cinna | |
{{{#fecd21 출생}}} | 미상 |
로마 공화국 로마 | |
{{{#fecd21 사망}}} | 기원전 68년 |
로마 공화국 로마 | |
{{{#fecd21 지위}}} | 파트리키 |
{{{#fecd21 국가}}} | 로마 공화국 |
{{{#fecd21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아버지) 안니아(어머니)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형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남편) 율리아(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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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귀부인.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첫번째 아내다.2. 행적
고대 로마의 가장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 중 하나인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며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이끄는 옵티마테스파에 대적했던 포풀라레스파의 지도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안니아의 딸이다. 남자 형제로 기원전 44년 법무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있었다.기원전 84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로마 최고의 사제직 중 하나인 플라멘 디알리스[1]에 내정할 정도로 카이사르를 눈여겨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카이사르와 결혼했다. 카이사르는 일전에 부모의 뜻에 따라 에퀴테스 신분이며 매우 부유한 집안 출신인 코수티아와 약혼했지만[2], 킨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코수티아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기원전 81년 술라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독재관에 취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살생부를 작성해 포풀라레스파를 대대적으로 축청했다. 이때 술라는 카이사르 역시 숙청 대상으로 고려했지만, 19살에 불과한 카이사르를 동정한 여러 사람의 만류를 받자 카이사르에게 코르넬리아와 이혼한다면 봐주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했고,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뜻을 굽하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이렇게 나온 것은 딸 율리아를 낳아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기도 했지만, 자신의 집안이 마리우스와 깊은 관련이 있고 민중이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음을 직감하고 술라에게 굴복하지 않기로 다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술라는 이런 카이사르의 태도에 화가 나 코르넬리아의 지참금을 몰수해 국고에 넣고 카이사르의 사제직을 박탈하는 등 여러 불이익을 가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자신이 곧 숙청될 것을 직감하고 이탈리아를 탈출해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술라는 카이사르를 선처해달라는 여러 인사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카이사르를 용서해줬고, 카이사르는 술라가 죽은 뒤 본토로 귀환했다.
기원전 68년, 코르넬리아는 남편이 재무관을 역임하고 있던 때에 사망했다. 카이사르는 일전에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내이며 자신의 고모였던 율리아의 장례식 연설에서 마리우스의 후계자이자 민중의 대표자로서 책무를 완수하겠다고 선언해 민중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은 바 있었다. 카이사르는 아내의 장례식 역시 사회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로마 역사에서 젊은 여인을 위해 그런 장례식을 베푼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고모의 장례식에서 마리우스를 내세웠던 것처럼 아내의 장례식에서 킨나의 상징을 행렬에 포함시켰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