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3 06:06:27

8군단 아우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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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삼두정치,(로마 공화정의 삼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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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3. 도나우 전선 군단4. 라인 전선 군단5. 최후의 로마군

1. 개요

Legio VIII Augusta. 상징은 황소. 갈리아 전쟁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고,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도나우 전선에 배치되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기원전 59년 갈리아 전쟁을 준비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들은 갈리아로 집단 이주하던 헬베티족과의 전쟁에 참여했고, 뒤이어 게르만계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와 맞붙은 보주 전투에서도 참여해 결정적인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57년 카이사르의 벨가이 원정에도 참여했으며, 사비스 전투 당시 11군단 클라우디아와 함께 중앙 대열을 맡아 비로만두이족을 격파해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에도 카이사르가 8년간 갈리아 전쟁에서 치른 전투에 대부분 참전했다. 특히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알레시아 성내와 포위망 외곽에서 동시에 협공해오는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굳건히 버텨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고, '갈리카(Gallica, 갈리아 군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를 따라 이탈리아로 남하해 로마에 처음으로 입성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발칸 원정에 동행했고, 디라키움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뒤이은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전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휘하에서 9군단 히스파나와 함께 좌익 대열을 맡아 아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캄파니아에 정착했다가 기원전 47~46년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고, 기원전 46년 4월 6일 탑수스 전투 당시 9군단과 함께 좌익을 맡아서 승리에 일조했다. 그 후 카실리눔 일대의 토지를 부여받고 그곳에 정착했다. 그러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기원전 44년 가을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7군단과 함께 재소집되었고, 기원전 43년 무티나 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대적했다. 이후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되자 삼두파에 속한 군대의 일원이 되었고,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해방자파 군대를 격파했다.

기원전 41년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옥타비아누스 편에 서서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대적해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시칠리아를 점령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 맞서 시칠리아 내전을 단행했을 때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미비해서 분명하지 않다. 또한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도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역시 분명하지 않다. 내전이 끝난 뒤에는 포룸 일리이(현재 프랑스 프레쥐스)에 식민도시를 세우고 정착했다.

3. 도나우 전선 군단

8군단은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마우레타니아 지방에 이전되었고, 서기 6년에 발발한 일리리아 대반란 진압 작전에 투입되어 반란이 수그러든 직후인 9년에 본부를 포에토비움(현재 슬로베니아 프투이)로 이전했다. 그들은 이 무렵에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또한 그들의 이름이 찍힌 타일이 일리리쿰의 부르눔에도 있었던 것을 볼 때 적어도 한 부대는 그곳에 별도로 주둔했을 가능성이 높다.

14년 아우구스투스가 붕어했고 티베리우스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판노니아 사령관 유니우스 블라이수스는 부하들에게 숙영지에서 휴식을 취하게 했다. 당시 장병들은 고된 훈련과 노역에 시달리고 있는데 급여는 매우 적다며 불만이 가득했다. 이때 군단병인 페르켄니우스가 동료 군단병들을 모아놓고 낮은 급여와 군역의 어려움에 대해 논하면서, "새 황제가 등극한 지금이 우리의 처지를 호소할 절호의 기회다"라고 설득해 호응을 얻어냈다. 8군단은 판노니아 전선에 함께 주둔한 9군단 히스파나 , 15군단 아폴로나리스와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티베리우스는 아들 소 드루수스를 파견해 군단병들을 설득하게 했다. 드루수스는 숙영지에 도착한 뒤 반란군의 갖은 협박과 모욕에 시달렸고, 숙영지 내부에 감금되다시피했다. 그러던중 월식이 발생하자, 드루수스는 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인망 높은 백인대장들을 은밀히 만나 이들을 설득했고,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이들과 면담 직후, 기본적인 질서마저 사라진 군단의 군율부터 재정비하기로 했다. 이후 백인대장들을 월식에 두려워하는 병사들에게 보내 달이 사라진 건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의 가족을 잡아가뒀기 때문이라고 알려주게 했다. 이에 설득된 병사들은 드루수스를 좀더 정중하게 대했고, 드루수스는 그들의 불만 사항을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해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 후 페르켄니우스 등 반란을 주동한 자들은 긴급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드루수스는 아직도 반란을 지속하려는 군단병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46년 또는 47년에 클라우디우스 1세에 의해 모이시아 속주의 노바에(현재 불가리아 스비슈토프)로 이전했으며, 일부 분견대가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에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5~49년 보스포로스 왕국의 국왕 미트리다테스 3세를 응징하는 원정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네로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 사르마티아 계열 유목 민족과 다키아를 상대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고, 이 시기에 주조된 동전에서는 8군단이 네로 황제로부터 Bis augusta("두번째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사실이 기재되었다.

네로 황제 사후 네 황제의 해가 발발했을 때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편에 섰다. 이후 다른 도나우 전선군과 함께 오토를 돕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내세운 라인 전선군이 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오토를 격파하고 오토가 자결하면서 실패했다. 비텔리우스는 8군단을 포함한 도나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크레모나 시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강제 투입시켰다.

이에 원한을 품은 채 도나우 전선으로 돌아간 그들은 유대 반란 진압을 도맡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며 반기를 들었다. 7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도나우 전선군을 규합하여 이탈리아로 진격해 69년 10월 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라인 군단병들을 격파하고 크레모나를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로마로 진격해 그해 12월 시가전 끝에 로마를 공략하고 비텔리우스를 처단함으로써 복수를 마무리했다.

4. 라인 전선 군단

70년 바타비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진한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휘하에 배속된 뒤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의 아르겐토라툼(현재 독일 스트라스부르)에서 라인강의 전략적 교차점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이들은 라인 전선군으로 배속되었고, 74년에 라인강 중류에서 도나우 상류까지의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아르겐토라툼에서 '검은 숲'을 통과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이후 도미티아누스 치세 때 검은 숲 일대를 공략하고 새로 정복한 영토를 위협하는 차티 족에 맞섰다.

187년 마테르누스라는 인물이 몇몇 죄수들을 탈옥시킨 뒤 강도단을 조직했다. 이후 여러 군단의 탈영병들이 이들에 가담하여 각지를 약탈했다. 이에 8군단이 출동해 이들을 격파했고, 콤모두스 황제로부터 피아 피데스 콘스탄스 콤모다(Pia Fidelis Constans Commoda, 충실하고 충성스럽고 신뢰할 수 있고 유용하다)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92년 콤모두스가 암살된 후, 이 칭호는 삭제되었다.

193년 다섯 황제의 해가 발발했을 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지지했고, 세베루스가 1차 파르티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참전했다. 197년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세베루스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을 때, 세베루스는 8군단의 분견대들에게 갈리아의 핵심 도시 중 하나인 리옹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했다. 213년 카라칼라알레만니를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다. 이때 원정에 동원된 군단으로는 3군단 이탈리카, 22군단 프리미게니아, 그리고 8군단이었다.

233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하는 원정을 단행할 때 8군단을 동원했다. 그러는 사이 알레만니족은 8군단이 주둔했던 라인강 중류 전선을 돌파하여 각지를 약탈했다. 235년 로마군은 보복 원정에 착수했는데, 8군단은 최선두에 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도중에 부하들에게 살해되었지만, 후임 황제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대혼란기에 휘말리면서 검은 숲 일대에 대한 방위력이 극도로 떨어졌고, 알레만니는 이때를 틈타 이 지역을 공략했다. 결국 로마군은 도나우 전선과 라인강 사이의 이 일대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8군단은 여전히 라인강 전선을 경비했다.

갈리에누스 황제와 포스투무스가 내전을 벌이던 시기에 다른 게르마니아 수페이오르 속주 군단들이 포스투무스를 지지했을 때 그들은 갈리에누스를 지지했기에 신실하고 충실하다는 의미의 Pia fidelis 칭호를 수여받았다. 8군단은 사두정치 시기 에도 라인 전선을 여전히 방위했으며, 8군단의 여러 분견대는 막시미아누스의 아프리카 원정에 동행했다. 8군단은 4세기에도 여전히 아르겐토라툼을 본부로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인강 상류의 바트추르차흐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이들이 371년에 아르겐토라툼에서 토목 공사를 벌였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357년 율리아누스아르겐토라툼 전투를 치렀을 때 이들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이 미비해서 불확실하다.

5. 최후의 로마군

4세기 말,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는 제국의 본토인 이탈리아를 게르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라인 전선에 주둔해 있던 로마군을 이탈리아로 소환했다. 이때 8군단도 이탈리아로 이동했을 것이다. 로마 제국의 직위 목록인 노티타 디그니타툼(Notitia Dignitatum)에 따르면, '옥타비아니 부대'가 이탈리아 방위를 맡았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부대가 8군단 아우구스타에 소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들은 475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탈리아를 이민족으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