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4 19:25:50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고대 로마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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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PQR_sign.png 로마 공화국 알리아 전투 파일:faction_emblem_senones_256.png 갈리아족(세노네스족)
삼니움 전쟁 파일:Samnites_league_mon_256.png 삼니움족
피로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7.png 에페이로스 왕국
제1차 포에니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제2차 포에니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셀레우코스 제국
마그네시아 전투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셀레우코스 제국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피드나 전투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루시타니아 전쟁 파일:external/a352ddf511b96cba04fbaa172c0df140c9cb8c8ae188ad8ddda8a5c3a3eae004.png 루시타니 부족연합
누만티아 전쟁 파일:external/b66a81d7e3c5440cfef450e3309a2b4b425f1dcd788e510bd84b747e2e2573be.png 아레바키족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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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아 전쟁 파일:akaian_league_mon_256.png 아카이아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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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파일:SoundCloud82837371853.jpg 아르메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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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파르티아 제국
제2차 유대-로마 전쟁 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유대 반란군
제3차 유대-로마 전쟁 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유대 반란군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파르티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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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곶 해전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Vandal_flag.png 반달 왕국 }}}}}}}}}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
영어: claudius invasion of britain
파일: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jpg
시기 43년 ~ 60년
장소 브리타니아
교전 세력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제국브리튼인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클라우디우스 1세
파일:attachment/mon_256.png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파일:attachment/mon_256.png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퀸투스 베라니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1] 호시디우스 게타
파일:attachment/mon_256.png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토고둠누스†
카라타쿠스
결과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남동부 확보.

1. 개요2. 배경3. 경과

[clearfix]

1. 개요

서기 43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1세가 군사적인 위업을 달성하고, 갈리아 3개 속주들과 히스파니아 북부 일대의 치안 및 드루이드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명령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2. 배경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전쟁을 치르던 중 기원전 55년기원전 54년브리타니아를 잇따라 침공한 이래, 로마인들은 브리타니아에 상당한 관심을 두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이루지 못한 브리타니아 정복을 이루고, 북부 갈리아 내 켈트족이 브리타니아를 활용해 벌인 반 로마 움직임을 제압해 안정적으로 로마 지배권을 강화하려면 반드시 브리타니아 섬이 로마의 손아귀에 들어와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갈리아 시찰 중 이 문제들에 관해 제대로 파악해, 아그리파의 게르만족 격퇴 작전 직후 라인 강 너머의 게르만족과 갈리아 내부의 반 로마적인 켈트 족 제어 모두를 위해, 세 차례(기원전 34년, 기원전 27년, 기원전 25년)에 걸쳐 브리타니아 원정을 기획했다. 그러나 첫 번째 원정 계획과 세 번째 원정 계획은 히스파니아, 북부 갈리아 등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중단되었고, 두 번째 원정 계획은 아그리파의 게르만족 격퇴 작전 성공과 오늘날 벨기에, 프랑스 파리 일대에서 벌어진 켈트족 독립운동이 진압된 직후 위기를 느낀 브리타니아 부족 지도자들이 전쟁을 피하고자 공물과 인질을 보내면서 흐지부지됐다.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에 따르면, 둠노벨라누스와 틴코마루스가 로마로 찾아와 막대한 공물을 바치면서 로마 제국에 따르겠으니 침략하지 말아달라며 간청했다고 한다.

이후 브리타니아 부족들은 로마 제국에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치고 갈리아와 무역 거래를 이어갔으며, 로마 제국은 게르마니아 전쟁, 일리리아 대반란, 티베리우스 황제의 카프리 섬 은둔과 간신 세야누스의 대숙청으로 인한 정치 혼란 등 일련의 사건을 겪느라 브리타니아 공략을 추진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서기 30~40년대 브리타니아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일면서, 로마는 이 섬에 관심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카투벨라우니족의 지도자였던 쿠노벨리누스가 트리노반테스족의 수도인 카물로두눔(오늘날 콜체스터)를 공략하고, 브리타니아 남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또한 그의 아들인 카라타쿠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트레바테스족 등 친 로마파 부족들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었다. 이에 견디다 못한 부족들이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다. 브리타니아의 정세가 혼란에 빠지면서 살길이 막막해진 이들이 해적으로 변해 갈리아 해안가를 종종 약탈했다.

서기 38년 초, 다시금 갈리아 북부 일대가 브리타니아의 혼란한 정세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갈리아 북부에서 기근이 돌고, 브리타니아 내 상황하에서 드루이드 문제가 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갈리아 내륙까지 스며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황제인 칼리굴라는 자신의 지위 강화, 군사적 업적에 대한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39년 갈리아의 루그두눔(리옹)으로 향했다. 이는 갈리아에 보낸 기근 마차의 운용 및 감독을 하고, 불안한 정국속에서 황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이 돌파구를 마련하면서 로마군의 충성을 확인하고자 한 목적도 있었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루그두눔에서 겨울을 보내며, 갈리아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는 39년 9월 포착된 반란 움직임 때문에 서둘러 동쪽의 게르마니아로 향했다. 그는 게르마니아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고 갈바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내세워 첫 번째 전투를 애매한 승리로 마무리했다. 이때 칼리굴라는 로마군과 레누스(라인) 강 일대의 장병들로부터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를 병사들의 자발적인 외침 속에서 선사받았다.

이후 칼리굴라는 삼촌인 클라우디우스를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 및 황실 식구들과 함께 서진했다. 서기 40년 지난해 게르마니아 원정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걸 만회함과 동시에 직접 갈리아 북부에서 브리타니아 일대를 시찰하고 군사적인 기동을 하기 위함이었다. 즉 로마 제국의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준비였다. 그렇지만 칼리굴라는 모종의 이유로 여러 제장들과의 논의 끝에 원정을 포기했다. 그가 한 일은 훗날 브리타니아 원정에 착수하기 전의 일을 대비해 보노니아(불로뉴)에 등대만 건설한 일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19세기부터 꾸준히 의심받았고, 수에토니우스가 의도적으로 musculi 등의 몇 몇 단어를 조개 같은 단어로 바꿔서 왜곡, 전달했다는 것이 확인된 터라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브리타니아의 코 앞에서 병사들에게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주우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이라는 의견과 바다를 두려워하는 병사들이 항명을 저지른 걸 반역죄로 처벌하는 대신 조개줍기로 모욕을 주었다는 의견, 언제 작전이 실행될지 몰라 대기하던 병사들이 대기 기간 중 부업삼아 조개껍질을 주워 석회 제조인에게 팔려고 한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1990년대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이때 로마군의 브리타니아 원정 준비를 지시했고, 등대를 세우면서 만든 기념비의 내용은 칼리굴라가 태어난 딸을 축복하고,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이들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며, 함께 온 삼촌 클라우디우스와 그 자녀들에게도 위엄이 있다는 축원비인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와 함께 칼리굴라는 등대 등을 세우면서, 이곳을 병참기지로 삼아 갈리아 북부의 치안과 드루이드교 문제, 브리타니아인들의 갈리아 월경 등을 해소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는 그가 갈리아의 루그두눔에서 겨울을 나던 해에, 브리타니아 원정에 필요한 2개 군단을 새롭게 창설하면서, 공성무기를 만들도록 지시할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주목하면서 분석했는데 클라우디우스 1세의 즉위 이후, 로마군의 브리타니아 원정과 병참 운용이 생각 이상으로 빨랐던 이유가 밝혀졌다.

즉, 조개껍데기 줍기라는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진 상황 속에서, 기존의 반박 중 바다를 두려워하는 병사들이 항명을 저지른 걸 반역죄로 처벌하는 대신 조개줍기로 모욕을 주었다는 의견, 언제 작전이 실행될지 몰라 대기하던 병사들이 대기 기간 중 부업삼아 조개껍질을 주워 석회 제조인에게 팔려고 한 것이라는 의견 등 역시 일정 부분 해결이 된 셈이다. 그렇지만 당시 칼리굴라는 그를 따라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돌아다닌 로마군의 장군들 및 원로원 의원들이 브리타니아 원정을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40년 5월 로마로 귀환했다. 다만, 그 귀환에 앞서, 칼리굴라는 브리타니아의 카투벨라우니족과 갈리아 북부에서 전투를 치루고, 아드미니우스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어쨌든 로마 제국은 칼리굴라의 진두 지휘하에서 공성무기 제작, 군량 확보, 브리타니아 일대의 우호세력 확보 등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 문제들을 해결했다. 하지만 브리타니아 원정의 필요성이 분명하고 황제, 군부, 원로원 모두 이를 이루고 싶어했어도, 당시 상황은 원정을 감행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1년도 못 된,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 황제가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의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장병 20명에 의해 암살당했다. 뒤이어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 1세는 칼리굴라의 또 다른 근위대장인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를 위시한 프라이토리아니 9개 대대 전원과 함께 죽은 조카를 위한 복수를 외쳤다. 그는 전직 법무관 베스파시아누스 등을 앞세워, 성난 게르만족 경호대와 군중 무리가 더 이상 원로원 인사들을 살해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후, 24시간도 안 되어 원로원의 공화정 복구 움직임과 로마 안에서 자신과 황실을 향해 벌어진 모든 반란을 손쉽게 제압했다.

제4대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1세는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평생 절었고, 고개가 자주 흔들렸으며 간혹 침을 질질 흘렸고, 왼쪽 팔에도 문제가 있는 등 신체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제위 계승 서열에서 밀렸고, 원로원 귀족들로부터는 경멸과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지적 능력이 탁월했고 존경하는 조부인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를 본받겠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하루도 안 되어 칼리굴라 암살 사건 직후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잠재우고, 암살 배후인 원로원을 제압해 곧 원로원 물갈이를 한 직후 클라우디우스 1세는 조카의 생전부터 화두가 된 갈리아 안정 및 브리타니아 내 드루이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칼리굴라 정부 아래에서 황숙으로서 젊은 황제의 조력자였고, 서기 40년 브리타니아 원정 당시 황실의 어른이자 정부의 인사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현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조부였던 아우구스투스처럼 군사적인 열망과 뚜렷한 군공에 목 말라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아버지 대 드루수스, 형인 게르마니쿠스와 비슷한 군공을 세우고 싶어 했다. 조카인 칼리굴라가 그랬듯이 브리타니아 원정을 시도한다는 것은 성공만 하면, 여전히 불안한 '프린키파투스'(원수정)의 안정을 가져올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하여 그는 선제 칼리굴라가 앞서 추진하려 했지만 못했던 브리타니아 원정을 성사시키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하여 43년, 로마군은 본격적으로 브리타니아 원정에 착수했다.

3. 경과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 1세는 카라타쿠스에 의해 축출된 아테르바테스의 족장 베리카를 왕위에 복귀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브리타니아 원정을 명령했다. 원정에 동원된 병력은 4개 군단[2] 2만 명에 비슷한 수의 보조병이었고, 지휘관은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였다. 원정에 참여한 군단 중 제2 아우구스타 군단은 훗날 황제가 될 베스파시아누스가 지휘한 군단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보노니아(불로뉴)에서 출항하여 브리타니아 남부 해안에 상륙했다. 상륙 지점이 어디었는지는 설이 분분하다. 대규모 천연 항구가 있으며 로마군의 군사 시설이 발굴된 리처버러(Richborough)라는 설이 우세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디오 카시우스가 로마인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을 남긴 것을 들며
"불로뉴에서 리처버러로 항해하려면 남북 이동을 포함해야 하니 맞지 않다."
라면서 베리카가 과거에 통치하던 지역인 노비오마구스(오늘날 치체스터) 또는 사우스햄튼 인근에 상륙했다고 주장한다.

카투벨라우니 족장 카라타쿠스와 형제인 토고둠누스는 메드웨이 강변의 로체스터 부근에서 로마군과 맞닥뜨렸다. 양군은 이틀 동안 교전했다. 이 전투에서 군단장 가이우스(또는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가 생포될 뻔했지만 부하들의 분전으로 구출되었고, 로마군이 우월한 전투력을 앞세워 대승을 거두었다. 토고둠누스는 전사했고, 카라타쿠스는 템스 강쪽으로 후퇴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에식스 부근에서 카투벨라우니족을 다수 살육했다. 이후 총사령관 플라우티우스는 공세를 중단한 뒤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마지막 공세를 이끄는 데 합류해달라고 요청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플라우티우스는 토고둠누스가 전사한 것에 분노한 브리튼인이 대대적인 복수를 할 걸 우려해서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반면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 1세가 단 한 번도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채 브리튼인에게 항복을 받아냈다고 기록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클라우디우스 1세가 제국의 먼 지역에서 전투 코끼리를 가져왔으며, 토착민들의 반란을 막을 만한 중무기도 가지고 왔다고 서술했다. 황제가 도착하자, 브리타니아 남동부의 부족들을 이끌던 11명의 지도자들이 황제에게 귀순했다. 한편 카라타쿠스는 브리간테스(오늘날 요크셔)의 땅으로 도망쳤으나, 브리간트 여왕 카르티만두아는 그를 쇠사슬로 묶고 로마군에게 넘겨줬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카라타쿠스를 수도 로마로 압송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런데 이 개선식때 황후인 발레리아 메살리나가 실제 전쟁에 참전해 승리를 거둔 황제, 장군, 병사들을 들러리로 세우면서 마치 자기가 주인공인마냥 대놓고 설치고 다녀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고 한다.

카라타쿠스는 개선식 때 전리품 취급을 받았고, 개선식이 끝나면 처형될 예정이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는 죽기 전에 할 말이 있다며 연설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고, 원로원이 받아들이자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한다.
"내 휘하의 귀족과 재산의 정도가 적당히 많았다면, 나는 포로가 아니라 친구로서 이 도시에 왔을 것이고, 당신은 훌륭한 선조에게서 나고 명령을 내리는 나라와 평화조약을 맺는 것을 경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현재의 운명은 나에게 있어 가장 변덕스럽습니다. 나는 말, 사람, 무기, 그리고 재산을 가졌습니다. 내가 그것들을 잃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당신들의 노예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정말 당연한 겁니까? 내가 지금 당장 항복하여 넘겨졌다면, 내 재산도, 당신들의 영광도 빛날 수 없었을 겁니다. 저를 어떻게 보복하든지 곧 잊혀질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저를 안전하고 건전하게 보호해주신다면, 저는 당신들의 관대함의 영원한 모범이 될 것입니다."
타키투스는 클라우디우스 1세가 이 연설에 감명을 받아 카라타쿠스를 사면하고 로마에서 평화롭게 살게 해줬다고 기술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타쿠스는 해방된 후 로마 시의 번영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듯 거대하고 아름다운 재산을 갖고 있는 당신들이 어째서 우리의 가난한 오두막을 탐냈습니까?"
한편 베리카는 아테르바테스족의 족장으로 복귀했지만 너무 늙어 얼마 안 가 사망했고, 코기두브누스가 그의 뒤를 이었다. 그는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이름을 본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코기두브누스'로 개명했고, 로마 제국의 동맹 부족장으로서 통치했다.

서기 44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제2 아우구스타 군단이 브리타니아 서부로 진군하여 부족들을 복종시키고 여러 마을을 함락시켰다. 그의 행군은 엑서터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제9 히스파니아 군단은 북쪽으로 이동했고, 4년간의 공세 끝에 험버에서 세번 강까지 이르는 일대를 공략했다. 47년 말, 브리타니아의 신임 총독이었던 푸블리우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는 현재의 웨일스와 체셔 평원에 정착한 부족들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웨일스 남동부에 기반을 둔 메기족은 끈질기게 대항했고, 스카풀라는 끝내 이들을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다. 스카풀라가 죽은 뒤 새로운 총독이 된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는 메기족을 복종시켰으나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다. 이는 클라우디우스 1세가 소모전을 더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54년 클라우디우스 1세가 독살된 뒤, 제5대 황제가 된 네로는 브리타니아 원정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소아시아의 호전적인 부족들을 처리한 경험이 있는 퀸투스 베라니우스가 새 총독을 맡아 웨일스 일대를 평정했고, 뒤를 이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서기 60년 모나(현재 앵글시)섬의 드루이드 성지를 파괴했다. 그러나 61년 부디카가 일명 부디카의 난으로 알려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로만 브리튼은 붕괴 위기에 직면하였다.


[1] 또는 그나이우스[2] 제2 아우구스타 군단, 제4 히스파니아 군단, 제14 게르마니아 군단,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