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23:45:44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고대 로마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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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700> 시대 전쟁 · 전투 교전국
파일:SPQR_sign.png 로마 공화국 알리아 전투 파일:faction_emblem_senones_256.png 갈리아족(세노네스족)
삼니움 전쟁 파일:Samnites_league_mon_256.png 삼니움족
피로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7.png 에페이로스 왕국
제1차 포에니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제2차 포에니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셀레우코스 제국
마그네시아 전투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셀레우코스 제국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피드나 전투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루시타니아 전쟁 파일:external/a352ddf511b96cba04fbaa172c0df140c9cb8c8ae188ad8ddda8a5c3a3eae004.png 루시타니 부족연합
누만티아 전쟁 파일:external/b66a81d7e3c5440cfef450e3309a2b4b425f1dcd788e510bd84b747e2e2573be.png 아레바키족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제3차 포에니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아카이아 전쟁 파일:akaian_league_mon_256.png 아카이아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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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파일:SoundCloud82837371853.jpg 아르메니아 왕국
갈리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1.png 갈리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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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파르티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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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콜라의 칼레도니아 침공 파일:faction_emblem_caledonii_256.png 칼레도니아
다키아 전쟁 파일:external/fd15abaec08ab5409f08c461582b21f1ce6d6e2258ae9a42432e4e47e0469e8a.png 다키아 왕국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파르티아 제국
제2차 유대-로마 전쟁 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유대 반란군
제3차 유대-로마 전쟁 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유대 반란군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파르티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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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의 칼레도니아 침공 파일:faction_emblem_caledonii_256.png 칼레도니아
니시비스 전투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파르티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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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재통합 전쟁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Visigoth_flag.png 고트족, 파일:faction_emblem_gallicrome_256.png 갈리아 제국, 파일:faction_emblem_palmyrene_256.png 팔미라 제국,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Vandal_flag.png 반달족,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사산 왕조, 알레만니족, 유퉁기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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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Visigoth_flag.png 게르만족(고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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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라우눔 전투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Hun_flag.png 훈족
본 곶 해전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Vandal_flag.png 반달 왕국 }}}}}}}}}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영어: Julian's Persian expedition
파일:율리아누스의 사산 원정.png
시기 363년 3~7월
장소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서부 이란
원인 사산 왕조를 꺾어 동방 전선을 안정시키고, 황권을 확고히 다지려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야망
교전 세력 파일:attachment/mon_256.png 콘스탄티누스 왕조 로마 제국
파일:1920px-Standard_of_the_Arshakuni_Arsacid_dynasty_svg.jpg 아르샤쿠니 왕조 아르메니아 왕국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사산 왕조 페르시아(이란) 제국
아랍 연맹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율리아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요비아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프로코피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플라비우스 아린테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다갈레이푸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네비타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킬리아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세바스티아누스
파일:1920px-Standard_of_the_Arshakuni_Arsacid_dynasty_svg.jpg 아르사케스 2세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호르미즈드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샤푸르 2세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아르다시르 2세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피그라네스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나르세우스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수레나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메레나†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노오다레스†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포도사케스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마메르시데스
병력 로마군 95,000명
아르메니아군 25,000명
함선 1,100 척
불명
피해 불명불명
결과 사산 왕조의 승리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순조로운 출발3.2. 악화되는 전황3.3. 후속 조치
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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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363년 3~7월,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제4대 황제인 율리아누스가 통치하는 로마 제국아르샤쿠니 왕조 아르메니아 왕국의 연합군이 제10대 샤한샤였던 샤푸르 2세가 다스리는 사산 왕조 이란(페르시아) 제국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사산 왕조의 샤푸르 2세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로마 제국을 상대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2. 배경

서기 298년, 로마 제국의 동방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사탈라 전투에서 나르세스 1세를 격파하고 샤한샤의 가족들을 붙잡은 뒤 여세를 몰아 사산 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공략했다. 한때 아르메니아 왕국을 석권하고 로마 제국을 몰아붙였던 나르세스 1세는 이제 로마군과 싸울 방도가 더 이상 없다고 판단한 후 평화협약을 맺기를 갈망했다. 로마 제국의 동방 정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크테시폰을 돌려주고 가족들을 나르세스 1세에게 보내주는 대신, 아르메니아 왕국과 이베리아 왕국이 로마 제국의 속국임을 인정하고 티그라노케르타, 사이르드, 마티로폴리스, 발라레사, 목소스, 다우디아, 아르잔 등 티그리스 강 너머의 메소포티미아 상류 지대까지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귀속하는 데 동의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나르세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이렇게 니시비스 평화협약이 체결된 뒤, 사산 왕조는 40여 년간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이후 제10대 샤한샤에 오른 샤푸르 2세는 로마 제국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337년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하면서 로마 제국이 어수선해지자, 샤푸르 2세는 40년간 이어진 평화를 깨고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단행했다. 그의 군대는 로마령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아르메니아를 타격한 뒤 싱가라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이후 니시비스(오늘날 튀르키예의 누사이빈) 공략을 338년, 346년, 350년에 시도했으나 매번 격퇴당했다.

샤푸르 2세는 아랍족과 백훈족(에프탈)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둘 정도로 군사적인 재능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유독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오랫동안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로마 제국의 동방 정제였던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제3대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군사적인 재능은 떨어졌지만 군대의 기강을 확고히 잡고, 반역의 기미가 보이는 자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면서도, 전선을 늘 순시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때부터 다져진 요새 방어망에서 누수가 발생하지 않게끔 관리 감독을 철저히 했다. 그러면서도 싱가라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야전에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이러니 샤푸르 2세가 아무리 공세를 퍼부어도 요새 몇 개 함락하느라 막대한 손실만 입다가 동방에서 유목민족의 침략을 받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서기 350년 세 번째로 니시비스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을 때, 동방에서 백훈족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샤푸르 2세는 로마와의 무익한 전쟁을 중단하고 북동쪽 전선에서 쳐들어오는 이민족을 상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정한 후, 휴전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 역시 서게르만계 알레만니족, 프랑크족, 콰디족, 이란계 사르마티아인 등의 침략에 맞서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싶었기에, 휴전을 받아들였다.

이후 샤푸르 2세는 동생인 아르다시르 2세의 도움을 받으며 7년간 백훈족과 맞붙었다. 그 결과, 357년 백훈족을 완전히 몰아내고 쿠샨-사산 왕국 국경을 안정시켰다. 이후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복귀한 샤푸르 2세는 359년 최전방의 요새도시인 아미다를 포위하여 73일간 이어진 공성전 끝에 함락시켰다.(아미다 공방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막심한 손실을 봐야 했고[1], 360년 싱가라와 베자브두를 추가로 공략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결국 점령한 지역에 수비대를 남긴 뒤 본국으로 철수해야 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사산 왕조의 침략에 보복하고자 대규모 병력을 동방 전선에 집결시켰다. 그러면서 갈리아에서 게르만족, 특히 알레만니족을 상대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었던 서방 부제(카이사르) 율리아누스에게 부대(1,000명)당 정예 300명을 차출하고, 야만족 용병 4개 부대와 부제의 근위대에서도 인원을 차출해서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는 전 병력의 절반을 달라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무리한 요구였다. 게다가 차출 대상이 된 병사들이 동방으로 가기를 거부했다. 율리아누스는 이들을 설득하려다가 정제(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되자, 이참에 어렸을 때 일가족을 살해하고(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자신을 유폐시켰으며, 이복형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까지 죽여버렸던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었다.

서방 부제 율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샤푸르 2세와 평화협약을 맺은 뒤 발칸 반도로 진군하려고 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신속히 도나우(다뉴브, 다누비우스) 강 전선으로 달려가서 그곳에 주둔한 정예병들을 포섭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던 중 중병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두자,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유일한 후계자인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숨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의 유일한 집권자로서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제4대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의 분열을 조장하고, 로마 다신교를 지원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사산 왕조에 대한 원정을 재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율리아누스는 사산 왕조를 굴복시켜서 불후의 명성을 얻기를 갈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단 율리아누스 개인의 욕망만이 대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동방 전선을 지속적으로 침략하는 사산 왕조를 결정적으로 꺾어놓지 않는다면, 동방의 안전은 보장받지 못할 터였다. 율리아누스는 막강한 방어력을 갖춘 요새를 세우고, 수성에 전념했던 선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수비적인 방어 전략에서 벗어나 공세적인 방어 전략을 수립해 사산 왕조가 침략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고자 했다. 또,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반기를 들어서 황제가 된 것이 율리아누스 정권의 아킬레스건이었고, 기독교 분열 조장 정책으로 인한 반발도 심했기에, 이를 만회하고 황제의 권위를 확고히 다지려면 사산 왕조를 성공적으로 정벌해야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율리아누스는 집권 2년 째인 363년 3월 동방 원정을 감행했다.

3. 전개

3.1. 순조로운 출발

율리아누스는 95,000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로마군을 시리아 속주에 집결시켰고, 아르샤쿠니 왕조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 아르사케스 2세로부터 25,000명의 병력을 지원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율리아누스는 본대를 페르시아 국경에 집중시키고, 프로코피우스와 세바스티아누스에게 30,000명의 병력을 맡겼다. 이 두 사람의 분대는 아르메니아로 이동하여 아르사케스 2세의 아르메니아군과 합세한 뒤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남하하도록 했다. 여기에 1,000척에 달하는 수송 함대를 준비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에서 보급물자를 싣고 육군 행렬을 따라가게 했다. 한편, 율리아누스는 40여 년전 로마 제국에 망명했던 샤푸르 2세의 동생인 호르미즈드를 부대 사령관으로 세워서 대 페르시아 원정에 동행하도록 했다.

363년 3월 5일, 율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하여 곧 국경 지대의 여러 요새에 주둔한 부대들과 합세한 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다. 3월 27일 칼리니크(현재의 시리아 라카)에 도착한 그는 유프라테스 강의 왼쪽 둑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아누스는 수송선 1,000척, 군함 50척, 안내에 적합한 페리선 50척이 유르파테스 강에서 로마 군대를 따라 항해했다고 기록했다. 반면 조시무스에 따르면, 600척의 목조 선박과 50척의 전함, 500척의 페리선이 있었으며, 식량과 공성 장치, 배를 운반하는 다른 많은 선박을 합해 총 1,150척에 달하는 대함대가 원정에 동원되었다고 서술했다.

로마군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계속 이동하면서 키르쿠시, 자이트, 다라를 지나갔다. 그해 4월 초, 로마군은 유프라테스 강의 왼쪽 지류인 아보루(현재의 하부르) 강을 건넜다. 이때 율리아누스는 군대가 모두 건넌 뒤 건설했던 다리를 모조리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이는 병사들이 원정을 달성하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을 꿈에도 하지 말라는 것을 병사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후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에 들어선 로마군은 전투 대형을 편성한 뒤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로마군의 행렬은 10마일(15km)에 걸쳐 뻗어 있었고, 전방과 측면에는 1,500명의 기병과 경보병대가 행진했다. 함대는 강을 따라 육군에 평행하게 나아갔다.

4월 중순, 로마군은 유프라테스 강 한 가운데에 있는 섬에 세워진 아나파 요새를 만났다. 호르미즈드가 요새 수비대에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항복하라고 요청하자, 수비대는 성문을 열고 백기를 들었다. 수비대 사령관 푸세이에게는 호민관 계급이 주어졌고, 아나파 시민들은 시리아로 이송되었으며, 도시는 파괴되었다. 이후 율리아누스의 군대는 계속 전진하면서 진로에 있는 모든 농지를 황폐화시켰다. 다음 요새는 틸루타와 아하야할라였다. 두 요새 모두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바위섬에 있었고, 아나파와는 달리 당장 항복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샤푸르 2세와 로마군 중 승자의 편에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율리아누스는 두 요새를 공격하다가 시간을 낭비하느니 공세를 계속 이어가기로 하고 두 요새를 지나쳤다.

며칠 후, 로마군과 페르시아-아랍 분견대 간의 첫 번째 교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로마군이 승리했고, 뒤이어 강력한 요새인 피리사보르에 접근했다. 포위된 지 며칠 후, 피리사보르 수비대는 항복 의사를 타전했다. 그 결과 수비대 사령관 마메르시데스와 2,500명의 페르시아군이 항복했고, 피리사보르 요새는 약탈된 후 불태워졌다. 로마군은 이렇듯 순조로운 원정을 이어나갔으나, 사산 왕조의 기병들이 끈질기게 기습하고, 반격이 들어오기 전에 도피하기를 반복해서 로마군의 피로는 갈수록 가중되었다. 로마군은 뒤이어 마요살마하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요새는 며칠간 로마군의 맹공을 견뎌냈지만, 로마군이 터널을 만들어 성곽을 관통하는 바람에 결국 함락되었다.(마요살마하 공방전) 요새를 지키는 장병들 중 80명 만이 살아남았고, 율리아누스는 이들을 풀어줬다. 또한 이 요새에 처음 들어온 전사들은 로마군의 월계관 중 가장 높이 취급받는 공성 화환을 수여받았다.

마요살말하 요새를 점령하고 파괴한 후, 로마군은 사산 왕조 기병대의 연이은 습격으로 손실을 입으면서도 묵묵히 남쪽으로 이동했다. 셀레우키아에 도착한 뒤 2일 동안 휴식을 취한 후, 과거 트라야누스 황제가 파르티아 원정 당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를 잇는 운하를 파려다가 중단한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재차 공사를 추진했다가 이내 중단한 후 말라버린 운하에 도착했다. 이제 로마군은 사산 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3.2. 악화되는 전황

363년 5월 말 운하에 도착한 로마군은 운하 건너편에 페르시아군이 집결해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빅토르 등 여러 장군들은 운하를 섣불리 건너지 말고 아르메니아에서 남하하고 있을 프로코피우스와 세바스티아누스를 기다리자고 제안했지만, 율리아누스 황제는 시간을 끌지 말고 당장 운하를 건너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로마군은 운하를 건넜고, 크테시폰 성벽 아래에서 로마군과 사산군 사이에 대규모 회전이 벌어졌다.(크테시폰 전투)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사산군의 지휘관은 수레나, 나르세우스, 피그라네스 등 3명이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사산군의 손실은 2,500명이었던 반면에 로마군은 70명에 불과했다고 하며, 사산군은 전투가 불리해지자 크테시폰 성벽 뒤로 후퇴했다.

이후 율리아누스는 회의를 소집해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를 포위할 지, 아니면 도시와 인접한 지역을 파괴하고 흩어진 적군을 분쇄할 지를 논의했다. 크테시폰은 트라야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갈레리우스 황제들에 의해 연이어 함락당했지만, 이제는 그때에 비해 강력한 요새들에 둘러싸여서 공략하기 힘들었다. 율리아누스는 고심 끝에 후자를 택하기로 마음먹고, 크테시폰 인근 지역을 며칠 동안 약탈하여 식량을 보충했다. 그런데 그는 돌연 결정을 바꿨다. 크테시폰을 내버려두고 페르시아 제국 깊숙이 더 진격하기로 한 것이다. 장수들은 그렇게 하면 전군이 위험해질 수 있다며 뜯어말렸지만, 율리아누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로마군이 크테시폰을 지나쳐 내륙 지대로 행진할 기미를 보이자, 사산군은 로마군이 지나갈 지역의 마을, 농경지, 스텝 지역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로마군은 음식과 사료를 구할 길이 없는 황량한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여기에 프로코피우스와 세바스티아누스가 50일이 지나도록 올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내륙 지대로 행군한지 20일 만에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율리아누스는 6월 16일 다시 회의를 소집한 뒤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르메니아 왕 아르사케스 2세와 프로코피우스, 세바스티아누스와 합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함대는 전부 파괴하고 단지 12척의 배만 분리해서 수레에 싣게 했다. 로마군이 방향을 틀어 북상하자, 사산군은 즉시 추격하여 그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로마군은 티그리스 강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 상류 지역인 코르두에나로 이동했다. 사산군은 기나긴 종대로 늘어선 로마군을 반복적으로 공격했다. 이에 율리아누스는 기동대를 결성한 뒤 마랑가에서 메레나의 지휘를 받는 사산군 기병대를 요격했다.(마랑가 전투)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사산군이 더 많은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적을 당분간 주춤하게 만든 뒤, 로마군은 계속 이동했다. 하지만 사산군은 이내 원기를 회복하고 로마군을 끈질기게 추격해 낙오병들을 사냥하고 로마군의 후미와 측면을 요격했다.

그러던 363년 6월 26일, 사마라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 진영에 사산군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적이 급습했다는 소식을 접한 율리아누스 황제는 병사들을 얼른 지휘하기 위해 갑옷을 챙겨입지도 않고, 말에 올라 타서 병사들을 지휘했다. 로마군은 황제의 지휘에 사기가 크게 올라 사산군을 몰아붙였고, 사산군의 지휘관인 메레나가 전사했다. 율리아누스는 도주하는 사산군을 향해 말을 몰아 추격했다. 그 때, 어딘가에서 창이 날아와 그의 복부를 깊숙이 찔렀다. 그후 천막으로 후송된 율리아누스는 개인 주치의이자 친구였던 오리바시우스의 극진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숨을 거두었다.(사마라 전투) 이로써 파란만장했던 콘스탄티누스 왕조[2]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3.3. 후속 조치

율리아누스 황제가 허망하게 사망한 다음날인 6월 27일, 근위대장이었던 요비아누스가 새 황제로 선출되었다. 로마군은 코르두에나 방향으로 계속 후퇴해 7월 1일 수메라와 하르카 지역을 통과하여 티그리스 강둑에 위치한 두라에 도착했다. 그러나 샤푸르 2세가 친히 이끄는 사산조 페르시아 대군에 포위되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고, 식량도 보충할 수 없어서 자칫했다간 전멸할 위기에 직면했다.

요비아누스는 샤푸르 2세에게 퇴로를 열어달라고 애원했고, 샤푸르 2세는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신, 일찍이 로마 제국이 뜯어간 모든 영토를 돌려주고, 아르메니아가 사산 왕조의 영도하에 있는 걸 용인하라고 요구했다. 요비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인질을 교환했다. 그리하여 율리아누스의 사산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두라 평화협정)

4. 이후

요비아누스 황제는 굴욕적인 평화협약을 맺은 뒤 귀국길에 올랐다가 몇 개월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관료들은 장시간 논의한 끝에 요비아누스의 장인을 따라 갈리아로 갔다가 그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요비아누스 황제의 장인은 죽고 자신은 간신히 살아남아 안키라에 돌아온 발렌티니아누스를 새 황제로 세우기로 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자신이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니케아로 달려왔다. 앞서 율리아누스 황제와 요비아누스 황제의 잇따른 죽음을 목격한 병사들은 새 황제에게 공동황제를 지명할 것을 요구했고,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자신의 친동생인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하여 동방을 맡기고, 자신은 서방을 맡기로 했다. 이로써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개막되었다.

한편, 샤푸르 2세는 새로 확보한 도시들에서 로마인들을 추방하고, 페르시아인들을 빈 도시에 정착시켰다. 니시비스와 수사를 복구하고, 새 도시인 에란샤흐르 샤푸르(Eranshahr-Shapur)를 건설해 로마군 포로들을 그곳에서 살게 했다. 요비아누스 황제로부터 영도권을 인정받은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해 아르메니아 국왕 아르사케스 2세를 붙잡았고, 이베리아를 침략했으며 아르사케스 2세의 아들이었던 파파스를 367년 무렵에 아르토게라사 요새에서 포위했다. 이듬해(368년) 봄, 파파스는 요새를 탈출하여 마르키아노폴리스에서 고트족과 맞붙고 있었던 발렌스 황제와 합류했다. 고트족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 발렌스는 파파스를 아르메니아의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휘하 장군인 아인타이우스를 파견했다. 아인타이우스는 무사히 임무를 수행해 파파스를 아르메니아 국왕으로 세울 수 있었다.

그러자 샤푸르 2세가 재차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파파스를 축출했고, 파파스는 일단 탈출했다가 370년에 훨씬 더 많은 로마군의 호위를 받으며 아르메니아에 돌아와 다시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371년) 봄, 로마군은 이베리아를 되찾고 아르메니아를 수비하기 위해 테렌티우스 장군의 지휘를 받는 더 많은 군대를 아르메니아로 파견했다.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군과 로마군은 아르메니아에서 맞붙었으나 371년 로마군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샤푸르 2세가 페르시아의 동쪽 국경 지대를 침략한 이민족들을 막으러 바쁜 덕분에 5년 동안 전쟁이 중단되었다.

그런데 로마군에 의해 아르메니아의 국왕이 된 파파스가 아르메니아 주교 나르스를 처형하고, 에데사를 포함한 로마인이 거주하는 여러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는 등 고압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에 분노한 발렌스는 그가 로마를 배신하고 사산조 페르시아와 손잡을 것을 우려해 암살하려고 했다. 타프수스에 유인해서 죽이려는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374년 또는 375년 테렌티우스 장군이 파파스를 연회에 초대한 후 시해했다. 이후 발렌스 황제는 아르메니아의 새 국왕으로 바라다테스를 선임했다.

376년, 발렌스는 동방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해 사산조 페르시아와 일전을 벌이려고 했다. 그런데 앞서 발칸 반도로의 이민을 허락받았던 고트족이 거주 지역 내 로마인 관료들의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발렌스는 급히 샤푸르 2세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샤푸르 2세 역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동방 전선에 자꾸 쳐들어오는 유목민족을 처리해야 했던 터라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계속 할 수 없어 받아들였다. 이후 발렌스는 고트족과 맞붙었지만, 378년 8월 9일에 벌어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했고, 로마 제국은 이때부터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 고대 기록에 따르면, 100,000명에 달하는 페르시아 대군 중 30,000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2] 또는 신 플라비우스 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