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센과 페터르의 난 영어: Uprising of Asen and Peter 불가리아어: Въстание на Асен и Петър | ||
시기 | 1185년 ~ 1201년 | |
장소 | 발칸반도 | |
원인 | 불가리아 제1제국의 부활을 꾀하는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의 봉기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 [[불가리아 제2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이사키오스 2세 알렉시오스 3세 요안니스 두카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 두카스 알렉시오스 기도스 바실리오스 바티치스 알렉시오스 아스피에티스◎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마누일 카미치스◎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이반 아센 1세| ]]† [[틀:깃발| ]][[틀:깃발| ]][[칼로얀| ]] [[틀:깃발| ]][[틀:깃발| ]][[이반코|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도브로미르 크리소스 | ]][[틀:깃발| ]][[페터르 4세|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불가리아 제2제국의 대두와 동로마 제국의 몰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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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85년 ~ 1201년, 페터르 4세, 이반 아센 1세, 칼로얀 형제가 동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불가리아를 부활시키기 위해 일으킨 반란. 불가리아 제2제국이 이 전쟁을 통해 대두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2. 배경
1018년, 동로마 제국은 42년간 이어진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불가리아 제1제국을 정복하고 다뉴브 강 이남의 발칸 반도 패권을 완전하게 확보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인들이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하도록 노력했다. 불가리아 왕족과 귀족, 종교 지도자들을 정중하게 대우했으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불가리아 속주 주민들이 세금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세금을 인하하고 곡물로 현물 납부할 수 있도록 하였고,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대주교를 황제가 서임하게 된 것 외에는 건드리지 않아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불가리아의 남은 군대를 그대로 제국 불가리아 테마병들로 편입하였는데, 이 병력은 제국이 불가리아를 제압하는데 소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치로 추산된다.바실리오스 2세의 이같은 조치 덕분에, 불가리아인들은 동로마 제국에 순순히 복종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 사후 후임 황제들이 외적과의 전쟁과 내정 관리를 명목삼아 불가리아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징병, 징용을 반복하면서, 제국에 대한 불가리아인들의 반감은 갈수록 증폭되었다. 그들은 페터르 데얀과 콘스탄틴 보딘을 앞세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했지만 모조리 진압되었다.
그러던 1180년대, 이사키오스 2세는 발칸 반도로 쳐들어온 시칠리아 왕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불가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장정들을 징집했으며, 심지어 새로 황후를 맞아들인 뒤 결혼 축의금을 마련하라는 명분으로 특별세를 부과했다. 이에 타르노보 인근에 사유지를 경영하고 있던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1185년 킵셀라에 있던 이사키오스 2세에게 세금 경감과 자치권, 그리고 세금을 내는 데 필요한 수도원 수입을 받기 위해 하이모스 산 근교의 토지를 하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요청은 거부당했고, 이사키오스 2세의 삼촌인 요안니스 두카스는 아센의 얼굴을 때리며 요구가 너무 무례하다고 꾸짖었다.
아센 형제는 메시아로 돌아간 뒤 반란을 꾀했지만, 동료들은 쉽사리 그들을 따라 제국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1185년 여름, 살로니카의 성 디미터르의 이콘이 터르노보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성 디미터르가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을 해방하라는 신의 뜻을 받들어 오랫동안 지고 있던 멍에를 벗었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선동했다.이에 가혹한 징세에 시달리던 민중이 호응하면서, 불가리아 제국의 부활을 꾀하는 대규모 반란이 발발했다.
3. 전개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군중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킨 뒤, 불가리아 제1제국의 수도였던 프리슬라프에는 상당 규모의 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타르노보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토도르는 차르만이 사용하던 휘장을 채택하고 페터르 1세의 후계자로 자처하면서 페터르 4세로 자칭했고, 아센 역시 이반 아센 1세로 칭했다. 그 후 형제는 각지를 빠르게 공략해 1186년 봄 무렵에 불가리아 북부 전역을 석권했으며 트라키아 일대를 약탈했다. 또한 프리슬라프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이사키오스 2세는 1186년 여름 친히 대군을 일으켜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형제는 산악 지형에 의지하여 동로마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1186년 4월 21일 일식이 찾아와서 어둠이 완전히 깔린 틈을 타, 동로마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 반란군을 격파했다. 형제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도나우 강 이북으로 도망쳤고, 이사키오스 2세는 성 디미터르의 이콘을 페터르의 집에서 획득해 반란의 명분마저 박탈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아직 잔당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정도면 다 이겼다고 여기고 승리를 자축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형제는 쿠만족의 원조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뒤 1186년 가을 도나우 강을 건너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던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이전의 영토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모이시아 전역까지 장악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요안니스 두카스에게 진압을 명했고, 요안니스는 반란군을 상대로 벌인 몇차례의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황제로부터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지휘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칸타쿠지노스는 어느 산채를 포위했다가 반군의 급습을 받아 참패당했고, 페터르와 아센은 그의 예복을 노획한 뒤 대중에 전시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칸타쿠제노스를 경질한 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로부터 황제로 추대받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다. 황제의 2번째 처남인 콘라드 1세가 브라나스를 전사시키면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그 사이에 입지를 확고히 다져놨다. 그 후 양측은 몇 차례 접전을 치렀지만 전황에 큰 영향은 없었다. 결국 이사키오스 2세는 1187년 페터르와 평화 협정을 체결해 불가리아 제국을 사실상 인정했다.
1187년 10월, 살라흐 앗 딘이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에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추진되었고, 118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가 비협조로 나오면서, 양자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동로마 제국을 협공하자고 제의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이를 심각하게 고려했지만, 예루살렘을 탈환하러 가는데 동로마 제국과 쓸데없이 싸울 이유는 없다고 판단하고 거절했다.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가 아나톨리아로 건너간 뒤, 이사키오스 2세는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1190년 7월, 황제는 함대를 도나우 강 하류에 파견하여 쿠만족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한 뒤 타르노보를 포위했다. 그러나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적이 올 것을 예상하고 요새 수비를 강화해뒀다. 황제는 요새 공략을 좀처럼 달성하지 못하다가 9월에 쿠만족이 도나우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로 귀환하기로 했다.
이반 아센 1세는 트랴브나 협곡에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그는 적 선봉대가 협곡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둔 뒤, 본대가 협곡에 완전히 들어섰을 때 급습했다.(트랴브나 전투) 동로마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 보고 괴멸되었고, 이사키오스 2세는 군대와 자금, 황제관과 황복을 죄다 내팽개치고 몇몇 측근만 대동한 채 도주했다. 페터르와 아센은 이사키오스 2세의 왕관과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유물을 포함한 '황제 휘장'을 대중에 전시했다.
이후 아센 형제는 쿠만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잇달아 공격하여 바르나와 포모리를 약탈하고 트리아디사를 파괴했으며, 불가리아의 성인인 이반 릴스키의 유물을 확보했다. 1192년, 이사키오스 2세는 사촌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 두카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트라키아에서 불가리아 약탈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진압되어 실명형에 처해졌다.
아센 형제는 1192년 통치하에 있던 영토를 분할하기로 했다. 페터르는 북동부 지역을 받고 프리슬라프에 수도를 세웠고, 아센은 나머지 지역을 관할하여 타르노보에 정부를 꾸렸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는 페터르를 동생에게 끌려다니는 자로 묘사하고, 아센을 무모하고 완고한 반란자로 지칭했다. 이로 볼 때 페터르는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려 했지만 아센이 전쟁을 지속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193년, 아센은 형 페터르와 함께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기도스와 바실리오스 바티치스를 파견했지만, 형제는 이들을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섬멸하고 폴로브디프를 포함한 트라키아의 일부 지역을 공략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트라키아를 되찾기 위해 킵셀라에서 군대를 모집했으나, 1195년 4월 8일 형 알렉시오스 3세에게 체포되어 실명형에 처해졌다. 알렉시오스 3세는 페터르와 아센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형제는 거부했다.
아센은 동로마 제국으로 진격하여 알렉시오스 아스피에티스를 격파하여 생포한 뒤 스트루마 강 연안의 요새를 공략했다.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이들을 물리치려 했지만, 아센은 쿠만군과 함께 세르스 인근에서 격파했다. 이때 쿠만족이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를 생포하자, 아센은 포로를 넘겨주라고 명령했다. 이에 쿠만족 지휘관 보야르 이반코는 반감을 품었다.
당대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는 이후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전한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이반코에게 딸을 시집보낼 테니 아센을 죽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이반코가 아센의 아내의 여동생과 성관계를 맺다가 발각당하자, 이반코가 죽임을 당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1196년 가을 이반코가 아센을 타르노보에서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반코는 동로마 제국의 새 황제 알렉시오스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황제는 마누일 카미치스를 파견했다. 그러나 군중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를 수습하느라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고, 페터르는 그 사이에 타르노보로 쳐들어갔다. 이반코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고, 페터르는 타르노보에 입성하여 반란 주동자들을 숙청한 뒤 동생 칼로얀을 새 지배자로 세운 후 프리슬라프로 돌아갔다.
1197년, 페터르는 동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그는 귀족 한 명의 칼에 찔러 죽었다고 한다. 반면 이스트반 바사리는 페터르가 폭동을 진압하던 중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 그 후 불가리아 제국의 단독 차르가 된 칼로얀은 두 형의 잇따른 죽음으로 혼란해진 정국을 재빨리 수습했다. 이후 트라키아를 연이어 습격하여 동로마 제국에 타격을 입혔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협상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1197년 봄, 알렉시오스 3세는 스트루미카와 프로세크 인근에서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의 조카인 도브로미르 크리소스에 대항하는 원정을 벌였다. 하지만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자, 황제는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고 마누일 카미치스의 딸을 크리소스와 결혼시키게 했다. 당시 마누일 카미치스의 딸은 유부녀였지만, 이혼을 강요당하고 크리스소와 억지로 재결합했다고 한다.
알렉시오스 3세는 칼로얀을 견제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에 망명한 이반코를 필리포폴리스의 사령관으로 삼았다. 이반코는 로도피 산맥의 두 요새를 점령했지만, 1198년 칼로얀의 회유를 받아들여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마누일 카미치스가 이를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사로잡혔고, 이반코는 마누일을 타르노보로 보냈다. 칼로얀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몸값을 보내라고 요구했고, 마누일 카미치스 역시 황제에게 몸값을 달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거부당했다. 그렇게 약 1년간 포로 생활을 보낸 끝에, 사위 도브로미르 크리소스에 의지하여 몸값을 마련해 겨우 풀려났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이 이반코의 반란에 신경을 집중하는 사이, 칼로얀은 1199년 봄과 가을에 쿠만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브라니체보, 벨버즈드, 스코페, 프리즈렌 등을 공략했다.
1200년, 알렉시오스 3세는 이반코에게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이반코는 젊은 약혼자를 보내고 자신의 영역을 인정할 것이며, 황제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고 성경에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사위 알렉시오스 팔레올로고스와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를 파견했다. 이반코는 협약을 논의하기 위해 그들을 만나러 갔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1201년 3월, 칼로얀은 쿠만족과 함께 콘스탄티아를 파괴하고 바르나를 함락시켰다. 한편, 사위 덕분에 겨우 풀려난 마누일 카미치스는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사위가 지불한 몸값을 대신 갚아달라고 청했지만, 황제는 역시 거절했다. 이에 격노한 마누일은 칼로얀의 지원하에 사위 크리소스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쳐들어가서 펠라고니아와 프릴레프를 점령했다. 이후 크리소스는 프릴레프에 남았고, 카미치스는 테살리아로 진격했다. 이로 인해 제국이 혼란에 빠진 사이, 레온 스구로스가 펠로폰네소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마케도니아 동부의 스몰레나 테마 총독이었던 요안니스 스피리도나키스도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시오스 3세는 우선 스피리도나키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1201년 가을 카미치스의 난을 진압하러 출진했다. 그는 크리소스와 접촉해 손녀 테오도라를 아내로 삼게 해주겠다고 제의했고, 크리소스는 곧 이에 동의하여 카미치스와 관계를 끊고 펠라고니아와 프릴레프를 넘겨줬다. 이에 동시에 환관인 요안니스 오이노폴리티스는 테살리아로 가서 카미치스에게 신분을 원상 회복하게 해줄 테니 귀순하라고 제안했다. 카미치스가 거절하자, 알렉시오스 3세는 친히 테살리아를 침공했다. 카미치스는 이에 맞섰으나 패배했고, 스타노스 요새로 피신했지만 곧 함락당하자 불가리아로 도망쳤다. 그 후 쿠만족이 철수하자, 칼로얀은 알렉시오스 3세와 평화협정을 맺고 그해 말 트라키아에서 철수했다. 이리하여 양국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