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0c0ff,#2f2f52> 니시비스 전투 Battle of Nisibis | ||
▲미리 뿌려놓은 마름쇠에 당한 파르티아군의 카타프락토이를 로마군이 공격하고 있다. | ||
시기 | 서기 217년 | |
장소 | 메소포타미아 마르딘 주 누사이빈 | |
원인 | 카라칼라 황제의 침공에 대한 파르티아의 설욕. | |
교전국 | 로마 제국 | 파르티아 제국 |
지휘관 | 마크리누스 | 아르타바노스 4세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 사상자 다수 | 사상자 다수 |
결과 | 로마 제국의 패배. | |
영향 | 로마-파르티아 전쟁 종결.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의 멸망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이란) 제국의 대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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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시비스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있는 도시 이름으로, 현 튀르키예의 누사이빈(Nusaybin)이다. 로마 제국과 이란계 제국[1] 사이의 국경지대이자 군사, 교역상의 요충지였으므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적이 몇 번 있었다.[2] 다만 본 항목에서는 AD 217년의 전투를 설명하고자 한다.서기 217년 니시비스 근교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로마 황제 마크리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파르티아의 샤한샤 아르더번/아르타바누스 4세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이 맞붙은 전투로서, 기원전 57년부터 이어진 로마-파르티아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였다. 양측 군대가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결국 이렇다 할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평화협상으로 마무리되었다.
2. 배경
210년대 초반, 로마군에게 수 차례 패배하고 중앙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국력이 점점 쇠락해지던 파르티아 제국은 샤한샤(왕중왕) 발라쉬/볼로가세스 5세가 죽은 뒤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전이 한창이었다. 볼로가세스 5세의 장남이었던 볼로가세스 6세가 샤한샤가 되었지만, 그의 아우인 아르타바노스 4세가 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와중에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 혹은 과대망상이 심한 - 세베루스 왕조 로마 제국의 젊은 황제인 카라칼라가 파르티아를 공격할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친형제에게 점점 밀리고 있는데다가 강대국인 로마와 맞설 방도조차 없었던 볼로가세스 6세는 카라칼라의 이런저런 요구들을 모두 들어주면서 최대한 대 로마 전쟁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216년 볼로가세스 6세는 아르타바누스 4세와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목숨은 살아 도망쳤지만 제국의 주도권은 아르타바노스 4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를 보고 동방 정벌의 기회(?)를 포착한 카라칼라는 파르티아로 쳐들어가서는 아르타바노스 4세에게 그 딸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즉 결혼 동맹을 제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타바노스 4세는 이 제안을 거절했고 카라칼라는 이를 빌미로 전쟁을 선포했다. 여기서 아르타바노스 4세가 카라칼라의 제안에 동의하여 결혼식을 주선했다가, 매복한 로마군의 습격으로 신부의 들러리를 섰던 파르티아측 인사들이 대거 죽어나가고, 그가 가까스로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카라칼라를 폭군으로 단죄하는 과정에서 지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카라칼라가 이끄는 로마군은 메디아의 넓은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아디아베네 왕국의 수도인 아르벨라에 도달했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217년 초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근위병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후 아르타바노스 4세가 반격하면서 니시비스 전투가 발발했다.
3. 전투
세세한 장비나 편제 따위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로마군과 파르티아군의 기본 개념은 카르헤 전투 이래 수백 년 동안 크게 바뀌지 않았다. 즉 로마군은 군단병을 중심으로 보조병을 활용하는 중보병 위주의 군대였고, 파르티아군은 카타프락토이와 다수의 경무장 궁기병을 중심으로 한 기병 군대였다. 니시비스 전투에서 맞붙은 양측 군대 역시 이 원칙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로마군은 기본적 대형, 즉 중앙에 군단병을 배치하고 양익에 기병과 보조병을 배치했다. 대신 중보병 대대 사이에 경보병들을 배치하여 치고 빠지는 전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양측 군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 제국의 최고 지도자들이 대규모의 전면전을 벌인 것이고, 로마 제국은 보통 동방 전선에 8개 군단 48,000명을 배치하며 절반 정도의 군단병이 전쟁이 터지면 출전하는 식이었고, 여기에 보조병을 모집하여 지원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최소 30,000명에서 최대 40,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파르티아군의 규모는 중장기병만 따지면 얼마 되지 않으나 실제로는 징집된 보병이 엄청난 규모였고, 보통 로마군을 상대로 2배 정도의 병력을 동원했으므로 도합 8~100,000명 정도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니시비스 전투는 파르티아군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궁기병들이 화살을 퍼붓는 사이 카타프락토이와 낙타 기병들이 정면 돌격을 위해 접근했고, 로마군은 이에 경무장 보조병들을 전방에 배치하여 응수했다. 이들은 쏟아지는 화살 공격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계속 전진하다가 카타프락토이의 돌격이 임박했을 때 재빨리 마름쇠를 뿌린 후 경상자들을 데리고 후퇴하여, 카타프락토이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마름쇠에 걸린 파르티아 기병들이 여기저기서 넘어지고 심지어 마름쇠에 찔려 죽기까지 하자, 로마군은 바로 보병들을 투입해 낙마한 파르티아군 기병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에 파르티아군은 일단 잔존 병력을 후퇴시킨 뒤 우월한 기동력을 활용하여 로마군의 측면을 공격했고, 로마군은 이에 맞서 전통적인 보병 대열을 포기한 후 궁수와 기병을 동원해서 막고 보병은 전열을 얇고 길게 퍼뜨려 대항하는 한편, 계속 마름쇠를 뿌려서 파르티아군의 진격 속도를 늦췄다.
이후 양측 군대는 특별한 전술적 우위 없이 소모전을 반복했다. 파르티아군이 보병까지 투입하여 공세를 이어나갔으나 숙련도가 낮은 농민 징집병들은 실질적으로 로마군에 피로와 소수의 사상자만 보탰을 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군도 이미 많이 지친데다가 병력면에서는 확연한 열세였고, 또한 파르티아군의 중장기병이 가하는 타격은 피해없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므로[3] 파르티아군보다는 피해가 적긴 했지만 사상자가 계속 나왔고, 피해가 누적되었다. 이렇게 3일 동안 온 들판에 시체가 즐비했다고 할 정도로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반복했으나 좀처럼 서로를 압도하지는 못했다. 이처럼 전투가 고착화되자 마크리누스와 아르타바노스 4세는 둘 다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마크리누스는 제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한시바삐 파르티아 문제를 정리하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다져야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정적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한편 아르타바노스 4세의 경우 파르티아 자체가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봉건 영주들로 이루어진 국가였기 때문에, 아무리 샤한샤라 해도 소득은 없고 피해만 큰 상황에서 군대를 오래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결국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마크리누스였는데, 그는 아르타바노스 4세에게 카라칼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며 점령한 영토들을 포기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4. 이후 경과와 의의
이걸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문제는 마크리누스가 맺은 협정이 사실상 로마군의 패배를 알리는 굴욕적인 협상이다 보니 로마 제국 내에서 반발이 심했다.[4] 특히 마크리누스가 맺은 굴욕적인 강화협상의 내용이 알려지자 그의 인기, 특히 군인들 사이에서의 인기가 급락했다. 그 틈을 타 선제 카라칼라의 이모인 율리아 마이사가 손자인 엘라가발루스를 카라칼라의 핏줄이며 적법한 후계자라고 내세웠다. 결국 엘라가발루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귀족들과 군인들이 모두 지지했고, 마크리누스는 제대로 맞서지도 못한 채 도망치다가 붙잡혀 죽음을 맞았다. 다만 굴욕적인 협상이라 해도 파르티아를 조지는 데는 성공했기 때문인지, 로마는 그 뒤 더 이상 파르티아를 공격하지 않았다.사실상 승리한 쪽인 아르타바노스 4세의 운명 역시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사실 굴욕적인 협상을 해서 그렇지 로마는 이 전쟁에서 파르티아를 거의 거덜냈기 때문에 목표는 확실하게 달성했다. 게다가 들판에 시체가 즐비하다는 서술도 대부분은 파르티아군이었다. 로마군이 중보병 위주로 방어전을 펼쳤고 대열이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중보병 부대는 협상이 굴욕적인(?) 덕택인지는 모르나 무사히 철군해서 전원 방위선에 합류했기 때문에 동방 군단의 대부분이 건재했고, 파르티아군은 엄청난 병력 손실까지 입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영토로 쳐들어갈 여력이 없었다. 이렇게 파르티아의 중앙 권력이 제위 계승 문제와 로마와의 전쟁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사이, 남쪽 파르스 지방의 아나히타 여신 숭배 사제 집안이었던 사산 가문이 점차 주변 지역을 공략하면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아르타바노스 4세는 사산 가문의 바바크(Papak)가 자기 아들인 샤푸르(Shapur)를 파르스 지역의 부왕(副王)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자 이를 거절했고, 샤푸르의 형제인 아르다시르가 왕위에 오르자 후제스탄의 부왕으로 하여금 그를 공격했다. 하지만 아르다시르가 승리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파르스로 쳐들어갔으나, 세 차례의 격전 끝에 결국 역관광을 당하고 전사했다. 이로써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은 멸망하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새로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상의 경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니시비스 전투의 가장 큰 수혜자는 사산 가문과 아르다시르 1세, 엘라가발루스라 봐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로마에 대해 수세적인 입장에 있었던 파르티아와 달리 사산 왕조의 시조인아르다시르 1세와 그의 아들 샤푸르 1세는 적극적인 대 로마 공세에 나섰다.[5] 결국 로마군이 이들을 격퇴하긴 했지만, 에데사 전투에서 엄청난 참패를 당하고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을 당하는 등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물론 사산 왕조 역시 나중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반격으로 대패를 당하고 점령한 로마 제국의 영토들을 다시 토해냈다. 이후에도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 간의 전쟁은 여러 차례 계속되었으며, 무려 7세기까지 이어지다가 둘 다 사이좋게 이슬람 제국에게 짓밟히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아예 멸망하게 되면서 끝이 났다.
하여튼 카라칼라의 공격은 분명 로마 제국의 최대 경쟁자이면서도 공생과 평화적인 해결이 가능했던 파르티아 제국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그 결과 더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좋지 못한 것이었다. 이처럼 장기적이고 대국적인 안목없이 당장의 전과와 승리에만 급급했던 행동이 승리는 고사하고 쌍방 lose-lose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 니시비스 전투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의의일 것이다. 한마디로 승자없는 싸움이었던 셈이다.
[1]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2] 영어 위키백과 기준으로는 다섯 번이었다. # 이에 따르면 교전 내지는 회전(battle)이 다섯 번의 전투 중 처음이자 본 항목의 이 전투였고, 그 뒤의 네 번의 전투는 모두 본 전투의 로마측 승리로 로마령이 된 니시비스를 사산 왕조 페르시아측에서 쳐들어 와 뺏을려고 하고, 이를 로마군이 막으려 하는 공성전 내지는 포위전(siege)이었다.[3] 사료에 기록은 없으나, 실제 파르티아군과 로마군의 전투 양상을 보면 로마군이 병력 30,000명을 동원하면 파르티아군은 중장기병 등 기병 1~20,000명에 징집병 60,000~80,000명을 동원하는 식이었다. 니시비스 전투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4] 특히 로마는 파르티아보다 압도적인 국력을 가졌는데, 이런 협정을 맺은 자체가 정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특히 파르티아를 상대로 로마가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할 수 있었는데도, 정적들을 족친다고 그런거 신경 안 쓰고 했으니, 오히려 정적들에게 마크리누스를 족칠 명분을 제대로 준 셈이었다. 게다가 로마군이 패배했다면 모를까, 카라칼라가 암살당하고 휘하 지휘관들의 수준이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아군에게 끝까지 밀리지 않았으며, 마크리누스가 제위 욕심에 뻘짓만 안 했다면 또 카라칼라가 이미 죽은 뒤이므로 이런 기막힌 협정을 맺을 이유가 없었다.[5] 왜냐하면 봉건제라서 왕권이 매우 약한 파르티아와 달리 사산 왕조는 중앙집권에 꽤 공을 들여 왕권이 파르티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다. 즉,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보다 장기전에서 싸우기에 더 좋은 정치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