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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사이빈

파일:누사이빈 터키 2.jpg
2015-16년 터키군의 군사 작전으로 파괴된 시가지
파일:터키 누사이빈 3.jpg
현재 시가지 전경
누사이빈 (마르딘)
Nusaybin

1. 개요2. 역사
2.1. 상고대2.2. 고대2.3. 로마 제국 VS 이란 제국
2.3.1. 로마 vs 파르티아2.3.2. 로마 vs 사산 제국
2.3.2.1. 3세기의 위기2.3.2.2. 로마 제국의 승리2.3.2.3. 4세기 중반 : 공방전의 연속
2.3.3. 동방 기독교와 학문의 중심지2.3.4. 사산 제국 / 동로마 제국 시대
2.3.4.1. 6세기 전반의 대격돌
2.4. 이슬람 제국기
3. 근대4. 현대 : 쿠르드 갈등

1. 개요

튀르키예어, 영어: Nusaybin
쿠르드어: Nisêbîn
시리아어: ܢܨܝܒܝܢ (느시빈)
아랍어: نُصَيْبِيْن
그리스어: Νίσιβις (니시비스)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고대 도시. 현재 터키와 시리아 국경에 위치한 인구 9만의 터키령 도시 누사이빈이다. 국경 건너편 시리아의 도시 카미실리와 마주보고 있다. 역사적으로 217년 로마 제국파르티아 간의 니시비스 전투로 유명하다. 4-6세기 서아시아 지역 학문의 중심지이던 니시비스 대학이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학생들 중 하나가 네스토리우스이다.

중세까지 실크로드 교역과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거점으로써 중요한 도시였으나 13세기 이후 쇠퇴하여 현재는 그저 그런 소도시이다. 주민들의 대다수는 쿠르드인이다. 2010년대 들어 국경 너머 시리아 내전의 여파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2016년 PKK가 도시를 접수하였고, 이에 터키 정군은 주민 9만 중 6만을 소개시킨 후 공격하여 9월에 점령하였다. 그후 시가지 1/4를 밀어버리곤 아파트를 지어 주민들을 재입주시켰다.

2. 역사

파일:누사이빈 터키.jpg

파일:터키 누사이빈.jpg
성 야곱 (모르 야쿱) 교회 유적

2.1. 상고대

니시비스는 BC 901년에 니시비나라는 아람인의 거주지로 처음 기록되었고 니르아리 2세의 원정으로 BC 896년에 아시리아 제국에게 점령되었다. 그리고 BC 852년에는 시리아 북부 총독령의 치소가 되었다.

BC 608년, 신 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하며 니시비스는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 역시 곧 아케메네스 제국에게 무너지며 BC 536년부터는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2.2. 고대

BC 332년, 니시비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점령되었고 이후 이어진 셀레우코스 왕조 하에서 미그도니아의 안티오키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워졌다. 이후 폴리비우스의 저술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메디아 총독 몰로니우스에 대한 진압을 할 때에 이 도시를 거쳐갔다고 한다. 또다른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니시비스에는 스파르타인의 후예가 거주하였다고 한다.

2.3. 로마 제국 VS 이란 제국

파일:로마 터키 국경.png
4-7세기 로마-페르시아 국경, 중앙부에 다라와 니시비스가 보인다

2.3.1. 로마 vs 파르티아

로마의 장군 루쿨루스아르메니아 왕국 원정 시에 함락된 니시비스는 이후 파르티아의 지배를 받다가 서기 115년,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의 일환으로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곧 이곳에서 철수하였다. 그리고 서기 199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 이후 니시비스는 로마 제국령 북부 메소포타미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카라칼라가 215 - 217년의 파르티아 원정 중에 에데사에서 암살당하고 뒤를 이은 마크리누스 황제가 니시비스 전투 이후의 협상에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포기하여 니시비스는 다시 파르티아령이 되었다(218년).

2.3.2. 로마 vs 사산 제국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26년, 이란 제국은 파르티아로 불리던 아르사케스 왕조에서 아르다시르의 사산 왕조로 교체되었고, 233년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로마 제국과의 대결은 무승부로 끝났다. 그리고 241년, 샤푸르 1세의 이란 군대가 안티오키아까지 공격하자 로마 제국의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섭정이자 장인인 근위대장 티메시테우스가 반격에 나서 243년에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재점령, 니시비스는 다시 로마령이 되었다.
2.3.2.1. 3세기의 위기
그러나 그 해에 티메시테우스는 진중에서 병사하며 부관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신임 근위대장이 되었고, 이듬해인 244년에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마저 암살된 후 즉위한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샤푸르 1세와 강화하고 북부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재차 포기하였다. 259년, 사산 제국샤푸르 1세안티오키아까지 함락하는 기염을 토하였고 이에 로마 제국발레리아누스가 출정하였지만 포로로 잡히며 로마는 시리아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 팔미라의 호족인 오데나투스에게 통치권을 위임하였다. 그러나 오데나투스가 조카에게 살해된 후 그의 아내 제노비아팔미라 제국을 세우며 사실상 독립하였고(267년) 니시비스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듯 하였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272년에 팔미라를 함락하고 시리아를 회복하였지만 다음 황제 타키투스가 276년에 이란 원정 중 사망하였다.
2.3.2.2. 로마 제국의 승리
이후, 프로부스 황제 하에서 일시적인 안정을 회복한 로마는 다시 이란 원정을 나섰지만 도중에 시르미움에서 프로부스가 피살되었다. 이에 근위대장 카루스가 즉위하여 원정을 지속, 283년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점령하였지만 벼락에 맞아 비명횡사하며 로마군은 혼란에 빠졌고, 아들 누메리아누스도 암살되며 경호대장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인솔 하에 다시 후퇴하였다.카루스의 아들 카리누스를 살해하고 로마 황제로 즉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사두정치를 실시하며 자신이 동방의 정제가 되고 부제로 갈레리우스를 앉혔는데, 그가 297년에 나르세스 1세와 대결, 사탈라 전투에서 이란군을 격파하고 북 메소포타미아를 회복하며 니시비스는 다시 로마 제국령이 되었다.
2.3.2.3. 4세기 중반 : 공방전의 연속
312 ~ 324년간의 내전을 끝내고 사두정치를 청산하며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로 즉위한 콘스탄티누스는 337년에 사산 제국의 샤푸르 2세의 공격에 반격하러 가던중 니코메디아에서 병사하였다. 페르시아 군대는 338년, 346년, 그리고 350년에 니시비스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수비대에 매번 격퇴당하였다. 그 후 359년에 샤푸르 2세가 지휘한 사산 제국군이 북 메소포타미아아미다를 함락시켰다. 그러자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갈리아의 부제 율리아누스에게 파병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내전에 들어갔다.

내전은 361년에 그가 병사하고 율리아누스가 즉위하며 평화롭게 끝났다. 니시비스는 360 - 363년간 제1 파르티카 군단의 주둔지였다.율리아누스는 363년에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 크테시폰을 포위하였으나 후발대의 늦은 행군과 청야전술에 막혀 후퇴하던 중 이란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경호대장 요비아누스가 뒤를 이었고 그는 전례대로 사산 제국과 강화를 맺고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포기하였다. 다만 반환 이전에 대부분의 시민은 아미다로 이주되었다.

2.3.3. 동방 기독교와 학문의 중심지

파일:니시비스 터키.jpg
당시 유적

니시비스는 300년 경부터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주교좌가 위치하였고 이후에는 기독교의 대주교좌가 세워져 메소포타미아 북부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350년에는 성 에프렘의 지도 하에 학교가 설립되었다. (니시비스 대학, ܐܣܟܘܠܐ ܕܢܨܝܒܝܢ) 363년에 로마 당국에 의해 에데사로 옮겨졌으나 489년에 네스토리우스파의 박해로 대립을 겪은 후 다시 니시비스로 돌아왔는데, 고대 - 중세 전환기 시리아 지방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2.3.4. 사산 제국 / 동로마 제국 시대

363년 이후 니시비스는 사산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대 로마 전선의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505년에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니시비스로부터 서쪽으로 수키로 떨어진 동로마 제국 동쪽 끝자락에 다라라는 거대 요새를 건설하여 이란의 침공에 맞섰다. 이란 측은 더이상 국경 요새를 짓지 않기로 한 422년의 협정 위반이라고 반발하였다. 508년에 다라의 요새화가 마무리된 후 양국간의 격전이 일어났으며, 아미다에데사 역시 끝없는 공성전에 시달리며 요새화되었다. 그외에 칼리니쿰, 사탈라 등지에서도 전투가 이어졌다.
2.3.4.1. 6세기 전반의 대격돌
이후 527년에 신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로마군이 니시비스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530년, 카바드 1세의 사산 왕조가 역습하여 다라를 공격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고 사탈라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531년 칼리니쿰 전투에서 벨리사리우스가 패한 후 전선은 교착화되었고, 532년에 로마 측이 110 센테나리오 상당의 금을 주며 양국간의 '영원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540년에 호스로 1세벨리사리우스의 서방 원정을 틈타 협정을 깨며 시리아를 침공, 대대적으로 약탈하며 안티오키아를 함락,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에 벨리사리우스가 동부 전선에 복귀하여 이란 군대를 격파하고 니시비스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542년부터 지지부진한 공방전이 일어났고, 544년에는 에데사가 호스로 1세에게 5 센테나리아의 금을 바치며 포위가 풀리기도 하였다. 결국 545년에 로마 측이 연공을 바친다는 조건 하에 5년 기한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2.4. 이슬람 제국기

파일:터키 누사이빈 4.jpg
중세 시기에 세워진 제이넬 아비딘 모스크

아랍 인들은 쇠퇴한 도시에 수백개의 정원을 조성하여 휴양 도시로 만들었다. 하지만 10-11세기에 벌어진 레반트, 자지라 지역의 혼란에 휩쌓여 도시도 쇠퇴하였다. 함단 왕조의 지배를 받던 니시비스는 942년과 972년에 동로마 군대에게 점령되었으나 곧 탈환되었고 마르완 왕조우카일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셀주크 제국의 쇠퇴 이후로는 아르투크 왕조장기 왕조의 지배를 거쳐 아이유브 왕조의 영토가 되었는데, 아이유브 조 치하에서 도시는 다시 번영하여 상업과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당시 아랍 지도에 묘사된 니시비스는 성벽, 목욕탕, 대저택, 다리, 병원 등이 있는 풍족한 도시로 그려졌다. 다만 점차 동남쪽의 신자르에 가려져 쇠퇴하였고, 13세기 중반 몽골 제국맘루크 왕조의 완충지대가 되어 사실상 버려졌다.

3. 근대

1230년부터 몽골 제국(일 칸국), 잘라이르 왕조, 티무르 제국, 흑양 왕조, 백양 왕조, 사파비 왕조를 거친 도시는 1518년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20세기 초엽 누사이빈에는 다수의 쿠르드인 외에 야곱파 / 칼데아 / 아르메니아 2천의 기독교도와 6백의 유대인이 거주하였는데, 1차 대전 중인 1915년 8월에 학살이 벌어져 기독교도의 숫자는 1200명으로 줄어들었다. 살아남은 이들도 대부분 시리아, 이라크로 이주하였다. 현재는 터키에 위치한 인구 9만의 도시이다. 시리아와의 국경에 접해있고 건너편의 시리아 도시는 카미실리이다.

4. 현대 : 쿠르드 갈등

파일:누사이빈 터키 3.jpg
2015년 이전의 시가지와 2016년 터키군의 군사작전 후의 모습

시리아 내전 발발 후 국경 너머 카미실리가 쿠르드 인민방위대령이 되며 터키-시리아 국경 지대 쿠르드 인들에 대한 터키의 감시와 의심은 배가 되었다. 2013년 터키 당국은 누사이빈과 카미실리 간의 방벽을 쌓기 시작하였고, 이에 카미실리와 교류가 잦던 누사이빈 주민들이 반발하였다. 시장 아이셰 괵칸은 단식 농성에 나섰고, 결국 방벽 건설은 중단되었다. 2015년 11월, 터키군은 누사이빈에 통행금지를 내렸다. 이에 쿠르드 인민당 (HDP) 의원들이 단식 농성에 나섰다. 이어진 혼란 도중 2명의 민간인과 10명의 쿠르드 노동자당 (PKK) 전투원이 사살되었다.

보다 못한 국경 너머 인민방위대 천여명이 유입되어 2016년 3월이 되면 누사이빈은 절반 가량 쿠르드 무장 세력 하에 놓였다. 놀란 터키 당국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61명을 잃은 끝에 도시 주요부를 탈환하고 6만여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다만 이후로도 3만의 쿠르드계 주민들이 남아 저항을 이어갔다. 몇개월 간 대규모 폭격을 퍼부으며 시가지의 1/4를 파괴한 끝에 터키군은 2016년 9월 말엽 도시를 완전 장악하였다. 수천여 주민들은 인근 마을로 도주하였고, 6천여 가옥이 불도저로 철거되었다. 2017년 3월, 철거가 마무리되자 터키 당국은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를 지어 체제 선전에 활용하였다. 2015-16년 누사이빈의 쿠르드 봉기와 시리아 쿠르드 인들의 도움은 2016년부터 터키군이 시리아에 직접 개입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