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해발 1463m에 달하는 신자르 (쉰갈) 산지에서 내려다 본 신자르 시가지와 평원
중심 거리의 전경
1. 개요
아랍어 سنجار쿠르드어 شنگال (슁갈)
시리아어 ܫܝܓܪ
영어 Sinjar
이라크 서북부 니느위 주의 도시. 주도인 모술에서 서쪽으로 120여 km 떨어져 있고 시리아 국경과 불과 30여 km 거리이다. 시가지는 야지디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약 50km 길이의 신자르 산지 동남쪽 기슭에 지금은 말라버린 개천의 양안에 조성되어 있다. 전쟁 전 인구는 약 9만 명이었고 아랍인, 야지디인, 쿠르드인과 수니/쉬아 이슬람, 야지디교, 기독교 등이 어울려 살아가는 도시였다.
중세 장기 왕조 ~ 일 칸국 시기까지는 자지라 지방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번영했다. 그러나 2014년 ISIS의 강점으로 수천의 야지디인들이 학살당하였고 이로써 국제적 관심이 집중되어 이듬해 비교적 이른 시일에 탈환되었다. 2017년 신자르로 돌아온 야지디인들은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 이에 쿠르드 병력은 철수하였다. 현재까지 이라크 정부의 지지 하에 자치 정부가 유지되고 있으며, 야지디 깃발이 휘날린다.
2. 역사
| 언덕 위의 사원으로 향하는 길거리 | 2015년 신자르 수복 공세, 일대 지형이 나타난다. |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성당 유적
신자르는 고대의 중요한 요새 도시 '싱가라' (Singara / Σίγγαρα)에서 기원하였다. 싱가라는 아미다 (디야르바크르), 니시비스 (누사이빈), 다라, 하트라 등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북부 (자지라)의 주요 거점이었고 수차례 로마와 페르시아 제국 (파르티아 제국, 사산 제국)의 수중을 오갔다.[1] 당시 성벽 일부가 시가지 북부에 남아있다. 서기 114년 겨울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중에 로마 제국의 장군 루시우스 퀴에투스가 점령했다가 111년 철수했다. 그러다 197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파르티아 원정 중에 점령, 대대적으로 요새화하고 제1 파르티카 군단을 배치, 군인들을 정착시켜 콜로니아 (식민도시)로 삼았다. 정식 지명은 아우렐리아 셉티미아 콜로니아 신가라 (Aurelia Septimia Colonia Singara)였고 3세기 내내 로마 제국의 최동단 군사 거점으로서 중시되었다.
4세기 들어 싱가라는 단일 도시에는 드문 2개 군단이 배치되었다. 344년과 359-60년 사산 제국의 샤푸르 2세가 싱가라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363년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후 싱가라는 사산 제국령이 되었고, 라틴계 인구는 추방되었다. 사산 제국은 싱가라 대신 니시비스 (누사이빈)를 요새화했고, 5세기 들어 신자르 산지는 아랍계 타글리브 부족이 정착해 중심지로 삼았다. 6세기 초엽 싱가라에는 카디시노이 (Kαδίσηνοι)라 불리는 아랍 혹은 쿠르드계 다신교도 부족이 정착했다. 당시 주민들은 다신교도, 기독교도, 유대교도 순으로 구성되었다. 640년경 싱가라는 이야드 이븐 가늠 이븐 주하이르 알 피흐리가 이끄는 이슬람 제국군에 점령되었고, 아랍어 발음인 '신자르'로 불리며 자지라 산하 디야르 라비아 주에 속했다. 970년에는 현지 타글리브 부족이 세운 함단 왕조령이 되었다.
2.1. 중세
1057년 신자르는 아르슬란 알 바사시리[2]의 거점이다가 셀주크 제국이 함락, 약탈했다. 그 무렵 도시에서는 아흐마드 산자르가 탄생했다. 12세기 들어 카르부카 (케르부가), 지키르미쉬 (제케르미슈), 자왈리, 마우두드, 아크순쿠르 알 보르소키 등 자치적인 모술 아타베그 (섭정 총독)들의 지배를 받던 신자르는 1127년에 그 마지막 주자인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세운 장기 왕조 령이 되었다. 1146년 장기가 사망한 후 장남 사이프 앗 딘 가지가 모술, 차남 누르 앗 딘 마흐무드 (누레딘)가 알레포를 계승했고 신자르는 전자에 속했다. 1149년 사이프 앗 딘 가지가 사망한 후에는 동생 쿠트브 앗 딘 마우두드가 계승했고, 1170년 9월 후자가 사망한 후에는 두 아들 중 차남 사이프 앗 딘 가지 2세가 계승했다. 이에 장남 이마드 앗 딘 장기 2세는 숙부 누레딘에 도움을 청했고, 누레딘은 모술을 포위해 1171년에 항복을 받아내었다.하지만 누레딘은 부관 귀뮈쉬테긴을 배치한 후 가지 2세를 명목상 아미르로 남겨두었고, 불만 가득한 장기 2세는 보상으로 신자르에 봉해졌다. 이로써 신자르는 장기 왕조의 번국 중 하나가 되었고, '작은 다마스쿠스'로 일컫어질만큼 번영하게 된다. (1171 ~ 1220년) 누레딘의 사후 알레포를 통치하던 그의 아들 앗 살리흐 이스마일은 1181년에 요절하며 (바로 이전 해에 모술의 아미르가 된 가지 2세의 동생이자) 사촌인 이즈 앗 딘 마수드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이미 시리아 대부분을 장악한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살라딘)에 맞서기 부담스러웠던 마수드는 형 장기 2세에게 신자르와 알레포 교환을 제안, 성사되었다. 다만 장기 2세 역시 살라딘에 맞설 수 없었기에 1183년 6월 그와 협상하여 (이미 1182년 11월에 살라딘이 점령한) 신자르[3], 니시비스, 라카, 사루즈, 하부르 강 유역의 영토를 대가로 알레포를 내주었다.
1187-88년과 1191-92년 신자르에서 파견된 군대 역시 하틴 전투와 3차 십자군에서 살라딘의 무슬림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1197년 장기 2세가 사망하고 계승한 아들 쿠트브 앗 딘 무함마드는 22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신자르는 학문적으로 번영했다. 무함마드는 카일 왕조 때의 성벽에 외성을 추가해 방어를 강화하였다. 1210년 기준 신자르에는 (1201년 무함마드가 세운 것을 포함한) 모스크 2개, 마드라사 6개, 칸카 (수피 사원) 3개, 알리 이븐 아비 탈립의 마슈하드 (사당) 등이 있었다. 1219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세 아들 이마드 앗 딘 샤한샤, 잘랄 앗 딘 마흐무드, 파트 앗 딘 우마르가 공동 군주가 되었으나 1220년 아이유브 왕조의 하란 아미르인 알 아슈라프 무사가 신자르를 점령하면서 모두 폐위되었다. 이후 신자르는 아이유브 왕조의 자지라 부왕령에 편입되었다.점령 직후 무사의 형인 이집트 술탄 알 카밀이 궁정 음모에 이용된 어린 동생 알 파이즈를 신자르 총독으로 봉했는데, 후자는 신자르로 향하던 중 사망했다. 1229년 다마스쿠스를 장악한 무사는 시리아에 더욱 집중하며 자지라를 알 카밀에게 넘겼다. 다만 1234년 알 카밀이 룸 셀주크의 케이쿠바드 1세와 맞서는 틈에 (같은 해 집권한) 모술의 바드르 앗 딘 룰루가 신자르를 점령했다. 1235년에 처음으로 신자르에 접근한 몽골 제국군은 1250년대 들어 빈번히 일대를 습격했다. 1258년 바그다드 함락 후 몽골의 훌라구 칸에게 복속했던 룰루는 이듬해 사망했다. 이후 룰루의 장남 루큰 앗 딘 이스마일 (앗 살리흐), 차남 알라 앗 딘 유수프 (알 무자파르), 삼남 사이프 앗 딘 이샤크 (알 무자히드)가 각각 모술, 신자르, 지즈레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를 계승했다. 이로써 신자르는 다시금 번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스마일이 부친처럼 몽골에 협력한 것과 반해 유수프는 1259년 10월, 키토부카의 몽골군이 다가오자 아이유브 왕조의 시리아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 진영에 합류했고 신자르는 몽골군에게 무혈 점령되었다. 1260년의 아인잘루트 전투 후 맘루크 왕조의 술탄 쿠투즈는 승리에 일조한 유수프를 알레포 총독에 봉했다. 다만 곧 쿠투즈가 암살당하자 알레포의 아미르들이 정변을 일으켜 유수프를 축출했다. 1261년 봄, 이스마일과 이샤크 형제는 이집트로 향해 술탄 바이바르스에 복속했고 유수프와 함께 가을에 바그다드 수복에 나선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2세를 따라 자지라로 향했다. 라흐바에서 칼리파와 헤어진 삼형제는 계속 북상하자 신자르에 이르러 유수프와 이샤크는 남고 이스마일은 모술에 당도했다. 다만 곧 칼리파의 패전과 죽음을 접한 유수프와 이샤크는 다시 시리아로 도주했다.[4]
비슷한 시기인 1261년 말엽 삼다구가 이끄는 1만의 몽골군은 모술을 포위했고, 이스마일은 각지에 구원을 청했다. 이에 혼란기를 틈타 하란을 장악하고 있던 튀르크인 군벌 아쿠쉬 알 바를리가 1천 4백의 기병대와 출격했으나 5월에 신자르 부근에서 삼다구에게 대패해 도주했고, 결국 바이바르스에 귀순했다. 계속 저항하던 이스마일은 6-7월에 항복했으나 처형되었고, 모술은 파괴되었다. (1262년 여름) 비슷한 시기 신자르에서는 2중 성벽과 알리의 사당 등이 파괴되었고, 그중 후자는 일 칸국이 임명한 페르시아인 총독 무함마드 알 야지디에 의해 복구되었다. 일 칸국 시기에도 신자르는 팔각 석조 욕탕과 바닥, 벽 모두 모자이크로 장식된 화려한 목욕탕 (함맘)을 지닌 유복한 도시로 남았다. 이븐 바투타는 주민들이 '용감하고 자비로운' 쿠르드인이며 대사원이 상시 흐르는 수로로 둘러져 있다고 기록했다.
2.2. 근세
1398년 티무르는 무려 7개월 간의 포위 끝에 신자르를 함락했고, 티무르 제국 / 흑양 왕조 / 백양 왕조를 거쳐 1507-08년 도시는 사파비 왕조령이 되었다. 그러다 1534년 오스만 제국이 신자르를 점령, 동명의 산작 (주)을 설치했다. 다만 17세기 들어 신자르는 인근 마르딘과 모술에 밀려 쇠퇴했고, 마르딘 산작 산하의 나히야 (면)이 되었다. 그 무렵 신자르를 방문한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주민들이 쿠르드인과 타이 부족의 아랍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신자르 산지에는 4만 5천여의 야지디인과 바부리 쿠르드인이 거주한다고 기록했다. 1830년 이후 신자르는 마르딘 대신 모술 산작으로 이관되었다. 오스만 당국은 신자르 산지의 야지디 인들의 노상 약탈에 골머리를 앓았고, 1850-64년의 야지디 반란 후 이라크 총독 미드하트 파샤가 중재하여 세금과 통행세 징세를 확립했다.2.3. 현대
다에시의 강점 (2014-15년) 후에 촬영된 신자르 시가지 모습
20세기 들어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한동안 안정을 유지하던 신자르는 1974-75년 아랍민족주의에 심취한 사담 후세인이 현지 쿠르드 인들에 대한 아랍화 정책을 펼치며 혼란을 겪었다. 이라크 전쟁 후인 2009년 8월에는 카페에서 벌어진 자살 폭탄 테러로 21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을 입었다. 2010년 8월에는 알카에다의 연이은 폭탄 테러로 야지디인 326명이 사망하고 53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2013년 기준 신자르의 인구는 7만 8천 명이었다. 주민들은 쿠르드인, 아랍인, 튀르크멘인, 아시리아인 등의 민족과 야지디교, 수니파 무슬림, 기독교도의 종교로 구성되었다. 시내에는 초등학교 23개, 중학교 3개, 고등학교 7개, 병원 1개, 보건 시설 2개, 공원 3개, 운동장 2개가 있었다. 또한 시리아 정교회, 시리아 가톨릭,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로 이루어진 3개의 성당이 있다.
2014년 8월 ISIL (다에시)은 페쉬메르가가 철수한 신자르를 점령했고, 2천여 야지디인을 학살했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포로로 끌려갔고, 이에 남은 야지디인 대부분이 피난했다. 그해 12월 말엽 페쉬메르가는 탈환전에 나섰지만 시가지 북부에 진입했다가 다에시의 반격에 물러났다. 2015년 11월 페쉬메르가는 야지디인들로 구성된 신자르 저항부대, 그리고 미군의 공습과 함께 신자르를 탈환했다. 이후 78명의 여성이 처형된 후 묻힌 매장지가 발견되는 등 5천여 명의 민간인 피해가 추산되었다. 시내의 세 성당들도 전란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신자르 저항부대는 보복으로 수니파 무슬림 주민들을 약탈하거나 보복 학살을 저질렀다. 2017년 8월 신자르의 야지디 인들은 이라크로부터의 자치 정부를 선포했고, 10월에 페쉬메르가의 철수 후 이라크 정규군과 인민동원군이 진입해 이를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