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20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Septimius Severu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Lucius Septimius Severus |
출생 | 145년 4월 11일 |
로마 제국 렙티스 마그나 | |
사망 | 211년 2월 4일 (향년 65세) |
로마 제국 에보라쿰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193년 6월 1일 ~ 211년 2월 4일 (17년 248일) | |
전임자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
후임자 | 카라칼라 게타 |
부모 | 아버지 :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어머니 : 풀비아 피아 |
배우자 | 율리아 돔나 |
가족 |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형) 셉티미아 옥타빌라(여동생) |
자녀 | 카라칼라, 게타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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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세베루스는 키는 작지만 강인했다. 결국에는 통풍 때문에 몸이 매우 쇠약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열정적이고 원기 왕성했다. 학식 면에서는 자신이 배운 것 이상을 원했으며 이 때문에 생각은 많아도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았고 적에게는 아주 가혹했던 그는 이루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주의를 기울였지만 자신에 대해 하는 말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 77. 16
디오 카시우스, 77. 16
로마 제국의 제20대 황제. 193년 다섯 황제의 해 속에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의 경쟁에서 모두 승리하고 세베루스 왕조를 연 인물로, 북아프리카 지방 출신으로 두 번째로 권좌에 오른 황제이자 푸닉 지방 출신 중 최초로 황제가 된 사람이다.[1]
로마 제국의 군제 개편, 군대 복지 개혁 등을 추진하고, 관료제 개혁과 개편에 진력했으며, 법률과 칙령을 통한 질서 확립을 통해 황권을 신장한 황제로 평가된다. 세베루스는 로마 제국 역사상 동부, 남부 일대 국경 확장에 진력해, 오스로에네 왕국을 합병하고,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영역을 넓혔으며, 202년 아프리카와 마우레타니아 일대를 위협한 가라만테스를 상대로 원정을 벌여 북아프리카 사막을 국경 삼은 황제로도 유명하다.
원로원 의원, 변호사, 치안판사 출신 법률가이나 스스로를 군인 출신 황제로 자처한 사람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거한 180년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 황제로 등극한 285년까지의 시기를 과거의 학자들은 로마사에서 가장 힘겹고 혼란스러운 시기로 정의내릴 때 그와 그의 왕조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이 이 시기를 재평가하고, 이 시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가 개창한 세베루스 왕조에 대한 연구가 구체화되고,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이 재평가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학자들에게 4세기 도미나투스(전제군주정) 체제의 원형을 제공한 황제이자 군사전제정 체제의 교과서를 제공한 전제군주의 시초, 또는 2세기 동안 누적된 문제 해결에 노력해 반세기 이상 쇠퇴를 막아낸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정적들을 상대로 한 내란에서든 이민족들을 상대로 한 외국 땅에서의 전쟁에서든 누구도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18년간 제국을 통치한 뒤 어린 아들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그들에게 이전의 어떤 황제보다 큰 부와 무적의 군대를 물려주었다.
로마 시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
로마 시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
에드워드 기번이나 원로원 중심에서 황제들을 평가한 디오 카시우스에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상당히 부정적이면서도 매력 있는 악당 같은 황제로 묘사된다. 이중 기번은 세베루스를 "제국의 쇠퇴를 초래한 주범" 내지 "이상적인 원수정 체제를 가혹하게 바꾼 황제"로 묘사하면서, 그가 능수능란하고 뛰어났음에도 굉장히 잔인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기번이 많이 참조한 디오의 기록이 큰 영향을 끼친 듯 하다. 왜냐하면 디오는 세베루스가 본인과 가문의 야망을 위해 제국에 무분별하게 쾌락, 조작, 공포감을 위한 협박을 자행했는지 묘사하면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가혹하고 잔혹하게 통치한 권위적인 프린켑스"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 평가에도, 동시대 디오와 헤로디아누스가 인정했듯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비열함과 잔혹성 등 인격적 부분의 문제 외에는 뛰어난 황제였다. 그는 동시대 원로원 의원 디오와는 정견이 다르고, 성향도 반대였으나 사적으로는 매우 친밀한 친구였고 매우 귀족적인 그에게서 엄격함, 절제력, 결단력, 애국심 측면과 사생활 측면에서의 검소함 측면에 있어, 디오가 경험한 여러 황제 중 가장 훌륭한 평가를 얻었다. 이는 헤로디아누스도 비슷한데, 세베루스 밑에서 황궁 관료로 근무한 것으로 추정된 헤로디아누스 역시 그가 가진 인격적 측면과 별개로, 세베루스가 가진 황제로서의 능력과 자세를 높이 평했다. 이런 동시대의 평처럼 세베루스는 재위 기간 내내 제국의 흐트러진 법체계와 질서를 바로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후대 로마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제국 통치에 필요한 법률, 행정, 군정, 종교, 경제 지식이 풍부한 황제이자, 잔혹함과 유연한 통치술을 두루 갖춘 훌륭한 황제였다. 간단히 말해, 그는 동시대 사람, 후대 사람 모두에게 공과가 분명한 현군으로 평가받는다.
세베루스는 2세기 후반 무렵 숫자가 줄어들고 있던 전통적인 로마엘리트 출신답게, 경험이 풍부하고 능력이 대단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또래 원로원 의원들과 비교해도 그는 전통적 로마 엘리트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세베루스는 즉위 후 스스로를 군인황제라고 하면서, 군대의 신임을 얻고 내전을 승리로 이끌어냈다.
실제 세베루스는 정치적 역량과 상황 파악 능력에서 동시대 경쟁자들과 비교해 매우 뛰어났다. 디오, 헤로디아누스로 대표된 동시대 사람 및 후대의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의 평처럼 세베루스는 교활하면서도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가 로마 입성 후 정통성을 위해 내세운 페르티낙스가 어떤 이유 때문에 몰락했고, 왜 마키아벨리, 디오 카시우스 등에게 까였는지 생각하면 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애 전반과 집권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세베루스는 매우 기민하고 영리한, 즉 영악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다섯 황제의 해 경쟁자 중 황제 참칭을 가장 먼저 했음에도, 적절한 시점에 자신이 황제가 됐음을 선포했고 과감히 로마로 군을 이끌고 간 뒤 스스로를 군인황제로 자처해 그 권위를 내세웠다. 이는 그가 원로원 의원이며, 법률가, 변호사 출신이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행보인데, 세베루스는 군인황제를 자처한 원로원 출신 황제임에도 군사적인 역량이 상당했다.
군사적 측면의 평을 살펴보면, 세베루스는 제 2 파르티카 군단을 이탈리아의 알바에 주둔시켜 전략적 예비대 및 기동군 역할을 하게 했다. 이는 상당히 진보적인 군사 배치였는데, 이러한 움직임과 아이디어가 모여서 후기 로마의 황제를 따라다니며 적을 격파하는 전문 야전군이 탄생하게 된다. 또한 두 차례의 파르티아 원정을 성공시켜서 전략적 요충지인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속주화를 결정했다. 이런 정복 전쟁 외에도 그는 말년에 칼레도니아 원정을 추진하면서 브리타니아와 북해 연안의 치안까지 해결하고자 했고, 방어선 구축과 로마군 활용 전술 역시 유연했다. 또 정복 전쟁을 치르면서도 그는 트라야누스처럼 철저한 군사적 계획만 수립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국의 국고 수입, 속주민들의 생활 문제까지 신경쓰는 등 행정가이기도 한 황제가 보여줄 치밀한 행보를 보였다. 이런 이유로 세베루스는 그와 세베루스 왕조가 재평가되면서, 군사적 측면에서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보다 유연하고 현명한 황제였다고 재평가받고 있다.
그는 로마 황제가 원수정 아래에서 얼마나 군대를 잘 장악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 알았던 황제이기도 했다. 로마 황제들이 근위대 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에 주둔 중인 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할 경우 상당한 부담감을 가져야 했던 것은 원수정의 문제점과 게르만족, 사산 왕조의 성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래서 그는 유언으로 두 아들에게 그토록 군대를 강조하고 그들을 통제하고 장악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세베루스 가의 마지막 후계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명군이긴 했지만 근위대조차 통제하지 못했고, 군의 지지도 온전히 받지 못한 까닭에 게르마니아에서 병사들 손에 암살됐다. 여기서 고려해야 하는 건 황제의 어린 나이도 있었다. 세베루스 왕조에서 초대 황제 빼고는 어린 시기에 즉위해서 전부 20대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전에 그들과 같은 경우는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네로 뿐이었고 그들의 최후가 어땠는지 고려한다면 세베루스 왕조의 불운은 어린 황제들이 연달아 즉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2]
이런 점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능수능란하게 군을 활용해 권위를 세운 다음, 혼란한 정국을 평화롭게 만든 황제라는 업적 하나만으로도 그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통치 스타일은 통치계급인 원로원 계층에게 비판받았고, 현대 이전까지는 저평가되거나 다소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부각된 군인황제의 시초로 평가받았다. 이유는 내전 때 알비누스를 지지하는 원로원과 척을 지게 되면서[3] 도미티아누스가 그랬듯이 자신의 기반인 군대에게 지지를 얻어서 통치하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4]
허나 세베루스 황제의 짧지 않은 재임기간에서, 황제와 원로원 사이는 생각보다 험악하지 않았고 치세 초반 외에는 도리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두 경쟁자를 모두 제거한 직후, 그들을 지지한 그리스, 푸닉, 시리아, 레반트 일대의 권세가들을 죄다 숙청하고 제위 안정에 잠재적 위협이 될 이들을 무력화시킨 것이 컸다. 즉, 세베루스의 치세는 대개의 왕조 교체기때 원로원 구성변화처럼 황제 쪽 인사들이 들어오면서 되레 안정됐던 것이다. 따라서 세베루스 치세 초기를 제외하면, 디오나 기번의 주장과 달리 황제 정부 안에는 원로원 의원들이 다시 넘쳐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의 치세에도 원로원 계급이 고위 행정, 군사직을 독점한 것이다(물론 기사계급의 대두는 철인황제 이후로 시대적 흐름이긴 했다).
황제로서의 지위가 확고해진 후 전형적인 원수정 황제로 제국을 통치했다. 시민들을 위해서 공공사업과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특별한 축제가 있는 날이 아니면 법정에 늘 참가하여 시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카라칼라가 병에 걸려서 아플 때도 빠지지 않았다). 낙태 금지를 법으로 제정한 것도 세베루스 황제였다.[5]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냉혹한 성품과 종종 나타난 잔혹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내전에 시달리던 로마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기에 벌어진 소득없는 마르코만니 전쟁과 안토니누스 역병, 콤모두스 황제의 실정, 이어진 내란으로 거덜난 제국의 재정을 안정시켰다.[6] 후세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런 세베루스를 성공한 로마 황제의 예시로 들며, 그가 주장한 짐승의 방법, 곧 사자의 사나움과 여우의 교활함을 가장 잘 활용한 황제라고 평가하고 그가 앞서 말했듯 대중에게 증오를 사지 않았기에 제국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고 서술했다.
다만, 세베루스는 지나칠 정도로 공포심을 상대에게 심어주는 과도한 철권통치, 가혹한 보복에 기반한 통치술, 매우 비열하고 폭력적인 성격, 그리고 후계자 양성과 선정 문제에 있어서는 오늘날까지 비판받고 있다.
먼저 그의 통치술은 설령 193년 내전과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부터 방비가 늦은 로마 내 경제, 사회 문제 및 속주 도시들의 독립 움직임 방지를 위한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일정 부분 이상을 넘어설 정도로 과격하고 지나치게 잔인한 측면이 많았다. 실제로 니게르와 알비누스를 지지한 동방의 비잔티움과 서방의 루그두눔은 시민들까지 세베루스에게 적국의 포로보다 못한 처벌을 받았고 이 때문에 세베루스를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또 그의 시대에 벌어진 과도한 보복조치들은 동방과 서방 속주들의 지역갈등을 넘어 일부 속주 내의 지역갈등까지 초래했다.[7] 또 세베루스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황제 본인의 뛰어난 통치술과 카리스마에 기반한 만큼, 도미나투스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전제적이었고 기본적으로 속주 내 자치와 도시 내 자치를 황제 개인이 철권통치 방식으로 통제해 어린 황제 또는 함량미달의 인물이 제위에 오를 경우 내재된 문제를 심화시킬 위험이 많았다고 지적받고 있다.
다음으로 그의 후계자 문제를 살펴보면, 그는 자신의 독단적인 인격 교육과 비열한 방법의 통치술 교육을 두 아들에게 오롯이 물려주고 이를 장려해 왕조를 단명케 했다. 세베루스는 집권 직후부터 장남, 차남에게 독단적이고 냉혹한 통치술을 손수 교육시켰고, 냉혹한 통치술로 비난 받은 선대 황제들[8]의 방법을 10살도 안 된 장남에게 교과서로 삼게 했다. 이런 자녀 교육과 후계자 양성 방법은 세베루스의 측근들까지 걱정할 정도였는데, 마리우스 막시무스 등의 걱정처럼 세베루스의 연년생 아들들은 서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만다.
세베루스는 집권 이후 오래도록 장남 카라칼라에게만 제위 계승권을 인정하고, 어린 카라칼라에게 누구보다 혹독하게 상대를 다뤄야 함을 손수 가르쳤다. 이는 당시 원로원이 무력하면서도 권위적이고 이기적으로 일관한 상황 속에서 효율적인 제왕교육 방법이 됐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론 카라칼라와 게타 간의 분쟁을 막을 수 없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세베루스는 차남 게타를 한 단계 낮게 대우했다가 결국 둘에게 같은 제위 계승권을 인정해 교통정리까지 실패했다. 차남 게타는 무뚝뚝했으나, 인격이나 재능으론 카라칼라보다 나았고 형제가 합심하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카드였다. 하지만 세베루스의 원칙 없는 결정과 후계구도 변경 조치는, 그의 바람[9]을 나타내는 것임에도 동복형제를 정적으로 만들고 가문을 단명케 했다. 장남 카라칼라는 게타를 살해하고, 그나마 소수였던 세베루스 가문의 방계 황족들까지 그의 손으로 모조리 멸문시켜 버렸다. 따라서 세베루스 황제가 뛰어난 황제임에도, 결론적으로 이는 그가 평가절하된 이유가 됐다.
물론, 세베루스의 이런 조치는 당시 정황상 합리적이긴 했다. 카라칼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잔혹해졌고, 성년식 전부터 세베루스 부부조차 통제가 불가능한 후계자였다. 그래서 학자들은 게타를 아우구스투스로 격상시킨 건 게타를 보호하고 가족을 지키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카라칼라가 게타를 살해하기 전까지 황제가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한 적은 있어도, 공동 통치자에게 살해당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인 전례를 생각한 그의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따라서 원수정 시기 황제 시해에 관련되어 있던 근위대, 군인들은 세베루스의 바람대로 카라칼라와 게타 두 명에게 모두 충성서약을 하였다.[10][11]
군인들의 봉급을 올려준 것을 비판하는 시각은 전형적인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이며 이 부분에서도 평가가 훌륭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봉급인상 이후 100년 만의 인상이었고 그 동안 조금이나마 인플레이션은 있었다. 로마군사사의 권위자인 브라이언 캠벨(Brian Campbell)은 세베루스 황제 이전에 미리 했어야 했던 일이라고 평가하였다.[12] 하지만 이 역시 그 필요성과 현실성 외에는 평가가 완전히 좋다는 것은 아니다. 2008년과 2017년 베르트 판 더 스펙으로 대표되는 현대 로마사, 셀레우코스 제국 및 헬레니즘 세계 분야의 권위자들이 발표했듯, 세베루스가 벌인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계속된 대외원정은 대부분의 세금을 내며 비용을 충당한 지중해 동부 일대의 세금 피로도를 높여, 끝내 카라칼라,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게 부채로 고스란히 돌아갔기 때문이다.[13]
또 세베루스 왕조에서 벌어진 근위대장의 전횡, 세베루스 가문과 친분을 맺은 극소수의 권세가들의 탐욕과 부정부패 역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비호 아래 벌어져 오늘날까지 비난을 받고 있다. 물론 세베루스 황제의 친구 플라우티아누스만 제 직위를 이용해 과거 세야누스, 마크로, 라이투스 같은 악행을 벌였기 때문에, 이 부분 역시 감안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플라우티아누스 외의 세베루스 왕조의 다른 근위대장들은 문제 많았던 플라우티아누스와 달리 행정적, 법적으로 매우 뛰어났고 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마크리누스만 하더라도 카라칼라 암살 사건에 간접적으로 연관된 점을 빼면 위험 인물이 아니었으며, 그가 카라칼라에게 등을 돌린 것은 카라칼라가 그를 비롯한 근위대 장교들을 의심해 죄를 덮어 씌워 죽이려고 했던 점이 컸다. 하지만 세베루스 집권 이후, 2세기~3세기 원로원 내에서 벌어진 극소수의 권세가들의 행태와 플라우티아누스 등 극소수의 공신 집단의 부정부패는 세베루스의 비호 아래 벌어져, 로마 귀족들의 갈등을 표면화시켰다.
더 큰 문제는 외가 친척이며 사돈관계인 플라우티아누스의 몰락과 이로 인해 벌어진 카라칼라, 게타 사이의 대립 격화였다. 플라우티아누스 일가의 비극적인 몰락은 세베루스 황제 일가에게 밉보여 몰락한 모양새였는데, 이는 필요악과 같았던 이 사람의 몰락으로 세베루스가 꿈꾼 가족애와 냉철함에 기반한 세베루스 가문의 번영이라는 프로파간다가 손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따라서 세베루스 본인은 플라우티아누스를 마음대로 쳐내지도 못했고, 그가 몰락했을 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서둘러 이를 끝내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어쨌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공존하는 현군이었다. 그가 취한 근위대장 직위의 내각총리화 개혁, 제국 각 지방에서 언제라도 벌어질 일부 지방 총독들의 월권 행위 시정 조치, 중앙 집권적인 명령 조치, 각 군대의 지위 보장 및 군대 개혁 작업은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해야 할 작업들이 뒤늦게 실행됐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이 마지막 평화기를 누릴 수 있게 해줬다. 따라서 3세기의 위기에서 군대의 대두는 세베루스 황제의 정책보다는 원수정 자체의 문제점[14]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순수 군인 출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병사들의 손에 옹립되면서 급기야 악명높은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고 만다.[15]
3.1. 세베루스와 도미나투스
현대 연구에 이르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세베루스 왕조가 재평가되고 그 업적이 부각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4세기 도미나투스 체제의 원시적 모습을 프린키파투스 체제에 도입해 정착시킨 부분에 있다.고대 로마인 중 원로원 입장에서 세베루스 왕조를 평가한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이들은 세베루스와 그의 가문을 이전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보다 강압적이고, 예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보다 전제적이고 독단적인 황제, 황실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세베루스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고대부터 입체적인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18세기 에드워드 기번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세베루스가 군인황제, 전제군주의 모습을 보인 인물로 규정했고, 19세기 J.부르크하르트 역시 세베루스를 최초의 군인황제로 이해하면서도, 마냥 그를 독단적이고 전제적인 인물만으로 매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 입장은 기본적으로 프린키파투스 체제에 관한 옹호 또는 원로원과 황제의 공존을 중시한 관점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 평가와 달리 현대에 이르러 이런 기류는 묘하게 달라지더니 최근 들어서는 아예 도미나투스 체제를 제시한 사실상의 시조격의 황제로 평가받는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클르니에, 로스토프체프, 그랜트 그리고 해먼드와 반스가 대표적인데, 이런 흐름들은 현대에 이르러 전통적 입장을 대체하고 있고 이 부분의 연구는 실제 3세기의 위기와 4세기 도미나투스 체제 연구까지 연장선에서 이어지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클르니에, 로스토프체프, 그랜트는 전통적 입장을 어느 정도 존중하면서 그가 도미나투스 체제의 사실상 시조이며, 그와 세베루스 왕조에 관해 군사전제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 렙티스 마그나 발굴과 비문 해석을 통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입체적으로 연구한 해먼드와 반스는 그가 황제 즉위 전까지 군사보다 행정, 사법관으로 경력을 쌓았던 점을 토대로 단순한 군사전제정보단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도미나투스 체제와 이전의 프린키파투스 체제 사이의 과도기적 형태의 도미나투스 체제로 평가한다. 다시 말하면, 현대에 이르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도미나투스 체제에 영향을 끼친 사실상 시조이면서도, 전통적인 프린키파투스 체제를 유지를 시도한 황제로 평가받는다.
이 부분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세베루스는 개인의 성향도 있겠지만, 2세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이전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때부터 시작된 프린키파투스 체제 아래에서의 로마 제국 내 문제 해결 방법을 위해 도미나투스의 원시적 형태 방법[16]을 많이 사용했다.
하드리아누스의 내정 개혁은[17] 효율성과 별개로 최상류층 내의 문무경력 이분화 및 관료들의 군사행정 이해도가 떨어지는 악영향을 가져왔다. 그래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군경력 없이도 관료가 되는 조치를 일정부분 수정했는데, 그럼에도 이 문제는 세베루스 집권 전까지 사실상 방치됐다. 이는 2세기 말 역병으로 인한 인구감소와 변경위기 등으로 로마제국의 사회, 경제적 악화 못지 않게 그에게 당면 문제였다. 그래서 세베루스는 이전부터 방치되다시피 한 원로원의 무력화 및 출신에 따른 문무경력 이분화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내전 승리 직후부터 로마의 전통적 엘리트 계층 성장과 관료층 인재 육성에 힘을 쏟았는데, 이때 그는 행정가, 법률가 경력을 살려 내정에 황제가 직접 개입하는 빈도를 늘렸다. 또 원로원의 군사적 통제권 이양을 추진해 원로원 내 반란 움직임까지 사전차단에 힘을 쏟았다.[18] 그 예로 원로원 내 출신 의원 비중은 세베루스가 내전에 승리하기 전부터 이탈리아 내 경제, 사회적 쇠퇴로 인해 이탈리아 출신이 80%에서 그의 시대동안 40% 초반까지 감소하게 됐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시대에는 80%가 이탈리아 출신이었지만,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통치기 중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 동방과 아프리카 속주출신들이 늘어나고 이탈리아를 제외한 서방출신들이 급격히 줄어든 모습도 띠게 되어 원로원 구성 내 지역 불균형 이야기가 나왔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아프리카 속주 출신들을 우대해 고위직을 내리면서도 이미지와 달리 황제가 이탈리아와 서방속주 출신들을 대신해, 이탈리아와 서방속주 내의 사회, 경제적 성장에 힘을 쏟았다. 따라서 그는 내전 이후 알비누스 세력을 척결한 이후 이탈리아와 속주 간의 격차를 해소하면서 황제가 쇠퇴된 본국 이탈리아의 주체이자 최고 통치자로 본국이 속주에게 제 목소리를 다하도록 통치했다.
즉, 이미지와 달리 그는 니게르와 알비누스 추종자들을 숙청한 이후 본국과 속주 간의 격차 해소를 추진하면서도 해마다 악화되는 본국 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동방속주 출신들의 입김 차단에 힘을 쏟았다. 이는 이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시도한 방법의 연장선이기도 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황제권을 강화해 원로원에게 권력을 이양받고 뺏는 방법을 쓸때 내전 이후부터는 의도적으로 자신과 황후의 고향인 동방 속주들의 입김을 차단하는 것에 주력했다. 따라서 세베루스 통치기에 이르러, 과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처럼 세력균형 내지 소외된 서방속주 출신들의 기용이 다시 시작됐고, 이는 자연스레 동서 간의 편차를 완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노력 덕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에는 40% 초반까지 떨어진 이탈리아 출신 원로원 의원들의 비율이 회복세를 띠고 이탈리아 출신들의 재산 비율도 늘어나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런 조치와 함께 세베루스는 치세 내내 황제의 직접 통치권을 강화했다. 이는 과거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이상으로 각 영역 내의 황제 행정권을 강화된 모습이었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는 뛰어난 행정가, 법률가답게 이를 법제화시켰다. 동시에 그는 정치적 이유로 원로원을 대신할 대안으로 군대와 프라이토리아니의 힘을 빌리면서도 정작 황제자문회의를 이용해, 후대의 도미나투스 체제를 연상시키는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그래서 제국 통치 논의 역시 도미나투스 체제와 유사한 모양새를 띠게 되는데 실제 세베루스가 칼레도니아 원정 중 요크에서 위독해질 당시 후임황제 선정과 정권이양 및 제국 통치 논의는 이전 시대와 달리 원로원 대신 황제자문회의가 담당했고, 이후에도 로마의 결정들은 황제자문회의의 입김이 상당히 강화되게 됐다.
이를 증명하듯 세베루스 치세 이후(더 정확히 말하면 플라우티우스가 교살된 이후)부터 저명한 법률가 파피니아누스를 시작으로, 법률가 또는 사법관들이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끄는 근위대장을 맡았고 3, 4세기에도 주된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세베루스는 근위대장의 성격을 기존의 군사적 성격보다는 행정, 법률가적 면모와 내정 업무에 능한 최고위 관료적 성격으로 변화시켰고, 이는 도미나투스 체제의 마기스테르 오피키오룸(magister officiorum)로 이어지는 모양새를 띄게 된다.[19][20]
또 그는 4세기 도미나투스 체제가 연상될 정도로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속주를 지배했다. 이는 4세기 이후 로마황제들의 방식과 비슷하면서도 여타 다른 황제들과 많이 달랐던 부분으로, 과거의 아우구스투스와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의 방식과도 확실히 차이가 있던 직접통치 방식이었다.[21] 이에 관해 현대학자 루셰는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소아시아 일대와 여타 다른 속주들의 속주 통치 기록과 편지 등을 통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의 후계자들(특히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에 이미 도미나투스 체제의 황제들처럼 지역 유력자들과 지역 출신 부자들의 공공건축물 기부 대신 황제의 이름을 받든 속주 총독들의 이름으로 공공건축물이 신축, 재건, 보수됨을 제시했다.
이러한 방식 외에도 세베루스의 복지수혜정책들 역시 이전과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 많은데, 그는 이전 황제들과 달리 알리멘타 수혜 관리 및 결정권을 황제의 직접 명령을 받는 중앙 행정관리에게 맡기고, 각 속주 및 도시들의 세금 징수 및 세제대상 선정까지 자치 시의회가 관여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그러면서 세베루스는 중앙관료들을 속주로 보내 세금을 징수하고 속주들을 도미나투스 체제처럼 경영하면서 통행세, 간접세까지 황제와 황제의 대리인들의 허가 없이 손대지 못하게 했다. 이 외에도 세베루스는 니게르와 알비누스와의 내전 이후에도 시리아, 브리타니아, 아프리카 속주들을 세분화하여 나누고 각 속주에 대한 황제의 직접 경영을 강화했는데 아들 카라칼라는 이런 흐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전제정의 면모를 한층 강화했다.
그 결과, 세베루스의 치세 후반 이후 통치체계는 황제를 최정점으로 한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속주 군단, 중앙 관료와 황제자문회의의 직접 연계에 기반한 프린키파투스 체제로 완성됐고, 이후의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확실히 도미나투스 체제의 원시적 형태로 변화된 모습을 띠게 됐다. 즉, 4세기 도미나투스 체제의 원형에 가까운 뼈대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이 세베루스에 의해 제시되고 완성됐다.\
3.2. 세베루스 시대의 그림자
모든 황제가 그렇듯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역시 명암이 분명했다.세베루스 시대는 공교롭게도 로마 제국의 마지막 군사적 원정 성공 속에서도 경제 하락의 시작, 로마 경제 쇠퇴가 심화된 시대의 서막이었다. 복잡해진 제국 현실 속에서 후계자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 문제가 심화됐고, 이는 그의 치세 후기부터 본인조차 온전히 제어하지 못한 채 그림자를 낳았다. 데나리우스 은화의 점진적인 하락이 문제였다.[22]
세베루스는 즉위 후 자신을 지지한 판노니아 군대와 다섯 황제의 해 기간 중 자신에게 협력한 로마군의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많은 자금을 군대에 하사했다. 그렇지만 정적들의 이름을 살생부에 넣고, 내전 기간부터 그들의 재산을 압류해 현금화 하더라도, 돈이 넉넉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기금을 통해 이자 불리기를 하고, 주화 발행 중 자신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데나리우스 은화의 순도를 의도적으로 줄였다. 이는 순도를 줄여 통용은화를 이전보다 많이 찍어낸 다음, 이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고, 군자금과 충성 보너스 등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이 조치는 국가적 위기, 장기화되는 마르코만니 전쟁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주화 은 함유량을 선대 황제 시절보다 25%까지 잠시 줄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180년 조치와는 다른 부분이었고, 트라야누스 황제가 117년 군자금 문제로 잠시 주화 은함유량 최고치의 18% 은 순도 하락을 허락한 부분과도 많이 달랐다. 따라서 이 조치는 주화의 가치 하락과 시중 유통량이 늘어남과 함께, 물가가 치솟는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이때 그는 콤모두스 시대까지 유지된 약 81.5%의 데나리우스 은 순도를 78.5%로 줄이고, 구리 등을 섞으라고 지시해 실제 은 함유 무게를 줄이고, 기타 금속 포함 기준 무게를 2.40g에서 2.46g으로 증가하라고도 지시했다. 이는 네로가 화폐 개혁 이후에도 국고 적자가 심화되자 한 조치와 비슷했는데, 이런 명령은 세베루스 아래에서 지속적으로 계속됐다.[23]
그런데 세베루스는 이듬해부터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의 군비 경쟁, 병사들의 지지 확보를 위해, 더 많은 돈을 수중에 넣고자 여기에서 또 이를 명령한다. 그 결과, 그는 은 순도를 78.5%에서 64.5%로 감소시키고, 은화 무게 중 은 함유 무게를 2.46g에서 1.98g으로 떨어뜨렸다. 이어 그는 다음해인 196년 데나리우스 은화 순도와 은 실제 함유 무게를 각각 54%와 1.82g으로 줄였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는 구리 등 은 이외 금속 함유량을 높이고, 데나리우스 은 순도 하락 속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이런 명령 아래, 세베루스는 연이은 대규모 건설, 건축과 순행, 대외전쟁 속에서 많은 양의 주화를 발행했다. 이렇게 되자, 그의 치세 기간과 의도적인 은 순도 하락 조치, 많은 양의 주화 발행 아래,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이중 로마인에게 체감된 가장 큰 부작용은 제국의 화폐 가치 하락이 유발된 가운데, 벌어진 인플레이션이었다. 당대부터 경제의 장기적 강점의 손상을 유발했다는 우려를 샀던 제국 관료들의 예측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 우려 그대로 세베루스 아래의 제국 경제는 문제에 빠졌다.
로마인의 주식인 밀 약 27kg의 물가는 그가 "모든 문제의 사단"이라고 부른 콤모두스 대의 곱절인 100 데나리우스가 넘게 치솟게 됐다. 국고에는 돈이 많아도 늘어난 물가로 막상 흑자가 아닌 상황이 펼쳐졌다. 세베루스가 치세 후기부터 법률가, 회계 전문가들인 파피니아누스, 마크리누스 등에게 전문성 아래의 고문 역할을 증대시킴 역시 이런 것을 해결하고자한 의도가 컸다. 그러나 이는 그의 칼레도니아 원정이 장기화되고 그의 계속된 명령 아래 은 순도가 40%대로 떨어져 발행되는 상황 속에서 결국 만년의 세베루스 자신조차 후회할 만큼 여러 고민을 안긴다. 물가는 아들 카라칼라 시대가 되면 200 데나리우스를 거뜬히 넘게 됐고, 그가 남겨준 국고 흑자에도 막상 국고는 일정 수준만을 넘긴 애매모호함 속에 빠진 것이다.
그 결과, 세베루스 치세 후반이 되면, 로마 제국의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국고의 적정성 속에서의 적자가 만성화된다. 이에 그는 콤모두스 아래 부작용이 이를 초래했다는 식으로 주장을 펼치고, 이 문제 해결을 하겠다며 기존 명령을 지속시킨다. 세베루스가 이렇게 한 이유는 다시 193년 이전인, 콤모두스 말년의 192년 데나리우스 은 순도로 되돌린다고 해도 뚜렷한 대책도 없고, 본인과 세베루스 왕조의 명분부터 본인 손으로 부정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됐기 때문이다. 하여 세베루스 치세 말인 서기 210년이 되면 약 45%대로 은 순도가 떨어진 주화가 발행되고, 물가가 오르고, 세베루스의 칼레도니아 원정이 장기화되면서, 이 부분이 도돌이표처럼 돌아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세베루스의 주화 가치 하락 조치는 본인의 군사적 승리와 세베루스 왕조 탄생 속에서 제국의 안정을 만들었지만, 로마 제국의 경제와 주화 가치 문제를 황제가 스스로 유발시켜 본인만 이득을 보고 후임자들에게 잔뜩 짐을 안긴 것 역시 돌이켜보면, 아들 카라칼라가 벌인 실책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세베루스는 후계자인 카라칼라와 달랐다. 그는 본인이 기용한 관료, 고문들의 주장을 수용했고, 기본적으로 매우 검소해 불필요한 비용을 최소화했다. 동시에 그는 모든 시혜에 앞서 나름 영리하게 적정선을 정해, 철저한 기준 아래 시혜와 상여금 지급량 모두 관리한 줄타기를 했다. 그는 군대 보너스를 내줄 시기에 재위 5주년, 10주년 기념 발행 등으로 주화발행량을 관리했고, 충성 보너스 하사 역시 장병들의 복지향상 등 속에 임금인상과 유지에 집중했다. 그렇지만 세베루스처럼 그의 후계자 카라칼라, 게타가 할 역량이 있는지 여부도 불확실했다. 두 아들의 섭정을 사촌 파피니아누스와 떠맡은 돔나, 그가 카라칼라에게 붙여준 법률가 겸 회계전문가 마크리누스 역시 그랬다. 이중 황후 율리아 돔나는 영리했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지만, 남편 세베루스 같은 결단력은 갖추기 못했다. 설상가상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죽인 뒤부터 이를 유지할 상황도 못 됐고, 카라칼라의 무모함과 즉흥적인 행동들은 율리아 돔나의 통제 밖이었다.
따라서 세베루스가 교과서처럼 기준선을 마련한 틀은 카라칼라가 공동황제인 친동생 게타를 살해한 직후부터 깨졌고, 이때를 시작으로 카라칼라는 위기돌파 차원에서 앞뒤 안 가리고 충성 보너스를 추가인상했다. 그는 아예 일시급 지급을 정례화하면서 그 틀을 깨버리는데, 이는 세베루스가 벌인 그동안의 데나리우스 가치 관리가 불안정한 것의 단점을 키우고, 카라칼라 주변의 고문단이 율리아 돔나 도움 없이는 세베루스 유지를 받들지 못한 결정타가 됐다. 그러니 율리아 돔나는 아들 카라칼라에게 대놓고 "선대부터 돈이 국고에 부족한 것을 압니까? 돈을 이렇게 낭비하면 안 됩니다"고 하소연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했다. 하여 카라칼라는 연이은 전쟁, 순방을 벌이며, 주변 국경을 예방전쟁 차원에서 안정화함에도, 부황이 준 국고에 긍정적 측면이 악화됨을 가중시킨 것을 의식했다. 이 부분은 다행이었다. 따라서 이 부분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한 카라칼라는 세베루스 왕조의 관료들에게 이를 해결하게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카라칼라 시대에서 벌어진 순행, 전쟁, 학살 속에서 빛을 바랬고, 그가 암살되면서 미완으로 끝난다. 따라서 실제 해결 조치는 카라칼라 단독 치세 시작점인 212년보다 10년 뒤인 222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 이후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의 집권 정통성인 세베루스 말년의 명에 따른 은 순도 45%가 암묵적 최대치로 된 까닭에 절반의 성공으로 애매하게 마무리됐다. 그렇지만 세베루스의 법적 손자로 권위와 정통성을 강조한 알렉산데르 아래에서, 로마 제국의 은 순도는 조금씩 높이는 조치 속에서 단계적으로 올려 나감은 분명 세베루스가 벌인 조치가 당시 그와 세베루스 왕조 집권에 있어 적정선인 것은 분명해, 이 부분에서는 그가 얼마나 영리한지 단번에 이해된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로 대표된 세베루스 왕조 후기의 아우구스타들이 군대 연공금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정했던 적정 수준으로 되돌리고, 황실 예산을 절반 이상 줄인인 조치는 그와 같은 카리스마가 없는 후계자들에게는 군대 장악에서 양날의 칼과 비슷했다. 또 카라칼라 아래에서 이미 더 많은 보너스를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받아온 군대에게 호응도 얻기 힘들었다. 즉, 세베루스의 은 순도 절감 명령과 그의 충성 보너스 다양화 조치는 그의 후계자들의 조치들 아래 그 부작용이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물가 안정 정도만 성공할 만큼, 그 후유증이 컸다. 이는 재평가 이후에도 그 평이 비슷하다. 따라서 카라칼라의 화폐 개혁, 율리아 마이사의 황실 예산 축소 명령, 울피아누스의 군대 연공 보너스 정상화 조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주화 관리 명령 등 역시 세베루스의 이런 조치 속에서 벌어진 후유증 극복 목적이 컸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긍정적 측면이 부각된,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부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황제들의 은 순도 함유량 조절은 경제 상황에 따라 변동했다고 해도, 세베루스처럼 의도적으로 은 순도를 계속 줄이고 무게를 가지고 자신의 정치적 이득과 세베루스 왕조 건설을 추진한 경우는 분명 이전의 황제들과는 달랐고, 그 부정적 영향 역시 마냥 재평가 중에서도 명암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세베루스 시대의 또 다른 그림자가 된 부분은, 그가 꾸린 전문적 행정체제와 중앙 집권화 속에서 완성된 도미나투스(전제정) 틀 속에서 시작된, 새로운 체제 안전의 문제였다. 세베루스는 집권 직후부터 황제의 절대적 카리스마, 잘 갖춰진 내각의 완성, 엄격한 질서 회복 등으로 안정을 이끌었다. 그러면서 그는 원로원 대신 프라이토리아니와 군대를 통해, 황제의 절대성과 황실의 안녕을 체계화시켰다. 그런데 이는 세베루스 시대의 기반이 어린 황제, 불안하고 위험성이 강한 황제 등이 등장했을 때, 큰 문제가 됐다. 황제가 암살, 요절 등으로 사라져 통제가 불가능하거나, 있어도 군대 장악에 실패할 경우, 프린키파투스의 단점과 결합해 국가는 돌아가도 정치적 혼란이 심화될 위험성을 높인 것이다.
이는 종국적으로 세베루스 왕조가 단명하면서 그의 업적과 직계 후계 황제들 중 업적을 논할 수 있는 카라칼라,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까지 저평가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여기에서 더 끔찍한 것은 세베루스 본인 역시 이를 알고 대비했다는 현실이었다. 따라서 이런 점은 그의 주화 가치 하락 속에서 물가 폭등을 심화시키고 제국 경제의 취약성을 부각시킨 부분과 함께, 그 그림자가 명확했다고, 재평가 이후에도 꾸준히 그 결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4. 여담
- 역대 로마 황제 중 미신, 운명, 마법, 점성술, 관상을 지나치게 믿고, 이를 절대시한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였는지 그는 젊은 시절에 첫 아내와 사별 후 두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후처 율리아 돔나를 신부 후보로 생각할 때에도, 그는 점성술, 운명, 마법, 관상에 따라 결정내린 끝에, 굳이 시리아 에메사까지 와서 신부감을 찾았다고 한다. 이런 태도는 황제가 된 뒤에도 바뀌지 않았는데, 그는 자신이 행동하는 모든 것은 운명과 마법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세베루스 왕조 역시 꿈에서 나온 운명에 따라 나온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는 여타 황제들의 정통성 선전과는 차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세베루스는 진심으로 그랬기 때문이었다. 하여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각종 미신적 믿음이 고조되고, 기존 로마 귀족들의 예법과 충돌하는 문제를 야기하면서, 그의 왕조가 단명한 원인 중 하나가 됐다고 한다.
- 그가 점성가 악토스(Actos)의 예언을 믿고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제거했다는 일화가 있다. 악토스는 세베루스에게 알비누스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고, 이를 믿은 세베루스가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또한 세베루스는 자신의 통치 기간과 후계자에 대해서도 점성가들의 예언을 참고했다고 전해진다.
- 로마 제국의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세베루스는 점성가에게 두 아들 중 누가 먼저 죽을 것인지 물었다고 한다. 이에 점성가는 '형제 중 먼저 어머니를 죽이는 자가 먼저 죽을 것'이라고 답했다. 세베루스는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는데, 이런 선택 역시 점복의 영향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후 카라칼라와 게타가 결국 불과 1년 만에 불화를 일으키고 게타가 살해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 세베루스는 점성술뿐 아니라 점복, 천궁술, 심지어 주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신적 기법에 심취해 그는 점쟁이, 점성가, 마법사들을 궁정에 거느리고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세베루스는 자신의 출생 날짜와 시간을 토대로 점성술적 운명을 믿었다. 『황제사』에 따르면 그는 149년 4월 11일 아프리카의 레포티스 마그나에서 태어났는데, 점성가들은 이 날짜를 근거로 그가 장차 제국을 통치하리라 예언했다고 한다. 세베루스는 이를 자신의 운명으로 확신하고 정치적 야망을 키워나갔다.
- 세베루스는 어느 날 벽돌 구이 행상을 만나 자신의 손금을 보여주며 장래를 예언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에 벽돌공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폐하의 운명은 로마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황제가 되어서도 결코 폐하를 잊지 마십시오." 세베루스는 이 일화를 계기로 벽돌공에 대한 각별한 정을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황제가 된 후에도 벽돌공을 만나러 갔고, 그를 고위 관료로 임명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이름이 여기서 따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르다는 의미의 Sever나 잔인하다는 Severe가 어원이란 말이... 하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나름 평균 이상의 군주임에도 잔인함과 비열함, 정적들에 대한 무관용, 자신의 측근들의 비리와 악행을 보호해주는 이중성 등으로 유명한 황제인 점을 생각해본다면, 작가가 세베루스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의외로 어원일지도 모른다.
- 황제가 된 이후, 콤모두스를 언급할 때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식농사를 실패한 것을 지적하면서 비판했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장남 카라칼라 또한 오늘날까지 콤모두스와 함께 부자세습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손꼽히는 폭군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물론 그의 아들들은 콤모두스보다 자질은 나았지만 성격이 막장인 건 똑같았다. 당장 세베루스가 죽고 1여 년도 안 되어서 두 아들이 서로 대립하다가, 형이 동생을 죽이고 동생의 친구와 시민 2만 여명을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학살하듯 무참히 죽였다. 게다가 그의 아들은 치세 중에도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학살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따라서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후세 학자들에게 “본인이 살아생전 후계구도 문제로 형제 간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이후에도 두 아들의 대립도 중재 못 해서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은 생각도 안 하고 남의 잘못만 지적한다.”라고 비난받고 있다. 게다가 콤모두스는 제위 등극 이후 벌어진 맏누이 루킬라 공주가 벌인 콜로세움 암살 미수 사건 후 얻게 된 충격 속에서 멀쩡히 2년간 잘 통치하다가 서서히 막장이 되었지만, 카라칼라는 원래 성격파탄자[24]였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데 형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즉위에 큰 도움을 줬다. 그는 치안판사, 군사령관, 총독 등을 지낼 정도로 세베루스가 황제로 오르기 전부터 성공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아꼈는데 193년 세베루스가 황제를 선포할 당시 모이시아에서 자신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와서 동생을 지지했고, 203년(또는 204년) 죽을 때까지 충언도 아끼지 않았다. 세베루스의 형 게타는 일찍부터 자신들의 외사촌 플라우티아누스를 믿지 않았고 그를 인간적으로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동생 세베루스가 제위에 오른 뒤, 플라우티아누스에게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끌게 하면서 근위대장까지 내주자, 이를 크게 걱정했다고 한다. 이런 탓에 세베루스의 형은 죽기 전, 동생에게 플라우티아누스가 언젠가 크게 배신할 사람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형의 진심어린 조언에도 이를 듣지 않았는데, 205년 그 결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됐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로마의 황궁인 팔라티노 황궁을 마지막으로 대대적으로 개축한 황제이기도 하다. 후대의 황제들은 재정 문제도 문제이거니와, 기본적으로 더이상 팔라티노 언덕에 건물을 더 들여놓을 부지가 남아있지 않아서 황궁을 더이상 확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후 로마 제국 자체가 서서히 기울어지며 황궁 개축에 막대한 돈을 쓸 여유 따위는 생기지 않게 되면서, 로마의 황궁은 이 시기 이후 쇠락해간다.
- 고향 렙티스 마그나와 지지 기반인 푸닉 지방과 제국 동부 속주들에 대한 끊임없는 후원을 벌인 황제로 당대부터 유명했다. 특히 고향 렙티스에 대한 사랑과 후원은 당대부터 유명해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에서도 확인될 정도다.
- 이탈리아, 페니키아 혼혈의 백인 황제로, 당대부터 전형적인 푸닉 출신의 이탈리아 혈통 로마인으로 불렸다. 그러나 오늘날의 리비아 출신, 로마 제국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 남겨진 초상에서 피부결이 아내 율리아 돔나, 두 아들 카라칼라, 게타와 달리 피부색이 짙다는 이유 아래에서, 최근 몇 년 동안 그가 인종적으로 아프리카인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렇게 주장하면서 고대 기록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있는 황제다. 하지만 고전 학자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분명히 백인 황제라고 한다.
- 글래디에이터의 후속작 글래디에이터 2 등장이 확정됐다. 두 아들 카라칼라, 게타가 모두 출연하고, 콤모두스의 조카인 루시우스가 성인이 되어 겪은 세베루스 왕조 당시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이다.
- 다섯 황제의 해 당시의 두 경쟁자(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중 같은 푸닉 지방 출신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달리, 페니키아 억양의 라틴어, 그리스어 사투리 및 어투가 심했다. 이 점은 푸닉 지방 출신임에도, 정갈한 라틴어를 사용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크게 비교됐다.
- 세베루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군단인 legio II Parthica, legio III Parthica를 창설했는데, 이는 파르티아 전쟁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 군단들은 이후 로마군의 주력 부대로 활약하게 된다.
- 흑인 황제설과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베르베르인 또는 푸닉인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추측에 불과하며, 세베루스가 순수 이탈리아-푸닉 혈통이라는 데에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동의한다. 다만 초상화 등을 볼 때 황후인 돔나나 두 아들보단 다소 까무잡잡했을 것이라고 한다.
- 세베루스는 법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심지어 황제가 된 후에도 법정에 직접 나가 재판을 집행하곤 했다고 한다.
- 그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속주를 방문한 황제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각 지역의 상황을 직접 살피고 통치에 반영하고자 했음을 시사한다.
- 세베루스 사후 그의 아들들이 황제위를 놓고 대립하는 와중에, 카라칼라의 지시로 세베루스의 상 중 일부가 파괴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부자간 불화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 푸닉은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일대의 지중해 연안 중 아프리카 속주, 누미디아 속주, 트리폴리타니아 속주를 합쳐 부른 지역명이다. 이렇게 불린 이유는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인을 로마에서 포에니, 푸닉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참고로 푸닉 지방 서쪽의 마우레타니아 지방은 로마에서는 바다 건너 북쪽의 이베리아 반도와 합쳐 히스파니아 지방으로 통상적으로 불렸다.[2] 네로의 경우에는 그의 시대 대부분을 근위대장으로 있던 티겔리누스,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모두 동시대인들의 기준에도 함량미달이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견해에 여지가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반면 가이우스(칼리굴라)는 선황 티베리우스 시대 후반기 동안 힘이 커진 마크로와 그 세력을 제거한 뒤, 역으로 아버지의 옛 측근이자 프라이토리아니의 입장을 대변한 카시우스 카이레아, 루푸스 등이 황실관료, 일부 원로원과 공모해 암살됐기 때문에 세베루스 왕조의 어린 황제들의 실패사례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3] 자신의 적을 더 지지한다는데 사이가 좋을 수 없는게 당연했다. 알비누스 지지자들은 세베루스가 니게르와 싸우러 동방으로 간 틈에 빈집털이를 하라고 알비누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4] 하지만 군단의 정치 개입은 가까이는 원수정 시기, 멀리는 공화정 후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부터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까지의 공화정 후기 및 내전기 군벌, 원수정 극초기 세야누스같은 근위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네 황제의 해에서 보여준 게르마니아, 도나우 군단의 행보, 네르바 시기 근위대의 준동만 봐도 알 수 있다.[5] 태아인권의 존중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가부장제 강화의 목적이었다고 판단된다.[6] 세금을 신설하고, 파르티아 원정으로 금은보화를 가져왔고, 내전에서 반대파의 재산을 몰수했다. 옥타비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의 행보와 상통하는 바가 많다.[7] 히스파니아 일대를 예로 들면 세베루스에 대한 여론과 황제의 태도로 남과 북, 동과 서에서 이런 갈등이 시작되고 그 대립이 강화되는 형태가 나타났다고 한다.[8]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9] 세베루스 황제가 내전을 극복하고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내건 슬로건은 화목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율리아 돔나, 카라칼라, 게타와 같이 가족 사진처럼 나와 있는 많은 조각품을 세웠다. 물론 카라칼라가 게타를 죽인 이후에 게타의 얼굴을 파버렸지만...[10] 게타 살해후 카라칼라가 제 2파르티카 군단에 찾아갔을 때 "우리는 카라칼라와 게타 모두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면서 기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11] 그러나 게타를 죽였음을 카라칼라가 직접 밝히고 사례금을 준다는 약속을 하자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카라칼라를 지지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내고 있던 군인들에게 남은 세베루스 왕조의 남자는 미워도 카라칼라 뿐이었다.[12] 세베루스의 로마군은 내전을 두 번 치렀고 큰 해외 원정을 3번이나 했다.[13] 물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도 이런 점을 신경 안 쓰고 지르고 보는 타입이 아니라서, 트라야누스와 달리 통화 평가 절하 조치를 취하면서도 세금 징세 과정에서 관행으로 여겨진 여러 악폐를 적극 단속하는 노력을 하며 장기적으로 국고 피로도를 줄이려는 노력을 했다.[14] 실질적으로는 말 그대로 황제였지만 형식상으론 원로원에게 프린켑스 제1인자라는 명칭을 수여받은 자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로마 황제라는 직책은 집정관이나 독재관이 아닌 호민관에서 차용한 것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원수정제의 황권은 원로원의 권위에 비해 떨어지기가 매우 쉬웠고 이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가장 쉬운 것은 군대의 무력에 기대는 것 밖엔 없었다. 이렇게 되면 군대를 가지게 되면 누구나 황제를 자칭하기가 쉬워진다. 또한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이 로마군의 사병화를 촉발했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는 제정이 되면서도 유효하게 적용되었다. 공화정 시대가 군벌의 사병화가 문제되었다면 4황제의 해, 콤모두스 사후 5황제 난립 시대는 유능한 장수(군단장이나 속주 총독)들의 사병화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군대에 기대지 않고도 적절한 황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 만큼 능력이 좋고 대외관계 상황도 좋았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나 트라야누스를 비롯한 극소수였고. 이들 못지 않은 능력치를 가져도 군인황제시대엔 내전이나 야만족 침략으로 비명횡사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15] 그래서 근현대의 로마 역사서 중 높은 평가를 받는 프리츠 하이켈하임의 '로마사'에서는 "세베루스 왕조가 그에 버금가는 황제를 배출하지 못한 것이 로마의 불운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실 세베루스 왕조의 일원들 중에 능력이나 업적에서 그나마 가장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버금갈만한 사람은 그의 남자 후손들도 아니고 셉티미우스의 처제이자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이고,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의 이모이며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마이사이다.[16]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군대, 황제자문회의와 황실 관료층이 황제를 최정점으로 하는 형태로 운영된 중앙집권 방법[17] 현재 학계는 하드리아누스가 관료제 개편및 내정을 개혁한 것을 과거처럼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그가 했다고 여겨졌던 개편이란 것들이 사실이 아니고 몇몇은 과장됨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18] 이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조치들은 후대의 갈리에누스 개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19] 물론 이런 조치에 관해,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원로원은 "새로 꾸려진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이 라틴어만 쓸 줄 알지 제대로 읽고 쓰는 실력이 형편없고 그리스어는 아예 말 한마디 할 줄도 모른다"며 "이런 행정적 조치들이 무슨 이유로 도움이 되겠냐"는 식으로 비난했다.[20] 물론 군사적인 측면도 고려하여 2명의 근위대장이 있다면 한 명은 군경험자가 맡았다. 카라칼라 시기에 마크리누스가 회계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낸 행정관료 였다면 다른 근위대장인 아드벤투스는 군사적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다.[21] 아우구스투스와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와 달리 보호국을 통해 간접 통치를 하면서, 황제가 문제에 개입해 직접 명령권을 내리는 방법이 많았고, 도미티아누스 역시 속주 행정에 있어서는 직접 명령을 하면서 속주 내 자치는 허용하는 모양새를 띠었다.[22] 다만 당시에는 금본위제가 아니라서 아우레우스 금화는 대상이 아니었다. 어쨌든 데나리우스 같은 제국 아니 전 지중해 세계의 기축 통화의 화폐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 결코 아니다.[23] 의외일 수도 있는데, 콤모두스는 놀고 먹으면서 나라를 방치한 암군일 뿐 전대의 네로, 후대의 엘라가발루스처럼 국고 문제를 심화시킨 암군은 아니었다.[24] 사실 카라칼라의 성격이 개막장이 된 것은, 세베루스 자신이 카라칼라를 냉혹하게 대했던 것도 있지만,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제자들을 카라칼라의 가정교사로 한 것도 원인 중 하나이다.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당대에 유능한 철학자이자 웅변가였으나 그에 못지 않게 인성파탄자로도 유명했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이 했던 것 처럼 거의 아동 학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카라칼라를 대하였다. 다만 세베루스는 아티쿠스의 제자들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소 파우스티나 등에 대한 루머를 양산하는 것" 만큼은 철저하게 금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