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mertinus 마메르티누스 | |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전체 이름 |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 Marcus Petronius Sura Mamertinus |
출생 | 미상 |
사망 | 192년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
가족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장인) 소 파우스티나(장모) 코르니피키아(아내) 페트로니우스 안토니누스(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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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기의 원로원 의원, 서기 182년 정규 집정관.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사위로, 로마 제국의 서기 2세기 ~ 4세기에 살았던 원로원 의원 중 그리스, 아나톨리아와 함께 가장 부유하고 보수적인 푸닉 지방의 재벌 귀족의 대표주자로 유명하다.
아내 코르니피키아 공주의 1살 아래 동생인 콤모두스의 신임 아래, 서기 182년 집정관이 됐다.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그는 처남의 신임을 저버리고, 이 음모에 간접개입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따라서 이 사건 후, 아내와 사이가 최악이 됐고, 아내와 별거했다. 그러다가 188년 동서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가 주도한 콤모두스 암살 계획이 실패하고, 주동자 부루스가 그를 모함하면서 190년 기소 후 192년 콤모두스를 노린 모종의 반역죄를 주도한 혐의 등으로 아들, 남동생, 누나 일가와 함께 몰살됐다.
2. 생애
도미티아누스 시대부터 로마 제국과 원로원 안에서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와 함께 매우 보수적이고, 부를 독차지한 푸닉 지방 출신에서도, 재벌 신흥귀족 출신이다.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그 조상은 이탈리아에서 포에니 전쟁 후 옛 카르타고 본토로 건너간 이탈리아계 푸닉인이다. 다만, 그의 성장 과정 등에서 확인되듯이, 푸닉 지방을 본적으로 두면서 그 가족은 로마와 푸닉을 오가면서 살았다.아버지는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마메르티누스는 서기 150년 보결 집정관이었고, 출신 가문은 아프리카 속주와 황제령 아이깁투스 등지에 가진 사업체가 많고 진짜 부유하면서도, 그 인맥이 제국 전역에 펼쳐져 있었다. 그의 친척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가 진심으로 존경한 문법가이자 교육자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였다. 이런 배경 덕분에, 친척어른 프론토의 제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딸 소(小)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 공주와 로마에서 약혼 후 결혼했다. 두 사람은 173년 결혼 후, 사이에서 외아들 페트로니우스 안토니누스를 낳았다.
형제로는 서기 190년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셉티미아누스가 있었고, 이름 미상의 누이는 저명하고 부유한 원로원 의원으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방계 황족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안티우스 루푸스의 아내였다.
대개의 정략혼처럼 아내 코르니피키아 공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내의 1살 아래 남동생 콤모두스와는 사이가 좋았고, 코르니피키아 공주와의 사이에 아들 페트로니우스 안토니누스를 얻으면서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일찍부터 콤모두스 친구로 있으면서 장인 생전부터 그의 추천을 받았다. 180년 장인이 서거하고, 콤모두스가 제위에 오른 뒤, 그의 신임 아래 승승장구했다. 그는 182년 처남의 추천 아래 집정관이 됐다. 하지만 마메르티누스는 처형 루킬라가 주도해 꾸민 182년 음모(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로 이후 인생이 꼬인다. 그는 이 사건 속에서 권력을 잡은 페렌니스, 클레안데르 주도의 이간질로 친구 집단에서 밀려 났고, 길거리 소문으로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에 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아내와 사이가 파탄난다. 그렇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고, 마메르티누스가 직접 개입은 하지 않아, 추방이나 처형은 면했다. 이는 그와 그의 아내 코르니피키아 공주가 콤모두스와 사이가 각별했고, 아내와의 관계가 파탄이 났어도 마메르티누스 인품이 좋았던 까닭으로 추정된다.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이후부터 마메르티누스는 콤모두스에게 완전히 신임을 잃었다. 따라서 부부 사이도 최악이 됐고, 이때부터 그는 아들과 함께 살고 아내는 따로 살게 됐다. 그러다가 190년 혹은 192년, 아내에게 이혼 당한 뒤, 모종의 사건 후 콤모두스의 명에 따라 처형됐다. 이 사건의 원인이 된 일은 188년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가 벌인 188년 암살 계획이 결정적이었다. 루키우스 안스티우스 부루스는 콤모두스 황제의 여동생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황녀의 남편으로, 콤모두스의 매형 중 폼페이아누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수라 마메르티누스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는 182년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당시부터 협력자라는 말이 꾸준히 돌았지만, 이 사건 여파로 장인을 어이없게 잃은 콤모두스가 덮어주면서 살아 남았다. 이런 안스티우스 부루스는 188년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을 기초해 꾸민 암살미수 사건을 기획해 추진했는데, 암살 결행 직전 이 계획이 발각되면서 처형됐다. 이때 부루스는 동서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에게 누명을 씌웠다. 이 일에 관해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부루스가 사건을 알고 이를 고변하려고 한 수라 마메르티누스에게 복수 차원에서 누명을 씌웠다는 말이 있다.
삼촌뻘 연상이나 손아랫동서인 부루스가 벌인 암살 미수 사건 속에서 마메르티누스는 결국 190년 이 사건으로 기소됐다. 그는 억울함을 밝혔지만, 결국 192년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때 죄목은 그가 아들, 형제자매와 함께 콤모두스와 그 일가 전체를 노린 반란을 꾸몄다는 혐의였는데, 정황상 콤모두스가 그의 재산을 노리고 죄를 뒤집어 씌웠거나, 그가 182년 이후 자신의 누명이 해소되지 않자 콤모두스 살해를 기획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그의 아들 페트로니우스 안토니누스, 형제 셉티미아누스, 누이와 그 가족 전체도 반역죄로 몰살됐다.
182년 사건 이후 아내 코르니피키아 공주와 사이가 최악이었고, 별거 생활 중인 까닭에, 이혼 전부터 코르니피키아 공주와는 사실상 부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전 남편과 아들이 처형됨에도 사건 직후에도 살아 남았다. 마메르티누스가 아들, 동생, 누이 등과 함께 몰살된 직후, 코르니피키아는 오랜 시간동안 불륜 관계였던 페르티낙스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잘생기고 부유한 귀족 청년 루키우스 디디우스 마리누스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