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3:36:10

마리우스 막시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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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gnotus: 불명
황제 겸 집정관 }}}
201년 202년 202년 보결 203년 204년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무레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아리우스 무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레갈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라비우스 리보
204년 보결 205년 206년 206년 보결 207년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리베랄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마르수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막시무스
ignotus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페트로니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파우스티누스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208년 209년 210년 211년 21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테렌티우스 겐티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퀸투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플라우티우스 아비투스 아울루스 트리아리우스 루피누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212년 보결 213년 214년 215년 216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퀸투스 마이키우스 라이투스 푸블리우스 카티우스 사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케리알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217년 218년 218년 보결 219년 22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메시우스 엑스트리카투스 마르쿠스 오클라티니우스 아드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221년 222년 223년 224년 225년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사비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비텔리우스 셀레우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226년 227년 228년 229년 23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퀸투스 아이아키우스 모데스투스 크레스켄티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아그리콜라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라일리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이키우스 프로부스 카시우스 디오 섹스투스 카티우스 클레멘티누스 프리스킬리아누스
231년 232년 233년 234년 235년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일리그니아누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파테르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우르바누스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티아누스
236년 237년 238년 239년 24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피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펠릭스 코르넬리아누스 폰티우스 프로쿨루스 폰티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베누스투스
241년 242년 243년 244년 24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아티쿠스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아리아누스 티베리우스 폴리에누스 아르메니우스 페레그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레피두스 프라이텍스타투스 가이우스 케르보니우스 파푸스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시우스 티티아누스
246년 247년 248년 249년 25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알리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아퀼리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51년 252년 253년 254년 25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256년 257년 258년 259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투스쿠스 (눔미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덱스테르)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뭄미우스 바수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260년 261년 262년 263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사이쿨라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도나투스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타우루스 볼루시아누스 눔미우스 파우스티아누스 덱스테르 (막시무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퀴에투스 아우구스투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라티아누스
264년 265년 266년 26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사투르니누스 루킬루스 사비닐루스 아르케실라우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268년 269년 270년 271년
아스파시우스 파테르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 파테르누스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산크투스
272년 273년 274년 275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포스투미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타키투스 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벨둠니아누스 율리우스 플라키디아누스 카피톨리누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켈리누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276년 277년 278년 279년 28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노니우스 파테르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81년 282년 283년 284년 28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오비니우스 루피누스 마닐리우스 바수스 Ⅱ)
285년 286년 287년 288년
티투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불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베티우스 아퀼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폼포니우스 야누아리아누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288년 보결 289년 289년 보결 289년 보결
… a 마르쿠스 마그리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케이오니우스 프로쿨루스
… ivianus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퀸티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코엘리아누스 헬비우스 클레멘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89년 보결 290년 291년 292년
플라비우스 데키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
… ninius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시우스 디오 율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93년 294년 295년 296년 29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눔미우스 투스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눌리누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298년 299년 300년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비리우스 갈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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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 막시무스
라틴어: Marius Maximus
전체이름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Lucius Marius Maximus Perpetuus Aurelianus
생몰년도 서기 160년경(추정) ~ 서기 230년대 후반(추정)
지위 원로원 의원, 황제 자문회의 수석 고문
계급 노부스 호모(신참자)→귀족
국가 로마 제국
고향 로마 제국 푸닉 지방[1]
형제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아내 카시아 마르키아나[2]
자녀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아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아들)

1. 개요2. 생애3. 《카이사리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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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혼란스러웠던 내전인 다섯 황제의 해, 내전을 종식하고 제국을 통일한 세베루스 왕조의 원로원 의원이자 전기 작가였다.

본명은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로, 일반적으로는 마리우스 막시무스로 유명하다. 따라서 비슷한 이름을 가진 아들은 보통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로 통칭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를 도와 로마 진군을 단행한 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원로원의 최고 실세였으며, 세베루스 왕조 시대 내내 그 위세가 대단했던 권세가였다. 그렇지만 보통은 아내의 오빠인 디오 카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역사가 및 전기 작가로 유명하다.

서기 4세기 경에 저술된 악명 높은 위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반이 된 사료인 《카이사리에스》로 알려진,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일기를 저술한 사람이다.

2. 생애

세베루스 왕조의 통치하에서 가장 성공하여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린 원로원 의원 중 한명으로, 마크리누스가 잠시 제위에 있을 당시 디오 카시우스가 총독이 될 때 큰 도움을 주고, 이후 세베루스 왕조가 부활할 때 위기에 빠질 뻔한 디오를 보호해준 인사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비문과 여러 증거를 통해, 전체 이름이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였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라고 한다. 비문을 통해, 형제는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아내는 디오 카시우스의 여자형제 카시아 마르키아나, 장남은 232년 집정관을 지낸 같은 이름의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차남은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진 뒤, 서기 237년도 정규 집정관직에 오른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로 확인됐다. 따라서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동시대의 역사가이자 원로원 동료였던 디오 카시우스와 일찍부터 친구였고, 디오의 매제였음이 밝혀졌다.

단순한 원로원 중진이 아니라, 서기 2세기 후반 ~ 3세기 초반까지 존속한 세베루스 왕조를 대표한 당대의 거물급 인사이다. 그는 생애 동안 총 2번의 집정관과 로마 시장격인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1회 역임했다. 이중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시절, 생애 두번째 집정관 시절은 마크리누스의 등장과 몰락, 세베루스 왕조의 부활과 율리아 마이사의 등장, 엘라가발루스 몰락,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집권과 울피아누스의 등장으로 이어질 때였는데,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이때마다 원로원, 황제 측에게 전권을 받아 중심을 유지하면서, 사태를 수습하고, 숙청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이런 중책을 맡은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 엘라가발루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로 이어진 세베루스 왕조의 모든 황제들, 카라칼라가 암살된 뒤 잠시 제위에 올랐던 마크리누스, 동시대부터 시리아 여제들, 시리아 에메사의 여인들로 불린 세베루스 왕조의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 모두와 친구, 동맹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세네키오 알비누스로 대표된 인사들보다 성공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이 사람처럼 숨을 거둘 때까지 온전히 경력을 쌓은 이는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가 있어도, 푸스쿠스조차 마리우스 막시무스보다 뛰어나지 못하고, 훨씬 부족했다고 평가 받는다.

성씨인 '마리우스'에서 드러나듯이, 공화정 말기의 명장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휘하 퇴역병들이 정착한 포에니쿠스 혹은 푸닉 지방으로 불린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해안 지방을 근거지로 둔, 이탈리아 혈통의 평민 가문 출신이다. 다만, 대개의 로마 원로원 의원, 관료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에퀴테스 출신으로 '신참자'(노부스 호모)로 귀족까지 오른 케이스였다. 다만, 아버지가 갈리아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살았고, 이 사람 역시 본적만 푸닉 지방이고, 아주 어릴 때는 갈리아에서 자랐다가, 출세 후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배경을 두고 있다. 즉, 이탈리아 혈통의 푸닉 이주민 후예인 기사계급으로, 본적은 포에니쿠스, 자란 곳은 갈리아 지방인 사람이다.

비문에 따르면 아버지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메투우스는 갈리아 지방에서 근무한 기사계급 출신의 검사, 관료로, 원로원 의원이 되지는 못했으나, 명망이 높고 모범적인 인격자였다. 그는 두 아들인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가 신참자로서 원로원에 입성하는데 필요한 여러 기반을 마련해줬다. 따라서 선대부터 그 재력이 상당했고, 부모의 노력과 좋은 평판은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원로원에 들어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대략 서기 160년 경 푸닉 지방 중 아프리카 속주 혹은 트리폴리타니아 속주의 퇴역병 정착도시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가 근무한 갈리아에서 성장했다. 그러다가 대개의 기사계급 출신 자제들처럼 본국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치세 동안 취해진 조치로서, 고향 속주에는 부임할 수 없는 상피제가 시행되었던 것을 볼 때 이 사람의 경력상, 부임지가 아닌 트리폴리타니아 속주 출신이 유력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 제10군단 프레텐시스를 시작으로, 제3군단 이탈리카 등 서방 주둔 로마군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이후 이 경력을 살려 178년~180년 이후 로마 성벽 바깥의 로마 가도를 관리하는 관리를 시작으로 명예로운 경력을 위한 준비를 했다. 이는 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때 복무한 군단에서 지휘관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에서 총독 등을 지낸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의 사위가 되면서 받은 도움이 컸다.

아내는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의 딸이었던 카시아 마르키아나였는데, 그녀의 오빠가 '디오 카시우스'로 유명한 루키우스 카시우스 디오 코케이아누스였다.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카시아 마르키아나와의 사이에서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라는 이름의 두 아들을 뒀다. 두 아들은 모두 집정관을 지냈다.

비문에 따르면 서기 182년과 183년 경, 호민관에 지명된 이후 '명예로운 경력'을 밞아 본격적인 정치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는 대개의 신참자들이 밞은 방법인데, 그는 콤모두스의 추천과 후원을 받았다. 콤모두스는 그를 원로원 의원에 임명하면서, 곧바로 법무관에 추천하여 발탁했다. 이후 막시무스는 서기 190년 경, 라티나 가도를 담당한 감독관을 거쳐 총독 임무를 수행했다.

서기 193년,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동향 출신으로 상 판노니아의 총독이자 도나우(다뉴브, 다누비우스) 강 방어선 사령관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부하 병사들의 지지 선언을 내세워 황제를 자처했다. 이때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모이시아에 주둔 중인 제1군단 이탈리카의 군단장으로 있었다. 그는 세베루스의 형이었던 셉티미우스 게타 등과 함께, 휘하 군대를 이끌고 세베루스 지지 선언을 한 후, 다섯 황제의 해 내전에 뛰어든 다음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에 참여하여 그의 로마 및 이탈리아 반도 장악에 힘을 보태었다. 이후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이의 내전에 뛰어들어, 193년과 196년 사이에 벌어진 모이시아 전투와 비잔티움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이런 공로로 그는 모이시아 일대의 사령관이 되었고, 이때부터 세베루스 황제를 도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의 일전을 직접 담당했다. 그래서 막시무스는 루그두눔 전투 당시, 세베루스 황제를 따라 전쟁을 수행했는데 이때 그는 갈리아 벨기카 총독으로 있으면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군을 견제하고,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서기 199년까지 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갈리아 벨기카의 총독직과 라인(레누스) 강 하류 일대의 군권을 맡겼고, 나중에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총독직을 줄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이 직책을 역임하는 동안, 황제의 추천으로 집정관에 처음 취임했고, 이때 귀족의 지위까지 하사받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최측근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하여 집정관 임기를 맡은 뒤인 서기 205년부터 3년 동안은 시리아 코일레 속주의 총독으로 재임했고, 213~218년까지는 아시아 속주 총독,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모두 거쳤는데 원로원에서 제비뽑기를 한다고 해도,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는 거진 황제의 측근들이 원하는 알짜배기 자리를 독점했기 때문에 그 권세가 대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 관할 속주 및 원로원 관할 속주의 요직을 모두 거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연이어 지명되었다. 이런 식으로 임지로 떠나, 정상적으로 임기를 채운 것은 처음이었다. 더욱이 최초의 비(非) 황족 전직 집정관이 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로마인들의 상식상, 특정 인물이 2년 연속 아시아 속주 총독을 하면서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전체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하면서 푸닉 전체를 좌지우지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파격적이었는지, 과거 황족들 중 차기 황제로 낙점된 이들도 하지 못한 전례였다고. 그래서 이 경력은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가장 성공했던 인물임이 단번에 드러난다는 증거로 단골처럼 언급되고 있다.

이런 성공과 위상 때문에, 적들이 많을 법도 했는데 알고 보면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친구이자 아내의 오빠인 디오 카시우스만 하더라도, 귀족적이고 냉소적인 성격 때문에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와 병사들이
"저 냉소적인 인간이 두 번째 집정관이 되면, 죽여버리겠다."
는 이야기가 나와서, 율리아 마마이아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디오에게 은퇴 종용을 했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는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권세가답게 눈치가 빠르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호사가였으며 인간관계가 두루 원만했던 것이 컸다. 오죽하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장남이었던 당시의 공동황제 카라칼라 역시 그와 대화를 나눈 뒤, 견제 대신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따르며 큰 존경을 표시했다. 이는 10대 초반 이후, 잔혹하고 매우 비열했던 카라칼라의 성미와 행보상 의외였다.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제 손으로 죽인 이후,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어깨를 나란히 당대의 걸물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를 죽이고, 파피니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를 처형해 머리를 효수한 뒤, 로마에서 약 2만명을 제 기분에 따라 모조리 학살했다. 그럼에도 카라칼라는 킬로, 트라세아 프리스쿠스 등과 함께 처형될 것으로 모두가 확신한 마리우스 막시무스를 죽이지 않았다. 되레 그는 마리우스 막시무스를 만난 뒤부터 그를 매우 존경한다며, 그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찬사를 쏟아냈다. 이는 영악한 여걸로 평가된 시리아 출신의 여제들도 비슷해, 구제불능의 폭군 엘라가발루스는 마리우스 막시무스를 건들지도 못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친구 이상의 관계를 맺은 카라칼라 황제가 암살당하고, 율리아 돔나 태후가 자결한 이후, 마크리누스가 황제로 즉위한 뒤에 위기에 처할 법도 했지만 몰락은커녕 계속 승승장구했다. 마크리누스와 반(反) 카라칼라 진영의 원로원은 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비상사태를 책임질 중책을 내리면서,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수도 장관) 직을 손에 쥐어준 뒤, 원로원 전체의 생사여탈권을 맡기며 도움을 청했다.

이렇듯, 막시무스는 세베루스 왕조가 최대의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큰 권력을 누렸다. 그러다가 율리아 마이사가 곧 반격해, 세베루스 왕조를 부활시켰는데, 이때도 그는 신임과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그는 엘라가발루스 등장 속에서 근위대장,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소방대장을 겸직하며 4년 내내 거의 독점한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았고,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두 딸들, 즉 시리아 여제들은 그에게 계속 조언을 구하며 그를 옆에 두려고 했다. 그렇지만 막시무스는 친구인 디오 카시우스와 함께 엘라가발루스 황제에게 크게 실망하여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고, 코마존의 계획을 묵인하면서 엘라가발루스와 그 모후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몰락을 앞당겼다. 이후에도 그는 율리아 마이사에게 꼭 해야 될 조언을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율리아 마이사와 율리아 마마이아 모녀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새 황제로 즉위한 직후, 마리우스 막시무스를 계속 옆에 두고자 서기 223년 공동 집정관에 루키우스 로시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와 막시무스를 추천하여 그에게 생애 두 번째의 집정관직을 내렸다. 동시에 그에게 이례적으로 거의 1년 동안 집정관에 있도록 하면서, 황제 자문회의와 고문단 편성을 조언받았다. 하지만 막시무스는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임기를 채울 뿐, 정사에 깊이 끼어들지는 않았다.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동시대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처럼 본인 혈육에게 보결 집정관 자리를 주고자 편법을 쓰지 않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와 척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두 번째 집정관직을 마친 뒤, 마라우스 막시무스는 정계를 은퇴했고, 아내와 함께 수도 로마와 고향을 오가며 조용히 살면서, 자신의 일기와 자서전을 겸한 작품을 내놓았을 때에도 큰 소란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대략 230년대 후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카이사리에스》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디오 카시우스와 마찬가지로, 당대 원로원의 최고 권세가였음에도, 회고록과 역사를 결합한 책을 저술해 남겼다. 바로 12명의 황제들의 일대기를 기술한 《카이사리에스》이다. 다만 그는 그리스어로 적은 디오와는 달리, 고향인 푸닉과 실질적인 고향인 갈리아의 모어인 라틴어로 이 책을 저술했다.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친구이자 형님인 디오 카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정치 경력을 끝마칠 무렵 이 책을 지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회고록과 일기를 겸한 《카이사리에스》는 서기 4세기 후반까지 동시대, 그리고 후대의 로마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어느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지《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역시 하드리아누스 황제부터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경험한 세베루스 왕조의 역대 황제들까지의 기록은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술을 제1차 사료로 삼아 26번이나 참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귀중한 책은 필사본이 아예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책은 여러 번 회자되었고, 인용되어 간접적으로나마 저술의 스타일 및 몇 가지 기록은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카이사리에스》는 네르바 황제부터 엘라가발루스 황제까지 총 12명의 황제를 다뤘고, 이중 7명의 황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토대로 가쉽거리도 많이 붙여서 적었다고 한다. 즉, 친구이자 아내의 오빠 디오 카시우스와 마찬가지로 본인이 경험한 황제들에 관해선 그들의 깊은 내면까지도 묘사가 잘 된 셈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저서는 그 내용에 있어, 경박하고 출처가 어디인지 모를 홍등가와 길거리의 소문까지 거침없이 적어 놓아 당대부터 호사가들의 가쉽거리 모음집에 유력한 원로원 의원 실세의 경험담을 결합한 형식으로 평가받았다. 서구권에서 혹평하는 이들의 경우, 서기 2세기 경의 역사가이자 변호사이며 호사가였던 수에토니우스의 대표적인 저서인 《12인의 황제들》과 매우 흡사하고 허구의 이야기가 사실로 많이 적혀, 수에토니우스가 되살아나 다시 쓴 착각을 들게 한다는 악평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는 이 책을 직접 읽어 본 로마인들의 평가도 비슷했다. 그래서 그 평이 심히 좋지 않고 호불호가 분명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귀족적이고 냉소적이긴 하나, 역사가의 입장과 정치인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분석한 서술이 많은 디오 카시우스와는 달리,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책에는 "황제의 사생활이 이랬다", "그 황제는 어떤 면에서 구린 구석이 많았다"는 식의 기록이 많아 영양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술은 이 사람의 성격이 잘난 척이 심하면서도 호사가이고, 가십거리를 좋아한 특징과 특유의 처세술로 후손들이 피해를 입으면 안 되는 속사정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마라우스 막시무스가 이런 식으로 기술한 진짜 이유는, 그가 같은 푸닉 출신인 수에토니우스의 저서를 참조했고, 그 스타일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역사서의 정석으로 생각한 것이 컸다. 그렇지만 디오 카시우스의 경우, 당대를 휘어잡은 대정치가의 명성 그대로 아우구스투스 황제부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까지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냉철하게 분석한 면이 많아 막시무스의 책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는 혹평을 듣고 있다. 심할 경우에는 마리우스 막시무스에 대한 능력까지도 종종 의문을 표시하는 이들까지 나오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 저술의 평가가 안 좋아, 본래의 경력과 공적까지 폄하된 셈이다.

어쨌든 당대, 후대의 로마인 역사가들은 이 책에 관해 좋은 평을 내리지 않았다. 동시대 사람으로 동년배였던 헤로디아누스는 자신의 저서 서두에 이렇게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서를 간접적으로 평하면서, 그와 수에토니우스의 저술 방법이 얼마나 저열하고, 뜬소문에 기반한 이야기로 가득하다는 것을 언급해 그 방법과 작가의 의도를 차갑게 비평했다.
이러한 작가들은 이야기의 진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며, 특히 표현과 완곡한 표현에 주의를 기울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글이 사실에 근거가 없다고 해도, 여전히 독자를 얻을 수 있고 속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일부 작가들은 폭군을 혐오하고, 통치자, 국가 및 개인에게 아첨하거나 경의를 표하고 싶어 하기에, 분명한 진실의 빛보다는 그들의 말이 명석하게 하여,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건들이 빛을 발하게 한다.

헤로디아누스의 악평처럼, 후대의 로마인 역사가들 역시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그가 저술 방법으로 참고한 수에토니우스를 겨냥해 많은 비난을 퍼부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카이사리에스》에 관해 혹평을 날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정통성을 위해 대대적인 조작까지 감행했던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황실 전기 작가들 역시, 이 책을 26번이나 직접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에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때 발행된 책의 오류를 잡는 동안 마르켈리아누스처럼 이 책에 관해서
"추잡하고 저열하다."
고 비판을 날리다가, 참다 못해 점잖은 표현으로 의문까지 표시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런 이유를 근거로,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서가 인기를 끌었음에도, 동로마 제국 시대 당시 필사본과 언급된 문장을 많이 남긴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와는 달리 남아있지 않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지만 이런 비방에도 불구하고,《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어찌 되었던 간에,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서를 제1차 사료로 삼았고, 그가 저술 방법으로 활용한 무분별한 짜깁기나 폄하한 기록을 자신들의 1차 목적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정통성 확보와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정당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 아프리카 속주 또는 트리폴리타니아 속주로 추정.[2] 디오 카시우스로 흔히 알려진, 루키우스 카시우스 디오 코케이아누스의 여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