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 헤로디아누스 (Herodianus) |
이칭 | 안티오키아의 헤로디아누스 |
출생 | 178년 |
사망 | 미상(대략 고르디아누스 3세 시대까지로 추정) |
직위 | 수사학자, 로마 제국 황실 서기관, 시리아 코일레 속주 총독 보좌, 제국 공무원 |
가족 | 아일리우스 헤로디아누스(아버지 혹은 숙부, 추정) |
저서 | 《히스토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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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수사학자, 역사가, 공무원.동명이인의 수사학자인 아일리우스 헤로디아누스와 구분하기 위해, 흔히 안티오키아의 헤로디아누스로 불린다.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그리스 혈통의 로마인이었다.
2. 생애
사망일은 미상이나, 14세 무렵 아버지와 함께 황제의 초대장을 받고, 서기 204년 콤모두스의 전설적인 14일 간의 콜로세움 경기를 관전한 것을 보면 서기 178년생이 확실하다. 따라서 240년 경에 저술을 마칠 당시에는 대략 70세가 넘은 고령의 퇴직 공무원이었던 것이 확실하다.과거에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태생으로 알려졌으나, 저서 곳곳에서 나왔듯 아이깁투스(오늘날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고향인 아이깁투스 이주 그리스계 로마인으로 추정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헤로디아누스는 제국의 동부에서 뜨거운 감자같은 지역 갈등 사안인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중 어느 도시가 동부 최고의 도시인가'
라는 논쟁에서, 별칭인 '안티오키아의 헤로디아누스'와는 무관하게 알렉산드리아 편을 들고 있다.알렉산드리아, 로마, 카르타고, 알페스(오늘날의 알프스 산맥), 안티오키아에서 관직 생활을 했고, 대부분의 삶은 로마와 안티오키아에서 보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살았고, 본인과 친척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카라칼라 황제가 벌인 알렉산드리아 시민 대학살을 경험하거나 들었던 터라 아이깁투스와 시리아, 소아시아 일대에서의 경험이 저서 안에 잘 녹아 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출신 그리스인이나 안티오키아 출신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헬레니즘 세계의 그리스인 특유의 유연함과 로마 시대에 살고 있는 지중해 동부 지식인의 입장에서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를 상당히 재치있게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본인의 대표적인 저서이자 일기인 《히스토리아》 중 1권과 3권에서 드러나듯이, 어릴 적부터 황제 및 황실과 교류를 해온 상당한 명망가 출신으로 추정된다. 192년 아버지를 따라 콤모두스 황제의 기행을 직접 관람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개최한 대형 경기 역시 황실의 초대를 받아 관전했던 부분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따라서 가설로만 취급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뛰어난 수사학자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존중받고 교류를 해온, 아일리우스 헤로디아누스의 아들이라는 견해는 사실로 추정 중이다. 그렇지만 아직 비문이 발견되지 않아, 자세한 가계는 알 수 없다.
최상류 기사계급이며, 아일리우스 헤로디아누스의 아들로 부친 밑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 사람의 저술이나 사건 요약을 보면, 헤로디아누스가 어린 시절 교육을 받은 경험을 토대로 수사학자와 문법학자를 하면서도 관료 생활을 훌륭히 해온 것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말년부터 관직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그가 사용하는 단어와 법제 설명 등을 보면 황궁 서기관일 확률이 매우 높으며, 원로원과 팔라티노 황궁 내 분위기도 속속 꿰뚫는 능력 역시 매우 탁월한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히, 이 사람이 평가한 세베루스 왕조 내 권력구도와 원로원 내부 상황 묘사, 황제 장례 절차 설명과 묘사, 황제 순행 묘사와 로마 사회의 분위기에 대한 보고 등은 이 사람이 단순한 하위 관료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서기 240년경 마지막 저술을 마친 이후, 더 이상 기록을 남기지 않아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허나 이때 나이가 고령이었고, 관료에서 물러난 뒤 안티오키아에서 남은 삶을 보낸 것을 보면 고르디아누스 3세의 장인이었던 티메시테우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전투를 치르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3. 작품 특징
과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찬사를 받고, 일리리아 황제 이론이 정설 취급을 받을 당시에는 일개 하위관료의 넋두리 정도로 취급받을 정도로 평가가 분분했다. 더욱이 헤로디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당대의 일만 저술해, 다른 저자들과 달리 수에토니우스처럼 본인의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서술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도 받았다.하지만 2000년대부터 이탈리아의 로마, 티볼리, 오스티아를 시작으로 프랑스의 리옹, 네덜란드, 독일 서부, 튀르키예,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 등지에서 동시대 로마 비문들이 발굴되면서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 사람의 저서에서 나오는 내용처럼 서기 2세기 후반부터 서기 3세기 중반까지의 로마 제국 중앙 정계 인사들의 인적 사항이 일치한다거나, 제국 내 파벌 사이의 역학 구도가 일치하는 등의 모습은 사료의 특별함을 크게 높여 큰 주목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물론, 헤로디아누스가 지리학적인 지식이 부족해 197~198년의 파르티아 상황 등을 온전히 서술하지 못한 한계는 여전히 까이고 있다. 그러나 헤로디아누스의 저술은 여러 금석문 해석 등을 통해 그 가치가 상당히 특별해졌고, 이는 현대 로마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헤로디아누스는 황제나 원로원의 시각이 아닌 관료이자 지식인의 시각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부터 고르디아누스 3세까지를 평가해 디오 카시우스와 같은 원로원 중심의 사관이나, 이전 시대의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로 대표되는 황제 중심 사관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사람의 저술은 도덕적인 부분으로 논평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후 사태의 예견에는 신중한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분명해, 많은 주석을 요구하는 후세대의 빅토르와는 달리 수사체 특유의 깔끔함이 강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따라서 헤로디아누스가 저술한 《역사》 8권은 서기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붕어부터 238년 고르디아누스 3세의 즉위 과정까지 1인칭 시점에서 본 황제와 원로원의 다양한 모습을 중립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평가받고 있다.[1]
저서의 곳곳에 나왔듯이, 본인이 경험한 황제들 중 몇몇 인물에 대한 평가가 디오 카시우스와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뚜렷하다. 가령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평가할 때, 원로원을 때려 잡고 본다는 식의 뉘앙스가 많고 즉위 과정에서 보인 냉혹함을 강조한 디오 카시우스와 달리, 헤로디아누스는 원로원이 아닌 로마 지식인이자 관료의 시각에서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느낀 감정을 언급해 이 부분에서 학자들에게 그 특별함이 대단하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카라칼라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에 대해서는 디오 카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잔혹하거나, 너무 유약해 문제가 심각하다고 평가했으며, 툭히 후자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경우에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어떤 비난을 받았는지 세세히 적어 놓았다.
또한 헤로디아누스는 디오 카시우스나 타키투스 등과 달리 비(非) 원로원 의원으로서 그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부분도 폐부를 찌르듯 과감하게 서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그는 고르디아누스 1세가 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반기를 들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고르디아누스 일가의 야심과 개인의 야심이 제국을 혼돈으로 몰았음을 비판하고 있다.
헤로디아누스 쓴 저작의 또 다른 특징은 본인이 해당 직무를 담당하면서 본 바를 소상히 기술해, 생동감이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장례식 과정과 법적 절차를 상세히 묘사한 부분인데,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을 보면 하드리아누스 영묘에서 진행된 황제 예우에 따른 장례 절차의 의미 외에도 황궁 관료들이 했던 일들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황궁 비서관과 비비아 사비나 황후 개인비서 경력을 가진 변호사 출신의 서기관 수에토니우스와 묘하게 비교된다.
또 헤로디아누스는 일기 형식으로 서술하면서도, 이후 어떤 분위기로 제국의 혼란이 지속될건지에 대해서도 본인 스스로 예측하고, 본인이 들은 이야기는 확실히 기술해 본인의 체험 및 사실과 뜬소문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이는 자기 판단에 따른 헛소리를 써놓고, 소문까지 죄다 사실이라는 식으로 서술한 특징을 가진 수에토니우스와 분명한 차이점이다. 그래서 헤로디아누스가 쓴 저서의 8권을 읽어 나가면 생동감이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이 사람의 예측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묘한 재미가 있다는 평가도 있다. 또 그가 예측한대로 그대로 전개된 사건이 꽤 많아, 호사가로 비난받는 수에토니우스와 비슷하게 지식인이자 관료임에도 불구하고, 사태 파악이나 비평 능력이 상당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배경 때문에 서기 9세기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포티오스는, 이전 로마 역사가의 여러 기록들 중 헤로디아누스의 저서가 지닌 가치가 대단히 훌륭하다고 생각해 필사본을 만들었다. 이때 그는 헤로디아누스가 뛰어난 역사가이며, 모든 미덕에서 그보다 우월한 이는 없다고 호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