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1 02:50:03

고르디아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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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26대 황제
고르디아누스 1세
GORDIANVS 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98px-Gordian_I_Musei_Capitolini_MC475.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출생 158년
로마 제국 피리기아
사망 238년 4월 12일 (향년 80세)
로마 제국 북아프리카 속주 카르타고
재위 기간 로마 황제
238년 3월 22일 ~ 238년 4월 12일 (15일)
전임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후임자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부모 아버지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1]
어머니 : 셈프로니아 로마나[2]
배우자 파비아 오레스틸라
자녀 고르디아누스 2세, 이름 미상의 둘째 아들[3],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종교 로마 다신교
1. 개요2.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
2.1. 가문과 처가2.2. 출세가도와 경력
3. 황제 즉위와 반란4. 로마의 혼란5. 몰락6. 외모와 성격7. 평가 및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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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르디아누스 1세(라틴어: Gordianus I)는 여섯 황제의 해에 황제를 칭한 인물로, 군인 황제 시대를 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대항해 반란을 통해 황제를 참칭했다. 공동황제는 아들이자 이름도 비슷한 고르디아누스 2세이며, 재위기간은 238년 3월 22일부터 4월 12일까지 불과 15일에 불과하다. 다만, 공동황제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몇 시간 전 패사한 탓에 로마 제국의 77명 황제 중 가장 짧게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 타이틀은 아들에게 내줬다. 보통 아들, 외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함께, 고르디우스 왕조[4]로 분류되기도 한다.

고대 기록, 비문에 따른 이름은 고르디우스이며, 종종 그리스식으로는 고르디아스로 불렸다. 하지만 현대에는 보통은 고르디아누스로 알려져 있다.

고대전승기록 중 신뢰도가 가장 떨어지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는 외가, 처가가 모두 오현제 중 두 명의 황제 후손이라고 한 까닭에 한때 오래된 세습귀족 출신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발굴된 여러 금석문, 유물, 유적 등을 통해 고대기록상 주장된 내용들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 고르디아누스 1세의 비문에는 그가 소아시아 태생이라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고, 그의 일가는 시민권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일가에게 부여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또 처가 역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어떤 관련이 없는 집안이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1세는 오늘날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의 옛 프리기아가 고향인 그리스계 로마인으로 옛 안토니우스 일가의 클리엔테스 가문 태생의 자수성가한 부자이자 원로원 내 실력자 출신이라고 현재는 소개되고 있다.

함량미달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처음으로 반기를 든 실력파 원로원 출신 로마 황제인데다, 황제 참칭을 했다고 해도 원로원에게 정식 승인 받은 점이 4세기 콘스탄티누스 왕조 아래에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이는 고르디아누스 1세가 황제 참칭을 했다고 해도, 원로원의 추인을 거처 황제로 인정받았던 것이 컸다. 아울러 그와 그의 아들, 외손자가 이 당시 고대전승기록 내용이 아니더라도 로마 내에서 상당한 부자이자 교양인으로 명성이 대단한데다, 그의 생애 역시 상당히 훌륭했던 점이 컸다.

하지만 당대 지식인으로 로마 정부 관료를 오랫동안 지낸 역사가이자 수사학자 헤로디아누스는 이 사람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개인적 야심을 이용해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고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고 지적한 점을 볼 때 3세기의 무정부 상태를 확전시킨 부분에서는 현대 이후 3세기의 위기로 불린 50년간의 내전 과정 연구에서 크게 비판받고 있다. 그래서 그의 출신가문과 경력은 명문가의 후예가 아님에도 전임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대척점에 선 원로원을 대표하는 인사 중 한명이라고 평가받고 있고, 이 인물에 대한 평은 현대에 이르러 비밀이 하나씩 풀리면서 과거처럼 좋게만 평가되지 않고 있는 중이다.

2.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

2.1. 가문과 처가

황제를 선언한 뒤에는 아프리카누스(Africanus)를 붙여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Africanus Augustus)를 존호로 삼았다. 이전까지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의 주장에 따라 외가, 처가는 오현제 중 두 명의 황제 후손이며 고르디아누스 1세 역시 제정 이전부터 대대로 세습귀족이었다고 한때 정설처럼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1세는 159년 소아시아 지방의 프리기아(Phrygia)에서 태어난 그리스계 사람으로, 같은 해 원로원에 옹립된 푸피에누스, 발비누스나 이후 등장할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갈리에누스 부자(父子)와 달리 제정 이전부터 대대로 원로원 의석을 세습한 가문 사람이 아닌 원로원 의원이다.

대개의 로마인처럼 고르디아누스 1세 역시 즉위 전 전체 이름에서 드러나듯, 이름을 통해, 가계와 혈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본명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이며, 고대 기록과 비문에서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우스로 적혀 있고, 당대 사람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보통 고르디우스라고 불렸다. 이중 가문의 이름이자 그를 부른 이름인 고르디우스(Gordius), 고르디아누스(Gordianus)는 모두 이 사람의 혈통과 출신이 그리스인 중 가문 조상의 기원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나톨리아 지방의 갈라티아 또는 카파도키아 사람이라는 뜻임을 알려준다. 고르디아누스라는 이름 명사의 뜻 자체가 프리기아의 중심도시 중 하나인 "고르디움 사람"을 뜻한다고 확언한다. 따라서 학자들은 고르디아누스라는 이름에서 이 사람과 그 가문의 기원이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는데, 고르디우스 가문 비문이 발견된 앙카라와 옛 프리기아 지방 유적 등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는 이 지역 출신 로마인임이 확인된다.

그의 로마 시민 이름 중 그의 프라이노멘(이름명)과 노먼(본관 성씨)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고르디아누스 1세의 부계 조상들은 공화정 후기 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또는 안토니우스의 딸 중 한명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은 해방 노예의 후예 내지 안토니우스 가족들의 클리엔테스임을 알려준다. 이는 소아시아에서 발견된 그의 비문, 그의 첫 경력이 안토니우스가 창설한 제4 스키티카 군단에서 시작된 것에서 재차 확인된다. 이 외에도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안토니우스 가문과 관련된 사람의 후손으로 추측되는 또 다른 이유는 안토니우스의 직계 후손들은 프라이노멘으로 마르쿠스라는 이름을 키케로 아들이 입안해 통과시킨 법으로 못 짓는 상황인 반면, 클리엔테스 후손들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라는 이름을 넣어 사용이 가능했던 것도 있다.

따라서 그의 집안과 가문 자체는 일단 제정 중기를 넘어선 3세기 당시 얼마 남지 않은 명문가이며 공화정 후기부터 400여 년 동안 의석을 가진 가문이라고 고대 기록에서 주장되고 있는 내용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 제위 정통성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고르디아누스 가문을 띄워주기 위한 체계적인 조작으로 결론나고 있다. 왜냐하면 아나톨리아 일대에서의 2000년대 이후 발굴로 그의 이름과 현대 시대에 발굴된 비문 해석 이후 어느 정도 비밀이 풀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존 기록들과 달리 현대 연구가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를 명문가의 후예로 보지 않는다.

이 외에도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라는 책은 3세기때 제위에 오른 여러 황제들의 경력들이 당시 로마에 없는 등의 오류 투성이고, 황제들의 가계도 역시 당시 로마를 지배한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당시 지배계층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5] 그래서 이 책을 기반으로 한 주장 중 상당수는 과거와 달리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이런 현재의 연구들처럼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앤소니 브래들리는 그동안 다른 현대 연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연구를 통해 비슷한 입장을 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와 그의 아들, 외손자는 훗날 공동황제에 오른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6]처럼 로마 공화정 시절부터 내려온 명문귀족의 후예는 아니었으며 소아시아 속주 태생의 기사계급에 속해 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즉, 고르디아누스의 집안과 가문 자체는 일단 제정 중기를 넘어선 3세기 당시 얼마 남지 않은 명문가이며 공화정 후기부터 400여 년 동안 의석을 가진 가문이라고 고대 기록에서 주장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며, 그는 이 시대 등장한 기사계급의 신참자 원로원 인사였던 것이다.

사실 제정 시대에 이르게 되면서 공화정 시절부터 의석을 대대로 가진 명문가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고, 남아 있는 가문들 역시 과거처럼 위세를 떨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속주 출신으로 원로원에 입성한 이들은 계속 늘어났는데, 제국 동방의 그리스, 소아시아 일대 출신 신참자들은 여러 속주 중 원로원 진출이 꾸준했고 많았다. 당장 이전의 세습왕조인 세베루스 왕조만 보더라도 왕조를 개창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본인 대에 원로원에 입성한, 이탈리아계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이었고, 세베루스 시대에 이르러 원로원이 인위적으로 재개편될 당시 많은 수를 차지한 사람들은 대개 제국의 동방, 특히 그리스와 소아시아, 레반트 일대였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당시 원로원의 이런 시대적 흐름처럼, 고르디아누스 1세 역시 본인 대에 이르러서야 원로원 의석을 꿰차고 자녀에게 물려주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문제가 많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의 어머니는 울피아 고르디아나(Ulpia Gordiana)라고 하며, 그는 외가를 통해 트라야누스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아내 파비아 오레스틸라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증손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르디아누스 1세의 어머니와 아내가 진짜 트라야누스의 피를 이어받은 친척인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증손녀인지에 대해서 오늘날 현대 사가들은 이 역시 모두 거짓이며, 이런 여성들의 이름들은 이 저서를 지은 이들이 만든 허구의 인물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프랑스의 역사가 크리스티안 세티파니는 이 분야에 대한 조사를 많이 했는데, 그는 연구를 통해 고르디아누스 1세 가계를 분석했다. 이 학자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가족들은 부계와 모계 중 어느 곳에서도 트라야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후예라는 증거가 없고 여타 다른 로마 귀족의 후예도 안 보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오히려 고르디아누스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가 셈프로니우스 가문 출신인 셈프로니아 로마나라는 것을 언급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그와 현대연구자들은 그의 모친 또는 조모가 진짜 셈프로니우스 가문인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의 어머니와 외가 가계상 그가 로마의 아주 오래된 평민귀족 가문인 셈프로니우스 가문과는 전혀 혈연적, 사회적 관계가 없다고 한다. 고르디아누스 1세의 풀네임 중 그라쿠스 형제의 집안이 속한 씨족으로 유명한 셈프로니우스 일족의 피가 흐른다는 의미를 내포한 셈프로니아누스라는 이름 해석도 의미가 없다고 한다. 즉, 그는 외가를 통해서 셈프로니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을 살펴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지적 중 셈프로니아 로마나가 고르디아누스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일 수 있다는 주장을 지지하고, 그 반대 주장 일부를 반박이라도 하듯이, 튀르키예앙카라, 옛 프리기아 일대에서 발굴된 여러 비문 중 셈프로니아 로마나의 남편 추모비 연구 아래, 고르디아누스 1세의 가계가 세티파니의 주장이 일정 부분 맞을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 비문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의 어머니로 추정된 셈프로니아 로마나는 법무관 예비 지명자 신분이 된 직후 사망한 남편을 위해 장례식, 추모 비문을 세웠다. 이 비문에 따르면, 황실 비서를 지낸 티투스 플라비우스 셈프로니아누스 아퀼라,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여자형제 클라우디아의 딸인 셈프로니아 로마나는 법무관 지명을 선사받고 얼마 뒤 세상을 뜬 남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를 추모했다. 여기에서 세티파니로 대표된 학자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 묘비명 등을 비교해, 셈프로니아 로마나의 남편인 해당 인물이 고르디아누스 1세의 아버지로 일명 '마이키우스 마룰루스'가 일정 부분 지어낸 이름임도 밝혀냈다.

이렇게 된다면, 고르디아누스 1세의 아버지 이름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 되며, 멸실 등으로 해석되지 않은 이름 뒤는 고르디우스 혹은 고르디아누스일 확률이 높음도 추가 확인된다. 또 고르디아누스 1세 가계를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연결 지은 부분도 해석되게 된다. 그 이유는 고르디아누스 1세의 어머니가 확실해 보이는 셈프로니아 로마나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친척 안니아와 결혼해 인척이 된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조카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그의 가계 조작은 완전히 터무니 없는 가계를 연결지은 것은 또 아니게 되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런 연구처럼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수성가한 군 장교 출신 작가, 사업가, 교육가가 단순히 아님도 확인된다. 자수성가한 인물로 신참자인 것이 맞지만 애초부터 엄청난 부자로 그리스, 아나톨리아 일대에서도 손 꼽히는 최상류 기사계급 출신인 것이다. 아버지가 원로원 의원이 아니더라도 많은 재력으로 법무관 지명 후보가 됐고, 어머니가 황실 비서와 당대 최고의 소피스트이자 자선 사업가, 교육자인 헤로데스 아티쿠스 여자형제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즉,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처럼 본인은 신참자이더라도, 이미 그리스, 아나톨리아 일대에서는 최상류층 출신이 고르디아누스 1세라고 해석될 여지가 많은 셈이다.

하지만 믿을 수 없어 위서로 분류 중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주장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아내로 고르디아누스 2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의 어머니로 주장되는 파비아 오레스틸라라는 인물은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인물인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전직 집정관 마르쿠스 안니우스 세베루스의 자녀로 추측되는 로마 내 상류층 출신이거나 그리스 혈통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여성인 것 역시 사실이 아닐 확률이 여러 비문 등을 토대로 보더라도 지어낸 것이 맞다는 이야기이다.

2.2. 출세가도와 경력

고르디아누스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좋은 집안 태생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2남 1녀 또는 2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이중 이들 부부의 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Antonia Gordiana)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히스파니아[7] 태생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로마 명문 원로원 가문 출신의 원로원 의원 발부스와 결혼했다[8]고 하는데, 고르디아누스 1세의 사위가 진짜 그 발부스인지도 의문이고, 이 역시 이 기록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아들은 두명이 있었는데, 장남은 고르디우스로도 알려진 고르디아누스 2세이며, 둘째 아들은 이름 미상이다. 차남은 고르디아누스 3세 시대때에 원로원 의원, 근위대장을 지낸 고르디우스라는 말이 있다.

엄청난 부자였던 고르디아누스 1세는 상술했듯이 고대 기록처럼 타고난 원로원 내 명문가 자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당시 원로원 의원 중 대표적인 최상류층으로 기록될 정도로 성공했다. 그는 집정관까지 올랐고, 자신의 가계를 스스로 트라야누스와 그라쿠스 형제와 연결시켜 신참자였던 자신과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9] 또 그는 원로원 입성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는 동안 세베루스 왕조 시절 내내 평판이 상당이 좋았던 인사였다.

오늘날 연구들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는 젊은 시절 고향 소아시아와 가까운 시리아 속주에서 제4 스키티카 군단에 몸담은 군인으로 복무한 뒤, 이 군대를 지휘했다고 하며 젊은 시절부터 수사학과 그리스 고전 문학 연구 및 교육 부분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런 경력은 고르디아누스가 시리아 속주 일대에서 수사학, 저서 활동, 사회공헌 활동을 하며 명성을 얻고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는 기반이 됐다. 하여 고르디아누스는 오랫동안 몸담은 제4 스키티카 군단 지휘관을 시작으로, 로마 중심 사회에 진입해 세베루스 왕조를 지지하는 행보를 통해 원로원의 일원이 됐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이 넘었다.

원로원 의원이 된 이후, 젊은 시절부터 쌓아 놓은 교육자, 문예후원 사업가, 사회 공헌 운동가 경력을 활용해 명예로운 경력을 거치며 호화롭고 장엄한 분위기의 그리스식 공연, 스포츠 경기 등을 개최해 일반 서민들에게 무한한 인기를 얻게 됐다고 한다. 하여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시대동안 막대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고, 본래부터 성격도 완만하고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라서 타고난 귀족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성공가도는 당시 황제인 카라칼라에게 그가 제대로 찍히는 결과로 이어져, 고르디아누스는 이 위기를 타개코자 잠시 은퇴하는 척 하고, 《안토니니아스》로 알려진 카라칼라 찬송 장편서사시를 손수 저술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 작품의 완성도와 수준이 대단해, 카라칼라는 이에 크게 흡족해했고 이를 계기로 의심에서 벗어나 복귀 후 더 높은 관직, 영예를 두루 누렸다고 한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1세는 로마인들이 "명예로운 코스"라고 불리는 엘리트 코스는 죄다 지냈다. 세베루스 왕조 시대동안 그는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법무관, 집정관을 역임했는데, 대개의 부유한 신참자들처럼 고르디아누스 역시 50대에야 이 경력을 밞고 60대의 나이에야 집정관에 올랐다. 영국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엘라가발루스 때인 218년경 하(下)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을 지냈다고 한다. 즉, 엘라가발루스 시대 때 이르러, 자신이 가진 부와 명예를 동원해 신임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모든 선출직을 역임해 60대 초반에서야 귀족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따라서 고대 기록의 주장과 달리 일반적인 세습 의원, 능력이 탁월한 신참자나 몰락귀족 출신으로 원로원에 복귀한 이들과 달리 50대 후반이 되어도 집정관이나 법무관 자리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다가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의 도움을 받아 고속 승진하게 된 케이스에 가까웠다. 즉, 모양새는 능력이 있어 보이지만, 마냥 포장하기 어려운 신참자였던 셈.

그렇지만 고르디아누스 1세는 3세기 무렵, 로마 원로원 가문태생은 아니었지만 자수성가한 신참자 중 당대 최고의 엘리트 귀족 반열에 올라간 사람이 됐다. 그래서 즉위 직전 그는 엄청난 부를 축적해 로마 최고의 부자 중 한명이 됐고, 로마 7언덕 중 하나인 카일리우스 언덕[10]]에 위치한 유서깊은 저택[11]을 구입해 살았다. 거기에다 오늘날 ‘보르가타 고르디아니’라고 불리는 호화로운 별장도 가지고 있었다. 로마 도심에서 5km 떨어진 교외에 위치한 이 별장 저택은 라치오에 그 일부만 남아 있는데, 규모만 보더라도 세베루스 왕조 시대 동안 고르디아누스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단번에 설명해주던 곳이다. 비싼 운송료가 드는, 원산지가 다른 최고급 대리석 원기둥 200개[12]가 원형으로 회랑을 이루어 둘러진 저택으로 고급 빌라가 하나의 웅장한 형태로 되어 있고, 비싸기로 유명한 기둥들이 대저택의 안뜰을 한 바퀴 휘감은 구조였다.

고르디아누스는 소아시아 태생의 그리스계로 수백년째 로마시민권을 세습한 로마인이었지만, 제국의 중심인 원로원 내에선 신참자였다. 하지만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처럼 말단병졸에서 승진해 대대장 신분으로 황제까지 오른 순수군인이 아닌, 소위 말하는 군단장급까지 군경력을 쌓고 의석을 제 힘으로 차지한 원로원 내 실력자였다. 또 이 사람은 온건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졌는데 원래부터 문학적 기질을 타고난 교양인인데다 꼼수를 사용해 적을 만들거나, 자신이 쌓아올린 부를 과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는 세베루스 가의 황제들과 원로원 동료들에게 평판이 상당히 좋았다.

또 그는 원로원 입성 후 ‘명예로운 경력’을 역임한 상태였는데, 이때도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 ‘명예로운 경력’은 말 그대로 명예직이 많았기에 공화정, 제정 초기의 엘리트 원로원 귀족들과 달리 군대 경험이 없어도 신참자가 사회최고지배층이자 귀족으로 인정받는 척도 중 하나였다. 그런데 고르디아누스는 과거의 명문가 엘리트들이나 앞 세대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처럼 장교, 군단장으로 재직한 엘리트였고, 이 경력들을 지내면서 까칠한 카라칼라한테도 미움조차 안 받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능력이 뛰어나고 돈도 많은 고르디아누스는 신참자 출신 원로원 의원 중 자연스레 로마귀족의 전형 중 한명이 됐다.

상술했듯이 고르디아누스 1세는 군경력과 행정, 정치 경력을 두루 거치는 동안 고전 문학을 사랑했고, 특히 그리스 문학에 정통했다. 그래서 그는 폭군 카라칼라 시대 때 오현제 시대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태평성대를 다룬 20권의 서사시를 지어 책으로 만들었고, 웅장하고 스케일이 큰 각종 게임과 공연들을 주최해 상당한 명성과 부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 이런 그의 행동은 카라칼라에게 의외로 견제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고르디아누스 1세가 워낙 신중하고 황제에게 조심했던 성격 때문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고르디아누스는 명예로운 경력을 지낸 엘리트들이 사회기부활동을 하는 전통을 피하지 않았다. 따라서 6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도서관을 지어 이를 로마 시민들에게 공립도서관처럼 개방했고,[13] 세베루스 왕조 시대 내내 재산을 축적한 뒤에도 문학가, 시인, 예술가 등을 후원하는 것에도 열성적이어서, 그리스 작가인 플라비우스 필로스트라토스는〈소피스트들의 생애〉를 그에게 바치기도 했다.

3. 황제 즉위와 반란

전형적인 로마 최상류층 출신은 아니지만 차근차근 경력을 쌓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황제였던 시절, 고령의 나이임에도 전직 집정관 신분으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속주총독으로 파견됐다. 일반적으로 전직집정관 자격으로 파견되는 원로원 속주 성향상, 본인이 꿀보직 중 꿀보직인 아프리카 속주를 점찍어놓고 출마해 간 것으로 보이는데,[14] 80이 다 된 나이에 뜯어낼 거리도 많고 평화로운 원로원 관할 속주총독에 아들과 같이 파견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은퇴 직전인 그가 마지막에 한몫 단단히 챙기고 물러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파견된지 1년도 안 된 238년 초, 아프리카 프로콘술[15]임에도 인근의 푸닉 현지의 부유한 젊은 지주들의 반란에 편승해 그들을 도와서 공무원, 세리 등을 죽이고 이들의 지지를 받아 추대하는 방법으로 황제로 선포됐다. 이는 명백한 반란이며, 로마 제국의 참칭 형태 반란 중에서도 질 떨어지는 형태였다. 그래서 이를 의식한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는 뒤에 원로원에게 밝히길, 자신들은 맨처음 마지못해 티스드루스에서 황제 선포를 했다며 자신들의 대의가 정당했으며, 국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

먼저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카르타고로 들어가면서는 아예 황제를 상징하는 보라빛 망토를 포함해 온갖 장신구를 착용했고,[16] 선포 직전부터 이미 황제가 된 듯 월계관을 쓰고, 주변에는 현지 청년 중 키가 크고 강건한 이들을 차출해 로마 근위대 병사들이 연상되는 복장을 입히고 그들에게 파스케스를 들게 했다. 이에 대해 동시대 사가 헤로디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들이 황제와 일반 관료를 구분짓는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신성한 불'이라고 불린 황제를 뜻하는 각종 권위를 주변에 모조리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당시 카르타고 시는 헤로디아누스의 증언처럼 아이깁투스[17] 알렉산드리아, 시리아 코엘레의 안티오키아와 제국 내 두번째 도시를 놓고 다툰 최대 도시였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푸닉 농장주들의 반란을 묵인하고 그들에게 옹립된 형태로 황제가 됐을 때, 그들이 거처를 카르타고로 옮긴 것은, 이들이 로마 내 세력들과 장기전도 각오할 준비를 염두에 뒀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고르디아누스 부자 역시 맨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제위를 차지하겠다며 덤벼들지 않았고, 아프리카 속주 일대 청년들이 자신을 찾아왔을 당시엔 매우 긴장했다. 동시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이때 일에 관해 공무를 마치고 쉬고 있던 고르디아누스에게 막시미누스가 보낸 관료를 살해한 청년들이 보라색 망토를 건네 주면서 일방적으로 "고르디우스 아우구스투스"라고 부르면서 황제로 선포하자, 본인이 너무 늙었다며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이유는 함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청년 무리 대표는 부임 당시부터 막시미누스를 미워했던 고르디아누스의 태도를 상기시키며, "당신은 황제가 되는 영예를 누릴 것이며 우리가 행한 행위는 처벌이 아닌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자신들이 총독 관저를 지키는 경비병을 제압 후 왔음에도 추가 명령을 내리지 않음을 지적했다. 동시에 그들은 고르디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권력을 쥐고 싶지 않다면 자신들을 벨 것을 청했다. 그러자 고르디아누스는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항의하며 양해를 구했고, 다시 한 번 청년 무리가 황제가 될 것을 청했다. 이에 고르디아누스는 자세를 바로 잡고, 보라색 의상을 입은 다음, "이를 수락하겠노라."고 선포했다고 한다.
그는 명성을 갈망했고, 개인적인 만족 없이는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황실의 영광을 떠올리며 현재의 위험보다는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는 쪽을 선택했으며, 필요하다면 지옥 속에서 죽는 것도 그렇게 끔찍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즉시 아프리카 전체가 흥분했다. 그곳 사람들은 막시미누스의 명예로운 상징을 철거하고 고르디우스의 그림과 동상으로 도시를 장식했다. 그들은 그의 제호에 아프리카누스를 추가하여 그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부여했다. 리비아인들은 라틴어로 아프리카인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헤로디아누스

이 선포 당시, 고르디아누스 1세는 고령이었고 아주 부유한 신참자 출신 원로원 의원으로, 교양이 풍부하고 여러 문예 후원을 베푼 개인적 매력과 별개로,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인망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 중이었다. 따라서 그는 청년들에게 청해 함께 있던 같은 이름의 아들 역시 함께 황제로 선포해달라고 했다. 이렇게 함께 제위에 오르게 된 인물이 고르디아누스 2세였다. 그렇지만 이런 결정에는 고르디아누스 1세가 고령으로 언제 사망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본인 상황을 인정하면서, 인망 많은 본인과 달리 압도적 지지를 장담할 수 없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 인기를 드높이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는 나이가 많아서 아들을 자신과 연관시키려고 했다. 며칠 후 고르디우스는 시민과 지역 정치 지도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카르타고 시에 입성했다.
헤로디아누스

그럼에도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를 옹립하고 지지한 현지 농장주와 청년 무리들은 걱정이 많았다. 첫 번째 고민은 원로원 설득, 두번째 고민은 바로 옆 속주로 군대를 쥐고 있어 반드시 지지 세력으로 만들어야 할 카펠리아누스 포섭 문제였다.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는 막시미누스라면 이를 갈고 있던 원로원 입장을 알고 있어, 본인들이 로마 원로원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카르타고에서 황제 노릇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는 자신의 친구, 친척들에게 서신을 보냈고 원로원 내 유력 인사들에게도 서신을 보내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담당한 이는 휘하에 있던 아프리카 속주에서 근무 중인 재무관이 중간 관리자가 되어, 총독 관저에 근무 중인 백인대장, 대대장들이 파견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때 그가 보낸 서신은 모두 황제만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제작된 밀봉 형태의 밀랍판이었는데, 이후 행동은 매우 용의주도했다. 카르타고 입성 전에 황제 자격으로 막시마누스 트락스가 보낸 자들을 죽여 버렸고, 로마에 있던 가족과 친척들에게 서신을 보내 막대한 부를 이용해 로비를 펼쳤다. 이윽고 그는 원로원 유력 인사들에게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을 대상으로 공개서한을 보내며 아프리카 속주민과 로마의 공고한 연합만이 가장 야만스럽고 경멸적인 트라쿠스를 제거할 수 있다고 간곡히 호소했다.

그런데 이런 평화적인 호소 외에는 무척 비열한 방법이 많았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속주 안에서는 정보가 새어 나갈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본인 지지자 외의 인사들을 추방했고, 이전까지 했던 재판 판결 중 유죄판결을 받은 인사들의 판결을 재심해 모두 사면하고 자기 편으로 포섭했다. 아울러 망명자들에게도 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꼬셨다. 동시에 그는 친구, 친척, 지지세력을 통해 근위대 병영에 사람을 보내, 자신을 지지해주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을 즉시 주겠다고 약속하고 로마 거주민 모두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큰 선물을 주겠다고 발표까지 했다. 이렇게 되니, 근위대와 평민들은 고르디아누스의 즉위를 일단 반겼다.

이런 상황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는 원로원과 상의를 하는 와중에, 막시미누스의 프라이토리아 근위대장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비탈리아누스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까지 몰래 파견했다. 이때 일에 대해 조시무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황제 참칭 직후 이런 일을 벌인 뒤 신속히 로마에 사람을 보내 발레리아누스에게 자신들의 황제 참칭이 문제가 있어도 원로원에서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했다고 한다.[18] 동시대 사가 헤로디아누스의 기술은 더 구체적이다. 이 사람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는 비탈리아누스가 자신들의 즉위를 반대하고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의심해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탈리아누스는 가장 야만적이고 잔혹한 막시미누스의 행동을 따른 것이 사실이었고, 막시미누스와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고 한다.

비탈리아누스 암살은 매우 비열하고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진행됐다. 후일 원로원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탄핵하면서, 처형 형태로 포장됐지만 고르디아누스는 비탈리아누스에게 교섭을 요청해 서신을 보낸 다음 그가 고르디아누스의 인장이 맞는지 확인하는 틈을 타서 준비된 단검으로 무참히 찔러 죽였다. 이를 담당한 이는 신체가 매우 강건하고 건장한 이로 고르디아누스 부자 휘하 재무관으로 신분을 위장한 암살범이었다고 한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보낸 암살범이 비탈리아누스를 암살했을 때, 근위대와 비탈리아누스 가족들은 도리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비탈리아누스를 살해했다고 여겼다고 한다. 그 이유는 트락스가 재위 기간 내내 제 부하라도 마음에 안들거나 수틀리면 총독이나 원로원 인사들 이름을 도용해 암살했기 때문이다.

4. 로마의 혼란

비탈리아누스가 암살되자,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보낸 사람들과 고르디아누스 가문 사람들은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비탈리아누스가 야만족 황제에게 살해된 양 소문을 퍼뜨렸다. 이렇게 되니, 집정관들과 원로원, 로마시민들은 막시미누스가 또 잔혹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겁에 질렀다. 이미 막시미누스 트락스의 무능함과 잔혹함, 독단적인 행동으로 여론은 황제를 갈아치워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한 터라 로마 시의 치안은 불안해졌다.

이런 흐름 속에, 4월 2일 고르디아누스 1세가 보낸 편지가 원로원에 도착한다. 이는 철저한 각본대로 이뤄진 까닭에, 원로원 의원들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공개서한으로 보낸 약속을 이행한다면 그를 인정해주겠다고 떠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리카 속주에서 황제로 추대된 고르디아누스 1세가 쓴 편지가 그해 집정관인 율리우스 실라누스의 낭독으로 동료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발표됐다. 실라누스의 대리 낭독이 끝나자마자, 원로원은 다시 한 번 그들이 모든 약속을 이행한다면 좋겠다고 답변한 다음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황제로 추대했다. 이때 원로원은 새 황제의 요청에 따라 막시미누스 트락스를 '국가의 적(공적)'으로 선포한 뒤, 다음 날 아침 <원로원 통고문>으로 제국 각지에 이를 알린다.

그런데 이때부터 로마 상황은 심각해진다. 고르디아누스 부자 즉위 이후, 고르디아누스 가문 지지자들이 꾸린 자경단과 그 측근들의 사적 보복으로 수도 로마는 난장판이 됐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밑에서 근무한 관료, 세금징수원들은 고르디아누스 가문 지지자들에게 잡혀 살해되고 하수구, 테베레 강으로 던져졌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동상들은 보이는 족족 파괴됐고, 의문을 제기한 이들은 고발된 뒤 모조리 처벌받았다. 고르디아누스 지지자 중 일부는 떼를 지어 자신들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살해하고 행패를 부렸다. 그들은 원로원을 향해 돌을 던졌고 수도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에 치안을 책임지게 된 도시 장관 사비누스는 치안 유지를 앞에서 진두지휘하다가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순직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해 헤로디아누스는 이때 벌어진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행동을 가리켜, 내전이 시작됐다고 평했다.

5. 몰락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현지의 젊은 귀족들이 로마 정부가 파견한 재정대리인을 살해할때 "막시미누스의 폭정 탓에 벌어진 일이다"고 했다고 주장했어도, 또 막시미누스의 행동이 분명 모든 로마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다스리던 속주는 1천 명의 군단병이 경비병 형식으로 주둔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원로원의 도움에도 두 황제에겐 확실한 무력수단이 전무했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누미디아 속주 총독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고르디아누스 1세가 아들을 공동황제로 선포해달라고 요청해, 함께 황제가 됐음에도 현지 농장주와 청년 무리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걱정했다.

당시 누미디아 총독은 막시미누스 사람이 아니었지만 총독과 원로원 의원,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을 최대 가치로 여기던 카펠리아누스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혁 이후, 누미디아 속주는 아프리카 속주에서 정식 분리돼 원로원 의원 중 법률가이면서 야전사령관 경력이 있는 사람을 파견한 자리였는데[19], 카펠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와는 로마에 있던 시절부터 이런 저런 이유로 상호간에 악감정이 있던 원로원 동료였다. 이들의 관계에 관해, 동시대 사람 헤로디아누스는 이들이 로마에서부터 정치적 견해로 사이가 매끄럽지 못했는데, 이 사건 전의 소송 문제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가 카펠리아누스 총독을 대놓고 아랫사람 취급하면서 무시한 일로 인해 양측 관계는 최악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적었다. 그리고 이런 관계처럼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와 카펠리아누스는 양 속주가 함께 처리하는 재판 분쟁에서 법률 해석과 판결 문제를 놓고 끝내 원수가 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말로 구워 삶아 본인 편으로 포섭해야 될 카펠리아누스에게 하지 말아야 될 행동을 벌였다.

먼저 두 사람은 황제를 선포하자마자, 편지를 통해 원로원에게 북아프리카 일대의 유일한 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는 제3군단을 통제한 카펠리아누스를 즉시 해임할 것을 요구했다.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 공동의 이름으로 카펠리아누스를 탄핵하면서 대놓고 범법자 내지 반역자 취급을 했는데, 세습 원로원 의원으로 형제와 친구들이 원로원 곳곳에 포진한 카펠리아누스에게 이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말이 안 됐다. 동시에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는 원로원의 승인이 떨어지기도 전에, 막시미누스를 지지하진 않더라도 적대감이 없던 카펠리아누스에게 선을 넘는 행동을 한다. 황제를 선언하고, 원로원 승인도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누미디아 속주로 사람을 보내 카펠리아누스에게 "반역죄로 처벌받고 싶지 않으면, 그 지방을 떠나라."고 명령하고, 후임자라며 두 사람이 밑에 두고 부리는 사람을 파견까지 했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니, 카펠리아누스는 폭발했다.

이 사건에 관해 동시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는, 새 황제들의 편지와 원로원의 포고문이 제국 전역을 통해 발표될 당시, 카펠리아누스는 원로원의 부탁에도 자신의 명예를 공개적으로 손상시킨 두 황제를 지지해줄 생각이 없었고, 공동황제 두 사람이 사적 감정을 이유로 자신의 해임을 명령했다는 것에 크게 화가 났다고 한다. 이는 다른 지방 속주 총독들도 대부분 비슷해, 어떤 총독은 공문을 전달하려고 온 이를 붙잡아 고문을 하고, 그들을 반역죄로 죽였다고 한다.

카펠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와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세를 몰수할 당시, 이를 행정적으로 같이 처리하면서 공적, 사적인 문제로 고르디아누스 일가에 대해 앙심을 품었고 감정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은 소송 탓인데, 이 사건 직후 양측은 원수 비슷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측이 일방적으로 "카펠리아누스를 해임시켜라"고 말한 것은 이들 부자가 몰락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더욱이 2014년 도널드 왓슨의 저서에 따르면, 원로원이 행동하기 전에 고르디아누스 1세가 마음대로 카펠리아누스 후임자를 파견했다고 하니 이 행동이 카펠리아누스, 원로원 모두에게 어떻게 해석되었을지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지지해준 원로원은, 이들을 환영하며 황제로 승인할 뿐 마냥 지지하진 않았다. 원로원이란 집단은 공화정 이래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이 벌어지는 동네였고, 원로원을 주름잡고 있던 의원들 역시 각자의 가문, 출신지에 따라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 중이었다. 더욱이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판단과 달리, 원로원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는 것을 우선시한 터라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부유하다고 한들 의원 전체가 이들을 온전히 지지해줄 일이 만무했다. 원로원 안에는 고르디아누스 부자보다 더 뛰어난 경력을 갖춘 이들이 즐비했고, 카펠리아누스와 친분이 있는 이들도 많이 있어 이들 부자의 서한이 낭독되었을 때 상황은 두 사람의 계산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런 걱정처럼, 발레리아누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 원로원 중진들은 혼란해진 로마 상황을 지켜본 뒤, 고르디아누스를 지지했어도 온전히 두 사람을 따라 줄 이유는 크게 없다는 듯 행동했다. 어떻게 보면, 이들 입장에서도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자신들에게 모든 비난과 후폭풍을 떠넘긴 셈이니 온전히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 정상이었다.

이런 속사정으로 원로원은 상술한 것처럼 통고문 형태로 제국 각지에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황제라고 알림에도, 정작 카펠리아누스를 해임하지 않고 "새 황제들이 당신을 껄끄러워 하는 것 같다."며 어쩔 수 없이 일단 총독직을 물러나 귀국하는 게 어떠냐고 권고만 했다. 즉, 원로원에서는 흐름을 눈치채고 법적 책임과 개인적 책임까지 온전히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안고 가게 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카펠리아누스는 원로원 권고대로 물러나도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것이 불보듯 뻔해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며 은근슬쩍 이 싸움에 끼지 않은 원로원에게 그 권위를 생각해 권고만 참고하겠다고 하면서, 원로원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다.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계속된 협박을 받던 중, 원로원의 입장이 적힌 포고문과 서한을 받은 뒤, 결심을 굳혔다. 그는 포고문을 받은 직후 조용히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로마 속주 총독의 의무와 책임을 이유로 그동안 베르베르와의 전투를 통해 단련된 제3군단 병력을 이끌고 그대로 카르타고로 처들어간 뒤 즉시 이들 부자를 공격했다. 부임 이후 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규율을 엄히 한 야전사령관인데다 능력도 출중해 즉시 전투를 치를 준비가 끝났다고 한다. 따라서 누미디아 주둔 제3군단은 그 즉시 바로 옆의 아프리카 속주로 진격했다.(카르타고 전투)

양측의 전투는 시작부터 누미디아 속주 측이 유리할 정도로 전력 차이가 많이 났는데, 상대 카펠리아누스와 제3군단이 처음부터 반란이라며 제대로 대응하니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누미디아 속주 병력을 이기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카펠리아누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든 탓에 교섭조차 불가능해,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내 지방 민병대 1천 명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며, 최대한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렇지만 애당초 싸움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 진노한 카펠리아누스가 맨 앞에서 군대를 이끌었고, 이에 맞불을 놓겠다고 고르디아누스 2세와 반란을 주도한 농장주 및 청년 무리는 그들 승리의 희망이 군대의 규율보다는 폭도의 규모에 있다고 생각해 카펠리아누스에게 단체로 맞서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헤로디아누스는 적었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 군대 경력이 상당했던 고르디아누스 1세는 머릿수가 많아도 잘 훈련된 카펠리아누스 휘하의 3군단을 이길 수 없다며 절망했다고 한다.

고르디아누스 2세와 카르타고 청년들은 시가지 전체에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차출해 무장을 하고, 시가전을 하면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수백년째 평화만 누리던 지역 속에서 쓸만한 무기로 구한 것은 도끼, 식칼, 단검, 사냥용 활, 사냥용 창 정도였고, 이런 무기도 구하지 못해 나무 몽둥이로 무장한 자들이 태반이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가죽이 보이는 대로 원 모양으로 잘라 나무 판자에 덧대어 방패를 만들고, 시가전을 대비했다. 이후 이들은 누미디아에서 온 3군단과 일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 대결은 싱겁게 끝났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호기롭게 카펠리아누스에게 덤볐다가 교전 직후 그대로 전사했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교전 직후 그대로 전사해, 시체는 찾을 수도 없게 됐는데, 마지막 희망을 품은 반란 지도자 청년들은 이 소식을 알리지 않고, 고르디아누스 2세 시신 수습도 포기하면서, 카르타고에 사는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동원하는 식으로 저항을 했다. 따라서 수비하던 민병대는 맞붙자마자 녹아내렸다는 표현에 걸맞게 그 자리에서 박살났고, 죄없는 카르타고 시민들까지 3군단 손에 줄줄이 살해됐다. 이때 카르타고 시내는 병사들의 외침과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지지한 농장주들이 죽임을 당하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 무고한 주민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로 생지옥이 됐고, 여기저기에서는 불길이 일고 피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총독 관저에 머물고 있던,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신의 침실에서 평온하게 승부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하들에게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었는데, 그는 패배를 직감하고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는 절망에 사로 잡혀 매우 침울한 표정을 지은 뒤 차고 있던 허리띠로 목을 매 스스로 자결했다. 이는 황제 선포 후 한달도 안 된 3주 남짓이었다. 이 사건에 관하여 헤로디아누스는, 이 승리 후 카펠리아누스는 아프리카 속주 내 약탈을 허용하는 자유를 내렸다고 한다. 이후 카펠리아누스의 기록은 없는데, 일설에 따르면 자신의 공을 인정받고 싶어했다가 막시미누스가 관심조차 가지지 않자 조용히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이나 여러 정황상 이 사건 이후 카펠리아누스는 이를 공으로 내세우거나 막시미누스 측에 합류하지 않은 채, 원로원 권고를 이행하겠다는 듯 조용히 총독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추측되며 이는 거의 확실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며칠 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달됐다. 당시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주변과 현지 주민들에게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어,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은 듯 놀라워 했다. 이에 대해 헤로디아누스는, 시민들과 원로원 모두 어리둥절했고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말과 달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따라서 원로원은 사태 파악을 한 뒤에야 속은 것을 알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그 즉시 푸피에누스발비누스를 공동황제로 선택한다. 이때 원로원은 독재자 막시미누스 타도를 결의했다.

6. 외모와 성격

고르디아누스 1세는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전형적인 상류층의 성공한 사람의 외모와 성격을 갖고 있었다. 먼저 그는 전형적인 로마인의 평균 키에 체격이 다부졌다고 한다. 그의 머리색은 점차 희끗희끗해졌고, 얼굴은 인상적이었지만 불그스레한 안색에 머리가 크고 눈과 표정, 눈썹은 경의를 느낄 만 했다고 한다. 또 성격은 온화하고 행동은 절도가 있었다고 하며, 격정적이거나 무절제하거나 지나치게 뭔가를 하지 않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외모와 성품은 자연스레 낮은 신분에 로마시민권을 보조병으로 있던 중 따면서 로마인이 된 경쟁자 막시미누스와 대비됐고, 원로원으로서는 트라키아 촌놈에 불과한 막시미누스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자인데다 소아시아에서 태어난 사람임에도 자수성가해 자신들과 똑같은 원로원 의원을 역임한 고르디아누스 1세에게 호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들 부자를 포장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저자들이 이들을 감싸면서 기술함에도 고르디아누스 1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가리켜, 겉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하는 이중적인 색골에 뚱뚱하고 교양이 있다고 해도 향료 섞은 포도주를 홀짝이고 첩실을 여럿 두면서 목욕탕, 연회장, 호화정원에서 살았다고 평하면서, 고르디아누스 1세가 망나니 아들의 행동을 감싸면서 아들과 비슷했다고 한 것을 보면 마냥 존경받을 위인인지 의문이다.

영국의 로마사 학자 팻 서던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의 긍정적인 평판은 겉으로 보기에 상냥해보이는 성격 때문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일단 외부적으로 봤을 때,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그리스 문학을 좋아하고, 본인 이름으로 방대한 작품을 출판한 일은 지적 추구에 대한 열망이 큰 그리스, 푸닉, 아나톨리아 출신 교양인들에게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 하지만 이런 점을 제외하면 고르디아누스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외모와 성격 모두에서 로마인들이 말하는 유능함을 증명하는 성과도 없고 외모적으로 강력한 통치자다운 카리스마라던지 모두에게 찬사받을 정도의 외모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라는 암덩어리를 제거한 뒤 후속대책을 강구하려고 한 로마 원로원에서는 이런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명분을 반신반의하면서 받아들였고, 각 속주 총독들은 원로원의 결정에 대부분 의문을 표하거나 강하게 반발했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외모와 성격 모두 이전 황제 중 가문, 외모, 능력 모두에서 애매모호했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비슷했던 셈.

7. 평가 및 여담

고르디아누스 1세는 상당히 예의바르고 온화한 성격과 고상한 문학적 취미로 그 평이 상당히 훌륭했다고 고대기록들은 전한다. 이런 이유로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와 함께 오늘날 거짓이 많다고 평가받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통해 혈통적으로는 확실히 조작된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3세기 군인황제 시대의 황제 중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원로원 귀족적 특징이 강했던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고르디아누스 부자 중 그는 대를 이어 원로원에 입성한 동명이인의 아들과 달리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는데,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아들과 함께 교양이 풍부하고 예의와 도덕심이 뛰어난 전형적인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로마 원로원 귀족이었다. 따라서 그가 80살이 다 된 고령의 나이임에도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속주에서 황제로 추대된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고대의 주장처럼 로마 제국 내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이탈리아 외에도 다른 속주에서도 가난한 농민. 부유한 지주 모두에게 지나친 물자 수탈로 반감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고대의 평가는 4세기 작성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등에서 주로 나왔고, 의문점이 상당히 많다.

이런 의문점을 증폭시킨 부분 중 한가지 증거는 당대 로마인 사가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이다. 청년 시절부터 로마와 이탈리아와 동방 속주를 오가며 관료생활을 했던 그는, 세베루스 가문의 통치시기때 로마정계 쪽을 알고 있던 사람으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비롯한 3세기 혼란의 초중반부를 직접 체험하고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정보들을 취합해 기록을 남겼다.[20] 세베루스 왕조와 트락스 모두에게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인 탓에 일각에선 비판도 하지만,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은 다른 후세 라틴기록에 비해 꽤나 훌륭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헤로디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에 대해 특유의 깔끔한 수사적 문체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고르디아누스는 노령이라는 이유를 들어 황제직을 고사하긴 했지만, 사실 권력에 대한 야심이 있었으므로 기꺼이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헤로디아누스(당대 로마인 사가)

그는 고르디아누스가 이런 도박을 한 이유에 대해, "고령인 탓에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고 단호하게 지적했다. 즉, 고르디아누스는 애당초 개인의 야심을 상황이 충족되자, 흐름에 몸을 맡긴 인물이며, 이 선택이 향후 자신의 가문과 혈육에게 정통성까지 부여한 고등 수준의 정치적 행위였다고 짚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헤로디아누스의 증언처럼 이 사람의 행동과 정치적 대의명분은 결국 로마가 오랜기간동안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헤로디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까지를 경험하면서 글을 남겼는데, 고르디아누스 3세의 등장에 관하여 평한 내용 역시 비판적이었다. 그는 민중들[21]에게 이상할 만큼 찬사를 받은 고르디아누스 3세의 등장 자체가 전혀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막시무스)가 훌륭한 업적과 경험이 있음에도 국가를 안정화시키는 도중 어이없게 몰락한 이유가 됐다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행동이 트락스를 몰락시킨 것 외에는 더 혼란을 키울 것이라고 예언하듯 증언했는데, 그 말처럼 로마는 3세기 동안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실제 현대사가들은 비밀스러운 노귀족 황제의 실체가 여러 유적들의 발굴로 드러난 이후, 과거 조작된 내용일 것이라고 평가받던 헤로디아누스의 주장을 상당부분 신뢰하고 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1세는 결단코 로마를 위해 헌신하고 대의를 추구한 고결한 인물이 아니라고 평가받는데, 어떤 이들은 막시미누스 트락스보다 이들 부자의 행동이 제국에 극도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며 강하게 질타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명확해지면서, 지금은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암흑기를 연 사람이 막시미누스라면, 고르디아누스 부자와 그 외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는 길고 긴 내전혼란을 장기화시킨 사람이라고 대차게 욕먹고 있다.

실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학정과 별개로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황제 추대는 아프리카 속주 주민들이 카르타고 일대에서 일으킨 반(反) 막시미누스 운동이었고, 이들 부자는 기민할 정도로 그 흐름을 이용해 파견 관리를 죽이고 이들을 선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고르디아누스 1세는 성공 후 원로원에 입성한 이래, 자신의 가계를 트라야누스, 그라쿠스 형제와 연계시키는 방식의 족보세탁을 하고 이를 지지자들과 민중들에게 홍보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제정 중기 이래 자수성가형 신참자들이 많이 사용한 방식이었고, 신참자들이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 전형적인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학자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가 생각 이상으로, 정치 수완과 그에 따른 정치적 판단력이 상당했던 야심가이자 기회를 노릴 줄 알던 권력자로 보고 있다.[22] 그리고 이런 주장들은 최근 고르디아누스 1세의 묘비와 그 흔적들이 터키 프리지아 일대에서 발굴되면서 꽤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담으로 고르디아누스 1세는 황제 선언 당시부터 세습왕조의 야심을 드러냈는데, 후대 학자들은 그를 고르디아누스 왕조의 창시자로 보고 고르디아누스 왕조로 서술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왕조는 비공식적 왕조이고,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의 재위기간은 다 합쳐도 고작 3주 남짓에 불과하다.

또 맨 위에 나와있는 고르디아누스 1세의 흉상을 비롯해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의 흉상 역시 어디까지나 추정되는 흉상일 뿐 두 사람의 공식적인 흉상은 아니라고 한다.
[1]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에서 마이키우스 마룰루스로 주장된 인물이다. 고르디아누스 1세의 어머니 셈프로니아 로마나가 세운 남편 추모비를 통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이라고 적혀 있음이 확인됐다. 법무관 지명 예정자였고, 일찍 죽었다고 한다.[2]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에서는 울피아 고르디아나로 적혀 있으나, 현대 발굴 비문 등을 통해 셈프로니아 로마나로 밝혀졌다.[3] 마이키우스 고르디우스, 근위대 장교 고르디우스 등으로 알려진 인물이 차남이라는 말이 있다.[4] 종종 고르디아누스 왕조로도 불린다.[5] 대표적으로 고르디아누스 1, 2, 3세 그리고 푸피에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등이 의도적으로 가계가 폄하 또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연계를 통한 4세기 지배층의 정통성 확보 목적의 위조 케이스에 속한다.[6] 제1차 삼두정치로 유명한 크라수스가 속해 있는 리키니우스 가문 출신이다.[7] 오늘날의 스페인[8]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의 아들이 바로 고르디아누스 3세이다.[9] 이런 방식으로 족보 세탁을 하는 경우는 대개 속주 출신 신참자들이 자수성가 후 성공한 이후 흔히 사용한 방식이었다.[10] 지금의 첼리오 언덕[11]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지은 폼페이우스 저택. 폼페이우스가 지은 저택인만큼 가격도 비싸고 아름다움과 호사스러움은 로마 내에서 아주 유명했다. 이 저택은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즉위 전 잠시 거처했던 저택 중 하나였다.[12] 이 기둥은 로마 시대 재산의 척도 중 하나였다. 특히 그는 이탈리아산의 하얀 대리석이 아닌 모두 수입산을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흰색+초록색의 그리스산, 붉은색의 이집트산, 노란색의 누미디아산, 흰색과 회색 반점의 소아시아산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13] 당시 책인 파피루스 두루마기는 아주 고가였다. 특히 책은 필사본이었기에 더욱 더 비쌌다.[14] 원로원에서 파견하는 속주 총독 임명의 경우, 통상적으로 해당 속주에 가고 싶은 이 지역 출신이 아닌 전직집정관들을 공모해 제비뽑기 혹은 표결 투표로 선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15] proconsul, 원로원이 관할하는 속주의 총독[16] 네로 시대부터 황제와 로마 정부의 명령 없이 임페리얼 퍼플로 불리는 보라빛 망토를 만들거나, 그 비슷한 형태의 염료 염색을 알아내려는 자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국가의 적'이 되어 큰 화를 입었다.[17] Aegyptus, 오늘날의 이집트[18] 막시미누스가 보낸 이들은 로마 정부의 공무원으로 법에 따라 세금 징수와 행정실무를 처리 중이었다. 또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현직근위대장 암살 시도 역시 매우 비열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벌인 행동들이 엄연히 불법이고 반역행위였고, 대의를 외치며 원로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부분에서 퇴색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19]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이렇게 조치를 취했고, 이후 로마 황제들이 이 기조를 이어나간 것은 푸닉 일대의 전속권을 관할한 아프리카 속주 총독의 누미디아, 트리폴리타니아 속주 문제 간섭을 확실히 차단하고 해당 속주들의 독립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20] '알렉산드리아의' 헤로디아누스의 아들 또는 친척으로 추측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인물의 고향은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였기 때문이다.[21] 특히 고르디아누스 일가 지지자들[22] 이 외에도 그와 그의 아들이 매우 고상한 취미와 문학 활동, 후원을 통해 로마 내에서 인망을 쌓아 자신들의 출신이 신참자임에도 오래된 귀족들이나 이탈리아 출신들처럼 상당한 지지세력을 만든 것, 황제 참칭 후 원로원에 이를 통보할 당시 내보인 정치적 수사와 그 정당성을 설득했던 방법 등도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