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반란자 실반나쿠스 Silbannacus | |
<colbgcolor=#FCE774><colcolor=#9F0807>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반란 대상 | 알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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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반란자. 당대의 어떤 문헌에도 언급되지 않았으나, 20세기에 동전이 발견되면서 존재가 확인된 인물이다.2. 의문의 동전
1937년, 대영박물관은 스위스의 동전상으로부터 로마 동전을 구입했다. 이 동전은 10펜스 크기의 변색된 은화였는데, 거기엔 역사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황제 '실반나쿠스(Silbannacus)'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동전의 초상화의 위에는 "IMP MAR SILBANNACVS AVG"라고 적혀있었는데, 이를 해석하면 임페라토르 Mar 실반나쿠스 아우구스투스이다. 뒷면에는 머큐리 신이 월계관을 들고 있는 요정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카두세우스(caduceus) 지팡이를 쥐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스위스 동전상은 이 동전을 라인강 인근의 프랑스 북동부 지역인 로렌에서 발견했다고 증언했다. 전문가들은 동전의 진위 여부를 조사한 끝에, 진품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실반나쿠스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황제나 반란자에 대한 기록은 일체 존재하지 않았다. 이름 역시 실제인지 의심되었는데, '실바나쿠스(Silvannacus)'나 '실바니아쿠스(Silvaniacus)'의 철자를 잘못 썼을 수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Mar라는 축약된 글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마리우스(Marius) 또는 마르쿠스(Marcius)와 같은 로마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이름은 로마의 들판과 숲의 신인 실바누스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에트루리아의 숲의 신 셀반스에서 유래된 것일 수도 있다.
실반나쿠스의 존재를 알리는 동전은 이것뿐이기에 학자들은 그의 실존 여부를 의심했지만, 1996년 실비앙 에스티오가 두번째 동전을 발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 동전은 파리 근교에서 발견되었는데, 첫 번째 동전과 앞면이 일치하고, 뒷면에는 마르스 신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두 동전의 앞면이 같은 주형을 통해 주조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에 학자들은 실반나쿠스라는 황제 참칭자가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3. 언제 황제를 칭했는가?
실반나쿠스가 어느 때 사람이며 언제 황제를 칭했는지를 알려주는 문헌 기록은 전무하다. 따라서 그의 출현 시기를 알아보려면 1937년과 1996년에 발견된 동전 2개의 물리적 구성과 문체에 의존해야 한다. 실반나쿠스 동전은 안토니아니 동전이며, 은 함량은 군인 황제 시대 때 주조된 동전과 일치하며, 270년대에 제조된 동전보다는 순도가 높은 편이다. 그가 동전을 주조할 수 있었던 건 공식적인 조폐국이 있는 지역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나, 임의로 만든 임시 조폐국에서 생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영국의 화폐학자 해럴드 매팅리는 첫번째 동전에 표현된 문양의 스타일이 필리푸스 아라부스 시기의 동전과 흡사하다며, 실반나쿠스가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만 필리푸스 시기의 스타일이 확실히 정해진 게 아니라서,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 입증하기 어렵다. 일부 학자들은 데키우스 시기의 반란자일 것이라 추정했으며, 프랑스 역사가 J.M. 도옌은 갈리에누스 시기 갈리아 제국을 세운 포스투무스 바로 이전에 등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2번째 동전은 아이밀리아누스의 동전이 사용한 것과 비슷한 양식을 따른다. 두 동전은 같은 주형을 공유하기 때문에, 같은 조폐국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에 입성한 뒤 동전을 찍었으니, 그의 동전도 로마에서 찍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아이밀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던 253년경에 공동 황제를 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학자들은 대체로 실반나쿠스의 출현 시기를 240~250년대로 추정하는데, 이때의 로마 황제는 필리푸스 아라부스, 데키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이밀리아누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등 총 6명이다.
4. 어디에서 황제를 칭했는가?
최초의 동전이 발견된 로렌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군단이 주둔한 장소였다. 몇몇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실반나쿠스는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군단의 지휘관이라고 주장했다. 두번째 동전이 파리 근교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파리 근교까지 미쳤을 수도 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데키우스 통치기간(249~251) 동안 갈리아인들의 봉기가 진압되었다고 기술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과 실반나쿠스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의 이름과 갈리아어 간의 연관성이 모호해서 확실하지 않다. 한편, 갈리아 제국 초대 황제 포스투무스는 자신의 동전에 머큐리 신을 담게 했는데, 이로 볼 때 갈리아 일대에서 머큐리 신의 인기가 많았던 듯하며, 실반나쿠스가 갈리아와 어떤 형태로든 관련있다는 걸 암시한다.영국 역사학자 케빈 버처 등 일부 학자들은 실반나쿠스는 아이밀리아누스의 부하였으며, 갈리아에서 그에 호응하여 군대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에 따른다면, 발레리아누스의 라인강 방면군이 이탈리아로 진격하는 사이, 그는 비어있는 갈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아이밀리아누스에 호응했을 수 있고,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인정한 원로원으로부터 공동 황제로 통보받았을 수도 있다. 이후 아이밀리아누스는 살해되었고, 로마에 입성한 발레리아누스는 사산 왕조와 싸우기 위해 동쪽으로 향했지만, 라인강 방면군 일부를 본 기지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이들은 기지로 돌아온 뒤 아이밀리아누스의 잔당이자 황제 참칭자 실반니쿠스를 잡아 죽였을 것이다.
이렇듯 많은 주장이 제기되지만, 실반나쿠스의 정확한 정체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고, 역사 애호가들로부터 비슷한 상황인 스폰시아누스와 함께 '알려지지 않은 황제(An Unknown Emperor)'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