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3:40:18

비텔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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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브리아 왕조 레온 3세 | 콘스탄티노스 5세 | 아르타바스도스 · 니키포로스 |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 레온 4세 | 콘스탄티노스 6세 | 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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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온 5세 · 콘스탄티노스
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미하일 3세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 미하일 6세
콤니노스 왕조 이사키오스 1세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콤니노스 왕조 알렉시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2세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 마누일 1세 | 알렉시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
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3세 |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4세 | 알렉시오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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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카리스 왕조 테오도로스 1세 | 요안니스 3세 | 테오도로스 2세 | 요안니스 4세 | 미하일 8세
비정통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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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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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 ignotus: 불명
  • incertus: 불확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가 계속 집권하였거나 아니면 불명의 다른 인물이 선출되었는지 불명확함
황제 겸 집정관 }}}
1년 1년 보결 2년 2년 보결 3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비니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발레리아누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3년 보결 4년 4년 보결 5년 5년 보결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카투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볼레수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클로디우스 리키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
6년 6년 보결 7년 7년 보결 8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킬리우스 롱구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8년 보결 9년 9년 보결 10년 10년 보결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파피우스 무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아울루스 비비우스 하비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퀸투스 포파이우스 세쿤두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11년 11년 보결 12년 12년 보결 13년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실리우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13년 보결 14년 15년 15년 보결 16년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센나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16년 보결 17년 17년 보결 18년 18년 보결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투베로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볼루세이우스 프로쿨루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리비네이우스 레굴루스
18년 보결 19년 19년 보결 20년 21년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빕스타누스 갈루스 루키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21년 보결 22년 22년 보결 23년 23년 보결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그나이우스 트레멜리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피누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막시무스
24년 24년 보결 25년 25년 보결 26년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아비올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26년 보결 27년 27년 보결 28년 28년 보결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벨라이우스 투토르
29년 29년 보결 30년 30년 보결 31년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수르디누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루벨리우스 게미누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31년 보결 31년 보결 31년 보결 32년 32년 보결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섹스투스 테디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33년 33년 보결 34년 34년 보결 35년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티투스 루스티우스 눔미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노니아누스
35년 보결 36년 36년 보결 37년 37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섹스투스 파피니우스 알레니우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케로니우스 프로쿨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플라우티우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폰티우스 니그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37년 보결 38년 38년 보결 39년 39년 보결
아울루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아퀼라 율리아누스 세르비우스 아시니우스 켈레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퀸투스 산퀴니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푸블리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칼푸르니우스 세라누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카이시아누스
39년 보결 39년 보결 40년 40년 보결 41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ignotus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sine collega 퀸투스 테렌티우스 쿨레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41년 보결 41년 보결 41년 보결 42년 42년 보결
퀸투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푸티우스 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이우스 바라누스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42년 보결 43년 43년 보결 43년 보결 43년 보결
코르넬리우스 루푸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섹스투스 팔펠리우스 히스테르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ignotus 스푸리우스 오피우스
44년 44년 보결 45년 45년 보결 45년 보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아울루스 안토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46년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카메리누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툴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47년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세다투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마르쿠스 호르데오니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바겔리우스 가이우스 볼라센나 세베루스
48년 48년 보결 49년 49년 보결 50년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퀸투스 베라니우스 루키우스 맘미우스 폴리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 빕스타누스 갈루스 가이우스 폼페이우스 롱구스 갈루스 퀸투스 알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수일리우스 네룰리누스
51년 51년 보결 51년 보결 52년 52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디에누스 오르피투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베투스 카르미니우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52년 보결 53년 53년 보결 53년 보결 54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트레보니우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살비아누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 퀸투스 카이키나 프리무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마르켈루스
54년 보결 55년 55년 보결 55년 보결 55년 보결
마르쿠스 아이풀라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누메리우스 케스티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트레벨리우스 막시무스
ignotus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55년 보결 55년 보결 56년 56년 보결 56년 보결
푸블리우스 팔푸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 안나이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쿠르틸리우스 만키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티투스 쿠티우스 킬투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프로쿨루스
56년 보결 57년 57년 보결 58년 58년 보결
루키우스 두비우스 아비투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아그리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트라세아 파이투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카이시우스 마르티알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58년 보결 59년 59년 보결 60년 60년 보결
아울루스 페트로니우스 루르코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티투스 섹스티우스 아프리카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아울루스 파코니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마닐리우스 보피스쿠스
61년 61년 보결 62년 62년 보결 62년 보결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 그나이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 푸블리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만리우스 타르퀴티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마룰루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루키우스 아피니우스 갈루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63년 64년 64년 보결 65년 65년 보결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안토니우스 마케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푸블리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65년 보결 66년 66년 보결 66년 보결 67년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아프리누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아니키우스 케리알리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가이우스 파키우스 아프리카누스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누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67년 보결 67년 보결 68년 68년 보결 68년 보결
아피우스 안니우스 갈루스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아스코니우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베룰라누스 세베루스 푸블리우스 갈레리우스 트라칼루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69년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세르비우스 갈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루스 사비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티투스 비니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아울루스 마리우스 켈수스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70년 70년 보결
파비우스 발렌스 그나이우스 카이킬리우스 심플렉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알리에누스 로시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퀸크티우스 아티쿠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70년 보결 70년 보결 71년 71년 보결 71년 보결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ignotus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그나이우스 페디우스 카스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퀴리날리스 발레리우스 페스투스
71년 보결 71년 보결 72년 72년 보결 72년 보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바르바루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두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72년 보결 73년 73년 보결 73년 보결 73년 보결
섹스투스 마르키우스 프리스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오쿨라투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퀸투스 가비우스 아티쿠스 […]m[…] ignotus
74년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퀸투스 비비우스 크리스푸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ignotus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on[…]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74년 보결 74년 보결 75년 75년 보결 75년 보결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파트루이누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76년 76년 보결 76년 보결 76년 보결 7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탐피우스 플라비아누스 갈레오 테티에누스 페트로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길로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77년 보결 77년 보결 77년 보결 78년 78년 보결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가이우스 아룬티우스 카텔리우스 켈레르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데키무스 유니우스 노비우스 프리스쿠스 (루푸스) 퀸투스 코렐리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ignotus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푸니술라누스 베토니아누스
78년 보결 78년 보결 79년 79년 보결 79년 보결
섹스투스 비툴라시우스 네포스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ignotus ignotus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79년 보결 80년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티투스 루브리우스 아일리우스 네포스 임페라토르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파브리키우스 베이엔토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팍투메이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켈루스 옥타비우스 푸블리우스 클루비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리우스 플라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아일리아누스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81년 81년 보결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포스투무스 브라두아 섹스투스 네라니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티티우스 프루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 노니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로스키우스 코엘리우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킬리우스 스트라보 티투스 비니키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베루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유베날리스
81년 보결 81년 보결 81년 보결 82년 82년 보결
루키우스 베티우스 파울루스 가이우스 스코에디우스 나타 피나리우스 루키우스 카르미니우스 루시타니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세르바이우스 In]noc(ens)
티투스 유니우스 몬타누스 티투스 테티에누스 세레누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움브리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3년
[…]an(us) [가이우스 아리니우스 Mo]dest(us)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파트루니우스 마르쿠스 라르키우스 마그누스 폼페이우스 실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ignotus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퀴에투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
83년 보결 83년 보결 83년 보결 84년 84년 보결
마르쿠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섹스투스 카르미니우스 베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가이우스 피시우스 사비누스 테렌티우스 스트라보 에루키우스 호물루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니그리누스 쿠리아티우스 마테르누스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 ignotus
84년 보결 84년 보결 85년 85년 보결 85년 보결
가이우스 툴리우스 카피토 폼포니아누스 플로티우스 피르무스 igno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리카누스 (마르쿠스 라이키우스 또는 푸블리우스 글리티우스) 갈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호노라투스
85년 보결 85년 보결 85년 보결 86년 86년 보결
푸블리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데키무스 아부리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살비우스 리베랄리스 노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퀸투스 율리우스 발부스 [코르넬리우스] 오레스테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페트로니아누스
86년 보결 86년 보결 86년 보결 87년 87년 보결
incertus 섹스투스 옥타비우스 프론토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퀸투스 비비우스 세쿤두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칸디두스 마리우스 켈수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티디우스 토시아누스 루키우스 야볼레누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87년 보결 87년 보결 88년 88년 보결 88년 보결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가비디우스 테바니아누스 가이우스 킬니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Ⅳ 데키무스 플로티우스 그리푸스 퀸투스 닌니우스 하스타
가이우스 두케니우스 프로쿨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88년 보결 89년 89년 보결 89년 보결 90년
마르쿠스 오타킬리우스 카툴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푸블리우스 살루스티우스 블라이수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Ⅴ
섹스투스 율리우스 스파르수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사이니아누스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푸시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아카이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바이비우스 이탈리쿠스 루키우스 알비우스 풀라이에누스 폴리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 가이우스 카리스타니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프로쿨루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폼페이우스 롱기누스
90년 보결 91년 91년 보결 91년 보결 92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케리알리스 (또는 마르쿠스 투키우스 케리알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데키무스 미니키우스 파우스티누스 퀸투스 발레리우스 베게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Ⅵ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카툴리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마리누스 푸블리우스 메틸리우스 사비누스 네포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92년 보결 92년 보결 92년 보결 93년 93년 보결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몬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 아비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실라누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티투스 아비디우스 퀴에투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아룰레누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페두카이우스 프리스키누스 섹스투스 루시아누스 프로쿨루스
93년 보결 94년 94년 보결 94년 보결 95년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라루스 섹스티우스 Na(so) 루키우스 노니우스 칼푸르니우스 토르콰투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실리우스 데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Ⅶ
[투키우스 Ceria]lis 티투스 섹스티우스 마기우스 라테라누스 가이우스 안티우스 아울루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95년 보결 95년 보결 95년 보결 96년 96년 보결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만리우스 발렌스 퀸투스 파비우스 포스투미누스
푸블리우스 두케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툴루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티투스 프리페르니우스 [파이투스]
96년 보결 97년 97년 보결 97년 보결 97년 보결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카이시우스 프론토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폴리나리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icus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섹스투스 헤르멘티디우스 캄파누스
97년 보결 97년 보결 98년 98년 보결 98년 보결
퀸투스 글리티우스 아틸리우스 아그리콜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쿠르비우스 툴루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마테르누스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티투스 베스트리키우스 스푸린나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마르티알리스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아킬리우스 [Pri]scus 코엘리우스 스파르수스
루키우스 마이키우스 포스투무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페록스 리키니아누스
98년 보결 99년 99년 보결 99년 보결 99년 보결
퀸투스 풀비우스 길로 비티우스 프로쿨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팔마 프론토니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크레티우스 바르바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발레리우스 마그누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페록스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퀸투스 소시우스 세네키오 세네키오 멤미우스 아페르 아울루스 카이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ignotus
100년 100년 보결 100년 보결 100년 보결 100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마르쿠스 마르키우스 마케르 루키우스 헤렌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아쿠티우스 네르바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가이우스 킬니우스 프로쿨루스 폼포니우스 마밀리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투스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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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8대 황제
비텔리우스
Vitellius
파일:Vitellius.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
Aulus Vitellius Germanicus
출생 15년 9월 24일
로마 제국 로마
사망 69년 12월 20일 (향년 54세)
로마 제국 로마
재위 기간 로마 황제
69년 4월 16일 ~ 69년 12월 20일 (247일)
전임자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후임자 베스파시아누스
부모 아버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어머니: 섹스틸리아
배우자 페트로니아, 갈레리아 푼다나
자녀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페트로니아누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 비텔리아
종교 로마 다신교
1. 소개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2.2. 황제 즉위와 몰락2.3. 최후
3. 성격과 사생활4. 평가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소개

로마 제국의 제8대 황제. 네로가 실각한 뒤, 시작된 내전 당시 즉위한 황제 중 한 명이다.

경쟁자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베스파시아누스와 달리 5대 황제 네로를 많이 존경하고, 그의 정책을 모방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이탈리아 로마 출생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베테리스(大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 그의 아내 섹스틸리아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비텔리우스의 아버지는 티베리우스의 신임 아래 집정관을 지냈고, 시리아 속주 총독을 역임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친 섹스틸리아는 명문가 출신으로 마르쿠스 섹스틸리우스의 딸이었다.

부친 大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 대해 더 살펴보면 그는 상당히 뛰어난 개인적 역량을 가지고 이를 십분 발휘해 원로원 귀족에 편입된 능력자였다. 그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확실치 않은 이탈리아기사계급 출신이었는데, 자신의 재능만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투스 일가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았다. 그는 이때 단순히 정치, 행정력을 인정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주사위놀이 실력과, 전차 경기 등의 지식과 분석 능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텔리우스의 부친은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클라우디우스 시대까지 세 황제의 조력자로 활동했다. 이 사람은 티베리우스의 상속자, 조카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종손인 게르마니쿠스와 젊은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최측근이었다. 또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도 상당히 총애를 받아 황제의 친구이자 조력자로 인정받고 중용됐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4대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가 별볼 일 없던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고, 제위 계승 서열이 일찌감치 밀려났던 클라우디우스를 여러 부분에서 많이 도와줬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후 비텔리우스의 부친을 신뢰했고,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역시 황제가 정치적 이유로 자신의 조카인 소 아그리피나와 재혼하려고 할 때 근친혼으로 이야기가 많던 결혼을 통과되게끔 만들었다.

이런 배경 탓에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파 귀족 자제로 태어났고, 권력가 자제답게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미소년들로 구성된 티베리우스 황제 소년 군단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고, 카프레이아 별궁에서 황제를 접견하고 황실 남자황족들과 함께 거주하며 교육받는 영광도 얻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서 티베리우스는 은둔생활과 원격통치 등으로 여론이 최악인데다 하필 돌고 있던 소문도 죄다 "늙은 황제가 별궁 안에서 음탕한 짓을 한다"는 내용이 많았다. 아울러 비텔리우스는 다른 소년들과 달리 아첨꾼이었고 부도덕한 모습도 보인 탓에, 로마로 돌아온 이후 창남(스핀트리아)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일찍이 19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의 딸인 페트로니아와 결혼해 37년경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페트로니아누스를 낳았다. 일설에 따르면, 비텔리우스 페트로니아누스는 한쪽 눈이 선천적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두 부부는 얼마 후 이혼했고, 페트로니아누스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다. 53년경 페트로니아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페트로니아누스가 전 남편의 집에서 나오는 조건으로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비텔리우스는 페트로니아누스를 내보내줬지만, 페트로니아누스는 곧 사망했고 그 유산은 비텔리우스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 때문에 그가 아들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수에토니우스는 페트로니아누스가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가 그런 마음을 먹은 걸 후회해 스스로 독을 삼켜 죽었다고 주장했다.

50년경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가이우스 갈레리우스의 딸 갈레리아 푼다나와 결혼했다. 비텔리우스의 장인 갈레리우스는 티베리우스 시대 당시 16년도부터 23년까지 이집트 장관이기도 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 게르마니쿠스가 19년 황제의 허가 없이 이집트를 방문할 당시의 이집트 장관이었고, 세네카가 자신의 아내, 아이들과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할 당시 이를 도운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로마 귀환 중 난파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부모와 처가 모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아래 잘나간 만큼, 비텔리우스 역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까지 승승장구했다. 특히, 비텔리우스의 연이은 성공에 크게 기여한 것은 소년 시절부터 카프레이아 별궁으로 건너가서, 교육도 받고 인맥도 쌓은 것과 열렬한 아첨꾼 다운 아부 기술이었다. 그래서 그는 네로 시대에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비텔리우스는 아부꾼임에도 네로를 진짜 존경하고 사랑한 팬이었다. 따라서 네로는 자신을 존경하고 모든 행사에 앞장서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공연에 진심으로 빠져든 그를 신뢰했다. 그러다가 네로가 몰락했는데, 비텔리우스는 별 탈 없이 잘 지내다가 갈바에게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는 전임자와 달리 호탕하고 플레이보이 기질이 강한데다 엄청난 부자라서 얼마 안 가 부하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었다고 한다.

2.2. 황제 즉위와 몰락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저지 게르마니아) 속주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비텔리우스는 엄격한 규율을 유연하게 다루고 성격이 워낙 좋은 덕에 인망을 얻었는데, 69년 초 갈바에게 불만을 품은 라인 강 군단병들[1]에 의해 쾰른에서 황제로 추대되는 대박이 터졌다. 그리고 천운이 따랐는지 몰라도 갈리아, 브리타니아, 라이티아 주둔 군단들에게도 지지선언을 받으면서 반 갈바 운동의 새로운 황제로 세력을 모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비텔리우스는 황제감이 아니었고, 네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을 뿐 네로보다도 훨씬 못한 위인이었다.

부하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니나노하며 느긋하게 뒤따르면서 열매만 따먹는 전형적인 윗분의 행태를 보이며, "갈바 타도"를 외쳤다. 하지만 로마 여행길 동안 그는 환락과 축제, 술파티에 몸을 맡겼고, 수행원들과 병사들 역시 비텔리우스와 함께 무질서함 속에서 진군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갈리아에 남아 있다가 부하 장군 발렌스와 카이키나가 크레모나 전투에서 오토를 운좋게 이긴 직후에야 이동했다. 도중에 루그두눔에서 아내와 자녀들과 대면한 뒤 8살된 아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에게 지휘관이 착용하는 망토를 씌우고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내리며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비텔리우스는 6월 말경에야 로마에 수행원들과 함께 개선하며 입성했는데, 사실 오토가 자살한 다음날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상태라서 많이 늦게 귀환했다. 그러나 내전의 상처를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더 벌리고 소금을 뿌리는 행태를 보인다. 오토를 따랐던 도나우 군단[2] 병사들을 용서하기는커녕, 도나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처형하고 병사들을 크레모나 시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강제 투입시키는 어이없는 짓을 했다.[3] 심지어 자신 휘하 군단이 도나우 군단을 이긴 지역을 시찰하고 했던 말이 더 가관이었다.
"적의 피는 냄새도 향기롭구나."

비텔리우스, 같은 로마군과의 전투 현장을 둘러보며

당연하지만 이 적들은 도나우 군단. 문제는 이들이 비텔리우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곤 하나 이 자들도 같은 로마인이자 로마군이었기에 상당히 문제가 큰 발언이었다. 따라서 내전 수습에는 평상시보다 더 고난이도의 정치력을 발휘해도 모자랄 판에 이 말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당연히 비텔리우스와 크레모나 시민들에 대한 도나우 군단의 분노는 깊어졌다.

비텔리우스는 수도 로마에 돌아와서 오토의 형 살비우스 티티아누스를 사면시켜 주고, 오토 측 인사들에게도 보복하지 않았다는 점을 빼곤 계속해서 실책을 저질렀다. 그는 로마에 와서 근위대를 해고하고 자신의 라인 강 군단 병사들로 근위대를 새로 꾸렸다. 하지만 이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근위대 전체를 반발하게 만들어 적으로 돌리는 행동이었고, 뒷수습도 말끔하지 못해 해고된 근위대 병사들과 그 가족들을 적으로 돌리고 만다.[4]

이후 비텔리우스는 대놓고 네로를 찬양하고 그를 존경한다고 말하면서, 네로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책을 계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인 건 “로마의 돼지”라고 불리는 별명답게 자신의 유일한 취미인 폭식에 탐닉[5]하며 국정을 돌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본래부터 느긋하고 게으른데다 성격 역시 좋은 집안 출신답지 않게 방종한 사람인터라, 로마 귀환 후 한 일이라곤 각 귀족 가문들의 희귀하고 맛난 레시피로 만든 고급 요리 탐닉에만 치중했다. 또 그는 자신의 어머니 섹스틸리아에게 불효를 저지르고[6], 내전 당시부터 위의 향기 발언처럼 잔인하고 생각없는 말을 대놓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비텔리우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해 증오심에 불타던 도나우 군단이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면서 비텔리우스는 단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무키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황제에 오르는 대신 유대반란 진압군의 총사령관인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비텔리우스 타도를 선언하면서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다. 무키아누스는 로마로 진격했고, 이 소식을 들은 도나우 군단이 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지휘하에 무키아누스에 앞서서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베드리아쿰에서 비텔리우스가 보낸 진압군과 다시 전투를 벌였다. 이번에는 도나우 군단이 승리했고 비텔리우스편의 총사령관이었던 카이키나마저 도나우 군단에 사로잡히면서 비텔리우스의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7]

2.3. 최후

비텔리우스는 진압군이 패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는 의욕을 잃고 그저 먹는 일만 하다가 12월 16일 포로 로마노에서 퇴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항의를 받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 날 원로원이 비텔리우스의 퇴위 선언을 받아들여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궁지에 몰린 비텔리우스의 패잔병들이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인 로마 시 장관 사비누스를 살해하고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불태우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이것을 막지도 않은 채 무기력하게 먹는 일만 하며 시간을 때웠다. 오히려 전직 아프리카 총독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동생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혼자서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도나우 군단에 맞서 최후까지 분전하지만 그 역시 중과부적으로 패하면서 항복하고 만다.

69년 12월 20일, 비텔리우스는 아내 소유의 캄파니아 내 고급 저택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 뒤 더럽고 낡아빠진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문지기로 위장해 탈출하려고 한 계획이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로마 탈출 대신 황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황궁에 돌아왔을 때, 이미 노예와 관료들이 모두 탈출하고 도망간 탓에 황궁 안은 텅 빈 상태였다. 이렇게 텅빈 황궁 안에 홀로 남은 비텔리우스는 매수를 위한 목적인지 몰라도 돈을 챙겨 허리띠 안에 넣고 다시 탈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로마를 점령한 베스파시아누스의 도나우 군단 병사들이 황궁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실패한다. 이에 비텔리우스는 병사들을 피하여 황궁 안의 숙소로 쓰이던 방 한 곳에 숨었다. 이때 그는 침대 매트리스와 집기로 자신이 숨은 방을 막고 걸어 잠그며 필사의 몸부림을 쳤는데, 그 행동은 무척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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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내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비텔리우스(Georges Rochegrosse, 1883)

로마 점령 전부터 복수심에 불탄 병사들은 황궁을 샅샅이 수색했고 비텔리우스는 곧 발견되었다. 황제는 어떤 사람보다 비참하게 병사들에게 끌려나왔다. 어느 정도로 비참했나면 체포 당시 그는 병사들에게 짐승 다루듯 끌려 나왔고, 입은 옷은 거의 찢겨져 반절 이상 벗겨진 상태였다. 이후 반나체로 로마 시내로 끌려간 비텔리우스는 분노한 시민들과 도나우 군단 병사들에게 포로 로마노에서 갖은 모욕과 고문을 당한 뒤 그 자리에서 참수형을 선고받아 목이 잘린다. 사후 시체는 티베르 강에 던져졌으며 머리는 장대에 꽂혀 퍼레이드 행렬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비텔리우스의 8살된 아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와 동생 역시 같은 날 살해되었다.[8]

비텔리우스의 아내 갈레리아 푼다나와 딸 비텔리아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특명으로 목숨을 건졌다. 비텔리아는 아버지의 부관이자 벨가이 속주 총독을 맡았던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와 결혼했다.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집정관으로 지명된 발레리우스가 임기를 수행하기 직전에 사망한 뒤, 비텔리아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남자와 재혼하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제공한 집에서 유복하게 살았다. 프랑스의 계보학자이자 역사가 크리스티안 세티파니 등 일부 역사가들은 비텔리아의 재혼 상대는 88년 보결 집정관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모계 조상인[9]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라고 추정한다.

3. 성격과 사생활

비텔리우스는 식충이로 널리 알려졌고, 탐욕과 부도덕함, 그리고 양성애적 사생활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 이것은 악의적인 소문이 아니라 진짜였기 때문에, 당대 사람들은 당연히 그를 최악으로 생각했다.

먼저 그는 한 연회에서 생선 2천마리, 새 7천 마리를 요리 재료로 사용할 정도로 사치를 부렸고, 식탐과 식욕이 엄청났다. 그래서 몇 달동안 그가 연회 비용으로 소비한 금액만 무려 9억 세스테르티우스였다!! 이는 대략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 제국 일년 세입이 평균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 티베리우스가 남긴 말도 안 되는 유증금이 2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즉위 후 유언 집행과 '빵과 서커스', 부모와 죽은 두 형을 위한 추모식 등으로 8개월간 써먹은 금액이 약 2억 세스테르티우스인 것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미친 소비였는데, 더 대단한(?) 사실은 로마에 있는 동안 본인과 측근들의 유흥만을 위해 쓴 음식값과 파티금액이 이 정도였다.[10] 즉, 빵과 서커스라는 인기영합을 위해 쓴 돈도 아닌데, 나라 일년치 세입 이상을 먹고 즐기는데 써댔다는 이야기이며, 비텔리우스의 재위기간이 11개월이고, 로마에 머문 기간이 8개월이 살짝 넘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칼리굴라가 8개여월간 쓴 유증금보다 더 썼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런 소비와 식탐 외에도 비텔리우스는 자신을 말리는 어머니를 때리는 패륜도 저질렀다고 하며, 젊은 시절부터 배우와 전차기수를 무척 좋아하고, 그들에게 빠져 여럿을 후원했다. 또 로마에서 유명하다는 해방노예 출신의 남창 아시아티쿠스와 동성애 행각을 가졌고, 배우나 다른 이들과 부적절한 관계도 여럿 맺었다. 아버지 대 비텔리우스가 뛰어난 정치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자 그대로의 호부견자이다.

4. 평가

69년에 단명한 세 황제 중 제일 무능한 인간으로 공인될 정도로 당대부터 평가가 최악이다. 아니,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중 이 사람과 동급 소리를 듣는 최악의 황제는 엘라가발루스 밖에 없다는 평이 적절할 정도로 최악이다. 즉, 로마 원로원에게 "네로+도미티아누스를 합친 것 같은 황제"라고 비난받은 콤모두스보다 최악으로 평가받는 엘라가발루스와 동급 수준의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사람의 재위기간이 네로, 콤모두스, 엘라가발루스보다 짧고, 후대의 카라칼라 같이 제 기분에 따라 정적과 죄없는 사람들을 마구잡이 인간사냥을 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가 단기간 동안 먹고 노는데 쓴 돈은 최악이었다. 그는 즉위 직후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유언장, 원로원 결정으로 예정된 대규모 공공건축물 건설을 재개하고, 티베리우스가 중지시킨 건물을 개보수함과 동시에, 어머니, 두 형, 고모부 정식 장례 수행, 즉위 후 민심 확보 차원에서 개최한 빵과 서커스 제공, 국가 기념일 축제로 8개월 동안 2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쓴 칼리굴라와 달리, 문자 그대로 놀고 먹는 비용으로 9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소비하고, 네로 명예회복 비용으로 추가 비용을 더 지출했다.

거기다가 유대 전쟁 조기종식이 자신의 황제 자리를 굳히고 제국 전체의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필수임을 잘 알고 전쟁수행과 파르티아 방면 방어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병력만 동원한 베스파시아누스에 비해, 황제 자리를 먹겠다고 라인 강 전선의 거의 전 병력을 동원하다시피 한 데다가 무리한 징병까지 감행해 게르만 부족들의 반감을 사 바타비아 반란의 원인을 스스로 제공하기까지 했다. 이후 로마에 입성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생깨나 해야 했으니 비텔리우스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 뒷일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조국방위를 내팽개친 황제라는 평가를 들어도 싸다.

따라서 황제들을 까는 걸로 유명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공정성을 유지하려 했던 타키투스조차 비텔리우스는 도저히 업적을 찾을 수가 없었는지, '무가치한 인간' 이라고 그를 표현했다. 이는 타키투스와 동시대 로마인들도 비슷해, 그들은 비텔리우스라는 사내를 가리켜 '자기 실력이 아니라,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 있던 덕분에 운 좋게 오르지 않아야 할 자리까지 오른 인간' 이라고 신랄하게 그를 비난했다. 오토가 뭘 할 시간도 갖지 못하고 죽었고, 갈바 또한 황제로써는 문제가 많았으나 비텔리우스 수준은 절대 아니었고 또 황제 이전에는 평가가 굉장히 좋았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네로의 사치로 인해 제국은 재정과 민생이 거의 파탄지경인데 해결은 커녕 여기에 돈을 펑펑 써대기까지 했으니, 네로가 박살낸 국고 적자를 더 키워, 다음 황제에게는 빚 폭탄을 떠넘긴 꼴이 됐다.

이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되었을때, "짠돌이", "인색한 구두쇠" 같은 욕을 먹어감에도 속주세를 대폭 인상하고, 이탈리아와 로마 공중화장실에 오줌세 같은 잡다한 세금까지 신설했다. 다만 그래도 이 시기에도 돈을 대책없이 찍으면 안된다는 상식은 있었는지 베스파시아누스는 세금을 늘릴지언정 화폐 평가절하는 하지 않았다.

그의 비극은 격에 맞지 않는 황제의 자리에 욕심을 부린 탓일지도 모른다. 황제 자리에 관심이 있어도 오를 생각도 없다가, 이곳 저곳에서 황제를 자처하는 상황에서 옹립된 모양새였다고 해도, 그가 황제 자리에 욕심을 내면서 비극이 시작됐으니 남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죽기 직전, 자신을 조롱하며 모욕하는 군단 병사들을 향해 "내가 그래도 한때는 너희의 황제였다."라고 일갈하면서, 반성조차 하지 않고 끝까지 억울함만 호소했다(...). 때문에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비텔리우스가 생전에 보여준 그나마 황제다웠던 유일한 모습이라고 조롱한다[11].

어쨌든 그의 죽음으로 로마의 내전은 일단락을 짓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황제의 자리가 넘어간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등장하는 안티 크로스 중 한 명인 베스파시아누스의 소환수 중 하나로 등장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몸통이 시커메지면서 거기에서 얼굴이 나타나는 형식. 갈바가 근접전 용도로, 오토가 원거리전 용도로 사용된 것이 작중에서 확인된 것과 달리 이 비텔리우스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 일단 이 얼굴에서 불을 뿜을 수 있다. 다만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의 부활이나, 사이크라노쉬의 결계 마술을 사용할 때 필요한 것은 확실.

재미있는 것은 그 소환수의 나머지 둘의 이름이 전임 황제들인 갈바오토라는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산해진미를 논하는 문단에서 등장한다. 로마인들의 식습관을 논하며 비텔리우스는 매우 사치하여 무려 공작의 혀를 먹었다는 이야기 나온다.

[1] 라팍스 제21군단, 알라우다이 제5군단[2] 아디우트릭스 제1군단, 게미나 제13군단[3] 대대장급 이상이라면 애초에 신분이 다른 사람이 많기 때문에 죽여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백인대장은 거의 대다수가 고참병으로 밑에서 올라간 자들이었다. 또한 전장에서 지휘를 하면서 같은 대열에 서서 군단병들과 같은 사선에서 목숨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에 동료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군단병을 노역에 투입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국의 유지를 위한 가도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구축에만 투입할 수 있었고, 형식적으로는 나라를 위해 군단 장병들이 전쟁이나 훈련이 없고 휴식도 충분히 취한 뒤 다른 방식으로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어서 노예처럼 작업을 강요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특히 원형경기장은 기본적으로 검투사들이 생사무관 결투를 하거나 죄인을 처형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사회간접자본으로 별 가치가 없다는 건 당대에도 상식이었고, 돈을 들여서 짓거나 개인이 기부하면 노예를 동원했다. 그런데 이걸 군단병들에게 지으라고 강요했다는 건 한 마디로 이들을 노예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크레모나 주민들의 구타와 모욕을 막아야 할 비텔리우스 휘하 군단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옆에서 놀고 있었으니 그들의 분노는 더 커졌다. 당연히 이때 공사를 강요당한 군단병들은 훗날 크레모나 주민들은 물론이고, 비텔리우스파 포로들까지 마구 학살하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4] 이들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판노니아 군단에 가담하여 로마 시가전때 자신들이 머물렀던 근위대 주둔지를 공격하여 자신들을 대체한 라인 강 군단 병사들을 살육하였다.[5] 로마 귀족들이 배가 부르면 음식을 강제로 토하고 다시 먹는다는 유래의 원조가 다름아닌 이 사람이다.[6] 폭식만 일삼으며 국정을 돌보지 않는 걸 보다못한 어머니가 제발 국정 좀 돌보라고 간언을 했지만, 오히려 어머니에게 화를 내며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7] 전술한대로 크레모나 주민들과 라인 강 군단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던 도나우 군단은 무려 공성전을 벌여 크레모나를 함락시키고 도망친 라인 강 군단 병사들과 크레모나의 같은 로마 시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였다. 이 잔인함에 로마는 큰 충격을 받았고 전의를 상실한 비텔리우스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려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더 어이없는 것은 로마 시민들은 이 학살의 충격을 오히려 유흥으로 삼았는데 로마 시가전 당시 시민들은 라인 강 군단병과 도나우 강 군단병들 간의 전투를 마치 검투사 시합처럼 취급하고 창녀들을 곁에 끼고 술을 마시며 결투에서 패배한 병사들 끌어내 죽이도록 강요하는 추태를 보였다.[8] 동생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계속 저항했으나 결국 무키아누스가 보낸 베스파시아누스 파 군대에 패하여 붙잡혔다. 그래도 몸값을 협상하여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무키아누스의 지시로 참수되었다고 한다(...).[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할머니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아버지였다.[10] 비텔리우스가 제위에 오른 뒤 이탈리아까지 오는 몇 달간 비슷하게 연회로 써먹은 돈까지 합친다면 그 금액은 갑절이 된다는 이야기도 된다.[11] 출처: 김경현 차전환 역 「타키투스의 역사」, 2011년,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