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실리우스 라틴어: Gaius Silius | |
생몰년도 | 미상 ~ 24년 |
출생지 | 로마 제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아버지) 코포니아(어머니) 푸블리우스 실리우스(큰형)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작은형) 소시아 갈라 가이우스 실리우스(아들)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13년 |
전임 |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
동기 |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
후임 |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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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로마의 파트리키 씨족인 실리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아버지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는 기원전 2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어머니 코포니아는 기원전 49년 법무관 가이우스 코포니우스의 딸이다. 큰형 푸블리우스 실리우스는 서기 3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는 리키니우스 가문으로 입양된 뒤 7년에 집정관으로 선임되었다.그의 이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타키투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그를 '가이우스 실리우스'라고 지칭했지만, 파스티 카피톨리니는 "가이우스 실리우스, 푸블리우스의 아들, 푸블리우스의 손자, 카이키나 라르구스"라고 지칭했다. 테오도르 몸젠과 아틸리오 데그라시(Attilio Degrassi)는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문구는 그의 전체 이름이 가이우스 실리우스 카이키나 라르구스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지만, 아서와 조이스 고든 형제는 실리우스가 집정관에 선임된 지 불과 50년 후에 처음 기록되었으며,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가이우스 실리우스의 뒤를 이어 보결 집정관이 된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로널드 사임 등은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는 알려지지 않은 원로원 의원일 거라고 추정했다.
13년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14년부터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으로 부임해 21년까지 복무했다. 그는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의 지휘하에 모군티아쿰(현재 독일 마인츠)에 본부를 둔 4개 군단을 지휘했다. 14년 라인 군단이 새 황제 티베리우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관망했다. 그 후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하는 게르마니아 전쟁에 참여했지만, 별다른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15년 개선 훈장을 받았고, 16년 아울루스 카이키나 세베루스와 함께 새 원정을 위한 함대 준비 감독 임무를 맡았다. 이후 하티 족의 땅을 약탈했지만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많은 전리품을 수집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하티족 지도자 우크로메르의 아내와 딸을 생포했다. 그 해 가을 보병 30,000명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하티족을 상대로 또 다른 원정을 벌였다.
21년, 트레베리족의 율리우스 플로루스가 하이두이족의 율리우스 사크로비르와 함께 빚에 시달리던 갈리아인을 선동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반란 진압 책임을 놓고 당시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와 논쟁을 벌인 끝에, 바로가 늙고 병약한 점을 들먹이며 압박을 가한 덕분에 진압군을 직접 이끌었다. 그의 군대는 트레베리족이 피난처를 찾을 것으로 예상했던 아르두에네 숲을 포위했고, 기병대를 투입해 반군을 쉽게 격파했다. 플로루스가 사망한 뒤, 율리우스 사크로바르가 반란을 이어가서 아우구스토두눔(현재 프랑스 오툉)을 공략하고 론 강 계곡에서 작전을 이어갔다. 실리우스는 2개 군단을 이끌고 그들에게 접근해 전투를 벌인 끝에 반란군을 섬멸했고, 이어진 아우구스토두눔 전투에서 하이두이족 주력을 격파했다.
이렇게 혁혁한 전공을 세운 뒤 임기가 만료되면서 로마로 귀환했지만, 24년 세야누스의 음모에 휘말렸다. 세야누스는 게르마니쿠스 휘하에서 게르마니아 전쟁을 치르면서 게르마니쿠스와 두터운 친분을 다졌고, 그의 아내 소시아 갈라가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 대 아그리피나와 친구라는 점, 그리고 실리우스가 7년간 군대를 지휘하고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얻은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점을 볼 때, 장차 티베리우스를 위협할 위험분자가 될 거라고 꼬드겼다. 이에 넘어간 티베리우스는 현직 집정관이자 21년 진압 책임을 놓고 실리우스와 논쟁했다가 밀린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의 아들인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에게 실리우스를 고발하라고 권했다. 때마침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도 아버지가 굴욕당한 것에 이를 갈던 터라 기꺼이 기소하기로 했다.
실리우스는 바로가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으니, 재판의 공정성을 위해 바로가 집정관에서 사임할 때까지 재판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티베리우스는 단호히 거부하면서, 집정관이 로마 시민을 심판하는 건 로마의 관례라고 선언했다. 실리우스는 사크로비르의 반란을 묵인했으며, 아내 소시아 갈라와 함께 반란군이 탈취한 전리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원로원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발언이 허락되지 않자, 처형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자살했다. 실리우스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그의 흉상은 파괴되었으며, 소시아 갈라는 추방되었고, 그녀의 재산 1/4은 고발한 사람들에게 돌아갔고, 나머지는 가족들이 상속받았다.
아들 가이우스 실리우스는 원로원 의원이었고, 48년에 이듬해 집정관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1세의 황후 발레리아 메살리나와 불륜 관계를 맺었고, 그녀와 결혼한 뒤 클라우디우스 1세를 암살한 뒤 황제가 되려 했다가 발각된 뒤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