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라틴어: Gaius Suetonius Paul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제국 |
사망지 | 로마 제국 |
지위 | 에퀴테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미상 |
참전 | 부디카의 난 네 황제의 해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66년 |
전임 |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가이우스 아니키우스 케리알리스 |
동기 |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
후임 | 마르쿠스 안니우스 아프리카누스 가이우스 파키우스 아프리카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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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부디카의 난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장군이다.2. 행적
기원 및 초기 생애는 알려진 바 없다. 그나마 알려진 정보는 고향은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 이탈리아 도시 피시우룸(오늘날의 이탈리아 페사로)이며, 동시대 역사가이자 원로원 의원 타키투스가 그를 파울리누스라고 부른 점 정도다. 참고로 얼핏보면, 푸닉 출신의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와 친척 같지만, 수에토니우스와는 어떤 관련도 없으며,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아버지로 네 황제의 해에 참전했다는 수에토니우스 라에투스와도 어떤 관계가 없다.그나마 남은 기록들에 의하면, 칼리굴라 황제의 신임 아래 서기 40년 법무관에 선임됐고, 칼리굴라 시대부터 황제의 도움 아래 승진을 거듭할 만큼, 파울리누스가 칼리굴라 측근 세력이었다는 것 정도다.
그는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국왕 프톨레마이오스가 로마에 방문한 뒤, 황제와 원로원이 벌인 프톨레마이오스 제거 직후, 원로원과 황제가 왕국을 나누고 속주화를 명할 때, 칼리굴라 황제의 강력한 추천 아래 마우레타니아 초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부임 직후, 칼리굴라 황제의 명에 따라 마우레타니아 왕국 병합과 함께 유바 2세 치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모두를 골치 아프게 한 마우레타니아 내전 문제인 동서 갈등 부분을 군사작전으로 처리했다. 이때 그는 지역 반란을 유도한 인사들을 관리하면서, 치안 유지를 맡아, 원로원과 황제가 함께 통과시킨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속주화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41년 1월 칼리굴라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칼리굴라가 암살된 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등극한 직후 로마가 혼란해진 상황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해방노예 아이데몬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파울리누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인사조치로 마우레타니아에 온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와 함께, 이를 진압했다. 칼리굴라의 명을 받고 마우레타니아에 왔을 때부터 이곳 지리, 사회 환경을 조사해 파악 중이었던 까닭에,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이를 보고했고, 이를 기반으로 로마 제국은 반격했다. 파울리누스는 이때 왕국의 수도, 프톨레마이오스 지지자들이 중심이 된 동쪽을, 게타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에 벌어진 타크파리나스 전쟁 당시 베르베르인들이 로마에게 격렬히 저항했던 서쪽 사막 일대 토벌을 담당했다. 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따르면, 그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군대를 이끌고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간 장군이었다고 한다.
칼리굴라 생전에 벌인 마우레타니아 속주 작업을 완수했고, 호시디우스 게타와 함께 아이데몬의 반란을 진압한 뒤, 로마로 나란히 귀환했다. 이후 58년, 임기 중 병사한 퀸투스 베라니우스를 대신하여 브리타니아 총독에 부임했다.
파울리누스는 전임 총독이 이끌었던 웨일스 부족에 대한 정복 정책을 이어갔다. 특히 60년 모나(현재 앵글시) 섬의 드루이드 성지를 공격해 드루이드 신자들을 학살하고 그들이 섬기는 떡갈나무 숲을 파괴했다. 그러던 61년, 이케니족의 여족장 부디카가 이웃 부족인 트리노반테스 족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켰다. 갖은 수탈과 탄압을 가하는 로마 제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부족들이 이에 호응했고, 나중에는 브리타니아 전체가 반란의 물결에 휩쓸렸다. 당시 로마군은 웨일즈의 모나 섬에 가 있었기 때문에, 브리타니아 본토에 남아있는 로마군은 얼마 되지 않았다. 부디카는 이 틈을 타 봉기하여 여러 초소에 흩어져 있는 로마군을 급습하고 로마 요새를 습격했다.
모나 섬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파울리누스는 제14 게미나 군단에서 약간의 분견대를 론디니움(오늘날 런던)으로 급파해 반란군보다 빨리 도착하게 했다. 그러나 그곳을 지키기에는 병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도시를 버리기로 하고 주민들에게 자신과 함께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많은 주민은 정착촌을 떠나지 않고 남았다가 반란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했다. 반란군은 론디니움을 철저히 약탈하고 불살랐다. 그 후 부디카의 군대는 와틀링 스트리트를 따라 로마와 동맹을 맺은 카투벨라우니 족이 거주하는 베룰라미움으로 진격하여 역시 약탈하고 파괴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약 7만 명의 로마인 및 로마와 동맹을 맺은 브리튼인이 반란군에게 피살당했다고 한다.
한편, 트리노반테스족은 부디카의 이케니족과는 별도로 카물로두눔의 퇴역병 식민도시를 공격했다. 이 식민도시에는 방벽이 없었고 소규모 방어 수비대만 있었기 때문에, 총독 카투스 데키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무장이 덜 된 병사 200명만 보냈고, 그들은 반군에게 섬멸당했다. 카물로두눔은 곧 함락되었고, 그곳에 살던 로마인 전원이 학살당했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는 제9 히스파니아 군단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으나 참패하여 보병을 전부 잃고 기병과 함께 요새화된 진영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데키아누스는 공포에 질려 갈리아로 도망쳤다.
파울리누스는 제14 게르마니아 군단,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과 보조 부대로 구성된 약 10,000명의 병력을 집결시킨 뒤 엑서터에 주둔하고 있는 제2 아우구스타 군단에 합류를 명령했다. 그러나 군단장 포에니우스 포스투무스는 가망이 없다고 보고 거부했다. 이후 파울리누스는 주민들과 함께 브리타니아를 완전히 떠날 지, 아니면 운명을 건 일전을 벌일 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전력상 절대 열세이지만 로마군의 전투력을 믿고 회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숲을 배경으로 협곡과 접한 평야를 전장으로 선택해, 매복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탁 트인 평원에서 적 앞에 섰다. 전투 장소가 어디 인지는 타키투스가 기록하지 않아서 확실하지 않으나, 현대 학계는 두 군대가 런던을 북서쪽으로 연결하는 와트링 스트리트를 따라 나란히 진군하다가 애서스톤 또는 맨케스터 인근에서 만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로마 군단병은 중앙에 배치했고 양익에 보조병을 배치했으며, 극좌익과 극우익에 기병을 배치했다고 한다. 반면 8만에 달하는 브리튼인은 무질서한 무리를 이루었으며, 후방에 수레 무리를 가득 배치하고 아이와 아내들을 그 위에 올려놓아서 전사들이 도망칠 틈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타키투스는 부디카가 동지들을 모아놓고 아래와 같이 연설했다고 밝혔다.
"나는 지금 고귀한 혈통의 후손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종족의 대표자로서 잃어버린 자유, 채찍질당한 내 몸, 내 딸들의 잃어버린 순결에 복수하려 한다. 로마인의 정욕은 너무 멀리 가서 우리의 인격은 물론 순결마저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지 않다. 하늘은 의로운 복수자의 편이다. 감히 우리와 대적하려 했던 군인은 파괴되었다. 나머지는 진영에 숨어 있거나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돌격과 타격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이의 함성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대들이 아군의 위력과 전쟁의 원인을 잘 따져본다면, 우리가 이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수에토니우스는 이에 대응하여 군단병들에게 아래와 같이 연설했다고 한다.
"저 야만인들의 소란은 무시하라. 그들의 지휘관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다. 그들은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우리는 전에도 그들을 이겼으며, 그들이 우리의 무기를 보고 우리의 투지에 직면할 때 산산조각날 것이다. 함께 맞서 싸우자. 창을 던지고 나아가라. 방패로 놈들을 쓰러뜨리고 검으로 숨통을 끊어라. 약탈은 잊어버려라. 이기기만 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현대 학계는 타키투스가 연설을 꾸며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다만 일각에서는 당시 브리타니아에서 장교로 활동했던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가 파울리누스의 휘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니, 타키투스가 장인 아그리콜라로부터 파울리누스의 연설을 전해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후 벌어진 와트링 스트리트 전투에서, 로마군은 완승을 거두었고 부디카는 자결했다. 전투에 참가하길 거부했던 포에니우스 포스투무스는 파울리누스가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을 듣자 제2 아우구스타 군단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것에 부끄러워하며 자살했다. 이후 파울리누스는 이케니 족과 트리노반테스 족에 대한 징벌 원정에 착수해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네로는 파울리누스가 브리튼인을 학살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접하고 또다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파울리누스를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로 교체했다. 페트로니우스는 더 이상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고, 브리튼인들을 좀더 온건하게 대했다.
브리타니아 총독에서 물러난 파울리누스는 로마로 귀환한 뒤 66년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어 1월부터 6월까지 임기를 수행했다. 68년 네로 황제가 자살한 뒤 69년 네 황제의 해가 벌어졌을 때, 파울리누스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황제에 의해 총사령관에 선임되어 비텔리우스의 라인강 방면 로마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그가 이끌게 된 군대는 프라이토리아니와 검투사, 해방노예로 구성된 잡다한 병력이어서 게르만족과의 오랜 전투로 단련된 라인강 방면 로마군의 전투력에 비할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69년 3월 말 아울루스 카이키나 아일리우스가 이끄는 비텔리우스군을 격파했다. 그런데 동족상잔을 벌이는 것에 심적 부담이 컸는지 당장 추격해서 섬멸하자는 요구를 묵살하고 적이 크레모나로 후퇴하는 걸 내버려뒀다.
카이키나는 크레모나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뒤 파비우스 발렌스의 또다른 군대와 합세해 재 공세를 벌일 준비를 갖췄다. 그들이 베드리아쿰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토는 군사 회의를 열어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파울리누스 등은 도나우 방면 로마군이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회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토의 형제 티티아누스와 근위대장 프로쿨루스는 당장 전투를 벌이자고 주장했다. 오토는 고심 끝에 아군이 저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서 사기가 크게 올랐으니 기세를 이어가면 또다시 이기리라 여기고 진격 명령을 내렸다.
오토 본인은 포 강 남쪽 둑에 있는 브릭셀리움에 상당한 예비군과 함께 남았고, 파울리누스 등이 이끄는 본대는 베드리아쿰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어진 전투에서 압도적인 수적, 전투력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4만 명의 로마인이 죽었다고 한다. 오토는 브릭셀리움에서 패전 소식을 접하자 자결했고, 그는 비텔리우스 일당에게 체포된 뒤 자신이 베드리아쿰에서 의도적으로 패배했다고 주장해 사면받았다. 이것이 사실인지,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건지는 불분명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