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황제 참칭자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Pescennius Niger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Gaius Pescennius Niger |
출생 | 135년/140년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라티움 아퀴눔[1] | |
사망 | 194년 (향년 53/59세) |
로마 제국 시리아 코일레 속주 안티오키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193년 4월 9일 ~ 194년 5월 (1년) | |
전임자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
후임자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부모 | 아버지 : 안니우스 푸스코스 어머니 : 람프리디아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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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대 로마제국의 2세기 내전 시기였던 다섯 황제의 해 당시의 임페라토르 중 한명.경쟁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달리 원로원의 승인을 받지 않았으나, 로마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 참칭 전부터 황제 후보로 거론됐던 사람이다.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있던 중, 193년 4월 동방 주둔 군대의 추대로 황제로 선포돼, 페르티낙스 암살 사건 문제를 제기하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 반기를 들었다. 194년 3월(또는 4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의 대결에서 패해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붙잡혀 참수됐다.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유스투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Gaius Pescennius Niger Iustus Augustus)[2]다.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과 경력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이탈리아의 오래된 기사계급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니우스 푸스쿠스, 어머니 람프리디아 모두 이탈리아 기사계급 출신이다. 이탈리아 안에서 탄탄한 가정환경과 재력을 갖춘 집안 사람이나, 오랜 역사에도 직계 내에서는 본인대에서야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다."까만"을 뜻하는 니게르라는 별칭은, 아버지 안니우스 푸스쿠스의 코그노멘이 '푸스쿠스(갈색)'인 것과 마찬가지로 페스켄니우스의 신체적 특징으로 얻게 됐다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얼굴이 붉고 구릿빛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몸이 하얗고 살집이 있어 뚱뚱했음에도 목덜미가 남들보다 까만 까닭에, 이 별명을 얻게 됐다.
초기 경력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전문 행정관료이자 군인으로 탄탄하지만 평범한 군대 경력을 거친 베테랑 행정가이자 장군으로 명성을 쌓았다. 그는 189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191년에는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알려졌다.
니게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이후 시작된 외적의 침공, 전염병 유행 등에 따른 기사계급 출신 인재 등용과 고속승진 흐름 속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다. 그는 문무 전반에서 오랜 경력을 탄탄히 쌓았고, 콤모두스 치세 초반에 전형적인 2세기 당시의 원로원 신참자 중 한명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경쟁자 세베루스와 묘하게 비슷하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본인 가족 중에서는 원로원에 첫 입성한 케이스였다고 해도,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보다 훨씬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최상층 기사계급 출신이고, 당숙 가이우스 등이 원로원에 먼저 입성한 집안 출신이라는 점에서 니게르와 그 결이 묘하게 달랐다.
어쨌든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의 치세가 시작된 직후 이런 흐름 속에서 기회를 잡았다. 젊은 시절 보조부대 지휘관으로 로마군을 지휘했고, 황제령 아이깁투스에서 전문 행정관료로 파견돼 탄탄한 전문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아래에서 원로원 의원이 되고 군단장에 올랐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의 경력은 콤모두스 치세 초기에도 계속됐다. 그는 젊은 콤모두스 황제와 그를 보좌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유지를 받든 제국의 장군들에게 신뢰를 받아 다키아 일대에서 도나우 일대 군단을 이끌며 여러 군사작전을 진두지휘했다.
페르티낙스가 살해되자, 193년 4월 13일 시리아 군단 병사들에 의해 선포됐는데 세베루스보다 먼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세베루스가 4일 전 먼저 제국의 황제 칭호를 참칭했다고 한다.
2.2. 황제 추대와 내전
이 사람은 군사 문제에서는 지나치게 원칙주의자였지만, 세베루스와 달리 매사와 인간관계에 있어 남달리 정직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부하들에게 황제로 선포되자 이를 알리는 서한을 로마로 보냈는데, 세베루스는 중간에서 그의 서한을 가로챘고 니게르가 먼저 반란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분위기를 바꿔 명분을 내세우며 로마로 진군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인망이 대단한 사람이었고 매우 정직했기 때문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자신에게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니게르를 로마로 복귀시켜 당장 황제 칭호를 줘라"고 항의를 받았다. 따라서 디디우스는 백인대장 한명을 자객으로 보내 니게르 암살을 명령했고, 실제로 암살범은 안티오키아로 향했다고 한다.니게르는 시리아 속주 총독 재임 중 193년 4월 13일 황제로 선포된 이후, 동방 일대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일가 칭호로 '정의'를 뜻하는 유스투스를 사용했다. 이후, 서방에서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시간을 두고 부하들이 자신을 추대하는 모양새로 황제를 자처했는데 세베루스는 로마 최정예를 이끌고 군사행동을 개시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살해된 이후 로마로 입성했다. 이후, 로마에서 황제의 지위를 굳힌 세베루스는 동방 군단들이 황제로 선포한 시리아의 총독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를 처리하기로 했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동향 렙티스 마그나 출신의 고향친구이며 외가 친척인 가이우스 플비우스 플라우티우스에게 니게르의 아이들을 인질로 붙잡아 두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니게르는 이런 세베루스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잔티움을 점령한 아시아 총독 아이밀리아누스를 비롯한 동방 일대의 총독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이윽고 군대를 규합한 니게르는 동방 일대의 군세와 오랫동안 쌓아온 인망을 바탕으로 본국 이탈리아를 장악한 세베루스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곡물 공급 지역인 이집트를 공격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세베루스는 밀 공급 방어를 위해 이집트 일대의 방어를 강화했으며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로마 최강의 16개 군단을 가지고 니게르를 압박했다. 왜냐하면 세베루스와 달리 니게르는 이 당시 시리아에 주둔한 3개 군단, 아라비아에 주둔 중인 2개 군단, 말라티아-아라비아 테트라에 있던 1개 군단 등 동방 6개 군단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게르는 시리아의 북부 측면을 막아주는 타우루스 산맥의 고개들과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를 요새화했다. 그는 또한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 보스포루스의 좁은 교차로를 통제하는 비잔티움을 포위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베루스의 군대는 트라키아에서 소아시아까지 진격해 들어갔고, 193년 말 무렵, 니게르 군대를 상대로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첫 번째는 마르마라 해안의 키지쿠스(Cyzicus)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의 승리였고, 두 번째는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니케아[3]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니게르는 대비했지만 세베루스의 군대는 타우루스 산맥의 고개를 돌파하여 시리아로 진군했다.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는 500년 전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퇴한 평원 위 이수스(Issus) 근처에서 194년 3월 또는 4월에 벌어진 전투였다. 니게르의 군사들은 북부 군단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아 패하고 말았다.
2.3. 최후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세베루스에게 패했고, 달아나는 동안 니게르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따라서 니게르는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붙잡혀 참수되었다. 이때 세베루스는 니게르가 동방에서 내전을 일으키고, 큰 소란을 일으킨 다음 파르티아로 도피하려던 것에 관해 죄를 물었다. 따라서 그는 니게르의 아내, 아이들을 붙잡은 뒤 연좌제를 적용해 모두 처형시켰다. 또한 그는 내전 당시 외세를 끌어들이려고 한 니게르 지지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죽인 이들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했다.하지만 옛 니게르 지지자 중 살아남은 이들은 세베루스의 무자비한 처벌을 피해 로마의 이웃이며 동방의 오랜 적인 파르티아로 피난갔고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연간의 1차 파르티아 전쟁 원인이 된다.
3. 사후 영향
동방 속주들의 지지를 규합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내전을 치른데다, 비잔티움에서는 이곳 주민들의 지지 아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군을 고생케하고 로마 제국의 적국 파르티아까지 니게르와 사실상 동맹인 까닭에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몰락 이후 동방 속주 일부가 이 문제로 꽤나 고생했다.당시 파르티아 왕 볼로게세스 4세는 세베루스의 경쟁자 니게르를 지원하면서,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한 로마의 속국 오스로에네에게까지 간섭해 왕과 로마를 이간질시켰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195년 여름 동안 니게르와 도망간 그의 군사들을 지원한 파르티아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향해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파르티아를 박살내기 위해 진군한 세베루스의 군사행동은 갑자기 중단됐다. 왜냐하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근거지인 브리타니아에서 힘을 키운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허나 비잔티움의 경우, 외세를 끌어들여 세베루스와 내전을 벌인 니게르를 지지하고 거세게 저항한 탓에 세베루스 황제에게 반역향으로 지목돼 본보기가 됐다. 이때 세베루스는 비잔티움 도시와 주민들에게 그 죄를 물어 혹독히 도시와 주민들을 처벌하고 약탈을 허용해 내전 중 외세와 협력한 행동을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