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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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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지리적 특징
2.1. 모에시아와 트라키아2.2. 카르파티아 산맥
3. 역사
3.1. 다키아 왕국: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2세기까지 약 300여 년간
3.1.1. 왕국 성립 이전3.1.2. 왕국의 성립과 전성기3.1.3. 로마와의 전쟁 후, 멸망3.1.4. 다키아 왕국의 의의
3.2. 105년 ~ 275년, 로마 제국, 다키아 속주
3.2.1. 275년, 로마의 포기: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3.3. 275 ~ 5세기까지: 로마화된 부족의 시기
4. 기타

1. 개요

카르파티아산맥다뉴브 강의 사이에 있는 영역 중, 판노니아(지금의 헝가리)가 아닌 지역이 다키아다.
파일:g3PlryW.jpg

다뉴브 강 유역을 나타낸 지도. 오른 편에 루마니아를 관통하여 올라가다가 서쪽으로 휘어지는 산맥이 카르파티아 산맥이다. 대체로 다뉴브 강, 카르파티아 산맥, 슬로바키아 아래쪽의 티서 강으로 둘러싸인 영역 중 판노니아를 제외한 동쪽이 다키아에 해당한다. 로마 제국의 다키아 속주가 이 영역에 건설되었다. 다만 다키아 인이라 불린 민족의 활동 영역은 그보다 더 넓을 때도 있어서 다뉴브 강 이남까지 내려오기도 했다.

루마니아 글씨 아래에서 카르파티아 산맥이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다가 다뉴브 강과 만나면서 끝나는 것이 보인다. 이 부분을 따로 트란실바니아알프스 산맥이라고도 부르며, 이 산맥을 기준으로 북쪽은 지금의 트란실바니아 지방, 남쪽은 왈라키아 지방으로 나뉜다. 자세히 보면 올트(Olt) 강이 트란실바니아알프스 산맥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흐르면서 두 지방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2. 지리적 특징

2.1. 모에시아와 트라키아

다키아를 이해하려면 모에시아와 트라키아와 같은 중요 인접 지역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파일:ZtRMpcy.jpg

전성기 시절의 로마 제국 영토 지도. 지금의 이스탄불을 포함하는 지역에 트라키아가 있고, 그 주변에 상류 모에시아(Moesia Superior) 및 하류 모에시아(Moesia Inferior) 속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의 불가리아가 있는 영역이 바로 모에시아와 트라키아로[1], 어디까지가 그리스 영향권인지 애매하게 보이는, 지리적 경계선과 문화적 경계가 겹치는 지역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분명히 다뉴브 강으로 구분이 깔끔하게 될뿐더러, 우크라이나 흑토지대에 육로로 인접해 있다는 점 때문에 굉장히 쏠쏠한 가치가 있었고, 실제로 로마에 복속되자 빠르게 모에시아와 트라키아로 속주가 분리될 정도로 체계화된다. 특히, 트라키아는 비잔티움이 있는 곳으로, 바로 이 비잔티움이라는 미개척 지역이 그 유명한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된다.

이 지역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까지 와서 사트라프를 설립한 쏠쏠한 땅덩이인데, 페르시아가 떠난 후 마땅한 패권이 정립되지 않았기에, 지중해 세계가 오래전에 건설된 문명으로 가득찬 상태에서 남은 쓸 만한 땅이 바로 저 모에시아-트라키아였으며, 따라서 이곳은 후발주자들이 새로운 문명을 건립하기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2.2. 카르파티아 산맥

모에시아 및 트라키아의 위쪽에 있는 다키아는 카르파티아 지역, 즉 판노니아의 흑해 방향 경계에 붙어있는 땅인데, 이 카르파티아 지역의 특징은 카르파티아란 이름답게 카르파티아산맥이 다른 땅덩이로부터 이 지역을 격리한다는 것이다. 즉, 천연의 성벽이 있는 셈이므로, 상당히 쏠쏠한 방어선이 되어 줄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파일:external/www.eliznik.org.uk/3-bc.gif

카르파티아 지역의 서편은 뻥 뚫려있으며(celts, 즉 켈트족이 붉은색 선으로 침략해오고 있다.), 카르파티아 지역의 동편에 약간 삐져나와 있는 왈라키아 지역은 그야말로 뻥 뚫린 대로와 같다. 그냥 뚫려있기만 하면 상관없는데, 문제는 그 주변에 각종 전투종족이 득시글거린다는 것. 서에서는 켈트게르만이 몰려오고 동에서는 스텝 유목민족 스키타이가 몰려오더니, 드네프르 강 타고 루스 바이킹이 내려오고, 왈라키아랑 볼가 강에서 북상하는 불가르에, 마지막으로 슬라브가 스멀스멀 기어온 땅이다. 고대 문명이 망조가 들 때마다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게 유민의 침략인데, 이곳은 그게 실시간으로 이어져 온, 정주문명이 자리잡기 매우 힘든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2]

3. 역사

3.1. 다키아 왕국: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2세기까지 약 300여 년간

다키아 왕국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현재 루마니아 지역에 있었던 고대 왕국이다. 로마와 다뉴브 강 하류 북부의 패권을 둘러싸고 두 번 전쟁을 치렀고, 도미티아누스 시절과 트라야누스 시절에 로마와 격전을 치렀으나 결국 다키아 전쟁에서 패해 멸망했다. 최후의 왕은 데케발루스.[3]

3.1.1. 왕국 성립 이전

위에 설명했듯이, 원래 이곳은 다뉴브 강과 산악 지역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리스와 로마가 두각을 나타내던 곳이다. 게다가 주변에는 켈트족, 게르만족 같은 야만족들이 둘러싸여 있어서 문명의 개화는 아무래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위에 설명했듯이 그 이전에는 켈트족이 트라키아인을 공격하고 지나가는 등 난장판이었다. 그리고 모에시아-트라키아도 1세기 이전에는 아예 아무 기록조차도 없다. 이 지역에 '다키아'란 이름이 붙은 것부터가 신기할 수준이다.

3.1.2. 왕국의 성립과 전성기

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잡으면서, 유민 폭풍의 빈도는 잦아들었는데 그래도 여긴 결코 살 곳이 못 되었었다. 근데 그러던 와중에 여러 부족들이 모여들어 다키아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더니, 기원전 1세기가 되어 부레비스타 왕(BC 82~BC 44)이 여러 부족들을 다키아인의 이름 아래 규합하고 흑해 연안과 중부유럽의 보헤미아까지 이르는 왕국을 세워낸 것이다.

부레비스타 왕이 죽은 후 분열되어 증발하나 싶었으나, 루보보스테스 왕이 켈트족을 몰아내고, 다키아인의 패권을 세우게 된다. 이후 데케발루스 왕이 등장해서 세력을 확장하며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다키아는 로마에 침략하기도 하여 로마와 전쟁이 일어났다.

3.1.3. 로마와의 전쟁 후, 멸망

다키아인들의 빠른 확장은 당연히 로마에 큰 위협이 됐다. 당시 로마는 게르만족의 산발적인 일리리쿰 침입 때문에 상당히 고생하고 있었는데, 다키아 왕국까지 다뉴브 강을 넘어오게 되면 '서쪽에 게르만, 동쪽에 다키아'라는 버틸 수 없는 위기에 처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다키아의 확장은 로마에게 있어 눈엣가시였다. 일단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로마는 다키아와 산발적으로 충돌하였고, 발칸 반도 북부와 다뉴브 강 유역에서는 계속 작은 충돌이 이어졌다.

기원후 87년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가 지휘한 로마군은 다키아에게 대패했고, 푸스쿠스는 전사했다. 로마군은 복수하러 갔다가 다른 지역에서 도미티아누스가 게르만족의 일파인 마르코만니족에게 패하는 바람에 다키아와는 강화를 맺고 철수했다. 이 강화는 매우 굴욕적이었고, 로마는 강화조건으로 다키아에게 기술자와 군사고문, 그리고 배상금을 지불할 정도였다.
3.1.3.1. 다키아 원정
도미티아누스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는 이를 매우 굴욕적으로 생각했고[4] 다키아에 적대적인 정책을 취했다. 다키아가 모에시아를 대규모로 침공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으므로, 매우 위협적인 거대 야만족 세력의 덩치를 줄여놓으려는 시도였는데, 공교롭게도 이렇다 할 이름이 붙은 것부터가 신기할 정도의 벽지 중의 벽지 다키아에 갑자기 금광과 은광이 발견된다. 다키아가 듣보잡 땅에 세워진 왕국이긴 해도 카르파티아 지역은 그럭저럭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었다.[5] 그리고 옆에 붙은 흑해로 무역이 가능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런 땅에 새로 발견된 금맥은 최소한 자원적 면에서는 신흥 왕국의 정립이 가능한 보증 수표였다.

다키아와 로마는 다시 전쟁상태에 들어갔고, 다뉴브 강 유역에서 예전처럼 계속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이때 다키아인들이 보여준 무용은 굉장했고, 로마군은 당시 기록에 따르면 다키아인들이 팔크스(Falx)를 가지고 사지를 자르는 광경을 경험했을 정도다.

파일:oPw4sus.jpg

팔크스는 원래 라틴어로는 평범하게 그냥 '낫'이란 의미인데, 나중에 그와 비슷하게 생긴 무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이 다키아인들의 팔크스는 날 끝을 굽힌 ㄱ자 형태의 곡도로, 찍기 성능과 베기 성능, 찌르기 기능을 합친, 만들기 나름이긴 하지만 칼에 가까운 일종의 언월도였다. 현대에 사용되는 무기 중에서는 구르카 족의 쿠크리를 생각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 조선낫 같이 생긴 무기다. 다키아인들은 이 팔크스를 사용해 전방의 군단병 대형의 방패를 쪼개버려서 개발살내고, 그 과정에 군단병들의 팔뚝도 덤으로 싹둑 잘라버렸다. 이들은 단순히 창칼 들고 덤비는 광전사가 아니라 정확하게 방패 옆으로 글라디우스를 겨누는 팔을 노려 대각으로 방패와 함께 팔을 절단하는 '충격보병+광전사'였던 것이다. 이놈의 팔크스에 하도 시달린 나머지, 너무 불편해서 순식간에 폐기되었던 로리카 세그멘타타(갑옷)가 다키아 원정 때 재생산되었으며, 로마군은 라멜라 아머(찰갑)를 팔에도 덧대서 초중무장을 한 상태로 다키아인과 싸워야 했다.

파일:fPwPu40.jpg

파일:haeAeXq.jpg

마땅한 병법이 없는 야만인을 상대로 강한 위력을 보이는 레기온이 게르만/켈트가 오는 것을 막기 어려워져갔던 것은 상대가 진보한 것이니 당연한 거라 쳐도, 신생 부족기반 왕국이 저 정도로 그 당시 최강이었던 로마군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굉장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새로이 등장한 것 치고는 무장 수준도 정말 좋았다. 당시 비문명권 부족들의 무장 수준이 날이 갈수록 향상되고 있기는 했지만 로마 제국 또한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기였고 게르만족의 무장 품질이 여전히 청동기 수준이던 시기다. 이에 비해 다키아인들은 최소한 방패는 들고 나왔으며, 사슬갑옷이나 찰갑과 투구로 완전 무장한 병사들까지 있었다.

사실 장비의 수준은 다키아인의 위력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이유밖에 되지 못한다. 진짜 중요한 건 다키아인들은 조직적이라서 이미 통합된 군율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떼거리 부족민이 아닌 로마의 적수인 사산조 페르시아군처럼 정규화된 다키아 군이었다. 조직화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광전사들을 선발 충격군으로 내세우고 조직화된 중보병들을 중추에 배치시키고 진형을 짜는 등, 전략전술까지 구사해 로마군을 아주 환장하게 했다.
3.1.3.2. 다키아 전쟁: 트라야누스 황제
결국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의 완전 정복을 위한 전쟁을 고려하게 된다.

그리하여, 101년, 트라야누스는 아예 다키아 왕국을 멸망시키려고 작정하고 대규모 원정을 실시했다. 이 원정은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이 투입된 속주 단위 대규모 전쟁으로서, 갈리아 원정을 떠났던 카이사르도 한 수 접어줄 수준의, 로마 제국 2,00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다키아 왕국에 고대 로마 버전 십자군이 선포된 급이다. 로마가 동원한 총병력은 15만~20만. 정규 로마 군단병뿐만 아니라, 각 속주나 동맹국에서 여러 병력을 제공했다. 여기에 맞선 다키아군은 총 4만 명 정도였으니까 로마 입장에서는 적군의 4-5배의 병력을 동원한 대원정이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93bb55f096ee0336463ef08d9689b08.jpg

로마군을 자주 골탕먹였던 다키아 왕국은 이런 대규모 원정은 버틸 여력이 없었고, 끝내 101-102년의 원정에서 수도를 빼았겼으나 데케발루스는 산악지역으로 도피하여 계속해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 게릴라전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자 빡친 트라야누스는 아예 저항을 뿌리뽑으려고 105-106년 다시 원정을 단행했고, 데케발루스는 로마의 대병력에 대패하여 쫓기다가 결국 포위되자 포로가 되길 거부하고 자결했다.

이렇게 다키아가 패하기는 했지만 이제 겨우 새로 생겨난 나라가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절대 강국 로마의 대규모 침공을 5년간 견뎌낸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애초에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원정을 어설프게 갔다가는 실패하거나 박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다키아의 완전 정복을 이룰 수 있도록 철저하고 신중하게 원정을 단행했으며 행군 도중 기회 닿을 때마다 요새를 단단히 하나씩 박아가며 진출했다. 다키아를 초토화시킨 것은 덤이었다.

다키아의 분전에 비할 수 있는 것은 훗날 불가리아 제1제국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바실리오스 2세의 로마를 상대로 30년을 버틴 것인데 전성기라곤 해도 이 당시 로마는 지중해 전체에서 지중해 동부로 반토막, 여기서 발칸 및 아나톨리아로 또다시 반토막이 난 것이기 때문에 다키아 원정 때의 전력을 가진 로마군의 침공을 받았다면 다키아처럼 5년을 버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재위 중이던 당시에는 로마의 적수였던 파르티아와 게르만족들조차 로마의 총력전 침공을 두려워해서 함부로 맞설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6]

3.1.4. 다키아 왕국의 의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apul_lui_Decebal.jpg

루마니아에 있는 데케발루스 기념상

현대 루마니아인은 민족과 문화, 언어에서 볼 때 라틴 민족에 속하는데, 언어의 경우에는 주변 민족과 국가들의 영향 때문에 타 민족의 어휘를 많이 받아들여 다른 로망스어파와는 이질적인 편으로 그리스어, 헝가리어, 남슬라브어, 독일어 등 여기서 따온 많은 차용어가 루마니아어에 들어가 있다.[7] 중세에 나타난 루마니아의 국명은 이 지역에 있던 많은 민족이 동로마와 관련돼서 나왔다는 설이 있으며, 때문에 1970, 80년대 루마니아의 악명높은 독재자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도 자신이 다키아와 로마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 현재 루마니아인들은 고대의 다키아, 중세의 동로마 제국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다.

3.2. 105년 ~ 275년, 로마 제국, 다키아 속주

제 1차 제 2차 다키아 전쟁을 통해 로마는 이 지역에 다키아 속주를 세우고 데케발루스 휘하 기존 다키아 왕국의 지배층과 민족들을 완전히 말살 초토화 시켰으며 이후 이 지역 주민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모여든 로마인들로 채워지게 된다 기존에 로마 제국이 피정복민들에게 보였던 관대한 조치와 비교하면 상당히 잔인하고 단호한 정책이라고 할수 있겠는데 이러한 조치는 훗날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때 나비효과로 돌아오게 된다.

다키아의 풍부한 금 은등의 자원들과 전리품들은 그후 로마제국 전역의 토목공사 등에 사용되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를 본떠 트라야누스 또한 다키아 전쟁기를 서술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고 다키아 전쟁의 일대 경위는 트라야누스 포룸에 부조로 조각되어 남겨져 오고 있다

파일:VpV4eR2.jpg

서기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기 로마는 마음만 먹었다면 다뉴브강 부근에 살며 이당시만 하더라도 세력이 미약했던 야지게스족, 마르코만니족들을 병합하여 다뉴브강 방어선의 단축을 노리고 국경 강화 및 다키아 속주의 방위력 강화등을 노려볼수도 있었으나 재위 기간 내내 제국 순행을 통해 로마군의 정예화와 제국 방어선 역량 강화에만 매진 했던 하드리아누스에게 이 문제는 아직 피부로 와닿는 문제라 할수 없는 사항이었고 결과론적이긴 하나 마르코만니족, 야지게스족은 이후 아우렐리우스 시기 콰디족과 함께 로마군을 괴롭히는 다뉴브강의 북방 게르만족들중 주요 한 부족이 되어 오랜 세월 로마와 적대를 거듭하게 된다

170년 봄 게르만족들의 침입을 맞아 격퇴 하는 과정에서 다키아 속주에서부터 북상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던 클라우디우스 프론토가 이끌던 로마군은 이과정중에 사령관 프론토가 전사하고 2만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참사가 발생하게 된다

로마인들과의 크고 작은 교류 및 반달족, 고트족같은 먼 게르만족들의 남하가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부족들 간의 통합 과정을 통해 시간이 갈수록 제국을 닮아가며 정예화 조직화 역량 강화를 거듭해나가던 가까운 북방 게르만족들의 공격으로부터 다키아 속주 국경 방어의 어려움을 이미 오래전부터 잘알고 있었던 로마제국은 178년 5현제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기 시작된 게르마니아 전쟁을 통해 다뉴브강 북쪽 지역에 보헤미아 속주라는 교두보를 확보 다키아 속주화를 통해 불가피하게 차질이 생기게 된 기존 선 방어 전략의 수명을 연장 시키고 선 방어 전략에서 아주 중요한 방어선의 단축 효과를 포함 이중 방벽 체제를 통해 다뉴브강 방어선의 강화를 노려 보고자 하였으나 180년 빈도보나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지병 악화로 인해 병사하고 그뒤를 이은 콤모두스가 돌연 취소함에 따라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183년 콤모두스 황제 시절에 다시 이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하는데, 다키아족의 반란인지 아니면 게르만족 같은 야만족의 침략인지 자세한 정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3.2.1. 275년, 로마의 포기: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한편 다키아 주변의 게르만족인 고트족은 계속 다키아 속주를 파상적으로 공격했고, 금, 은광이 있다는 것이 장점이긴 했지만 위치가 교두보 수준이고 경계선도 그냥 산맥 아니면 평지인지라 적의 침략을 막는 게 힘들어 비용이 더 들었다. 로마는 이에 견딜 수가 없어서 275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결국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고 이 지역에 주둔하던 군단의 기지를 다뉴브강 남쪽으로 옮겼다.

이후 33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지역을 일시적으로 수복하지만 얼마 안 가 다시 상실한다.(콘스탄티누스의 고트족과 사르마티아 원정) 이후 이 지역은 중세로 넘어가며, 루마니아가 된다.

3.3. 275 ~ 5세기까지: 로마화된 부족의 시기

4. 기타

대거의 어원이 다키아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다키아 인', '다키아의 것' 등을 의미한 속화 라틴어 'daca'가 변해서 나온 말이라고. 영문 위키낱말사전 참고. 루마니아의 고고학자인 콘스탄틴 다이코비치우[8]에 의하면 다키아인을 의미하는 단어인 'dac'가 'daca'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daca'는 다키아 언어로 그들이 사용했던 고유 무기인 '칼'과 '단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후기 동로마 제국에서 사용한 군기 비잔티움 드라코에서 다키아 지역이 로마에게 준 영향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원조 다키아 드라코는 개머리 모양 장식에 물고기같이 생긴 몸체를 붙여놓은 것이었는데, 이것이 좀 더 간지나게 아예 용 대가리로 개머리 모양을 대체한 것이 비잔티움 드라코. 참고로, 다키아의 영향은 그냥 아주 펠로폰네소스를 포함한 발칸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세르비아와 같은 다뉴브 강 주변 지역의 나라들에 전통으로 이어져오는 각종 드라코들로 짐작할 만하다.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인 비트디펜더는 회사의 국적이 국적이다보니 아예 대놓고 원조 다키아 드라코를 박스 이미지로 쓰고 있다. 꽤나 간지나게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개량한 이미지가 박스 이미지에 그려져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은 그냥 간지난다고 생각하고 땡이지만 다키아 드라코가 뭔지 아는 사람이 보면 묘하다.

루마니아의 자동차 브랜드 다치아가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듯하다.
[1] 다만 동트라키아는 터키, 남트라키아는 그리스 땅이다.[2] 거대 문명과 가까우면서도 주변 이민족에 취약한 개방적인 지형이라는 점은 동아시아의 만주와도 유사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단군 책임론에서 약간 다루고 있다. 만주 지역은 중국이 압도적인 문화적 우세와 거대한 인구로 장악하는 결과로 귀결되었고 그나마 한민족 정도만이 유의미한 소수민족으로 남아있다.[3] 라틴어식 이름이다. 다키아식 이름은 디우르파네우스(Diurpaneus).[4] 둘 사이에 네르바가 있기는 하지만 재위기간이 2년 남짓으로 짧으니 패스.[5] 애초에 농사가 되기 때문에 후대에 마자르족이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판노니아와 트란실바니아에 눌러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6] 실제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정복 후 파르티아를 침공해서 초토화를 시키고 멸망 위기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침공 도중에 트라야누스가 사망하는 바람에 정복을 완료하지는 못했다.[7] 19세기에 언어정화운동으로 타 로망스어의 차용어를 받아들였으나 현재에도 로망스어 중에서는 외래어가 많은 언어에 속한다.[8] Constantin Daicoviciu(1898~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