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9:05:41

여섯 황제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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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 Romae
Ἡ Ἱστορία τῶν Ῥωμαίω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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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황제의 해
Annus sextus Imperatorum
238년
황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
로마 제국의 왕조
세베루스 왕조 군인 황제 시대

1. 개요2. 배경3. 전개
3.1.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봉기3.2. 카르타고 시가전과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몰락3.3. 원로원의 황제 추대와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난동3.4. 아퀼레이아 공방전과 막시미누스의 허무한 최후3.5.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의 몰락
4. 고르디아누스 3세 하의 혼란과 티메시테우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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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38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로마 황제로 잇따라 등극한 사건. 군인 황제 시대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된 내전이다.

2. 배경

235년 3월 19일,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 방면 로마군이 모군티아굼(오늘날 독일 마인츠)에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 휘하 장군, 원로원 의원, 황제 자문위원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그 후 황위에 오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원로원에 승인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러나 원로원은 새 황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막시미누스는 트라키아 속주민 출신 귀화인으로, 고향 속주민도 야만족이라고 부른 혈통 출신이었다. 그는 미천한 출신이라는 자신의 출신 배경을 원로원에서 증오할 것이라고 굳게 믿어, 제위 찬탈 직후부터 원로원을 의심해 황제로 승인받음과 동시에 추가로 피바람을 일으켰다. 이는 막시미누스가 장년의 나이까지 보조병들을 훈련시키는 교관 노릇을 하다가 황위를 찬탈한 이력, 본인 대에 시민권을 취득했어도 능력이 뛰어나면 인정해주는 로마군, 원로원 내 실력자들의 분위기상 용인될 수 없는 행동이 됐다. 그 결과, 막시미누스는 원로원 전체에게 '반야만족'으로 단단히 찍히게 된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를 존중해 일단 막시미누스 아내 카이킬리아 파울리나에게 아우구스타 직위를 주고, 그의 뜻에 따라 얼마 뒤 죽은 카이킬리아를 신격화시켜줬다. 이어 막시미누스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에게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직위를 내려, 그를 황태자이자 원로원의 차기리더로 인정해줬다. 그렇지만 막시미누스는 이런 원로원의 유화적 태도에도 여전히 적대적이었고, 이는 황제와 원로원 사이의 끝없는 긴장 상태를 야기시켰다.

막시미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당시의 국방 전략을 계승해 로마를 위협한 게르만족을 상대로 3년간 전쟁을 벌였다. 이런 행보는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 세력에게 외교적 협상을 하면서 굴복한 것 같은 인상을 준 알렉산데르 정부에게 불만을 품은 원로원 인사들에게도 환영을 받았다. 따라서 원로원 인사들은 그에게 군사적 조언을 건넸는데, 이는 막시미누스를 자극해 막말, 협박, 처벌이 동반된 잔혹한 보복으로 되돌아왔다. 설상가상 막시미누스의 게르마니아 전쟁은 많은 인적, 물적 비용이 동원되면서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와 같은 속주 경제 재건, 안정화 조치 등 실리를 취할 일의 근거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막시미누스는 이에 필요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속주민들에게 과중한 속주세를 부과하고, 본국 이탈리아에도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어 그는 로마인 가정에게 제공된 복지 구호 물품까지 모조리 강탈해 전시물자로 동원하고, 유능한 관료들을 압박해 그들을 부유한 제국 동부의 속주로 보내 이중과세를 매기고 계속 강탈했다.

이에 각지에서는 조세저항이 물밀듯이 발생했지만,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않고 무력 진압을 독촉하기만 할 뿐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여기에 그동안 고생한 군인들의 급여를 두 배로 늘리라고 명령했다. 원로원과 내각이 재정이 열악해서 힘들다며 우려를 제기했지만, 그는 세금을 더 거두라고 명령했다. 세금 징수원들은 부자, 중산층, 서민, 해방노예, 무산자에 상관없이 세금을 이중, 삼중으로 거뒀고, 막시미누스의 명령 아래 예비 국고분으로 편성한 각종 기금까지 모조리 전쟁 물자로 충당됐다.

이러한 황제의 행보에 반감을 품은 인사들은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황제가 게르마니아에서 부교를 놓고 군사작전을 벌일 때, 전직집정관 출신의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마그누스를 필두로 한 게르마니아 군대의 여러 장교들, 원로원 의원, 재무관 등이 라인강 북쪽 강변에서 군용 부교를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막시미누스는 로마법에서 정해진 사법절차를 모조리 무시하고, 그대로 가담자와 그들과 친분있는 자들을 모두 즉결처형했다.

서기 235년 혹은 그 직후 동방에서 티티우스 콰르티누스를 옹립하려는 또 다른 정변 시도가 발생했다. 티티우스 콰르티누스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235년 피살될 때 막시미누스에게 재판없이 강제 퇴역조치된 장군이었다. 메소포타미아 궁수들의 지지 속에 반란을 일으킨 콰르티누스가 마음을 바꾼 반란군 지휘부에게 살해돼 머리가 막시미누스에게 전달되면서 내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막시미누스는 콰르티누스를 제거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해 자신의 잔혹한 성품을 제국 동방까지 알렸다. 이러한 막시미누스의 가혹한 징수와 정적으로 의심되는 자들에 대한 잔혹한 숙청은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고, 재위 3년째인 238년에 아프리카 속주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여섯 황제의 해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3.1.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봉기

238년 1월, 아프리카 속주의 현지 농장주들이 높은 전시세금에 반발하여 세금 징수원을 살해하고 관공서를 공격한 뒤,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맡고 있던 고르디아누스 1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이것은 고르디아누스 1세가 "자신은 황제를 참칭하고 싶지 않았는데 속주민들이 강압적으로 권해서 어쩔 수 없이 따랐다"라는 입장을 원로원에게 알리고자 위장한 것일 뿐, 실제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부임할 때부터 반역을 꾀했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로마 시민권을 얻은 프리기아 출신 속주민의 자식이었으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후예라는 식으로 족보를 위조하고, 시민들에게 도서관을 무료로 개방하고 빈민들에게 상당한 재물을 나눠주고 대규모 서커스를 개최하는 등의 행보로 민중의 신망을 얻었다. 따라서 폭군 카라칼라는 그 행동이 반역이라며 죽일 생각을 했는데, 눈치가 빠르고 아부 기술도 능해 위기를 기회로 바꿔 50대 중반 나이에 원로원 의석까지 얻었다. 이후 친척 고르디우스와 함께 엘라가발루스의 애인, 권신 히에로클레스와의 호의를 배경삼아, 집정관에 오르고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까지 올라 신참자임에도 귀족반열까지 오른다. 그러다가 79세의 고령에 은퇴하지 않고, 전직 집정관 경력을 앞세워 아프리카 속주에 부임했다.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폭정으로 민심이 들끓은 끝에 속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기회로 여겼다. 그래서 카르타고에서 폭동이 일어난 곳으로 갈 때, 황제를 상징하는 보랏빛 망토와 각종 장신구를 죄다 구비했다.

이후 속주민들의 추대에 따르는 형식으로 황제가 된 뒤, 원로원 안에서 교양 넘치는 호색한, 탕아로 유명한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내세웠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추방자들에게는 추방을 해제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제국의 살인자, 범죄자들에게는 자기를 지지하면 무죄로 방면해주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원로원에 사람을 보내 여러 유력 인사와 접촉하여 "로마와 푸닉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며 도움을 청하고, 자신들을 지지해주면 로마인들과 근위대에게 상상도 못할 위로금을 즉시 주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더해 막시미누스의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를 암살하고, 로마에 거주하는 일가 친척들을 총동원해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비탈리아누스가 야만족 황제에게 살해된 양 소문을 퍼뜨렸다.

막시미누스는 재위 기간 내내 제 부하라도 마음에 안들거나 수틀리면 총독이나 원로원 인사들 이름을 도용해 암살했기 때문에, 근위대와 비탈리아누스 유족들은 소문이 진실이라고 믿고 난동을 일으켰다.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은 공무원, 군인, 세금징수 대행업자를 보이는 대로 죽여 이들 시신을 하수구나 테베레 강에 던지고, 사적 보복을 한다며 돈을 빌려준 부자나 친구들을 찾아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지지자로 몰아 죽이고 그들 재산을 강탈했다. 원로원과 로마시는 혼란에 빠졌고, 이 과정에서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한 수도 장관 사비누스가 돌에 머리를 맞고 순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원로원은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려면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황제로 세워야 한다고 여겼고, 막시미누스의 천박하고 잔혹한 성품에 질리기도 했기에 부자를 진짜 황제로 선포하고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1세는 원로원에 누미디아 속주 총독으로, 자신이 아프리카 총독에 부임한 이래, 사사건건 갈등을 벌였던 카펠리아누스를 제거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총독 자격 요건도 못 되는 자기 클리엔테스를 새 누미디아 총독으로 지명해, 카펠리아누스에게 사임하고 기소 전까지 잠자코 있을 것을 통보하면서 겁박했다. 그렇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과 같은 의원이고, 오래된 세습귀족 엘리트인 카펠리아누스가 별다른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음을 알아, 굳이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에 카펠리아누스에게 "새 황제들이 당신을 해임해달라고 하니 따라달라"는 협조 요청 공문을 보냈다.

3.2. 카르타고 시가전과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몰락

이런 원로원의 태도는 정식 공문, 원로원 포고문이 제국 전역에 발송되면서 알려진다. 대부분의 속주 총독들은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즉위를 반신반의하거나, 화를 내면서 따졌다. 따라서 당시 시리아 코일레 속주에서 총독 휘하 문관으로 있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는 이런 점을 적으면서, 고르디아누스 부자(특히 고르디아누스 1세)가 개인의 야망과 더 큰 권력에 대한 열망으로 반란에 몸을 맡기고 국가를 파탄으로 몰고 무책임하게 행동했다며 마구 씹어댔다. 당연한 말인데, 아프리카 속주의 유일한 정규 군단인 제3 아우구스타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던 카펠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1세의 행위를 전해듣고 분노했다.

그는 원로원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한 뒤, 일단 법에 따라 황제 선포 당시로는 현직 황제, 원로원에 반기를 든 역적을 토벌하겠다는 칙령을 발표하고 카르타고로 쳐들어갔다. 카르타고 시가전이 벌어지기 전, 카펠리아누스는 푸닉 지방의 무질서를 야기한 농장주들을 공격. 반란 주동자, 참여자와 그 가족들을 법에 따라 모조리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 국고에 집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병력을 이끌고 카르타고 시가지로 진격했다.

아프리카 속주 파견 당시, 아프리카 속주와 푸닉 지방 전체 군인사를 책임진 자리는 고르디아누스 2세가 담당 중이었다. 이에 고르디아누스 2세는 탈출한 농장주들과 그 휘하 자경단과 함께 카펠리아누스 군을 막고자 했다. 두 황제 중 고르디아누스 2세가 농장주들의 노예, 현지 경비병들을 임시로 동원해서 방어하기로 하고, 고르디아누스 1세는 카르타고 총독 관저를 임시 황궁 삼아 농성하기로 결정내린다.

그렇지만 고르디아누스 2세는 시가전이라는 이유로 정규군과 전면으로 맞붙었다. 그래서 그는 속절없이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고, 고르디아누스 1세는 승리 소식을 기다리다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체념. 카펠리아누스의 입장, 원로원 및 주변 총독들의 입장을 안 뒤 침울한 표정을 짓곤 체포 직전 스스로 목을 매고 자결했다. 카펠리아누스는 반역에 가담한 카르타고를 약탈한 뒤 반란 참여 농장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누미디아로 돌아갔으며, 이후 원로원에게 사임의사를 전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3.3. 원로원의 황제 추대와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난동

한편, 변방에서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치른 뒤 시르미움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던 막시미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원로원이 이에 호응해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했다. 그는 군대를 소집해 원로원의 배신을 규탄하고 반역자들을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선포한 후 로마로 진격했다.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20명의 원로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립하고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프리카 속주에서 두 황제가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원로원은 깊은 충격에 휩싸였다.

콘코르드 신전에 소집된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소식을 접한 이후 일상적인 업무만 처리했을 뿐, 그들 자신과 공공의 안전에 대해서는 토론하기를 거부했고 겁에 질린 침묵이 한동안 좌중을 압도했다. 이때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의 의원이 동료 의원들을 무기력으로부터 일깨웠다. 그는 먼저 막시미누스가 야전군을 앞세워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조심스러운 유화책은 더이상 소용이 없다고 말한 뒤 이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용감하게 전장으로 나아가 '포악한 야만인'과 싸우거나 고문과 치욕적인 죽음을 기다리는 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발비누스푸피에누스 의원을 황제로 옹립하자고 제안했다.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원로원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에게 집정관 및 호민관 권한을 수여하고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와 최고 대사제라는 직분을 안겨줬다. 두 황제는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감사를 올리기 위해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갔다. 그러나 감사 의식은 고르디아누스 일가를 지지하는 민중의 방해를 받았다. 민중들은 자신들이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며 원로원이 선택한 두 황제에 더해 제 3의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며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사람을 황제로 세우라고 요구했다.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가 군중을 밀치고 나아가려 하자, 몽둥이와 잔돌로 무장한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은 떼를 지어 가로막으며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공격하려 들었다.

결국 두 황제와 원로원은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여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를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불러들여 고르디아누스 3세로써 '카이사르(부황제)'칭호를 내렸다. 이에 만족한 군중이 물러가면서 간신히 자유의 몸이 된 두 황제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하고 있는 막시미누스군을 막기 위해 역할을 분담했다. 푸피에누스는 군을 이끌고 막시미누스와 직접 전쟁을 벌이기로 했고, 발비누스는 로마에 남아서 보급을 담당하면서, 로마 치안과 곡물 수습 등 민생 안전에 힘쓰기로 했다.

3.4. 아퀼레이아 공방전과 막시미누스의 허무한 최후

푸피에누스는 군사를 이끈 경험이 풍부했던 툴루스 메노필루스 등 경험 많은 동료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했다. 이탈리아 북부의 항구 도시 아퀼레이아에 도착한 후 시민들을 불러 모아 이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후, 그는 시민들과 함께 아드리아 해를 면한 아퀼레이아 쪽에서 진영을 펼치고 방어전을 준비했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람답게 지형을 파악해, 아퀼레이아를 둘러싼 7개의 도시 하수구 배출구 방어를 중심으로 도시를 감싼 얕은 바닷가와 습지를 건넜고, 이곳 주민들이 조상 대대로 '일곱 바다'라고 부르는 천혜의 방어선 중 지름길로 불리는 곳을 통과해 병력을 이동시켰다. 첫째날과 둘째날에는 남녀노소가 힘을 합쳐 공성전에 도움이 될 돌, 짚불, 낙엽을 모았고 푸피에누스는 승리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며 병사, 시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침략자에 맞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얼마 후 아퀼레이아에 도착한 막시미누스는 맹공을 퍼부었지만 수비군의 끈질긴 방어에 막혀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렇게 4주가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급품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힌 그에게 식량과 전쟁 물자를 보내주는 도시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막시미누스가 아퀼레이아에 얶매인 채 별다른 대책도 세우지 못하자, 그를 따라왔던 병사들은 반감을 품었다. 그들은 아퀼레이아와 북이탈리아 로마인들이 푸피에누스와 그를 따른 근위대, 투항한 막시미누스 진영 병사들에게 떡갈나무와 올리브 나무 잎사귀와 나뭇가지를 선물하고, 꽃잎을 행군하는 곳에 뿌리고, 응원을 해주고 격려하면서, 자신들을 야만족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고 저주를 퍼붓고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을 보고 깊은 절망과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238년 4월, 제2 파르티카 군단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막시미누스와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근위대장 아눌리누스 등을 살해했다. 세 사람의 머리는 라벤나에서 푸피에누스 편 장병들에게 전달되었다. 아퀼레이아 시민들은 수급들을 확인한 뒤 성문을 활짝 열어 칼을 맞댄 옛 막시미누스 병사들을 위로한 뒤 굶주린 병사들에게 식량을 나눠줬다. 이후 이를 받아든 푸피에누스는 판노니아 속주 주둔병력과 아퀼레이아 병력을 모았고, 옛 막시미누스군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이렇게 화해가 끝난 뒤, 푸피에누스는 사비와 황제 개인 국고를 털어 본인과 발비누스의 이름으로 아퀼레이아 주민, 양 병력 모두에게 보너스를 하사하고 그들을 격려했다.

이윽고 그는 국법에 따라, 양군을 로마 근교에서 해산했는데, 공성전에 참전해 싸운 병사들에게는 추가로 공을 치하하고, 많은 하사금을 지급했다. 푸피에누스는 국법에 따라 게르만 호위대과 로마에서 함께 출발한 프라이토리아니와 귀환했는데, 민중들은 로마에 들어온 황제 일행에게 개선식을 떠올릴 만큼 열렬히 환호했다. 이렇게 최대의 적수였던 막시미누스가 허무하게 사라지면서 로마는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3.5.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의 몰락

공동의 적 막시미누스가 사라진 뒤, 칠순이 넘은 공동황제는 부딪힌다. 마음을 놓은 탓인지, 아니면 권력을 놓고 양립할 수 없던 이유 때문인지,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는 심한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발비누스는 자신보다 신분이 못하다고 여긴 푸피에누스가 일방적으로 민중의 환호를 받는 것에 질투했고, 게르만 호위대, 프라이토리아니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에 입성한 건 자신을 배제하려는 술책일 거라 여겼다. 푸피에누스 역시 발비누스가 로마에 있는 동안 치안 안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로마 시가 혼란에 빠진 것에 반감을 품었고, 발비누스가 오래된 귀족의 후예인 자신과 몰락귀족임에도 훌륭한 조상을 둔 본인 가문을 깔본 것에 진노했다. 이리하여 양자는 서로를 헐뜯었고, 자신들이 맡은 권한의 범위를 놓고 분쟁을 벌였다. 원로원 의원들도 각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양 파벌로 나뉘어 대립했다. 두 황제는 제각기 다른 집무실을 사용했고 서로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두 황제가 임명한 근위대장 두 명도 각자 파벌을 나눠서 대립했다. 따라서 그 중간에서 모든 것을 지켜 본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은 깊은 환멸을 느꼈다. 이는 막시미누스 몰락 직전, 제위를 노리며 민중 봉기를 주도한 고르디아누스 가문에겐 기회가 됐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를 비롯한 고르디아누스 측 인사들이 그들을 은밀히 포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푸피에누스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그들을 달래려 애쓰는 한편, 발비누스에게 게르만 호위대대를 내줄 것을 동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발비누스는 이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푸피에누스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238년 7월 29일, 병사들은 로마에서 카피톨륨 행사가 한창인 틈을 타 황궁으로 침입했다. 이날 두 황제는 상대방의 상황이나 의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푸피에누스는 나중에 암살자들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발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발비누스는 이 요청이 푸피에누스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의 일부라고 의심해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두 사람은 암살자들이 방안에 들이닥칠 때까지 쓸데없는 언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이렇게 체포된 두 사람은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에게 '원로원 황제'라고 불리며 조롱받고, 황제의 의복이 벗겨진 채 로마 거리를 질질 끌려 다녔다. 이후 병사들은 자신들의 진지까지 산 채로 끌고 온 두 사람을 신나게 고문하다가 게르만족 출신 근위대가 두 사람을 구하려고 달려올 것을 우려해 그 날 전부 죽여 버렸다. 그 후 두 사람의 시신은 거리에 내던져져 한동안 방치되다가 뒤늦게 원로원에 의해 수습되었다. 이후 원로원은 13세의 고르디아누스 3세를 유일한 황제로 옹립했고, 사전에 고르디아누스 일가에 포섭된 프라이토리아니 대원들은 받아들였다. 또한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를 살해한 자들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4. 고르디아누스 3세 하의 혼란과 티메시테우스의 등장

13세의 소년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는 스스로 통치를 행사하기엔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래서 원로원과 관료, 근위대장 등이 황제의 업무를 대리했고, 어머니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그 시작은 새 정권이 가장 먼저 추진한 정책으로 벌어진 숙청과 혼란이었다.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의 입김 아래 꾸려진 내각은 소년 황제를 앞세워,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중 핵심 국정과제가 된 것은 속주의 권력 남용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집행된 총독 처벌 강화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내세우는 명목이었을 뿐이고, 실제로는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부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제3 아우구스타 군단를 강제 해산시키고 카펠리아누스를 물러나게 만드는 등 정치보복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아프리카 속주의 유일한 정규 군단이었던 제3 아우구스타 군단을 해산시킨 일은 이 지역의 치안 공백을 초래해, 후대 황제들이 혼란에 빠진 아프리카 속주를 수습하는 데 애를 먹는 배경이 되었다.

고르디아누스 3세 정권은 이와 더불어 무분별한 소송을 막겠다고 선언하고 재정 문제로 인한 각종 보완을 발표했다. 이 조치는 지방 행정 업무를 가중시키는 소송 문제를 덜고, 재정 문제의 안정을 위한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알맹이가 전혀 없고, 거진 정치보복인 터라 엿가락을 늘리고 줄이듯 집행됐고, 중앙의 지방행정 파악 문제를 심화시키는 문제를 일으켰다. 고르디아누스 일가와 대립한 이들의 승진은 제한됐고, 일부 인사들은 공적, 사적으로 소외되는 조치가 이어졌다. 서방 국경에서 거대한 적으로 떠오른 고트족에게 조공을 바쳐 습격을 막는다는 조치를 발표하면서도, 카르피족에게는 공물을 바치지 않겠다고 통보해 그들의 반발을 사서 국경 지대가 혼란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241년, 고르디아누스 3세는 여러 원로원 의원들과 동방 출신 인사들의 추천 아래 티메시테우스의 딸 트란퀼리나와 결혼하고 티메시테우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했다. 티메시테우스는 근위대장의 직임 외에도 임페리움(통솔권)을 수여하면서,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치안 및 곡물 관리권, 기소권을 행사한 권한을 부여받았고, 장군이라는 명예까지 수여받았다. 티메시테우스는 행정 능력이 탁월하고 군사적 역량도 뛰어난 인물로, 고르디아누스 3세 집권 초기의 혼란을 바로잡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지난날 막시미누스 황제 휘하에서 세금 징수에 종사하다가 막시미누스가 타도된 뒤 2계급 강등당하고 쫓겨난 일에 원한을 품고, 240년 아프리카 속주 총독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사비니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아퀼레이아 공방전에서 막시미누스를 물리친 툴루스 메노필루스를 처형하고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이에 사람들은 자신을 내쫓는 데 앞장섰던 메노필루스에게 원한을 품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이 조치 외엔 티메시테우스 등장 후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는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와 그 측근 무리가 벌인 실정과 같은 문제를 양산하지 않았다. 따라서 241년부터 243년까지 황제 이름으로 로마 조폐국 하에 대규모로 안토니니아누스 은화 등을 발행해 경제를 안정시키는 등 나쁘지 않은 성과를 이룩했고, 카라칼라 암살 이후 황제와 근위대장이 오랜만에 프리아토리아니를 계서제 구조상 군율을 통제한 모습을 대외적으로 과시한 성과도 냈다.

그러나 242년, 사산 왕조샤한샤 샤푸르 1세가 로마 동방 영토인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소아시아의 안티오키아를 위협했다. 이에 티메시테우스는 황제를 대동한 채 동방 원정에 착수했다.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는 소식을 접한 샤푸르 1세는 이미 탈취한 도시들의 수비대를 철수시키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티그리스 강으로 후퇴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첫 번째 원정 승리를 원로원에게 통지하면서 그 공로를 티메시테우스에게 돌렸다. 티메시테우스는 원정 기간 내내 군대의 안전과 기강을 감독하고 단속했다. 그는 부대 내에 물자를 충분히 비축하고 전방의 모든 도시들에 식초, 베이컨, 밀짚, 보리, 밀 등의 창고를 짓게 함으로써 군인들이 안심하고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로마군은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여 레세나(오늘날의 시리아 라스 알 아인)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을 격파하고 사산 왕조의 영토 깊숙이 진군했다.

그런데 243년, 티메시테우스는 돌연 사망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당시 설사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설사약이라며 건넨 약을 먹고 증상이 치명적으로 악화되어 사망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교차검증할 만한 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에 현재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은 없다고 간주하고 있다. 학자들은 그의 사망 원인은 이질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이었기 때문에, 당대부터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을 무척 신뢰했기에 큰 충격을 받았고, 티메시테우스 공백은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가 내세운 프라이토리아니 통제 등이 잠깐의 안정이었다는 것이 들통나서 정권이 삽시간에 붕괴된 원인이 됐다.

결국 244년 2월, 고르디아누스 3세는 신임 근위대장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암살되거나(로마 측 기록) 사산 왕조와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사산 왕조 측 기록). 그렇게 238년에 선임된 마지막 황제였던 고르디아누스 3세는 18살의 나이에 사망했고, 로마 제국은 본격적으로 군인 황제 시대로 명명된 혼란기에 휘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