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Antonia Gordiana) |
출생 | 201년 |
사망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아버지 | 고르디아누스 1세 |
자녀 | 고르디아누스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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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 초기 여섯 황제의 해 시기에 제위에 오른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2. 생애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원로원 의원이며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후손인 마이키우스 마룰루스와 트라야누스 황제의 후손인 울피아 고르디아나의 아들로 태어난 고르디아누스 1세는 집정관 마르쿠스 안니우스 세베루스의 딸이며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증손녀인 파비아 오레스틸라와 결혼해 고르디아누스 2세와 마이키아 파우스티나를 낳았다. 마이키아 파우스티나는 안토니누스 왕조 방계 황족인 유니우스 리키니우스 발부스와 결혼해 고르디아누스 3세를 낳았다고 한다.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비문, 동전, 유적지 등 여러 고고학적 증거를 연구한 끝에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가족들은 부계와 모계 중 어느 쪽에서도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트라야누스의 후손이 아니며, 본래 소아시아 지역에 살다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은 뒤 로마 정계에 진출한 이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파비아 오레스틸라라는 여인은 고르디아누스 1세를 추켜세우려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저자가 가공으로 만들어낸 인물이며, 고르디아누스의 실제 아내는 소아시아의 어느 그리스 계열 유지의 여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한, 학계에서는 마이키아 파우스티나라는 이름 역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지어낸 이름이고, 실제 이름은 로마식 작명법에 따라 아버지의 이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를 딴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했다는 유니우스 리키니우스 발부스 역시 가공의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소아시아에서 막대한 부를 쌓고 로마 정계에서 활약한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로마에서 인정받는 귀부인이 된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그녀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짓고 티베리우스 황제가 거처하기도 했던 대저택에 살면서 아들 고르디아누스 3세를 양육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실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남편은 238년 이전에 사망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콘스탄티누스 왕조 시절의 익명 황실사가들이 적었듯이, 그녀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3세 친부가 실제 고르디아누스 2세일 확률이 높다고 이전 황제들과 대제, 덱시푸스 등의 이 분야 전문 관료들이 주장한 것을 떠올리면,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와 고르디아누스 3세의 관계가 상당히 복잡해질 수도 있다.
238년 3월,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와 형제 고르디아누스 2세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막시미누스 황제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원로원은 이 소식에 반색하며 두 사람을 황제로 인정하고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탄했다. 그러나 15일 만에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의 공격으로 고르디아누스 2세가 피살되었고,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이에 원로원은 막시미누스에 대항하기 위해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지지하는 무리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를 황제로 옹립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결국 두 황제와 원로원은 그를 카이사르로 세우기로 했다.
이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아퀼레이아 공방전을 치르던 중 휘하 병사들에게 피살당하면서 내전이 종식되었지만,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곧 심각한 정쟁을 벌였다. 이에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은 238년 7월 말 두 황제를 살해하고 고르디아누스 3세를 단독 황제로 옹립했다.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고르디아나가 막대한 재산과 원로원과 근위대 내 인맥을 이용해 프라이토리아니를 포섭했다고 추정한다. 두 황제를 살해한 자들이 어떠한 처벌을 받지 않았고, 프라이토리아니는 이후에도 고르디아누스 3세 정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이 '고르디아누스 3세'를 칭하게 했는데, 이는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을 결집시킬 목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어린 아이를 황위에 올린 뒤 원로원 내부에 세나쿨룸을 세우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다가 원로원 귀족계급과 시민, 그리고 프라이토리아니의 반발을 샀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를 반면교사로 삼은 듯하다. 고대 사료에서는 어린 아들을 위해 기본적인 집무를 도와줬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16명으로 구성된 황제 자문 회의에 참석한 원로원 의원들과 근위대장이 정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그녀 본인은 정치에 전면으로 개입하지 않았지만, 배후에서 이들과 교류하면서 아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3군단 아우구스타 강제 해체 등에서 확인되듯이, 실제로는 율리아 마마이아처럼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면서 영향력이 컸던 것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의 입김 아래 꾸려진 내각은 소년 황제를 앞세워,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중 핵심 국정과제가 된 것은 속주의 권력 남용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집행된 총독 처벌 강화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내세우는 명목이었을 뿐이고, 실제로는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부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제3 아우구스타 군단를 강제 해산시키고 카펠리아누스를 물러나게 만드는 등 정치보복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아프리카 속주의 유일한 정규 군단이었던 제3 아우구스타 군단을 해산시킨 일은 이 지역의 치안 공백을 초래해, 후대 황제들이 혼란에 빠진 아프리카 속주를 수습하는 데 애를 먹는 배경이 되었다.
고르디아누스 3세 정권은 이와 더불어 무분별한 소송을 막겠다고 선언하고 재정 문제로 인한 각종 보완을 발표했다. 이 조치는 지방 행정 업무를 가중시키는 소송 문제를 덜고, 재정 문제의 안정을 위한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알맹이가 전혀 없고, 거진 정치보복인 터라 엿가락을 늘리고 줄이듯 집행됐고, 중앙의 지방행정 파악 문제를 심화시키는 문제를 일으켰다. 고르디아누스 일가와 대립한 이들의 승진은 제한됐고, 일부 인사들은 공적, 사적으로 소외되는 조치가 이어졌다. 서방 국경에서 거대한 적으로 떠오른 고트족에게 조공을 바쳐 습격을 막는다는 조치를 발표하면서도, 카르피족에게는 공물을 바치지 않겠다고 통보해 그들의 반발을 사서 국경 지대가 혼란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241년, 고르디아누스 3세는 여러 원로원 의원들과 동방 출신 인사들의 추천 아래 티메시테우스의 딸 트란퀼리나와 결혼하고 티메시테우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했다. 티메시테우스는 근위대장의 직임 외에도 임페리움(통솔권)을 수여하면서,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치안 및 곡물 관리권, 기소권을 행사한 권한을 부여받았고, 장군이라는 명예까지 수여받았다. 이렇듯 티메시테우스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 배경엔 고르디아나가 있었을 것이다. 티메시테우스는 행정 능력이 탁월하고 군사적 역량도 뛰어난 인물로, 고르디아누스 3세 집권 초기의 혼란을 바로잡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지난날 막시미누스 황제 휘하에서 세금 징수에 종사하다가 막시미누스가 타도된 뒤 2계급 강등당하고 쫓겨난 일에 원한을 품고, 240년 아프리카 속주 총독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사비니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아퀼레이아 공방전에서 막시미누스를 물리친 툴루스 메노필루스를 처형하고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이에 사람들은 자신을 내쫓는 데 앞장섰던 메노필루스에게 원한을 품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이 조치 외엔 티메시테우스 등장 후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는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와 그 측근 무리가 벌인 실정과 같은 문제를 양산하지 않았다. 따라서 241년부터 243년까지 황제 이름으로 로마 조폐국 하에 대규모로 안토니니아누스 은화 등을 발행해 경제를 안정시키는 등 나쁘지 않은 성과를 이룩했고, 카라칼라 암살 이후 황제와 근위대장이 오랜만에 프리아토리아니를 계서제 구조상 군율을 통제한 모습을 대외적으로 과시한 성과도 냈다. 그러던 242년, 사산 왕조의 샤한샤 샤푸르 1세가 로마 동방 영토인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소아시아의 안티오키아를 위협했다. 이에 티메시테우스는 황제를 대동한 채 동방 원정에 착수했다.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는 소식을 접한 샤푸르 1세는 이미 탈취한 도시들의 수비대를 철수시키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티그리스 강으로 후퇴했다.
티메시테우스는 원정 기간 내내 군대의 안전과 기강을 감독하고 단속했다. 그는 부대 내에 물자를 충분히 비축하고 전방의 모든 도시들에 식초, 베이컨, 밀짚, 보리, 밀 등의 창고를 짓게 함으로써 군인들이 안심하고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로마군은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여 레세나(오늘날의 시리아 라스 알 아인)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을 격파하고 사산 왕조의 영토 깊숙이 진군했다.
그런데 243년, 티메시테우스는 돌연 사망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당시 설사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설사약이라며 건넨 약을 먹고 증상이 치명적으로 악화되어 사망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교차검증할 만한 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에 현재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은 없다고 간주하고 있다. 학자들은 그의 사망 원인은 이질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이었기 때문에, 당대부터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인을 잃은 고르디아누스 3세는 신임 근위대장으로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세우고 전쟁을 이어갔으나, 244년 2월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암살되거나[1] 사산 왕조와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2]
이후 고르디아나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친척 혹은 동생인 고르디아누스 3세의 마지막 근위대장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가 기록말살형이 된 것이 추정될 만큼 곧바로 이름이 보이지 않는 점,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며느리와 달리 깨끗할 만큼 필리푸스 1세 아래에서 기록상 제거된 부분 등을 보면, 정황상 프리기아로 추방되거나 살해된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확률 역시 배제할 수 없다.
3. 여담
- 3~4세기 당시 고르디아누스 3세가 외삼촌 고르디아누스 2세의 친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 후대 로마인 중 황제, 귀족들의 족보를 관리하는 이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정설로 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저자들 역시 이를 무시하지 못해 끝내 이 내용을 실어 넣었다. 여기에 따르면, 덱시푸스 같이 황제들 사생활을 꿰뚫고 있던 이들이 그렇게 말했는데, 덱시푸스는 이를 높은 사실로 생각해, 이를 확정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엽색을 즐긴 호색가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사생아로 고모의 아들로 입양되었거나, 친남매가 사이에 얻은 아들이 고르디아누스 3세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거의 정설로 확정된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의 조각상이 존재한다. 3세기 초중반에 제작된 로마 귀부인 두상 중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박물관에 전시된, 일명 "뚱보 황후" 두상이 그것이다. 이 조각상 속 로마 황후는 살집이 많이 있어 턱살이 처질 정도로 뚱뚱한데, 동시대 제위에 오른 여러 로마 황제 중 눈, 코, 턱, 귀모양이 해당문서 인물 초상 두상으로 실린 고르디아누스 3세의 것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판박이인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고르디아누스 3세 두상 등과 함께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참고로 고대 기록에 따르면 외조부 고르디아누스 1세는 머리가 크고 목이 짧으며 평균 키에 어느 정도 살집 있는 체구였고, 외삼촌이자 양부 고르디아누스 2세 역시 체구가 크고 뚱뚱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여인이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일 확률은 거의 확정적으로 평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