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8 09:16:07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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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ignotus: 불명
황제 겸 집정관 }}}
201년 202년 202년 보결 203년 204년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무레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아리우스 무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레갈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라비우스 리보
204년 보결 205년 206년 206년 보결 207년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리베랄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마르수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막시무스
ignotus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페트로니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파우스티누스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208년 209년 210년 211년 21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테렌티우스 겐티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퀸투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플라우티우스 아비투스 아울루스 트리아리우스 루피누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212년 보결 213년 214년 215년 216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퀸투스 마이키우스 라이투스 푸블리우스 카티우스 사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케리알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217년 218년 218년 보결 219년 22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메시우스 엑스트리카투스 마르쿠스 오클라티니우스 아드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221년 222년 223년 224년 225년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사비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비텔리우스 셀레우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226년 227년 228년 229년 23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퀸투스 아이아키우스 모데스투스 크레스켄티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아그리콜라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라일리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이키우스 프로부스 카시우스 디오 섹스투스 카티우스 클레멘티누스 프리스킬리아누스
231년 232년 233년 234년 235년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일리그니아누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파테르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우르바누스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티아누스
236년 237년 238년 239년 24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피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펠릭스 코르넬리아누스 폰티우스 프로쿨루스 폰티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베누스투스
241년 242년 243년 244년 24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아티쿠스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아리아누스 티베리우스 폴리에누스 아르메니우스 페레그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레피두스 프라이텍스타투스 가이우스 케르보니우스 파푸스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시우스 티티아누스
246년 247년 248년 249년 25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알리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아퀼리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51년 252년 253년 254년 25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256년 257년 258년 259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투스쿠스 (눔미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덱스테르)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뭄미우스 바수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260년 261년 262년 263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사이쿨라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도나투스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타우루스 볼루시아누스 눔미우스 파우스티아누스 덱스테르 (막시무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퀴에투스 아우구스투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라티아누스
264년 265년 266년 26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사투르니누스 루킬루스 사비닐루스 아르케실라우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268년 269년 270년 271년
아스파시우스 파테르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 파테르누스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산크투스
272년 273년 274년 275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포스투미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타키투스 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벨둠니아누스 율리우스 플라키디아누스 카피톨리누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켈리누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276년 277년 278년 279년 28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노니우스 파테르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81년 282년 283년 284년 28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오비니우스 루피누스 마닐리우스 바수스 Ⅱ)
285년 286년 287년 288년
티투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불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베티우스 아퀼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폼포니우스 야누아리아누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288년 보결 289년 289년 보결 289년 보결
… a 마르쿠스 마그리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케이오니우스 프로쿨루스
… ivianus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퀸티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코엘리아누스 헬비우스 클레멘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89년 보결 290년 291년 292년
플라비우스 데키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
… ninius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시우스 디오 율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93년 294년 295년 296년 29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눔미우스 투스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눌리누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298년 299년 300년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비리우스 갈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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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us Valerius Eutychianus Comazon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에우티키아누스 코마존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직위 원로원 의원, 집정관, 야전 사령관, 근위대장,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자녀 푸블리아 발레리아 코마시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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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제국 세베루스 왕조엘라가발루스 시대의 권신.

원로원 의원, 집정관, 야전 사령관,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으로, 엘라가발루스 정권의 탄생부터 몰락까지 함께 한 율리아 마이사의 친구이자 동맹자이다. 코마존은 4년의 악행을 책임지지 않고자 동료 근위대장으로 자신이 엘라가발루스 제거 작전을 기획할 당시에 내세운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장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 본인은 은퇴 후 편히 여생을 마무리한 악인으로 유명하다.

자신의 권력과 성공을 위해, 함량미달의 엘라가발루스 치세를 4년여 간 보필하면서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4년 연속 수도 장관 자리와 근위대장 자리를 겸직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다. 그러다가 엘라가발루스의 난잡하고 악몽 같은 치세가 흔들리자, 황제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와 함께 엘라가발루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제거 작전을 기획해 이를 222년 3월 성공시켰다.

2. 생애

전체 이름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에우티키아누스 코마존이다. 얼핏 전체 이름 중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만 놓고보면 로마 건국과 시작을 함께 한 파트리키 명문가 발레리우스 가문 출신 같은 로마인이다. 그렇지만 그리스식 이름에서 따온 "에우티키아누스"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그리스 혈통의 신참자이다.

코마존은 로마군 병졸로 입대해, 군생활을 시작했고, 장교의 길을 걸으며 승진의 길을 얻게 된 시기는 트라키아에서 근무 중일 당시에 만난 콤모두스 덕분이었다. 이 당시, 콤모두스는 공동황제로 있으면서, 맏누나 루킬라 공주가 시기심 아래에서 벌인 암살 미수 사건 전의 아주 정상적이고 평균 이상의 시절이었다. 그래서 코마존의 승진은 그가 영리하고 용감한 부분을 높게 산 공동황제 콤모두스와 그의 매형 폼페이아누스 장군 등의 추천 덕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콤모두스 아래에서 경력을 시작하면서, 다누비우스 전선으로 알려진 다뉴브 강 주둔 군단들에서 장교로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에 있는 동안, 상관으로 부임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탈루스 파테르쿨리아누스와 갈등이 생겨, 파테르쿨리아누스 장군에게 징계를 받고 강등 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강등 조치는 일시적이었고, 그의 군생활과 승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허나 이런 일 때문에 코마존은 218년 권력을 쥔 직후, 자신과 갈등관계였던 파테르쿨리아누스를 비롯해, 무나티우스 술라 등 정적들을 마크리누스 지지자로 모함해 살해했다.

그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콤모두스 아래에서 계속 승진했는데, 정황상 콤모두스 시대 말에 원로원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193년부터 다섯 황제의 해가 터졌다. 이때 그의 행보는 분명치 않다. 다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갈등을 빚지 않았고, 여전히 안토니누스 역병에 따른 인재 수급이 어려워진 제국 현실상, 원로원 의원이 되고 이를 바탕으로 군경력을 이어 나간 것은 확실하다.

그의 이름이 다시 기록에 등장한 것은 서기 218년이었다. 때는 카라칼라가 217년 암살되고 마크리누스가 황제로 등극한 지 1년 뒤인데, 이때 코마존은 제국 동부의 제2 군단을 지휘 중이었다.

이때 제3군단 갈리카가 엘라가발루스를 앞세운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간니스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여기에서 코마존은 2군단을 이끌고 이들과 합세한 뒤, 세베루스 왕조의 재건 1등 공신으로 맹활약했다. 따라서 코마존은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엘라가발루스와 두 시리아 여제가 안티오키아에 입성할 무렵부터 실질적인 엘라가발루스 군대 총사령관으로 있었고, 그 치세의 시작부터 실권을 쥐게 됐다. 이때 그는 친구이자 동맹자 율리아 마이사의 요청에 따라 로마로 먼저 건너가서, 엘라가발루스 이름으로 충성 보너스를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지급하고 근위대장에 올랐다.

엘라가발루스의 4년여 재위 기간 내내, 권력을 쥐고 로마 제국 안에서 실력자로 핵심 요직을 겸직하면서 연임했다. 218년부터 근위대장 두 자리 중 수석 자리를 항상 차지했고, 220년 집정관, 220년~222년까지 3년 연속 수도 장관을 지냈다. 이때 그는 수도 경비대, 소방대 장관직까지 사실상 편법으로 겸직했고, 원로원 감시와 정치공작을 직접 명령했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가 계속해서 로마의 전통을 무시하고, 온갖 실정 속에서 난잡함을 보이자, 율리아 마이사에 앞서 먼저 엘라가발루스 제거를 기획했다고 한다. 그 시작은 베스타 여사제 아퀼리아 세베라가 엘라가발루스에게 납치된 뒤 순결을 잃고 강제 결혼을 한 사건부터였다. 이때 엘라가발루스에게 항의한 아퀼리아 세베라의 아버지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를 엘라가발루스는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코마존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엘라가발루스의 에메사, 중동 사투리가 심한 그리스어를 알아듣지 못한 척하고 아퀼리우스 사비누스를 정중히 이탈리아 밖으로 도피시킨 다음 추방했다고 거짓보고를 올렸다. 이어 그는 율리아 마이사 등을 압박해 이를 경고하고,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따라서 율리아 마이사는 이 사건 이후 코마존의 행동을 보고, 외손자 엘라가발루스 갱생을 사실상 포기하고 그의 뜻에 따라 손자 제거를 다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마존은 이후 율리아 마이사와 함께, 율리아 마마이아의 둘째 아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옹립할 기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그는 안티오키아 출신의 장군으로 서방, 동방, 남부 로마군 모두에게 덕장, 용장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던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장군의 집정관 추천과 그의 동료 근위대장 취임도 은밀히 손을 썼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는 매우 인기 없는 황제였고, 할머니에게 속아 양자로 입양하고 카이사르 직위를 내린 알렉산데르를 죽이려고 했다. 이때 엘라가발루스는 코마존을 부하 취급하면서, 알렉산데르를 죽이라고 독촉했다. 따라서 코마존은 안티오키아누스와 함께, 엘라가발루스와 그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를 더 이상 못 봐주겠다고 뜻을 굳혔다. 그는 안티오키아누스와 함께,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이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았고, 이 사건은 222년 3월 11일 프라이토리아니와 엘라가발루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그리고 알렉산데르의 3자 대면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그는 이를 주선하면서 판을 짜고, 엘라가발루스 정권 붕괴를 유도했다. 따라서 엘라가발루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살해됐는데, 이때 코마존은 사건이 터지자마자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끌면서 이 사건을 주도하면서도 원로원에게 "임기가 끝났기 때문에 은퇴하겠다."고 뜻을 밝힌 다음, 시골로 떠났다. 아울러 그는 은퇴를 하면서 자신의 모든 권력을 활용해, 엘라가발루스 실정에 어떤 책임도 없던 안티오키아누스가 울피아누스에게 살해되는 것을 방치했다. 그래서 이 사건은 228년 울피아누스가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증오 끝에 암살된 사건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으며, 세베루스 왕조가 235년 무너질 때까지 군대의 신뢰를 완전히 얻지 못한 결정타가 됐다.

은퇴한 222년 이후 언제 사망했는지는 모르나,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여생을 마친 뒤 자연사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