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로마 공화정 및 제정 시대의 국가 운영 방식, 혹은 제위를 둘러싸고 일어난 각종 내전들을 다루는 문서.2. 역사
2.1. 공화정 시대의 내란
2.1.1. 배경
포에니 전쟁을 통해 강적 카르타고를 제압한 이후 로마는 지중해 전역의 패권자가 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문제점도 발생하는데, 바로 자영농이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원로원 귀족층은 속주에서 얻은 광대한 토지를 이용하여 대농장[1]을 운영했고[2], 여기서 수확된 값싼 농작물이 이탈리아 본토로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가격 경쟁에서 밀린 자영농들은 몰락하기 시작한다. 로마 공화정 시기 자영농은 군역의 의무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영농의 몰락은 국방에 있어서도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이에 그라쿠스 형제를 비롯한 몇몇 세력들이 자영농을 보호하려는 시도를 펼치기도 했지만 패권과 국제정세의 역학을 무시한 지나친 포퓰리즘 공약과 원로원의 권위를 훼손하는 선동으로 원로원에 의하여 무참히 진압당한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 원로원은 농지에 대한 핵심적인 개혁 없이 유지된다. 귀족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벌족세력이 주류였으며 시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몇몇 의원들이 존재했다. 공화정 시기[3] 로마에서 일어난 내란은 모스 마이오룸과 공화정을 유지하려는 원로원과 그에 야합한 군벌, 그리고 군사력과 빈민의 지지를 얻은 급진개혁파의 내전이라 할 수 있다.2.1.2. 동맹시 전쟁
- 자세한 내용은 동맹시 전쟁 항목 참고.
이에 분노한 동맹국들은 로마 동맹에서 탈퇴하여 자신들만의 정치적 연합체인 이탈리아 공화국을 결성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로마에게 실력행사를 시작한다. 즉 과거의 동지끼리 칼을 맞댄 것이다. 전쟁은 전반적으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눈부신 전략을 앞세운 로마가 주도했지만, 내전은 로마에게도 썩 달가운 것이 아니었고 루키우스 술라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하던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5]가 동맹국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키면서 해소된다.
2.1.3. 술라의 내전
1차: BC 88~BC 87 / 2차: BC 82~BC 81.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등장한 이후 고대 로마에서는 장병들이 지휘관의 클리엔테스, 즉 피후원자[7]가 되는 일종의 사병(私兵)화가 이루어지고, 이러한 현상은 술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기원전 88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이끄는 민중파가 자신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자 이에 격분한 술라는 자신들의 장병들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감행, 마리우스와 민중파를 국가의 적그런데 술라가 원정을 떠나자마자 술라의 정치적 동지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8]가 술라의 통수를 때린다(...).[9] 이에 따라 마리우스가 다시 권력을 잡고 무시무시한 피의 복수를 단행하지만 이미 70세의 노인이었던 마리우스는 금방 사망하고, 킨나 역시 술라와의 내란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뜬금없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한편 술라는 급선무였던 동방원정을 성공적으로 치른 뒤 기원전 82년 이탈리아에 상륙한다. 민중파 역시 술라에게 맞서려고 온갖 발버둥을 쳐봤지만, 술라는 당대 로마 최고의 명장이었으며 그 옆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루쿨루스 등 술라 뺨치는 인재들이 있었다. 결국 1년간의 전쟁 끝에 로마는 다시 술라의 손에 들어왔으며 6년 전 마리우스가 그랬듯이 술라 역시 피의 숙청을 감행하고는 독재관에 오르게 된다. 한편 마리우스와 킨나의 오른팔이었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는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쳐서 10년 넘게 술라에게 저항했지만(세르토리우스 전쟁) 결국 폼페이우스에게 진압당하고 만다.
2.1.4. 카틸리나 음모
BC 62.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를 비롯한 일련의2.1.5. 카이사르의 내전
- 자세한 내용은 카이사르의 내전 항목 참고.
2.1.6. 옥타비아누스의 내전
BC 32~ BC 30. 카이사르의 사후 후계자로 부상한 인물은 둘이 있었다. 하나는 유언장을 통하여 카이사르가 양자로 입적시킨 옥타비아누스, 다른 하나는 카이사르 생전 내내 카이사르의 최측근이자 부사령관으로 활동한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직후 양측은 카이사르의 암살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서 삼두정치라는 정치적 동맹을 결성했지만, 물밑에서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치열한 암투가 연이어 일어난다. 필리피 전투에서 카이사르 암살 세력을 궤멸한 이후, 양측은 로마 세력을 양분하여 옥타비아누스는 제국 서부를 안토니우스는 제국 동부를 담당하게 된다.동부로 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
악티움 해전을 통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세력은 궤멸됐고, 두 사람이 자결하면서 이집트와 동방 영토는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14]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가장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경칭을 원로원으로부터 선사받고, 명목상으로는 로마 제1의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 실질적으로는 황제가 되어 제정을 창시하게 된다.
2.2. 고대 제정 시대의 내란
2.2.1. 네 황제의 해
네 황제의 해 Annus Quatuor Imperatorum | ||
68년 | ||
주요 황제 |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 |
로마 제국의 왕조 |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플라비우스 왕조 |
비텔리우스는 애당초 황제는커녕 원로원 의원으로도 형편없는 위인으로 부도덕한 아부쟁이였다. 따라서 비텔리우스는 오토가 미처 치우지 못한 네로, 갈바의 폐단을 끊기보다는 끊임없는 삽질을 저지른다.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오토의 지지층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17], 자신의 병사들을 로마 시내에서 야영시키는가 하면, 하라는 통치는 안 하고 허구한 날 향락만 즐겼다. 설상가상 원로원, 근위대, 속주총독, 로마군 모두에게 국가의 적으로 공인돼 몰락한 네로를 정식 신원복구하겠다고 하면서 일을 더 키웠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비텔리우스에 대항하여 한 번 더(...) 봉기가 일어난다. 이번에 봉기를 일으킨 인물은 당시 유대 총독으로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경매업, 고리대금을 가업으로 삼던 기사계급 출신으로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아래에서 뛰어난 행정 능력, 눈치, 충성심을 바탕으로 귀족까지 오른 실력자였다. 그는 장군으로서도 유능한 인물이었는데,[18] 그를 보좌한 장남 티투스를 비롯한 측근들 역시 상당히 유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본토의 비텔리우스는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를 시전하면서 민심까지 잃어버린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손쉽게 비텔리우스를 제거하고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제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을 방지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원로원을 설득하여 제위 상속제를 실시했고 그 결과 플라비우스 왕조가 창설된다.
한편 '갈바의 살해 -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전투 - 오토의 자살 -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의 충돌 - 베스파시아누스의 즉위'라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68년 한 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 해를 '네 황제의 해'라고 불렀다.
여담으로, 먼 훗날의 동쪽 로마에서도 641년 한 해에 황제가 4명 존재했다. 고대 로마와의 차이점은, 한 왕조 내의
2.2.2. 다섯 황제의 해
다섯 황제의 해 Annus Quinque Imperatorum | ||
193년 | ||
황제 |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
로마 제국의 왕조 |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세베루스 왕조 |
콤모두스가 서기 192년 12월 31일 암살당한 이후, 원로원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두 사위 폼페이아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이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자들에게 황제 자리를 제안한다. 하지만 이들은 콤모두스 시대의 폐단을 시정하고, 국가 안정이 우선이라면서 거절한다. 그러자 원로원은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와 사전교감을 거쳐 황제 자리를 제안받았던 페르티낙스에게 황제 즉위를 요청한다. 따라서 로마 제국 안에서 1세기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이어 2세기 100년간 로마의 황금기를 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문을 닫게 된다.
페르티낙스는 피폐한 제국 재정을 개선하고자 노력했으나 그 과정에서 각종 경비와 군사 예산을 삭감하려던 것이 군의 반발을 샀다. 더욱이 그는 콤모두스 폐단을 시정한다는 이유로, 관료들을 이런 저런 이유로 추방하는데 이 과정에서 국고를 채우기 위해 콤모두스 시대처럼 매관매직을 황제가 나서서 벌이고 민심회복이라면서 면세지 선정을 하는 등 기대치와는 동떨어진 실책을 벌인다. 이렇게 상황이 진행되자 원로원, 관료들은 큰 실망을 하게 됐고, 때마침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 한 약속을 어기고 근위대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안 주면서 이들을 개혁대상으로 몰아 황제와 근위대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다.
근위대장 라이투스와 그 부하들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족들에게 가야 할 제위를 페르티낙스에게 넘기는 대가로 보너스를 기대했었고, 라이투스는 고향 푸닉 지방과 가까운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직을 원했다. 따라서 페르티낙스가 자신들에게 콤모두스 실정 책임을 돌리며 근위대 비난을 강화하자,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다행히 원로원과 민중들은 새황제의 근위대 개혁을 지지해, 시간은 페르티낙스 편이었다. 이에 근위대는 기회를 엿보다가, 곡물 문제로 오스티아 항구에 시찰나온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페르티낙스는 전쟁영웅으로 군부의 존경을 받는 명성을 생각해, 호기롭게 평화 교섭을 제안했다가 근위대에게 집단구타로 살해당했다.
페르티낙스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다. 그는 페르티낙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내내 장군, 원로원 의원, 집정관으로 명성을 쌓은 이로 콤모두스 치하에서 바른 소리를 했다가 여러 차례 죽을 위기를 넘긴 거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즉위하는 과정은 황제 자리를 경매로 팔아치운 라이투스와 근위대의 농간으로 우습게 됐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제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페르티낙스 장인과 황제 자리를 놓고, "근위대에게 화끈한 보너스를 누가 많이 주느냐"로 결정나서 정통성이 크게 훼손되는 꼴이 됐다.
따라서 콤모두스가 암살된 직후부터, 황제 자리에 욕심을 가지고 있던 각지의 야심가들이 하나 둘 황제를 칭하기 시작한다. 맨 먼저 황제를 칭한 사람은 판노니아 사령관이자 이 일대 총독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하지만 영악하고 비열한 세베루스는 상황을 보면서 황제 참칭을 정식 발표하지 않고, 누군가 먼저 황제를 칭하길 기다렸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덕망 있고 법 원칙을 준수하기로 이름난 여러 인사들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이 여론에 맞춰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가 황제를 자처하고 이를 로마 원로원에 통보한다. 그러자 중간에 편지를 가로채 이 사실을 알게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두 번째로 황제를 선언. 이어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세번째로 황제를 선언한다.
이렇게 네 명이 서로 황제라고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급박해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세베루스와 연락을 취하면서 제 갈 길을 찾고 있던 라이투스를 제거한 뒤 폼페이아누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에게 공동황제를 제안하면서 그들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황족들은 모두 이 제안을 거절. 이런 상황에서 도나우 강 유역의 로마군 주력을 이끌고 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진군 이후, 거의 200년 만에 군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온다. 따라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원로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세베루스에게 다시 공동황제를 제안하는데, 원로원과 근위대는 유리한 협상 위치를 점하기 위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체포해 죽인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처형장으로 끌러갔다가 죽은 뒤, 세베루스가 로마에 들어와 반협박하는 모양새로 원로원에게 정식 황제로 승인된다. 세베루스는 전임자 페르티낙스를 죽인 죄로 이탈리아 출신들로 구성된 기존 근위대를 해산해버리고, 제 부하들로 근위대를 재창설. 이후 원로원에게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 약속을 손바닥 뒤엎듯 파기한 다음, 자신이 한때 존경했던 페르티낙스 죽음과 연루된 이들을 구금. 이어 살해된 뒤 방치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시신을 수습해 유가족에게 인도하고, 이 사건을 빌미로 원로원을 다시 한번 손본다.
다섯 황제의 해 이후 196년까지 3년이라는 세월 동안 각 세력 간의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는데, 세 경쟁자 중 먼저 나가 떨어진 쪽은 파르티아까지 내전에 끼어들게 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였다. 이때 세베루스는 브리티나아와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 북쪽을 차지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주고 동맹을 맺어 니게르를 제거했다. 그러나 황제 자리는 하나였고, 세베루스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격돌하게 된다. 루그두눔 전투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쪽은 냉혹하고 교활한 면에서 한수위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세베루스 승리 이후, 원로원 안에 있던 니게르, 알비누스 지지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원로원을 개편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로마 제국에는 약 30년 동안 지속된 세베루스 왕조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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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군인 황제 시대
AD 235~ AD 284.50년 동안 공동 황제 포함 20명 이상의 황제가 등극. 평균 재위 기간 2년 미만. 그야말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자세한 내용은 군인 황제 시대 항목과 각 황제들의 개별 항목을 참고할 것.
2.2.4. 사두정의 내전
2.2.4.1. 밀비우스 다리 전투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막센티우스가 제국 서방의 통치권을 두고 로마 근교에서 붙은 전투. 전투 자체보다는 다른 것으로 역사에선 유명한 전투이다. 바로 전투 전날 밤 콘스탄티우스가 천사에게서 십자가(크리스토그램)와 함께 '이것으로 정복하리라(In hoc signa vinces)'라는 문구를 전달받고는 다음날 휘하 장병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그려넣게 했고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야사. 물론 신빙성은 글쎄(...)2.3. 중세 전제정 시대의 내란
영어 위키백과의 List of Byzantine revolts and civil wars(동로마의 반란과 내전 목록) 일단 참고.2.3.1. 니카의 반란
532년에 서로 대립하던 두 파벌 녹색당과 청색당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왕권 강화에 반발하며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사건2.3.2. 20년간의 혼란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실각한 695년부터 레온 3세가 즉위하는 717년까지 약 20년간 6명의 황제가 갈아치워졌던 혼란기이다.2.3.3. 슬라브인 토마스의 난
미하일 2세가 레온 5세를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한 것에 대해 슬라브 혈통의 동로마 군인 토마스가 일으킨 내전.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참고
2.3.4. 레온 토르니키오스의 난
1047년에 동로마 군인 레온 토르니키오스가 콘스탄티노스 9세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사건.제1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참고
2.3.5. 팔레올로고스 내전
1차 내전: 1321, 1322, 1327 ~ 1328 (안드로니코스 2세 vs 안드로니코스 3세)2차 내전: 1341~1347 (요안니스 5세 vs 요안니스 6세)
3차 내전: 1352~1357 (요안니스 5세 vs 요안니스 6세, 마테오스)
4차 내전: 1373~1379 (요안니스 5세, 마누일 2세 vs 안드로니코스 4세, 요안니스 7세)
로마 제국 최후의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내전. 동로마 제국을 회생 불가 상태로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팔레올로고스 내전 참고.
[1] 흔히 라티푼디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2] 애시당초 이들이 독점하고 라티푼디움을 운영한 땅은 원래 국유지로 이들이 이 땅을 점거한 것은 사실상 탈법행위나 마찬가지였다.[3] 대략 기원전 2세기 초중반부터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제정이 수립되기까지의 시기.[4] 오로지 로마와만 동맹을 체결해야했다. 다른 도시국가 혹은 부족과는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 금지됐다.[5] 우리가 아는 그 카이사르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카이사르의 작은 아버지 뻘이다. 이 시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고작 12세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17살에 그리스를 정복했는데 뭐[6] 사실 이때 통과시킨 것도 완전한 것은 아니라서 해소되었다고 말하기도 그런 상태였다. 이후 카이사르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동맹시에 대한 처우를 완전히 개선함으로써 진정으로 해소되었다.[7] 그렇지만 일방적인 피후원자는 아니고, 패트로누스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후원자와 일종의 기브 앤 테이크 관계였다.[8]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인이기도 하다.[9] 여담이지만 킨나는 술라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신전에서 맹세까지 해놓고는 술라가 원정을 떠나자마자 배신해버렸다.[10] 농담이 아니라 이들이 체제전복을 노린 이유는 막대한 빚을 탕감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애꿎은 카이사르도 빚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에 가담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었다.[11] 다만 이것도 말이 많았던게 키케로가 자기 업적을 쌓기 위해 음모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았고 증거도 모이지 않았음에도 선빵을 날려 카틸리나를 처형해버렸다. 즉, 어떤 의미로는 생사람을 잡은 격인데 애시당초 죽인 사람이 카틸리나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지지자까지도 죄다 때려잡았기 때문. 거기다 키케로는 이 일에 원로원 최종권고를 날리는 등 무리한 행적을 일삼았기 때문에 나중에 정적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에게 반격을 당해 로마에서 쫒겨나게 되었다.[12]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돌싱이었지만(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로마군에게 살해, 14세는 요절했고 아들인 15세(카이사리온)과 공동통치 중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결혼한 유부남이었기 때문.[13] 사실 이 시점에서 안토니우스의 영향력은 아직 사라진 건 아니었고 딱히 옥타비아누스가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베스타 신전에 보관되어 있던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꺼내 공개하면서 로마에서 안토니우스의 지지세력 대부분이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던 자들은 도망쳐서 안토니우스에게 합류했다.[14] 이후 이집트는 황제 직할령으로 편입된다.[15] 네로가 몰락하기 전, 아우구스투스 직계혈육들은 피소 음모 당시 설계자로 누명을 뒤집어 쓰고 처형된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의 억울한 죽음을 끝으로 끊긴 상태라서, 네로가 가진 아우구스투스 혈육이라는 후광 효과는 사라진 상황이었다. 네로가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통해, 입양을 통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계승자이자 아우구스투스 혈육이라고 해도, 그는 칼리굴라의 공식 선언을 통해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계승권이 보장되지 않은 타 가문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서 네로의 모후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네로와 결혼시켜 이 단점을 상쇄하고자 했다. 하지만 네로는 제 손으로 처남, 어머니를 죽인 뒤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민중, 원로원 반대에도 이혼 후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 제거해 이미 정통성이 반쯤 박살난 상태가 됐다. 더욱이 증거 없이 고변을 받았다는 이유로 피소 음모, 베네벤툼의 음모가 터트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지지세력과 방계 황족들을 거진 죽여 빈덱스 반란 직전 이미 네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임에도 가짜 황제와 다름없는 처지가 됐고, 이는 그가 어이없이 무너진 원인이 된다.[16] 알다시피 이땐 교통이나 통신이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느렸기 때문에 오토가 갈바를 살해한 것도 모르고 비텔리우스는 반란을 일으켰다.[17] 특히 정신나간 짓거리가 있었는데 오토의 지지층이자 로마 국경 방어의 핵심이었던 도나우 강 수비대의 백인대장들을 싸그리 처형시켜버렸다. 이짓을 하고도 국경선에 구멍이 안 뚫린 게 신기 아닌 게 아니라 갈리아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는 했다. 비텔리우스의 뒤를 이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재빠르게 진압해서 별로 부각이 안 된 편일 뿐[18] 물론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먼치킨이랑 비교하면 후달리지만, 그래도 명군의 자질은 충분히 갖춘 인물이었다. 애시당초 세계사에 꼽히는 인물들인 저 2명이랑 비교하면 누구나 초라하게 보일수밖에 없다... 다른거 안 보고 이런 난세를 잘 끝낸것 만으로도 유능한것은 확정.[19] 숙질 간의 근친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