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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서기 39년 12월 혹은 40년 1월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 | 서기 62년 (23세) |
로마 제국 판다테리아 섬 | |
배우자 | 네로 |
자녀 | 없음 |
아버지 | 클라우디우스 1세 |
어머니 | 메살리나 |
형제자매 |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이복오빠), 클라우디아[1](이복언니),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이복언니) 브리타니쿠스(동복동생) |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
전임 | 소 아그리피나 |
후임 | 포파이아 사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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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클라우디우스의 차녀이자 네로의 황후이다. 흔히 옥타비아[2]로 불린다.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초대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혈육이다. 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小 Octavia)의 외손자이며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인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 어머니는 악명 높았던 아우구스타 중 한명인 메살리나이다. 출생 당시부터 3대 황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와 아버지 클라우디우스에게 몇 안 남은 카이사르 가문의 혈육인데다 황실의 번영을 위해 부모가 황제의 중매 아래 결혼한 터라 임신 당시부터 축복받았다고 한다. 당장 풀네임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에서 드러나듯, 그 이름은 외증조모 소 옥타비아에서 따왔다.
5대 황제 네로의 첫 아내로, 서기 62년 간통죄의 누명이 뒤집어 씌워져 불명예스럽게 아우구스타 직위가 박탈되고 캄파니아 지방으로 추방됐다가 판다테리아 섬에서 네로의 명으로 살해됐다. 남동생으로는 브리타니쿠스가 있으며 이복언니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최후의 아우구스투스 직계혈육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가 있는데 이들 역시 네로에게 억울하게 살해됐고 언니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부군으로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외삼촌이 되는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 역시 누명을 뒤집어 쓰고 네로에게 죽임을 당했다.
2. 생애
로마인들과 원로원, 황실에서 말하는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직계인 카이사르 가문의 공주로 서기 53년 사촌언니 소 아그리피나의 외아들로 아버지 클라우디우스의 의붓아들이 되는 아헤노바르부스(후일의 네로)와 결혼했다.사촌오빠였던 3대 황제 가이우스 시대때인 서기 39년(또는 서기 40년),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로 가이우스 황제의 작은아버지인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아내로 소 옥타비아의 또 다른 후손인 메살리나 사이에서 메살리나의 첫 아이로 태어났다. 고향은 로마. 아버지 클라우디우스가 외증조모 소 옥타비아의 이름을 따서 손수 이름을 지어줬다고 하며, 유년기에 일찍이 먼친척으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방계 황족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와 약혼했다.
품성이 바르고 조용한데다 교양이 풍부했지만 미남이었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와 동생 브리타니쿠스, 엄청난 미녀였던 이복언니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달리 상대적으로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 후일 정략혼을 통해 맞이한 남편 네로가 철저히 무시하고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혈통적, 사회적으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직계후손인데다 황제의 둘째 딸인 까닭에 혈통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를 이었음에도 3대 황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생전에 일찌감치 카이사르 집안 사람이 아닌 것으로 규정된 네로에게 그 정통성의 기반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남편'이라는 정치적 후광과 정통성의 타이틀을 준 존재였다. 따라서 아버지의 후처로 온 사촌언니 소 아그리피나의 간계로 일찍이 약혼한 루키우스 실라누스와 강제로 파혼한 뒤 네로와 결혼했다.
남편 네로와 정략혼으로 맺어진 사이인데다 서로 성격 차이도 큰 까닭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에 대해 타키투스는 네로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타고난 귀족적인 품성과 고귀함에 싫증을 냈다고 하며, 믿기 어려운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네로가 옥타비아를 목졸라 죽이려고 했다고 말한다. 결혼생활은 불화로 인해 힘들었지만 외증조모 소 옥타비아처럼 총명하고 그 품성이 좋아 이름난 현모양처로 로마의 시민들에게서 동정을 받았고 네로가 일찍부터 함량미달로 인식되는 와중에도 소년 네로의 제위계승 정당성을 상징한 아내였다. 이런 까닭에 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는 아들 네로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무시할 때마다 이를 지적하면서, 그녀를 늘 편들었다. 하지만 네로와의 사이는 네로의 끝없는 무시와 포파이아 사비나와의 외도로 나빠졌고, 네로가 밤마다 황궁을 빠져 나와 질 나쁜 무리와 어울려 일탈행동을 벌일 때마다 부부 사이는 최악으로 흘러갔다. 이런 상황에서 네로가 서기 55년 그녀의 남동생 브리타니쿠스를 저녁식사 자리에서 살해하고 그녀의 버팀목인 소 아그리피나마저 네로 손에 59년 살해되면서 결혼생활은 악몽이 되고 만다. 여러 고대 기록들에 따르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는 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와 함께 남동생 브리타니쿠스가 독살되고 네로가 천연덕스럽게 "간질로 그런 거다. 걱정하지 마라"고 거짓말 한 것을 직접 목격해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남동생과 시어머니가 모두 네로 손에 살해된 상황에서도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는 정치적 계략이 난무한 황궁에서 과거 사촌오빠 칼리굴라처럼 철저히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면서 위기를 넘어갔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네로는 오토의 아내로 유부녀였던 포파이아 사비나와 매일 같이 잠자리를 가졌고,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구박했다.
결국 서기 62년, 네로가 포파이아 사비나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불명예스럽게 이혼당했다. 이때 네로는 그녀와의 이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없던 죄를 만들기 위해 옥타비아의 노예들을 고문하고 주변 인사들을 협박했다고 한다. 이는 칼리굴라 생전부터 "내 조카는 카이사르 가문 사람이 아니며 계승권도 없다"고 선언받았다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남편이 되면서 양자로 황실에 들어온 네로가 도덕성이 없는 인간말종으로 인식된 범죄행위로 로마인들에게 단단히 인식됐다. 따라서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이혼 사건은 후일 네로 몰락의 단초 중 하나가 됐다고 한다.
이혼 직후, 캄파니아로 유배되듯 쫓겨났는데, 네로가 증거조작을 하여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졌고 무죄임에도 억울하게 판다테리아 섬으로 추방됐다. 이때 네로는 주변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비양심적인데다 이혼 사유 중 하나로 내세운 "아내가 불임이다"는 주장 역시 네로의 불륜과 방종이 큰 원인인 까닭에 로마인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이를 크게 질타했다. 특히, 이탈리아 내 로마 서민들은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모욕받고 추방된 황후를 딱하게 여겨 옥타비아의 조각상을 앞세워 공개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당장 죄없는 황후를 복귀시켜라"라고 목청껏 외쳤다. 이에 크게 겁 먹은 네로는 옥타비아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며 재혼하겠다고 했다가, 금세 마음을 바꿔 옥타비아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때 일에 대해 전남편 네로는 포파이아 사비나에게 이벤트를 해주겠다며 유배 중인 옥타비아를 살해하도록 하고 그 머리가 잘려 네로, 포파이아 사비나 부부의 선물로 전달됐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혈육이자 황후였지만 로마의 아주 전통적인 대역죄인 사형방식으로 살해됐다. 이때 일에 대해 로마 시대부터 내려온 고대기록들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시종들은 네로에게 고문을 받아 모두 살해됐고, 옥타비아 역시 죄인처럼 포박된 뒤 정맥을 잘리고 뜨거운 증기 목욕탕에서 질식해 죽는 방식으로 자살로 위장돼 살해됐다고 한다.
증조모 소 옥타비아처럼 대중들의 존경을 몸소 받은 황후였고 살해 직후 네로가 잔혹하게 그녀의 시신을 능욕한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언니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를 비롯한 몇 안 남은 황족과 친황실파, 원로원과 일반서민들 모두에게 그녀의 죽음은 아우구스투스 직계의 끔찍한 종말과 입양자 네로의 인간말종 행동으로 인식되어 큰 충격을 줬다고 한다. 따라서 네로의 정통성 기반이자 아우구스투스부터 클라우디우스까지 내려온 카이사르 가문의 몇 안 되는 직계황족인 까닭에 훗날 네로가 몰락할 때 반 네로 운동의 여러 명분으로 언급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