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6:36

소 아그리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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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소(小) 아그리피나 | 율리아 아그리피나
Agrippina Minor | Julia Agrippina
파일:Rome_Agrippina_Minor.jpg
이름 율리아 아그리피나
(Julia Agrippina)
출생 15년 11월 6일
로마 제국 게르마니아 오피둠 우비오룸(쾰른)
사망 59년 3월 23일 (43세)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배우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28년 결혼 / 41년 사망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41년 결혼 / 47년 사망)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49년 결혼 / 54년 사망)
자녀 네로(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어머니 대(大) 율리아 아그리피나
형제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통칭: 칼리굴라),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이그노투스 카이사르)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전임 메살리나
후임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1. 개요2. 생애
2.1. 가계와 혈통2.2. 초기 생애와 첫 결혼2.3. 오빠 칼리굴라와의 대립과 유배생활2.4. 로마 귀환과 황궁으로의 복귀2.5. 아들 네로와의 대립과 몰락
3. 평가4. 여담5.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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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 원수정 시대의 제4대 아우구스타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이다. 어머니와 이름이 아그리피나로 같다. 따라서 후대 사가들은 이를 구분하기 위해 어머니는 대(大) 아그리피나, 그녀는 소(小) 아그리피나라고 부른다.

부계와 모계 모두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카이사르 가의 직계 황족으로, 가장 오래까지 살아남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의 일원이다. 아그리피나는 5대 황제 네로 황제의 어머니이자, 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의 동복누이였으며,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친조카이자 계후이다. 또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의 증손녀, 로마 황족이자 장군 대 드루수스와 2대 아우구스타 소 안토니아의 손녀이자 카이사르 가문의 상속자, 장군, 정치가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의 딸이다. 따라서 그녀의 외할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육 대 율리아, 외할아버지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다.

그녀는 폭군 네로의 친모라서 욕을 먹은 것이 아니라 , 본인의 행적이 상당히 문제가 많아서 평이 나쁘다. 아우구스타 직위에 있는 동안, 그녀의 야심 탓에 벌어진 황실 음모와 그 피바람이 상당했다. 따라서 역대 아우구스타 직위를 가진 이들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여러 황족 중에서도 고모 리빌라와 함께 대표적인 악녀로 불린다. 그 평가도 고모 리빌라, 증조모 리비아 드루실라와 오빠 칼리굴라 이상으로 고대 기록들에서 평이 상당히 나쁠뿐더러, 역대 아우구스타 중에서도 본인 스스로 직접 정치에 개입해 월권을 행사하고 파벌을 구축해 일어난 숙청 사건도 많았다. 그래서 현대에도 악녀, 월권을 행사한 아우구스타 등으로 평가받을 뿐, 재평가되고 있지 않다.

2. 생애

2.1. 가계와 혈통

풀네임은 율리아 아그리피나로 서기 15년 11월 6일, 대 드루수스소 안토니아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와 그의 아내 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6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위로는 오빠만 5명이 있었으므로, 아그리피나는 이들 부부의 첫 딸(장녀)이었다. 그녀의 부모 아래에서 이후 여동생들로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가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대개의 로마인 부부들이 그렇듯 장녀인 그녀의 이름은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율리아 아그리피나)에서 고스란히 따왔다.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친혈육 대 율리아와 장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부부의 차녀이자 네 번째 아이였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로, 초대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손자이자 외종손이다. 따라서 소 아그리피나는 부계, 모계 모두를 통해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를 모두 이어받았다. 할머니 소 안토니아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인 까닭에 그녀는 안토니우스 가문의 피도 이어받았으며, 멀리 올라가면 옥타비아를 통해 폼페이우스 가문의 피도 흐르고 있었다. 이런 탓에 소 아그리피나는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처럼 자신이 로마 최고 영웅들의 피가 흐르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는데, 이런 모습은 너무 지나치고 거만했다고 한다.

아울러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이 되는 클라우디우스는 아버지의 동생, 즉 숙부였으며, 고모는 리빌라, 고모부이자 삼촌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황제 티베리우스는 그녀의 할아버지 대 드루수스의 친형이자 법적 할아버지였다.

2.2. 초기 생애와 첫 결혼

오빠들과 달리 독일 출신으로 오피둠 우비오룸 내 병영기지에서 영아기를 보냈고, 기록들을 유추해보면 최소 바로 아래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가 태어난 이후까지는 게르마니아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잠시 로마로 돌아가 처음으로 이탈리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때 할머니 소 안토니아가 그녀를 직접 키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게르마니아 전쟁이 최종적으로 종결되고 난 이후,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의 명에 따라 시리아 속주로 18년 임지를 옮겼다. 이때 임지를 따라다녔던 어머니를 따라 세 오빠,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와 함께 동방으로 거처를 옮겨 함께 살았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무렵 소 아그리피나는 여동생과 함께 만삭의 어머니를 따라 레스보스 섬으로 갔다고 하며 이곳에서 막내여동생 율리아 리빌라가 태어났다고 한다.

서기 19년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갑자기 안티오키아에서 요절했고, 이후 가족들은 로마로 돌아왔다. 이 시기 동안 그녀의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는 남편이 피소에게 독살되었다고 의심하면서 티베리우스가 사주했다고 믿고, 티베리우스와 공공연하게 대립했다. 따라서 결국 그녀의 어머니와 큰오빠 네로 카이사르는 세야누스의 음모 아래에서 반역죄로 기소된 뒤, 추방돼 사망했다. 아울러 둘째 오빠 드루수스 카이사르마저 세야누스와 카시우스 세베루스의 음모 아래 반역죄, 정신 이상에 따른 동성애 혐의와 성추문으로 기소됐다. 이 당시,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결백했고 티베리우스 역시 이 기소 부분에 의심을 했는데, 세야누스와 불륜 중인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거짓 증언을 하면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따라서 둘째오빠는 곧 황궁 지하실에 유폐됐고, 그곳에서 아사했다.

이 시기동안, 소 아그리피나는 처음에는 세 오빠와 두 여동생과 함께 팔라티누스 황궁 안에서 살았다고 하며, 어머니와 두 오빠가 억울하게 숙청된 이후에는 증조모 리비아와 조모 소 안토니아 아래에서 성장했다. 증조할머니 리비아와 할머니 안토니아는 이때 소 아그리피나와 유일한 오빠 가이우스 칼리굴라 등 게르마니쿠스의 자녀들에게 교양과 처세술 등을 가르쳤고, 그들이 엇나가지 않게 양육하고 엄격하게 감독했다고 한다.

13살 생일이 지난 28년, 법적 할아버지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의 가부장 티베리우스가 직접 혼처를 찾았고 아버지의 이종사촌동생이 되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신랑으로 결정났다고 한다. 따라서 소 아그리피나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에서 그녀의 유일한 혈육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훗날 네로)가 서기 37년 태어났다.

2.3. 오빠 칼리굴라와의 대립과 유배생활

서기 37년 6월 티베리우스가 승하하고, 제위를 유일하게 살아남은 오빠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가 승계했다. 이때 그녀의 남편은 각종 범죄에 연루됐는데, 진짜 문제가 많던 위인인 터라 유죄를 선고받고 처형되기 직전이었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가 죽고 새 황제가 민심 수습 차원에서 모든 반역혐의 기소자들을 풀어주면서, 남편 아헤노바르부스 역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승하할 당시, 첫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며 서기 37년 안티눔에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를 출산했다. 이때 그녀의 남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그녀의 임신 당시부터 "내 아이가 맞다"고 인지했으며, 오빠 칼리굴라는 여동생이 조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뒤 "나는 아그리피나의 이번 출산이 국가적으로도 축하받을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칼리굴라는 즉위 후 소 아그리피나를 포함한 세 여동생에게 각종 특권을 하사하고, 이들을 특별히 대접했다. 이때 그는 소 아그리피나 등 세 여동생에서 다음과 같은 영예를 하사했다.
* 로마 내 각종 경기장에서 맨 앞좌석에 앉을 권리 수여.
* 황제가 발행한 주화 반대편에 초상화를 새길 권리 수여.
* "나는 황제와 그의 세 누이들의 안전 보장을 내 생명과 내 자녀들의 생명처럼 중요하게 여기겠습니다"라는 충성 맹세 서약을 원로원이 선서하고, 보장함.[1]

그러나 서기 38년 6월, 로마를 휩쓴 전염성 열병으로 율리아 드루실라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이들 남매는 이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그러던 중, 39년 율리아 드루실라의 남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리빌라가 칼리굴라 암살을 계획했다는 증거가 나왔는데, 암살을 주도한 레피두스는 체포 후 법정에서 "가이우스가 내 아내 드루실라를 자신의 아내처럼 대우한 것과 거리 내 소문을 알고 있지만 신경쓰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또 레피두스의 자필 편지에서는 "가이우스를 어떻게 죽일 건지 설명한다"며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리빌라와 논의한 부분도 나왔는데, 이 역시 그는 인정했다. 따라서 이 사건으로 황제와 소 아그리피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믿었던 두 여동생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에 분노한 칼리굴라는 레피두스와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리빌라와 그들의 연인들에게 반역죄를 내리게 했고, 반역법에 따라 이들을 추방시킨 뒤 레피두스는 유배지에서 참수형에, 소 아그리피나는 섬으로 추방돼 친삼촌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할 때까지 살았다. 이때 오빠 칼리굴라는 그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했으며, 법에 따라 그녀의 재산, 노예, 귀금속 등을 전부 경매로 팔아치웠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시기 그녀는 본인의 생전 발언처럼 유배지에서 수영을 잘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타키투스의 원전 등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정확히 알 수는 없다.

2.4. 로마 귀환과 황궁으로의 복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은 그녀의 어머니인 대(大) 아그리피나와 똑같았다. 칼리굴라의 동복누이들이 칼리굴라가 일으킨 난리 전후에 전부 죽어,[2] 소 아그리피나는 살아남은 게르마니쿠스의 유일한 핏줄이 되었다. 소 아그리피나는 오빠 칼리굴라에 대한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형에 처해졌고,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으나, 오빠 칼리굴라가 재위 4년여 만에 암살되고 친삼촌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하면서 풀려나게 된다.

소 아그리피나는 복귀 이후, 오빠의 장례식 참석했다. 그녀는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이종사촌동생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해 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낳은 지 2년 만에 남편이 사망하면서,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 파시에누스(Gaius Sallustius Crispus Passienus)와 재혼했었다. 그런데 재혼했던 남편마저 사망한 터라 홀로 첫결혼에서 낳은 외아들을 키우면서 로마 상류층에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었다.[3]

그러다가 삼촌 클라우디우스의 황후 메살리나가 불륜과 반역죄로 체포당해 사형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클라우디우스에게 해방노예 3인방은 "새 황후가 필요하다"며 강권했고, 이때 잊혀진 그녀를 추천한 사람은 팔라스[4]였는데, 팔라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혈연적으로는 율리우스 가문이었지만 법적으로는 율리우스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는 약점을 갖고 있던 부분을 강조하면서 소 아그리피나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팔라스의 강권에 따라, 결국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친조카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을 결정하는데, 정략적인 이유 때문에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조카인 소 아그리피나와 상당히 무리하면서까지 결혼했다. 그리고 이렇게 소 아그리피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생전부터 자신과 그 일가에게 헌신한 팔라스의 도움으로 황궁에 복귀한다.

권력욕이 강했던 소 아그리피나는 황궁에 돌아온 이후, 오른팔 팔라스를 이용해 세를 키우고 황궁 전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 남편이자 삼촌인 클라우디우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남편의 친아들[5] 브리타니쿠스가 있었음에도, 무리해서 자신의 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훗날 네로)를 황제로 만들려고 했다.

사실 네로가 황제가 된 건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 덕이었다. 그녀는 클라우디우스의 황녀 옥타비아와 약혼했던 방계 황족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살리누스를 근친상간 혐의가 있다며 모함해 파혼시킨 뒤, 원로원 의석까지 뺏았다. 아울러 클라우디우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철학자 세네카와 근위대장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아들 아헤노바르부스에게 붙여주면서 황제의 피해방인 궁정대신 3인방을 자신의 사람으로 포섭했다. 이후 클라우디우스를 구슬려 옥타비아와 아헤노바르부스의 결혼을 주선했으며, 황제의 사위가 된 그녀의 친아들을 자신의 친정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의 양자로 입적시켜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2.5. 아들 네로와의 대립과 몰락

친아들 네로가 양자가 된 뒤 건강하던 클라우디우스가 갑자기 죽은 후, 근위대를 움직여 반쯤 쿠데타나 다름없는 형태로 황자 브리타니쿠스를 밀어내고 네로를 제위에 앉혔다.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소 아그리피나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며,[6] 이때 황족 중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부자와 도미티아 레피다 등이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이후 소 아그리피나는 자신과 아들 네로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나르키수스와 칼리스투스를 파면 후 처형한 다음, 궁정대신 팔라스를 통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그렇지만 네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어머니와 대립했고, 여기에 세네카와 부루스가 힘을 보태면서 클라우디우스 사후 4개여월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자 관계는 험악해지게 된다.

소 아그리피나는 아들 네로가 성년식을 치렀고, 친정을 원했음에도 권력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네로는 오토의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를 사랑해 아내인 옥타비아를 내치려고 했다. 왜냐면 네로는 옥타비아와 애초부터 애정이 없었고 소 아그리피나가 자신의 아들을 카이사르 가문의 양자로 입적시킬 당시 정통성을 보장하기 위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네로를 결혼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네로의 즉위 역시 옥타비아의 남편이라는 타이틀이 큰 정통성인 탓에 소 아그리피나가 네로의 이혼 요구를 도와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네로는 이에 불만이 커서 소 아그리피나와 사사건건 대립한 것을 넘어, 모자 관계는 정적 관계로 변했다.

이때 그녀는 아들과 사이가 나빠질 대로 나빠지자 결국 브리타니쿠스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시키기로 한다. 아그리피나는 네로에 반대해 옥타비아와 브리타니쿠스를 내세워 민중 앞에 호소했으며, 아들을 가리켜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부르고 자신과 브리타니쿠스가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혈통"이며 자신은 "게르마니쿠스의 유일한 딸"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소 아그리피나는 친 황실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에 상당수가 호응하면서 네로와 세네카, 부루스는 단순한 협박이 아닌 것을 느꼈다.

소 아그리피나가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한 것의 정확한 의도는 확실치 않다. 이것이 진짜로 네로를 실각시키고 브리타니쿠스를 황제로 만들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말 안듣는 네로를 위협하여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시키려고 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네로보다는 브리타니쿠스의 정치적인 입장이 더 강력했고, 이 때문에 네로에게 있어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공포에 질린 네로는 자신의 하수인을 보내 일단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했다.

이와 동시에 네로는 협박차원인지 몰라도 소 아그리피나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던 게르만족 친위대를 어머니의 거처에서 철수시켰다. 그럼에도 소 아그리피나는 계속해서 이혼을 반대했으며, 이 시기부터 밤마다 황궁을 빠져나와 불량배들과 어울리는 아들을 질책했다. 그러자 이에 네로는 격분하여 어머니를 살해하겠다고 마음먹고는 부하들에게 어머니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는 이때 아주 잔혹하고 비열한 방법을 사용했다. 이를 위해 소 아그리피나의 경계심을 흐트러트리려고, 네로는 우선 자신의 어머니와 화해한다는 명목으로 선상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때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는 서로 포옹하는 등 다정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그날 밤 네로는 자신의 측근들과 빠져나온 뒤 배를 침몰시켰는데... 이미 오빠에게 외딴섬으로 유배당했을때 수영을 배워 수영 실력이 출중했던 그녀는 헤엄쳐 돌아왔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네로는 자신의 근위대를 소 아그리피나의 자택에 보내 살해하도록 했고 소 아그리피나는 결국 근위대에게 살해된다. 이때 소 아그리피나는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고, 그녀를 죽이려고 하는 병사에게 배를 보여주며 황제가 들어있던 배를 찌르라고 일갈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로마인들은 여자가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네로의 존속살해는 후대 로마인들에게 항상 거론된 네로의 악행으로 기록되었을 정도로 욕을 먹었다. 왜냐면 로마인들에게 가족에 대한 헌신과 사랑, 효는 중요한 삶의 일부였기 때문에, 타키투스 등의 말처럼 네로는 이 부분을 공개적으로 지적받고 끝내 단죄되었다. 이런 이유로 소 아그리피나와 브리타니쿠스, 옥타비아의 죽음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 등이 반란 명분으로 내세웠으며,[7] 네로는 이 부분이 최대 악행으로 지적된 이후에는 “인간으로서의 미덕 자체를 모르는 말종”이라고 까였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빈덱스 반란을 제압한 루푸스의 게르마니아 주둔 병력이 네로에 대한 충성을 이런저런 이유로 거부하고, 근위대장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마저 배신을 때린다. 이후 각본이 짜여진 것처럼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공인하는데 네로는 처절하게 몰락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네로가 자기 품을 벗어나려 하는 게 싫어서 소 아그리피나가 네로를 유혹했을 거란 소문이 네로 집권 시기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주장 역시 칼리굴라의 사례처럼 근거없는 비방성 소문이기에 신뢰성은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3. 평가

고대와 현대 모두의 평가가 한결같이 안 좋다. 그녀에 대해 일관된 평가는 "야심이 너무 강하고, 고집이 세며 폭력적이면서도 비열하고 무자비했다" 였다. 아울러 고대 로마인들은 그녀가 자신의 혈통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거만한 것 역시 비난했는데, 이와 별개로 소 아그리피나의 외모와 육체적 매력은 상당했다고 한다. 이런 탓에 위에서 나온 근친상간 소문도 나왔던 것이고, 길거리 소문에 따르면 아들 네로 역시 어머니 장례식 당시 자신의 어머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언급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네로는 어머니 암살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도 이를 믿지 않아 겁에 질렸고, 장례식 날에도 화장되는 동안 별 말이 없었다고...

4. 여담

  •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 즉 현재의 쾰른은 소 아그리피나가 실권을 잡고 있을 때 지어졌다. 라인 강변에 식민지를 건설할 때,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소 아그리피나가 자신의 외조부인 아그리파를 기린다는 명목 하에 아그리피넨시스(아그리파의 도시)라는 이름을 붙여버렸다. 그러나 아그리파와 소 아그리피나의 이름이 같다는 걸 고려하자면 사실상 아그리피나 자신의 이름을 따서 붙인 거나 마찬가지다. 당시 로마 시대에 여자가 정치에 참여하거나 공공 기록에 이름이 남겨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도시 이름에 자기 이름을 썼으니 당시로선 엄청난 월권행위였다.

5. 창작물에서



[1] 이 맹세서약이 훗날 수에토니우스가 주장한 "칼리굴라가 세 여동생과 근친상간했다"는 신빙성 없는 주장 근거가 된다.[2]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자신과 동생들에게 하는 충성서약을 원로원에게 강요한 것을 볼 때 소 아그리피나를 제외한 여동생들과 칼리굴라의 근친상간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 아그리피나도 사실 그런 유혹을 받았지만 거절했다는 말도 있다고 하는데, 크게 신빙성은 떨어지는 주장이지만 칼리굴라가 폭군으로 낙인찍히고 비방성 주장들이 진짜 사실로 왜곡되면서 오늘날 막장 소재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3] 다만 소 아그리피나는 당대의 아우구스타 메살리나의 주요 경계대상이었고 메살리나는 언제나 소 아그리피나의 아들 네로를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4] 이 자유민은 대 드루수스소 안토니아 부부 생전부터 이들 가족의 충실한 가신이었다. 그런데 그는 나르키수스, 칼리스투스와 달리 소 아그리피나에게 충직한 해방노예였다.[5] 소 아그리피나에겐 사촌동생이자 의붓아들[6] 고대 기록들에 따르면, 나르키수스가 팔라스와 소 아그리피나 일당을 처내려고 했는데 이를 눈치챈 그녀가 나르키수스에게 통풍치료를 권하면서 온천으로 보냈고, 이후 클라우디우스가 그날 저녁 식사 중 급사했다고 한다. 소 아그리피나는 유명한 독살 전문가인 로쿠스타에게 독약을 제조시켜 클라우디우스가 좋아하는 버섯에 독을 넣어 먹였으나, 바로 죽지 않자 역시 아그리피나에게 포섭된 황실 주치의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크세노폰이 구토를 유도한다는 명목으로 독이 묻은 깃털을 목에 넣어 독을 다시 주입해 살해했다고 전한다.[7] 빈덱스의 네로 탄핵연설 중 조작된 피소 음모 사건과 묶여 거론된 첫 명분은, 네로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선황을 희화화하고, 자신의 가족들을 살해한 존속살해와 패륜이었다. 이는 원로원과 군대, 심지어 반란을 진압한 루푸스의 게르마니아 주둔병력마저 인정할 정도로 네로가 ‘국가의 적’으로 단죄받은 핵심 명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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