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아우렐리아 프리스카(Aurelia Prisca) |
출생 | 미상 |
사망 | 315년 로마 제국 트라키아 테살로니키 |
남편 | 디오클레티아누스 |
자녀 | 갈레리아 발레리아 |
사위 | 갈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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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사두정치 시대를 이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부인, 갈레리아 발레리아 황후의 어머니.2. 행적
2002년 로마 제국 달마티아 속주의 주도였던 살로나 유적지 동쪽 지역에서 발굴된 사원에서 그녀에게 헌정된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 비문에는 아래의 라틴어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Aureliae / Prisce / nobilissimae / feminae
고고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의 전체 이름은 아우렐리아 프리스카(Aurelia Prisca)이며, 생전에 "노빌리시마 페미나(nobilissima femina, 가장 고귀한 여자)" 칭호를 받았다고 추정한다. 이 칭호는 아우구스투스와 아우구스타 칭호를 각각 수여받은 황제와 황후 바로 아래에 있는 황족 여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일부 고고학자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영묘에 새겨진 이시스 여신의 부조도 프리스카의 외모를 본떠서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외에 그녀의 가족 배경, 전반적인 삶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다. 딸 갈레리아 발레리아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고 그녀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가 주조되었지만, 정작 프리스카 본인이 아우구스타가 되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아내에게 아우구스타 칭호를 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는 그녀의 신분이 비천했음을 암시한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아우구스타에 선임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물증은 없고, 차후에 그녀가 아우구스타로 등극했음을 나타내는 유물이 발견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락탄티우스의 <박해자의 죽음>에 따르면, 프리스카와 딸 발레리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오염되도록 강요당했다"며, 그럼에도 많은 기독교 신자들을 숨겨주었다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실 제국의 모든 주민들이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독려하고자 아내와 딸에게 실천을 요구했을 것이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한 뒤, 그녀는 딸 발레리아와 함께 사위 갈레리우스의 궁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311년 갈레리우스가 병사한 뒤, 그녀와 발레리아는 위험에 처했다. 본래 서방 속주를 이끌기로 되어 있던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의 난립으로 인해 서방에서 제 세력을 일으키기 어렵게 되자 동방으로 넘어가서 갈레리우스가 관할했던 속주를 강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딸 발레리아와 함께 리키니우스로부터 도망쳐 리키니우스와 대적하던 막시미누스 다이아에게 의탁했다.
얼마 후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 여동생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와 결혼하면서 동맹을 체결하자, 막시미누스는 위기감을 느끼고 발레리아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화가 나서 발레리아와 프리스카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당시 스팔라툼(현재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에 은거중이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서한을 보내 항의하자, 막시미누스는 두 여인을 석방했지만 재산을 몰수하고 시리아로 추방했다.
313년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무찌른 리키니우스는 자신에게 의탁하려는 프리스카와 발레리아를 오히려 죽이려 했다. 두 여인은 테살로니키로 피신하여 15개월간 숨어지냈지만, 결국 315년 초 체포된 뒤 참수형에 처해졌다. 두 사람의 몸은 바다에 버려졌고, 수급은 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