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23:25:36

알라니아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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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알라니아의 마리아
Maria of Alania
파일:알라니아의 마리아.jpg
출생 1053년
사망 1118년
아버지 바그라트 4세
어머니 알라니아의 보레나
형제자매 기오르기 2세, 마리암
남편 미하일 7세, 니키포로스 3세
자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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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두카스 왕조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미하일 7세니키포로스 3세황후.

2. 생애

1053년조지아 왕국의 3대 국왕 바그라트 4세와 조지아 북부 카우카시아의 오브세티의 통치자 도르골리의 누이인 보레나의 딸로 출생했다. 초명은 마르타(Martha)였다. 그녀에겐 남자 형제 기오르기 2세와 여자 형제 마리암이 있었다. 그녀가 출생하기 전, 조지아와 동로마 제국 간에는 긴밀한 접촉이 있었다. 부친 바그라트는 1023년 5살 때 인질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졌다가 1025년 조국으로 돌아갔고, 1030년 바그라트의 모후 마리암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조지아와 제국의 동맹을 재확인받고 아들의 배필이 될 여인을 찾았다. 당시 제국의 황제였던 로마노스 3세는 조카인 엘레니 아기로풀리나를 보냈지만, 그녀는 조지아에 도착한 지 얼마 안 가 사망했다.

이렇듯 조지아와 동로마 제국의 사이가 각별했기에, 조지아의 왕자와 공주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에 자주 들락거렸다. 어린 마르타 역시 105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처음 방문하여 몇 달 간 체류하다가 테오도라 여제가 사망한 뒤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1065년 조지아와 동맹을 굳건히 하려 한 콘스탄티노스 10세에 의해 미하일 왕자(훗날 미하일 7세)와 결혼하고 이름을 마리아로 개명했다. 조지아의 카홀리(Khakhuli) 삼각지대에 세워진 비석에는 "내 손으로 미하일과 마리암에게 왕관을 함께 씌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비석은 미하일과 마리아가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마리아의 부친 바그라트 4세에게 선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되며, '마리암(Mariam)'은 마리아의 조지아식 표현이다. 하지만 조지아 측 기록은 그녀의 초명인 마르타로 일관되게 기술했다. 동로마 문헌에서, 마리아는 '알란(Alan)'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이는 그녀의 어머니 보레나가 이베리아 또는 아바시아 출신인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067년 5월 22일 콘스탄티노스 10세가 사망하자, 미하일이 새 황제로 등극했고 마리아도 황후로 선임되어 아우구스타 칭호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실권은 미하일의 모친인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에게 있었다. 에브도키아는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으로 소아시아가 상실될 위기에 몰리자, 1068년 유능한 지휘관으로 정평났지만 지난해에 반역을 꾀했다가 체포된 뒤 사형되기 직전이던 로마노스 4세와 결혼하여 공동 황제로 등극시켰다. 그러나 로마노스 4세는 1071년 8월 26일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부하들의 배신으로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참패당했다. 그 후 로마노스 4세는 귀환하던 중 1072년 초 동로마 귀족들의 군대에게 체포되어 실명당했고, 미하일 7세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 후 셀주크 투르크의 거듭된 침략으로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을 거의 상실했고, 남이탈리아에 자리잡은 노르만족이 발칸 반도로 쳐들어왔다. 게다가 물자 유통이 거의 마비되면서 1077년도의 식량 가격이 1075~1076년 대비 50배 수준으로 폭등하는 지경에 이르자, 화폐 가치를 1/4이나 절하해야 했다. 미하일은 재정난을 수습하기 위해 세금을 급격히 인상했고, 이로 인해 민중의 반감을 샀다. 결국 1077년 아나톨리아 관구의 군사 지휘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로 진격했고 1078년 1월 6일 아야 소피아성탄절 행사 도중 사제단이 니키포로스를 황제로 선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하일은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3월 1일 니키포로스가 수도 건너편 해안에 이르러 봉화로 도착을 알리자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하여 3월 24일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황궁을 접수했다. 미하일 7세는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체포된 뒤 스타우디오스 수도원수도자로 전락했다.

이때 마리아는 남편과 함께 수도원에 가서 수녀 신분이 되었다가 곧 니키포로스 3세와 결혼했다. 이는 마리아가 아직 젊어 로마노스 4세의 미망인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등 다른 결혼 후보자들에 비해 외모적으로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구 두카스 정권 구성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타니아티스는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두카스 왕조 지지자들의 불만을 가라앉힐 수 있었고, 본인에게 다소 부족한 정통성도 제고할 수 있었다. 전 남편 미하일 7세가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제들이 반대했지만, 니키포로스는 이들을 모조리 해임시켰다.

하지만 니키포로스는 미하일 7세와 마리아의 외아들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고, 다른 후계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조카인 니키포로스 시나디노스(Nikephoros Synadenos)를 후계자로 삼고 보타니아티스 혈통에 기반한 왕조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분개한 마리아는 콤니노스 및 두카스 가문과 연계하여 정권을 뒤엎으려 했다. 안나 콤니니에 따르면, 그녀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와 서신을 주고받았고, 알렉시오스의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마리아는 니키포로스의 옛 친구들인 보릴루스와 게르마누스가 알렉시오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눈치채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알렉시오스를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1081년 초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자, 사전에 내통하고 있던 수비대는 성문을 활짝 열었다. 이후 니키포로스를 지지하는 시민군과 반란군 간의 참혹한 시가전이 벌어진 끝에 반란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니키포로스는 제위를 포기하고 페리블렙토스(Peribleptos) 성당 부속 수도원에 은거하여 1081년 말 병사하였다.

1081년 4월 4일, 알렉시오스는 새 황제로 즉위했다. 세간에서는 알렉시오스가 어머니 안나 달라시니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리니 두케나와 이혼하려 한다는 소문과 알렉시오스와 마리아는 서로 사랑을 나눴으며 마리아가 새 황후가 될 거라는 소문이 동시에 돌았다. 하지만 당대 최강의 귀족 가문인 두카스 가문과 척질 수 없었던 알렉시오스는 이리니 두케나를 새 황후로 지명하고, 마리아를 황궁에서 내보냈다. 그 대신, 외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해달라는 마리아의 요구를 받아줬다. 그 후 마리아는 망가나 수도원 옆의 저택에 은거했다. 1083년 12월 안나 콤니니가 태어나자, 알렉시오스는 안나를 콘스탄티노스와 약혼시켰다. 1090년경, 알렉시오스는 마리아에게 8살이 채 되지 않은 안나를 기르게 했다. 마리아는 1090년부터 1096년까지 안나를 훈육했고, 안나는 마리아가 자신을 매우 좋아하고 모든 비밀을 공유했다고 밝혔다.

마리아는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황제의 어머니이자 알렉시오스 1세의 대모로서,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오크리드의 테오플락트, 니케아와 에우스트라티우스 등 여러 문인들을 후원했다. 테오필락트는 파이데이아 바실리케(Paideia Basilike)에서 마리아의 신앙심과 신학에 대한 열정을 칭송했으며, 에우스트라티우스는 '천둥과 번개에 대하여', '지구의 차원에 대하여', '하늘과 지구 사이의 거리에 대하여', '지진에 대하여', '바다에 대하여', '별에 대하여' 등 각종 논문을 그녀에게 바쳤다.

1087년 9월 13일, 알렉시오스 1세와 이리니 두케나 황후 사이에서 요안니스 2세가 출생했다. 알렉시오스는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의 지위를 당장 거두지 않았지만, 알렉시오스의 친족들은 아들이 아닌 사위가 후계자가 되는 게 말이 되냐며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했다. 이로 인해 콘스탄티노스의 입지는 갈수록 불안해졌고, 1092년 요안니스 2세가 공동 황제로 공표되었다. 1094년 콘스탄티노스 두카스가 중병에 걸리자, 알렉시오스는 이를 이유로 콘스탄티노스와 안나의 약혼을 파기하고 콘스탄티노스를 퇴위시킨 뒤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안나를 결혼시켰다. 이로 인해 분열의 조짐이 일었지만,[1] 1095년 또는 1097년 콘스탄티노스가 사망하면서 무마되었다.

마리아는 아들이 사망하자 매우 낙심했고, 속세를 떠나 수녀가 되기로 했다. 그녀는 수녀가 된 뒤에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테오필락토스는 그녀의 엄격한 옷차림과 금욕적인 생활방식을 칭송했고, 조나라스도 그녀의 검소함을 여러 번 칭찬했다. 그녀는 말년을 자선 활동과 신앙에 매달리며 조용히 지내다 1118년경 숨을 거두었다.






[1] 1094년 6월 알렉시오스를 시해하려다 체포된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는 마리아도 음모에 가담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는 일이 커질 걸 우려해 마리아의 건을 불문에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