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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 3대 군주 ბაგრატ | 바그라트 4세 | ||
제호 | 한국어 | 바그라트 4세 |
조지아어 | ბაგრატ | |
라틴어 | Bagrat IV | |
가족 | 기오르기 1세(아버지) 바스푸라칸의 마리암(어머니) 구란두크트(누이) 마르타(누이) 카타(누이) 디미트리오스(이복동생) 엘레니 아기로풀리나(첫째 왕비) 알라니아의 보레나(둘째 왕비) 기오르기 2세(아들) 알라니아의 마리아(장녀) 마리암(차녀) | |
생몰 년도 | 1018년 ~ 1072년 11월 24일 | |
재위 기간 | 1027년 8월 16일 ~ 1072년 11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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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왕국 3대 군주. 45년에 걸친 긴 치세 동안 외세의 침략, 이복동생 디미트리오스와 강력한 귀족 리파리트 4세의 반란 등 숱한 고난을 겪었고 한때는 국외로 망명하기도 했지만, 끝내 왕위를 지켜내고 강력한 귀족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해 후대 왕들이 강력한 왕권을 누리며 국가 발전에 몰두할 발판을 마련했다.2. 생애
1018년 조지아 왕국 2대 군주 기오르기 1세와 아르메니아 바스푸라칸의 세네케림-호반네스 왕의 막내딸 마리암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누이로 구란두크트[1], 카타[2], 마르타[3]를 두었고, 이복 동생으로 디미트리오스가 있었다. 4살 때인 1022년 아버지가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패배한 뒤 맺은 협약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졌다.1025년 12월 15일 바실리오스 2세가 사망하자 조지아로 돌아갔다. 바실리오스 2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콘스탄티노스 8세는 조지아에 사절을 보내 "약속된 3년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째서 왕자가 조지아로 돌아갔는가?"라고 따지고 왕자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다시 데려가게 했다. 하지만 기오르기 1세는 거부했고, 왕국 각지의 장정을 소집해 제국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던 1027년 8월 16일, 기오르기 1세는 트리알레티 지역의 음킨바르니 마을에 들렀다가 돌연 사망했다. 이리하여 당시 10살이었던 그가 왕위에 올랐고 어머니 마리암이 트리알레티아 총독 리파리트 4세, 카르틀리 총독 이바네과 함께 섭정을 맡았다.
콘스탄티노스 8세는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왕자를 멋대로 귀국시키고 전쟁을 벌일 태세를 갖추던 조지아를 아니꼽게 여겼다. 마침 조지아의 일부 귀족이 제국에 조지아의 내정에 관여해줄 것을 요청하자, 황제는 이를 명목삼아 조지아와 전쟁을 벌였다. 아르타누지가 동로마군에게 함락되자 몇몇 귀족이 동로마 편으로 넘어갔지만, 대다수는 바그라트 4세를 위해 싸웠다. 하지만 양자 모두 전면전을 벌이기엔 사정이 좋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8세는 형 바실리오스 2세가 사망한 뒤 단독 황제가 되었을 때 이미 65세의 고령이어서 군대를 적극적으로 이끄기 곤란한데다 사라센과 페체네그족의 압박에 대비해야 했다. 조지아 역시 어린 왕 등극 후 어수선한 국정을 바로잡는데 몰두해야 했다. 그래서 양자간의 전쟁은 몇 차례의 소규모 접전에 그쳤다. 그러다 1028년 11월 12일 콘스탄티노스 8세가 사망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1030/1031년, 마리암 왕태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찾아가 로마노스 3세와 협상한 끝에 아들이 조지아 왕으로 인정받고 바그라티온 가문 인사들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대대로 수여받았던 큐로팔레이트 칭호를 얻어냈다. 1032년, 그는 로마노스 3세의 조카이자 바실 아기로폴리스의 딸인 엘레니 아기로풀리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엘레니는 이듬해 사망했고, 그는 알라니아의 왕 도르골의 누이인 보레나와 재혼했다. 두 사람은 아들 게오르기 2세와 두 딸 알라니아의 마리아, 마리암을 낳았다.
1032년, 기오르기 1세의 막내아들이자 그의 이복동생인 디미트리오스가 왕에 반대하는 인사들과 함께 반란을 꾀했다. 그러다 음모가 발각되자, 그는 어머니 알다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고 자기가 다스리고 있던 아나코피아를 동로마 제국에 양도했다. 로마노스 3세는 디미트리오스에게 고위 관직을 주고 바그라트 4세에 대적하게 했다. 그는 아나코피아를 되찾고 싶었지만 제국의 위세가 두려워서 그러지 못했다. 그 대신, 645년부터 무슬림의 손에 들어갔던 이베리아의 고대 수도 트빌리시를 탈환하려 했다. 1032년 가신인 리파리트 4세가 이끄는 조지아군이 티플리스를 포위하고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리파리트 4세의 권력이 너무 강해질 걸 두려워한 그는 철수하게 했다.
1034년, 리파리트 4세는 아랍의 샤다디드가 이끄는 무슬림군의 침략을 아르메니아와 함께 격파했다. 뒤이어 1038년 다시 트빌리시를 포위해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그러나 조지아 귀족들이 그의 세력이 커지는 걸 두려워하여 그에게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설득했고, 그는 이에 넘어가 리파리트 4세에게 철수를 강요했다. 리파리트 4세는 이에 분노해 그에게 깊은 반감을 품었다. 그러던 1039년, 디미트리오스가 동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아 강력한 용병대를 이끌고 조지아로 돌아왔다. 리파리트 4세는 즉각 그와 손을 잡고 그에게 대적했다. 그는 한때 수도 쿠빌리시까지 위험해질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1042년 디미트리오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반란군의 기세가 꺾인 덕분에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할 수 있었지만, 리파리트 4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대항했다. 리파리트 4세는 토벌대를 상대로 숱한 승리를 거뒀는데, 특히 사시레티 전투에서 바랑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왕의 군대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패한 뒤 조지아 동부가 리파리에게 넘어가는 걸 허용해야 했다. 결국 리파리트 4세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콘스탄티노스 9세 황제에게 중재를 호소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리파리트 4세가 조지아 왕에게 신하로서 복종하되 므트크바리 강 남쪽 일대의 조지아 영토를 관장하게 했다. 이리하여 리파리트 4세는 조지아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로 우뚝섰다.
그러던 1048년 9월, 리파리트 4세는 셀주크 투르크에 맞서 싸우라는 동로마 제국의 지시에 따라 아나톨리아로 진격했다가 카페트루 전투에서 투르크군에게 패하고 생포되어 이스파한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이때를 틈타 라파리트 4세가 가지고 있던 조지아 동부 일대를 되찾았다. 그러나 리파리트 4세가 셀주크 술탄이 관대한 조건으로 풀어주는 덕분에 자기 영지로 돌아오면서 상황은 빠르게 역전되었다. 1049년 리파리트 4세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쿠타이시로 쳐들어오자, 그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압하지야로 피신했다. 그러나 리파리트 4세가 압하지야까지 쳐들어오자, 이번에는 어머니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하여 3년간 그곳에 지내야 했다. 그 사이, 리파리트 4세는 바그라트 4세의 아들 기오르기 2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을 맡았다.
1053년,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낸 그는 조지아로 돌아와 리파리트 4세와 전쟁을 벌였다. 7년간의 내전 끝에 전세가 바그라트 4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리파리트 4세의 추종자들은 1060년 주군을 체포하여 그에게 바쳤다. 왕은 리파리트 4세를 안톤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시키고 수도원에 강제로 들어가게 했다. 이로써 가장 까다롭던 귀족 리파리트 4세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그는 자신에게 반항적이던 귀족들을 잇따라 숙청해 왕권에 다시는 도전하지 못하게 했다.
1068년,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아르메니아를 정복한 후 조지아를 침공해 요새화된 도시인 아할칼라키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그가 군대를 이끌고 맞섰지만 패배했고, 셀주크 투르크에게 공물을 바치고 술탄을 주군으로 받들겠다는 조건의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동로마 제국과 조지아는 셀주크 제국의 위협에 맞서 긴밀한 협력을 모색했다. 그의 장녀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1065년 콘스탄티노스 10세 황제의 아들 미하일 황자와 결혼했고, 차녀 마리암은 동로마 제국의 고위 인사인 테오도로스 가브라스와 결혼했다.
알프 아르슬란은 조지아를 떠나기 전에 트빌리시와 루스타비 요새를 조지아의 오랜 적수인 아란의 샤다디드 왕조에게 넘겼다. 알프 아르슬란이 떠난 뒤, 그는 두 요새를 되찾고자 사다디드 왕조와 전쟁을 벌였다. 사다디드 왕조의 군주 파즈룬 2세 이븐 사브루가 3만 3천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갔지만, 그는 이들을 성공적으로 격파했고, 뒤이어 아니 시를 탈환하고 카르틀리에서 사다디드의 세력을 몰아냈다. 파즈룬 2세는 카헤티로 도주했다가 지역 통치자 아그사르탄 1세에게 체포되어 그에게 넘겨졌다. 그는 이오리 강 유역의 여러 요새를 양도받는 조건으로 그를 풀어줬다. 뒤이어 트빌리시 요새를 포위 공격한 끝에 그곳의 에미르로부터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고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포위를 풀었다.
1072년 11월 24일 사망했고 촐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기오르기 2세가 뒤를 이어 조지아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