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테오도로스 가브라스 (영어:Theodore Gabras, 그리스어: Θεόδωρος Γαβρᾶς) |
출생 | 미상 |
사망 | 1099년 |
직위 | 찰다라 총독 |
반란 대상 | 알렉시오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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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의 반란자. 알렉시오스 1세에 맞서 아들을 빼내려 했다가 실패했고 반역자로 취급되었다. 이후 황제의 용서를 받고 동방 전선에서 투르크군과 맞서다가 생포된 뒤 개종을 거부하고 처형되었다.2. 생애
카파도키아를 기반으로 하는 군사귀족 가문의 인물로, 군대에 입대한 이래 용맹하면서도 교활한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어떤 임무를 맡더라도 성공시켰다고 한다. 1067년 파트리키오스, 토포테르테스, 하이파토스의 반열에 올랐다. 1075년 트레비존드로 진격하여 투르코만족을 몰아내고 빼앗겼던 영역을 되찾았다. 1081년 황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트레비존트를 중심지로 하는 찰다라 테마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트레비존트에서 상당히 독립적으로 활동하였고, 조지아 왕국의 습격을 번번이 막아냈다. 또한 투르크 계열 에미르들의 공격을 모조리 격퇴하고 영토를 바이부르트까지 확장했다. 그는 삼순에서 귀뮈샤네에 이르는 일대에 많은 산성을 쌓아서 흑해의 해안지대를 지배했다.1080년대 후반 황제의 부름을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된 그는 큰아들 그레고리오스를 동로마 제국의 유력한 장군이자 그의 딸인 그레고리아와 약혼한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 맡긴 뒤 트레비존트로 돌아갔다. 얼마 후 첫번째 아내가 사망하자, 1091년 알란 출신의 고귀한 부인과 결혼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레고리아의 4촌이었다. 이에 정교회는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그레고리아와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약혼을 파기하라고 요구했고, 결국 황제는 파혼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그의 반응이 걱정되었기에 테오도르의 큰아들 그레고리오스를 인질로 잡아뒀다.
109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서 아들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는 자신의 딸 중 하나를 그레고리오스와 결혼시키는 걸 고려하고 있다며 거절했다. 이를 믿지 않고 아들을 구출해 트레비존트로 데려가려는 음모를 꾸몄다. 일단 거짓으로 황제의 뜻에 따르겠다고 밝힌 뒤, 떠나기 전날에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와 저녁을 먹었다. 그는 아들과 하루를 더 보내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이사키오스는 이에 동의했다. 다음날, 그는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소스테니움으로 가는 여행을 전송하게 할 수 있는지 물었다. 허락을 받아내자, 그는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가다가 몰래 파로스 항으로 가서 상선을 타고 흑해로 도망쳤다.
황제는 그의 행위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함대를 즉시 파견했다. 그들은 아이기누스 마을 인근에서 상선을 따라잡고, 그에게 아들을 넘겨주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하여 체포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넘겨줬고, 트레비존트로 돌아가는 걸 허락받았다. 그레고리오스는 탈출을 위한 또다른 음모를 꾸몄지만 발각당하고 필리포폴리스에 수감되었다. 이후 황제의 용서를 받은 1097년 십자군과 연합하여 투르크군과 싸웠다. 십자군이 안티오키아 공성전을 벌이는 동안, 그는 알렉시오스 황제와 함께 행군하여 소아시아 서부 마을을 탈환하는 걸 도왔다. 또한 팔퍼트를 공략하였고, 팔퍼트를 되찾으려는 투르크군을 격퇴했다.
1098년 바이부르트 인근 소루 강둑에서 다니슈멘드 가지의 아들 이스마일의 군대와 맞붙었으나 패했다. 그 후 바이부르트로 침입한 투르크군과 맞서다가 투르크 장군 아크메트 멜리크에게 붙잡혔고 1099년경에 처형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멜리크는 이슬람교로 개종하라고 요구했고, 그가 듣지 않자 끔찍한 고문을 받을 거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응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외쳤다.
"가장 높으신 임금님, 아들과 성령이시여! 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투기 경기장에 인도될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 제가 값진 제물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당신의 손을 십자가에 뻗으시고 인류에 대한 구원의 은총으로, 제가 당신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소서!"
멜리크는 격분하여 그의 눈을 뽑고 양손과 양발을 베고 가죽을 벗겼지만, 그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담담히 순교했다고 한다. 훗날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