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16:15:53

다비트 4세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d0000, #c00000 20%, #c00000 80%, #8d0000);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바그라티온 왕조
바그라트 3세 기오르기 1세 바그라트 4세 기오르기 2세
바그라티온 왕조
다비트 4세 데메트리우스 1세 다비트 5세 데메트리우스 1세
바그라티온 왕조
기오르기 3세 타마르 기오르기 4세 루수단
바그라티온 왕조
다비트 6세
다비트 7세
서부 동부
바그라티온 왕조 바그라티온 왕조
다비트 6세 콘스탄틴 1세 다비트 7세 데메트리우스 2세
바그라티온 왕조 바그라티온 왕조
미켈 바그라트 1세 바흐탄그 2세 다비트 8세
바그라티온 왕조
기오르기 5세 바흐탄그 3세
바그라티온 왕조
다비트 8세 기오르기 6세
바그라티온 왕조
기오르기 5세
1차 통일
바그라티온 왕조
기오르기 5세 다비트 9세 바그라트 5세
동부
바그라티온 왕조
바그라트 5세 기오르기 7세
2차 통일
바그라티온 왕조
기오르기 7세 콘스탄틴 1세 알렉산드레 1세 바흐탄그 4세
바그라티온 왕조
기오르기 8세 바그라트 6세 알렉산드레 2세 콘스탄틴 2세 }}}
}}}}}}

조지아 왕국 5대 군주
დავით | 다비트 4세
파일:다비트 4세.jpg
제호 한국어 다비트 4세
조지아어 დავით
라틴어 David IV
별명 건설자(the Builder, აღმაშენებელი)
가족 기오르기 2세(아버지)
엘레니(어머니)
아르메니아의 루수단(첫째 아내)
오트로크의 구란두크트(둘째 아내)
데메트리우스 1세(장남)
바크탕(차남)
기오르기(삼남)
루수단(장녀)
타마르(차녀)
카타(삼녀)
생몰 년도 1073년 ~ 1125년 1월 24일
재위 기간 1089년 ~ 1125년 1월 24일
서명
파일:다비트 4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조지아 왕국 5대 군주.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중동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셀주크 제국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고 국가의 질서를 확립해 조지아의 황금시대를 개창한 명군이다.

2. 생애

조지아 왕국 4대 군주 기오르기 2세와 엘레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중세 조지아 역사서 <다비트 왕의 생애>는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16살이었다고 기술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1073년생이었을 것이다. 그를 처음 언급하는 문서는 기오르기 2세의 왕실 헌장으로, 1073년경 움흐비메 수도원에 수여되었다.

당시 조지아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아버지 기오르기 2세는 바그바시 가문 등 여러 유력 귀족의 불순종을 제대로 징벌하지 못했고, 그들을 달래기 위해 봉토를 거듭 하사해야 했다. 게다가 셀주크 제국의 술탄 말리크샤 1세가 조지아를 잇따라 침략하여 트빌리시, 에르주룸 등 주요 도시를 약탈하고 왕실의 국고를 탈취했다. 특히 1079년부터 매년 투르크인들의 침략이 이어지면서 조지아 전역이 황폐해졌고, 수많은 백성이 전리품으로 끌려갔다. 다비트 왕의 생애는 이 때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땅에는 더 이상 파종과 수확이 없었다. 숲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고, 야수와 짐승들이 인간의 자리를 대신했다.

기오르기 2세는 말리크샤 1세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조지아 군대를 보조군으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해 셀주크 제국이 더 이상 침략하지 않게 했다. 그러나 술탄은 본인이 직접 공격하지 않을 뿐 투르크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조지아로 가서 약탈하는 걸 방치했다. 기오르기 2세는 말리크샤의 지원을 받아 카케티아를 정벌하려 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카케티아 왕 아그사르탄 1세는 말리크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셀주크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이렇듯 암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1088년, 대규모 지진이 조지아를 강타하면서 막대한 희생자와 재산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가뜩이나 투르크인들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인해 파탄 지경에 놓여 있던 민심은 이로 인해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다. 기오르기 2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089년 이제 갓 16살된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퇴위했다.

여러모로 실패와 굴욕으로 점철된 치세를 보낸 끝에 불명예스럽게 퇴위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는 파탄 지경에 몰린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먼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수여받은 노빌리시모스, 쿠로팔라테스 등 작위를 거부해, 동로마 제국을 더 이상 조지아의 종주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이후 투르크인들에게 여러 차례 패배해 사기가 떨어진 군대를 재편성했다. 소수의 귀족과 왕족이 지휘하고 농민이 주축이 된 몇 개의 소규모 부대를 조직하고, 이들을 주축삼아 투르크 유목민들이 세운 천막들을 기습 공격하게 했다. 농민들은 가족과 땅을 유린한 투르크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었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기습 작전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자, 수십 개의 분견대가 잇따라 창설되어 그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이들을 이끌고 투르크 전사들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유목민들은 산악 지대나 숲속에 숨어 있다가 기습 공격을 해오는 적에 애를 먹었고, 피해는 갈수록 불어났다. 결국 견디다 못한 투르크인들은 조지아인과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투르크인들은 조지아를 더 이상 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는 아버지의 통치 기간에 정해진 공물을 정직하게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조지아인들은 이후에도 자기네 땅에 살고 있던 투르크인들을 맹렬히 공격했고, 결국 수많은 투르크인들이 조지아에서 쫓겨났고 조지아인들은 자신들의 터전에 복귀했다. 그는 전쟁으로 파괴된 마을을 재건하고 농업 진흥 정책을 실시해 파탄 지경에 처했던 경제를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경제가 어느정도 회복되자, 그는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여 여러 귀족을 복속했다. 하지만 몇몇 귀족은 여전히 그에게 반란을 꾀했다. 1093년 오르벨리아니 공작 리파리트가 "다비트 왕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라는 루머를 퍼트리고 그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몄다. 그는 이 사실을 눈치채고 리파리트를 감옥에 가두었다. 2년 후, 리파리트는 충성 서약을 한 뒤 풀려나 트리알레티로 돌아갔다. 그러나 리파리트는 야심을 거두지 않고 재차 음모를 꾸몄다. 그는 첩보를 통해 이 사실을 간파하고 1098년 재차 체포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했다. 리파리트의 아들 라트 4세가 1101년 사망하자, 그는 즉각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여 왕실의 직할지로 삼았다. 자간 아불레티스제를 비롯한 몇몇 귀족들도 반란을 꾸몄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 사형이나 추방형에 처해졌고, 그들의 영지는 왕실 소유로 귀속되었다.

그가 귀족들의 음모를 조기에 적발할 수 있었던 건 비밀 경찰 므스토바르니(mstovarni)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급 귀족이나 평민 출신으로, 왕의 총애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들은 대귀족들의 동태를 철저히 살펴 음모를 밝혀냈다. 또한 전임자들이 선택한 고관들을 해임하고 하급 귀족들을 중용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중용해준 왕에게 충성을 바쳤다. 그 결과 한때 조지아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 바그바시 가문 등 여러 가문이 몰락했고, 귀족들은 왕의 권위에 복종했다.

이렇듯 왕권을 강화하고 있을 무렵, 국제 정세는 조지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한때 중동 전역에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셀주크 제국은 1092년 말리크샤 1세가 사망한 뒤 극심한 내분에 시달렸다. 여기에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이 벌어지면서 아랍권의 시선은 십자군 쪽으로 쏠렸다. 그는 이 때를 틈타 1099년 셀주크 제국에 공물을 더 이상 바치지 않고, 그 돈으로 군대와 기반 시설에 대거 쏟아부어 국가의 역량을 강화했다. 1103년, 그는 마침내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셀주크 제국에 빌붙었던 카케티아 군주 크비리케 4세가 사망했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그사르탄 2세는 너무 어려서 귀족들에게 정권을 위임해야 했다. 또한 백성들은 정교회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한 왕실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카케티아로 쳐들어가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고 카케티아 전역을 장악했다. 몇몇 카케티아 귀족들은 간자의 무슬림 통치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간자의 술탄은 1105년 조지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양군은 에르츠키에서 카케티아의 패권을 놓고 맞붙었다. <다비트 왕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전투 도중 말이 자꾸 죽어 3번이나 말을 갈아타야 했지만, 네번째 말에 올라탄 뒤 적군 한복판으로 치고 들어가서 수많은 적병을 사살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간자는 이후로는 조지아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못했다.

1110년, 샴쉬빌데 역시 조지아군에게 함락되었으며 이를 되찾기 위해 쳐들어온 무슬림군 역시 섬멸되었다. 1115년, 조지아군은 여세를 몰아 루스타비를 공략해 트빌리시를 무슬림 세계로부터 고립시켰다. 갈수록 강성해지는 조지아에 위협을 느낀 인근의 토후국들이 셀주크 제국과 연합하여 트빌리시 구원 작전에 착수했으나, 1121년 디드고리 전투에서 다비트 4세에게 완패했다. 1122년 트빌리시가 항복했다. 그는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그곳을 조지아의 수도로 선포했다. 1123년에는 시르반 토후국의 절반 영토를 점령했고, 1124년에는 카스피해의 중요한 항구 도시인 데르벤트를 공략하고 헤레티아 역시 복속시켰다. 얼마 후, 아르메니아 왕국 바그라투니 왕조의 옛 수도였지만 지금은 투르크족의 통치를 받고 있던 아니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그에게 자신들을 해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에 응해 6만 대군을 이끌고 아니로 진군했고, 짧은 포위 끝에 아니를 탈환하고 자신을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왕"으로 선포했다. 이리하여 캅카스의 무슬림 권력은 파괴되었고, 조지아의 영토는 흑해에서 카스피해까지 이르는 캅카스 전체를 뒤덮었다.

이러한 군사적 위업을 달성한 뒤, 그는 체제 개혁에 착수했다. 당시 조지아 교회는 귀족들의 입김에 좌지우지 되었다. 귀족들은 나이가 어리고 자격이 없는 아들들을 교회 서열에서 영향력 있는 지위에 앉혔다. 이로 인해 부정부패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귀족 출신 사제들은 교회에서 불법으로 정한 행위를 거리낌없이 저질렀다. 그는 이러한 현실에 반감을 품은 수도자들을 불러모아 루이부르니시 공의회를 개최했다. 공의회에 참석한 수도자들은 귀족이 교회의 인사에 간섭하는 걸 철저하게 배격하고 일탈 행위를 저지른 자들을 교직에서 추방하기로 했다.

그는 고문인 기오르기 츠콘디디를 조지아 대주교로 선임해 공의회 결의에 따라 교회 개혁을 단행하게 했으며, 교회 조직이 국가에 종속되도록 했다. 한편 겔라티 수도원을 세우고 백성의 추앙을 받을 만큼 신실한 수도자들을 그곳에 배속시켰다. 겔라티 수도원은 왕들의 안식처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저작을 집필함으로써 조지아에 학풍이 일어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총대주교와 대수도원의 유력 인사들이 참여하는 다르바지(darbazi)를 구성했다. "억압받고 굴욕받은 자들을 변호"하는 취지로 설립된 이 기관은 한번 판결을 받은 자들의 항소를 심의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일종의 대법원 역할을 수행했다. 왕은 이 기관의 수장을 맡아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한편, 그는 훗날 무슬림들이 조지아로 대거 쳐들어 올 것을 예견하고, 이를 막기 위해 군사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우선 충직하고 용력이 뛰어난 전사들을 모아 왕의 근위대인 모나스파(mona-spa)를 창설했다. 또한 도시와 요새의 수비를 담당하는 수비대를 대폭 강화하고 조직화하여 중앙의 통제에 따르도록 했으며, 왕실 직속의 기동대를 별도로 갖췄다. 외적이 쳐들어올 때 수비대가 최대한 버티고, 기동대가 그쪽으로 출격해 요격하는 방식의 체계를 갖춘 것이다. 조지아군은 여름보다는 겨울에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무슬림들이 여름에는 왕성하게 활동하지만 겨울에는 군사 작전을 꺼리는 걸 역이용한 것이었다.

그는 외교 정책에도 신경썼다. 처음엔 아르메니아 토후국의 공주 루수단과 결혼했다가 1107/1108년에 이혼하고 캅카스 산맥 북쪽의 강력한 부족인 오트로크 족 칸의 딸 구란두크트와 재혼했다. 오트로크 족은 우수한 전사들을 보내줘서 조지아군이 승승장구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그는 이외에도 북캅카스 일대에 조지아 교회 건설을 후원했고, 현지 주민들과 경제 및 문화 교류를 장려했으며, 트란스캅카스에서 대 캅카스 산맥을 거쳐 키스캅카스까지 이어지는 산길을 통제해 북캅카스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러면서도 동로마 제국에 자신의 딸 카타를 시집보내, 무슬림 세력에 대항하는 양자의 동맹 관계를 강화했다.

그는 말년에도 군사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1125년 1월, 이브라힘 이븐 솔리만과 이븐 수크만이 이끄는 무슬림군의 조지아 침공에 맞섰다. 5일간 이어진 전투 끝에, 조지아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다가오는 봄에 무슬림의 침략에 보복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격무에 시달리고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날로 악화되던 건강은 이 시기에 급속도로 나빠졌고, 결국 36년간 조지아를 강대한 국가로 육성시킨 군주는 1125년 1월 24일 트빌리시 왕궁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생전에 세웠던 겔라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아르메니아 공주 루수단과 결혼했으나 1107/1108년에 이혼했고 북캅카스의 강력한 부족인 오트로크 족 칸의 딸 구란두크트와 재혼했다. 그에게는 4명의 아들을 포함하여 적어도 8명의 자녀가 있었다. 장남 데메트리우스 1세가 그의 뒤를 이어 조지아 왕위를 이었다. 12세기 조지아 문서인 <다비트 왕의 유언>에 따르면, 그는 디미트리오스 1세에게 차남 바크탕을 양육하되 그가 능력이 있다고 입증되면 왕위 계승자로 삼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크탕은 디미트리오스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실명형에 처해진 뒤 얼마 안가 사망했다. 삼남 기오르기는 조지아의 부왕을 맡다가 1129년에 사망했다. 사남 주라브는 18세기 조지아 연대기 사본에서 등장하지만 실존 여부는 불분명하다.

장녀 루수단은 알라니아의 왕자 야다론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다비트 소슬란을 낳았는데, 이 인물은 훗날 타마르 여왕과 결혼했다. 차녀 타마르는 시리반 토후국의 군주 마누히르 3세와 결혼했고, 마누히르 3세가 사망한 뒤 수녀로서 여생을 보냈다. 동로마 제국에 시집보낸 것으로 알려진 삼녀 카타의 결혼 상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알렉시오스 1세 황제의 아들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그녀의 남편이라고 하며,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안나 콤니니의 아들 알렉시오스 브리엔니오스, 요안니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라는 설도 제기되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3세기의 조지아 연대기인 <소베르인의 역사와 추도사>에는 알라니아에서 결혼한 그의 또다른 딸이 언급되지만,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